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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밀린 독서일기가 에버노트에 한 가득 있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려다 패가망신할 것 같아서 ㅋㅋ 일단 최근에 읽은 책부터 정리하자로 전술 전환...

 

# 마샤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민음사, 2015

 

일찍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나, 죄가 무슨 죄나 사람이 죄지.. ㅡ.ㅡ

이런 인간환멸이 한 가득인 상황에서 정신 좀 다독여보려고 책을 읽음.

사실은 코로나 유행에서 드러난 혐오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책을 폈는데, 중간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점화되면서 가해자 신상공개 논란이 벌어짐. 한층 혼란 ㅜ.ㅜ

 

법은 감정적이 아니라고 노력한다지만 분명히 감정을 반영하고 (사실 분노와 탄식 없이 어떻게 인류사회에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겠나!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법에서 감정의 역할을 흔히 부정하고는 하지만 이미 영미 현행법에서도 '타당한 동정심'은 이미 양형 선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 또 이론과 실천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으로부터 책은 시작. 이를테면 법이 범인에게 수치심을 주어야 한다는 시각과 법은 시민들이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 상황. 특히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사회규범의 표현으로 옹호되는 경향.  


감정은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고를 담고 있음. 대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의 도식 안에서 일정한 중요성을 부여해왔던 것에 대해서만 감정을 가지며, 목마름이나 배고픔의 욕구와는 다른 것이, 감정에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훨씬 더 많은 사고를 수반. 즉 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을음 수반. 이를테면 인종주의는 감정 속에서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증오의 기반이 되는 사실이나 가치와 관련된 잘못된 밁음을 없앤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ㅜ.ㅜ) 감정도 바뀔 수 있는 것임.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   옳소옳소....

 

법은 잘못된 '행위'를 처벌하고 그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guilty)'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야지, 행위가 아닌 인간 정체성에 근간을 둔 혐오에서 비롯된 법적 판단, 혹은 수치심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됨. 수치심과 혐오는 분노나 두려움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기에, 너스바움은 혐오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혐오가 어떠한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함  

 

혐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혐오가 법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위해로 여겨질 수 있는 불쾌감이 정당한 지침 역할을 할 수 있는 생활방해법이나 토지용도 지정 정도. 흔히 '혐오가 담고 있는 지혜'를 운운하며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에 기반한 차별이나 법제도를 옹호하지만 (동성애가 대표적 타겟), 사실 혐오라는 감정은 인간이 동물적 육체를 갖고 있다는 불쾌감으로부터 촉발되며, 사회적 실천은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투영됨. 이러한 반응이 규범적 의미에서도 비합리적인 것은, 이러한 반응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는 열망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표적으로 해서 심각한 위해를 가하기 때문.

혐오는 감각 요소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적 반응인 '기피'나 해로운 결과가 예상되어 거부하는 '위험'과도 구분됨. 혐오는 대상이 지닌 감각적 요소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 관념적 요소에 의해 유발.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오염'),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임.   
혐오는 분개와도 다른데, 분개는 모든 사람에게 법률적 규제의 기초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위해 또는 손상과 관련된 반면, 혐오는 법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오염'에 대한 사고와 연관. 분개는 일반적으로 발생한 위해를 야기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일상적 평가에 기초하는 반면, 혐오는 실제적 위험보다는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사고에 바탕. 또한 분개는 일반적 속성 상 우리가 쉽게 상처입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가장 마음쓰는 대상이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만,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임.  혐오의 절규에는 '나는 이 추악한 세상을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한 바보같은 제도에 나는 토할 것 같고 그것들이 나의 (순수한) 존재의 일부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가 담겨있는 반면, 분개는 '이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방아왔다면 더 이상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 혐오는 오염에 대한 사고가 중심이기 때문에, (행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길 원함.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작동해왔음. 특권을 가진 집단은 자신과 구별하는 집단을 통해서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 했으며,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계급 사람들 모두 육신의 오물로 더럽혀진 존재로 그려짐. 이런 면에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위험과 분개로부터 혐오를 '분리시키는'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을 것임.

혐오는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응으로, 너무 어리거나 부주의해서 혹은 잘 몰라서 해당 품목의 이점을 숙고할 수 없을 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혐오가 법적,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귀중한 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됨.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많은 반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될 수 없음.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됨.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고 있는 인간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 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 됨 === 한문장 한문장 모두 지극히 동의

 

다음 타자 수치심!
인간에게는 원초적 수치심이 존재하고 선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공적 삶에서 규범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움. 그래서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억제하고 시민이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음. 왜 그런고 하니,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특정 사회가 지닌 규범적 정향에 상관없이 밑바탕에 존재. 수치심은 인간이 지닌 인간성, 즉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매우 일시적인 방법이기도 함. 모든 사회는 혐오와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통해 특정 집단과 개인을 선택하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별하며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왔음.

수치심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처벌 방식의 일부이지만, 규범적 상황은 혐오보다 훨씬 복잡함. 일정한 형태의 수치심은 긍정적 윤리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러한 역할들이 원초적 또는 나쁜 형태의 수치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함.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정상적인 시민'이라는 매우 일반화된 직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수치심을 둘러싼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음.

수치심은 어떤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자아의 '특정한 행위'보다는 '전체 자아'와 관련. 수치심과 모욕의 구분이 필요한데, 수치심을 주는 것은 도덕적 비판이 정당한 경우들과 당사자의 인간성 자체를 욕보이지 않는 가벼운 경우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인 반면, 모욕은 일반적으로 이를 당하는 당사자가 인간 존엄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지 않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진술을 표현함. 당혹감은 일반적으로 수치심보다 가벼운 상황이며, 항상 사회적이고 맥락적이지만 수치심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음. 수치심은 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며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담고 있는 감정이라는 점이 중요. 당혹감은 청중이 없으면 생기지 않고, 청중의 속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반응하는 것.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 (자아의 나르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함. 분노와도 구분이 필요한데, 분노는 위해 또는 손상에 대한 반응이며 부담함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죄책감은 말하자면 자기 처벌적 분노로, 자신이 잘못이나 위해를 저질렀다는 인식에서 생겨남. 수치심은 결점이나 불완전성에 주목하고 감정을 느끼는 그 사람 자체가 지니는 일정한 측면에 관심을 두지만 죄책감은 어떠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 죄책감에 내재된 공격성은 수치심 주기에 담긴 공격성보다 더 성숙된 것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음. 죄책감은 도덕적 요구를 수용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제한하는 것과 연관되었기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생각과 관련됨. 법은 사회가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표현하고 죄책감을 사회적 동기로 활용하도록 해야 함.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통찰력 있는 말을 귀담아 들어서 귀중한 개인적 이상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모든 것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되며, 많은 경우 신체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됨. 수치심을 외부 대상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소인을 찍임으로써 정상인들은 일종의 대리 행복을 얻고, 외부를 통제하고 완전무결해지려는 유아기적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음. 모든 사회가 관여하고 있는 낙인찍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유아기적 나르시즘과 자신의 불완전성에서 생겨난 수치심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라 할 수 있음. 낙인찍는 행위의 핵심은 피해자를 비인간화하는 것.

 

수치심을 주는 처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음 

  1.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게 됨 (죄책감은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수치심은 인격에 주목)
  2.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일반적으로 인민재판 같은 모습을 갖는데, 인민재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일반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공평하고 심의적이며 중립적 재판이 아님
  3. 역사적으로 수치심 처벌은 사람을 잘못 대상화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정확하게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처벌이 지닌 억제 기능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함.  수치심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서 단순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비교적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 왜냐하면, 수치심은 애당초 잘못된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상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 이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지배적 집단은 자신들을 정의하고 보호할 수 있음. 이러한 자기보호 뒤에 완전무결성과 나르시즘적 승리를 추구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에, 수치심을 주는 사람이 지니는 분노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상인'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 있음
  4. 수치심에 기초한 처벌은 경험적으로 강력한 억제 효과를 지닌다기보다 정반대의 결과 초래. 모욕을 당한 사람은 전보다 소외되고 불안해지며, 이미 연약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면 우울증과 공격성으로 이어지기 쉽고, 그래서 수치심을 강화하는 것은 폭력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키우기 십상
  5.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보다 많은 사람을 사회적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큼.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치심 처벌이 형벌의 네가지 목적 (응보, 억제, 표출, 개심 또는 재통합)을 잘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 처벌이론에서 응보주의는 무임승차와 평등한 자유에 관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시민이 동등하며 행위에 대한 동등한 자유를 향유해야 할 때, 범죄자는 자신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의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응보적 처벌은 범죄자의 불평등한 자유요구를 기록에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 응보적 처벌은 복수와 다르고 이런 면에서 수치심 처벌은 전혀 응보적이지 않음. 수치심 처벌은 일탈 집단과 대비되는 상위집단을 정의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음.  


물론 비판적 자기성찰의 결과로 야기되는 수치심 (에렌라이크의 미국 근로빈곤층에 대한 르포가 미국 대중들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드는 방식)은 개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 일종의 건설적 수치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는 완전히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법적인 측면에서의 수치심 처벌과는 다름.

 

대개 혐오와 수치심을 기초로 작동하는 법적 처벌은 시작은 도덕적 공분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향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
동성결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공격적 대중운동의 많은 부분은 전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며 원초적 나르시즘의 공격적 형태의 요소를 수반. 성소수자에게 낙인을 안겨줌으로써  가족과 성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발휘하길 바라는 것임. 이는 인종 간 결혼 합법화에서 '정상적' 가족 구조를 송두리째 뒤집는다는 인식과 마찬가지. 당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러한 수치심의 위협을 피하려는 욕구에서 인종간 구분선을 엄격하게 나누고자 했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동성 결혼의 권리에만 초점을 두다보니, 결혼의 지위에 대한 건설적 논쟁이 어려워짐. 제도로서의 결혼은 사랑과 함께 폭력을, 아이 양육과 함께 아이에 대한 학대와 멸시를 키워왔고 특히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왔음. 동성결혼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평등한 결혼 권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공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긴급한 문제들이 지연됨 ㅡ.ㅡ)

 

혐오와 수치심을 규범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킬레스 건은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모든 공동체는 규범과 가치에 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권력의 차이도 마찬가지. 특정 집단의 가치로 내걸리는 것은 주로 집단 내 가장 지배적 구성원들의 가치임.  또한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인종, 장소, 또는 공통의 문화나 언어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두지만, 공통의 취향이나 직업, 문제를 공유하는 집단, 압제의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도 공동체가 될 수있음

 

밀이 자유론에서 옹호했던 결론은, 다수(자신이  행하는 방식이 정상이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의 압제를 막고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적이고 주의 깊은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낙인의 작동에 대한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해법은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빈틈없이 강조하고 모든 시민에게 법의 동등한 보호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임. 너스바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들이 수치심과 낙인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촉진적 환경'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면서 낙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빈곤을 지적하며, 예의 역량접근법을 토대로 사회가 모든 시민에게 괜찮을 생활수준을 보장해야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 (인간 역량이란 어떤 구체적 형태의 기능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한 기능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상태를 지칭). 법적 측면에서는 차별금지법과 증오범죄법이 중요한데,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실재함. 또한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다루기 어렵고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는 인간성의 측면을 대면하고 검토할 수 있는 공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강조함.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 생기는 상상과 공상은 과도한 불안없이 자신의 인간성이 갖는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며 이러한 탐구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이러한 자기탐색은 타인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줌. 이 두 가지 능력은 바람직한 힌간관계를 맺는 데에도 중요하며, 자유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도 필요. 즉, 사회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상상하고 탐구하는 공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 프라이버시 영역, 특히 사람에 따라서는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활동과 상상을 위한 프라이버시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요. 대개 공/사 구분은 대칭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정상인'의 경우는 감추고 싶은 선택과 공개하고 싶은 선택을 모두 보호하지만 '비정상인'에게는 감추라고 요구하기 때문. 이를테면 성소수자에게, 여성들에게 '사회가 혼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욕구와 노출을 감추라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논의들을 따라가다보면, 최근의 텔래그램 성착취 사건에서의 가해자 신상공개가 과연 처벌의 응보, 억제, 표출, 개심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범죄의 내용이 개인에게 수치심과 말할 수 없는 낙인을 가져온 행위였다는 점에서, 응보적 측면의 처벌이 타당해보이기도 함. 물론 억제와 표출 측면에서는 신상 공개보다는 강력한 형량이 더 의미있는 기여를 할 것으론 생각하지만서도... (이들에게 개심이 가능하긴 한 건지 잘 모르겠음 ㅡ.ㅡ)
근데 사실, 가해자의 수치심 처벌 측면에서의 신상공개보다는 잠재적 범죄 예방 측면에서 논의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음. 핵심 가해자인 조주빈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거야 뭐 대중에게 딱히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것이 없으나, 그를 포함한 26만명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거나 앞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상 공개가 필요해보임. 언론에 명단이 공개되어 봤자 이들이 연예인도 아닌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고, 오히려 좀더 상세한 정보를 성범죄자 신상공개 형태로 조회해볼 수 있게 해서 잠재적 피해를 예방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보임.
     


너스바움의 논문들만 읽다가 단독 저서는 처음 읽어봤는데 엄청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견고한 정치철학적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서 강추하고 싶음.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근본적 미스테리는, 이렇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양반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느냐 하는 것... 인간 본연의 취약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혐오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합리적 감정이 아니라는 수백페이지짜리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종교에 대한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혐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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