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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1/09
    타임랩스 책읽기
    hongsili
  2. 2021/10/04
    생각 혹은 마음에 대하여
    hongsili
  3. 2021/10/04
    불평등, 그리고 갑자기 조지오웰
    hongsili
  4. 2021/02/26
    주구장창 밀리는 독서일기
    hongsili
  5. 2021/01/17
    밀린 '교양'서적 이야기
    hongsili
  6. 2020/05/23
    노동이야기
    hongsili
  7. 2020/05/02
    뭔가 찜찜한 책
    hongsili
  8. 2020/04/11
    혐오와 수치심
    hongsili
  9. 2020/01/27
    불평등과 차별에 관한 책들
    hongsili
  10. 2020/01/25
    대중 과학(으로 분류해도 될지 모르겠는) 책들
    hongsili

본격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본격적인 정치이야기

밀린 독서노트 틈틈히 정리해보자.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라지만, 어차피 태산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으니 작은 티끌들을 소중히 줍줍..

 

# 그런 세대는 없다 (신진욱, 2022)

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개마고원, 2022

 

신진욱 선생님의 진정한 빡침이 느껴지는 책 ㅋㅋㅋ 내가 그놈의 88만원 세대 때문에 20년동안 W 욕했지만 메인스트림에서 실명으로 이를 비판한 경우는 보기 드물었던지라, 일단 책에 급호감 ㅋㅋㅋ
이 책의 미덕은 이러한 빡침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세대론의 이론적 기원을 설명하고 (만하임 등장!), 세대 간, 세대 내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면서 "세대" 그 자체가 아닌 "세대 담론"을 둘러싼 지형을 세밀하게 분석함.

불평등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은 이미 오래 전에 신광영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사회학자가 수행하여 세대 간 불평등보다 세대 내 불평등 문제의 본질을 지적했던 바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세대 담론의 진화는 매우 인상깊게 읽었음. 박근혜 정부의 소위 노동개혁을 거치면서 청년과 불공정 담론이 본격 만나게 되고,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이것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경과를 뚜렷이 보여줌. 사실 나는 조국 사태가 이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었는디...  물론 그것이 보수언론과 정치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적극 조장된 담론/프레임이라 해도 일단 이렇게 폭발하고 나면 담론 그 자체가 새로운 힘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존재.

 

"기성세대라는 가상의 악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비난의 대상을 만들어주고 청년의 편인 듯 가장하여 인기를 얻으려는 발상은 어쩌면 큰 걸림돌이 없는 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기성세대른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집단으로서 실체가 없기에, 비난에 대해 반박하지도, 보복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냐나 만약 당신이 고용주에게, 직장상사에게, 집주인에게 맞선다면 당신은 곧바로 응당한 댓가를 치를 것이다. 그가 노인이든, 중년이든, 당신보다 젊은 청년이든 말이다. 계급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제도권 정치든 사회운동이든 고령화가 진전되고, 젊은 리더들이 기성 정당으로 편입하여 정치게임의 '작은 부품으로' 편입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속시원하게 간명하게 진단을 내림

"구조의 본질은 나이가 아니다. 이미 권력자원을 점하고 있는 기성 정치세력들이 현존하는 정치질서의 근간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개혁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체제를 지속하는 체제. 안토니오 그람시가 변형주의 transformism 이라고 불렀던 반 개혁 정치가 본질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MZ 세대 담론은 압도적으로 경제력과 문화자본을 가진 상류층과 중산층 청년들에게 접속하는 청년담론. 그렇다보니 사실 소비자로서 청년 세대를 호명한 1990년대 X세대 신세대 담론과 다르지 않음. MZ 세대 어쩌구 볼 때마다 저거 30년 전에 했던 똑같은 이야기잖여 라고 마뜩찮아했던 X 세대의 직관을 분석으로 잘 보여줌.

근데..... 아무리 이런 분석이 있고, 심지어 이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책을 내면 뭐하냔 말인가... 쓰나미같은 미디어와 상업자본의 공세에 어떻게 맞설 수가 없잖여 ㅜ.ㅜ

 

#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허시먼, 2016)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앨버트 O. 허시먼
나무연필, 2016

 

2년 전에 읽은 책에 대해서, 에버노트 쪽메모를 기반으로 독서노트를 정리하는 나란 사람.. 대체.. ㅜ.ㅜ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아... 곽재식의 '칼리스토 법정의 대역전극'에서 마금희 변호사가 로봇판사에게 어뷰징을 걸기 위해 불렀던 노래를 내가 여기서 부르게 될 줄이야...

하여간, 노력을 해보자면...

 

제발 번역서 제목 좀.. "Exit, Voice, and Loyalty: 이토록 간결한 원저 제목을 왜 이따구로....  ㅡ.ㅡ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오래된 고사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동체에 남아 부단히 뭔가를 바꿔보려했던 사람들의 고민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가.... 하면 그건 아니고 ㅜ.ㅜ

경제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답게 어떤 상황에서 이탈이, 혹은 항의가 조직 혹은 구성원들의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와중에 충성심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탐색한 책이었음.

합리적 주체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완전경쟁 시장에서 수요-공급이 지배하는 경제학의 세계에 이탈 이외에 충섬심이나 항의라는 개념은 존재하기 어려움. 소비자는 이 상품이 맘에 안 들면 다른 상품으로 옮겨가면 되잖여. '회복가능한 일탈'이란 개념이 존재하기 어렵지....  허나 현실은 그보다 구질구질하고
또 독점인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적극적 항의를 통해 변화를 도모하는 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이 필요했다고 설명함. 놀랍게도 책의 발간 시점은 베트남전으로 미국이 혼돈에 휩싸여있던 1970년...

저자가 1958년에 출판한 [경제발전전략론]의 기본 명제가 "발전은 주어진 자원과 생산요소들을  최적으로 조합하는 것보다는 여기저기 숨어있거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자원과 능력을 발전 목표에 맞게 이끌어내 정렬시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는디, 어쩐지 너무 절절하게 공감.. ㅜ.ㅜ

모든 조직이 매 순간 최대한의 능률로, 최대한 활기차게 움직이는게 아니라, 그게 운동조직이든 민간기업이든 공공부문이든... 시간이 되면 어찌 되었든 느슨해지는디.. 허시먼은 "느슨함은 매순간 태어난다'며 "제 아무리 기능을 잘 고안해서 제도적 틀을 갖춘다 해도 기업 등의 조직은 합리성, 효율성, 잉여생산 에너지를 서서히 잃어가는 지속적이고 임의적인 퇴보와 쇠락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퇴보는 언제나 공격을 멈추지 않고 존재하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이 급진적 비관주의는 스스로 고유의 치유책을 마련해낸다" 고 기술함. 기이할 정도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관점이여 ㅋㅋㅋ

 

밀턴 프리드만을 비롯한 경제학자는 이탈이야말로 효율적이고 심지어 유일한 문제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공교육에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임. 부모들에게 쿠폰 나눠주고 경쟁적으로 제공되는 교육서비스를 선택하여 구매하지 못하는 경우, '오로지 성가신 정치적 채널을 통해서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대표적. 항의에 대한 경멸이 아주 잘 드러남.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가에서 가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제도들은 성가시더라도 항의를 다루는 것이 일상적이고 때로는 유일한 대처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밀턴 프리드만 이 냥반, 이 시절에도 까였는데 나중에 무슨 세상 멘토인 것처럼 사람들 떠받드는거 꼴보기 싫어 죽겠음. (심지어 내가 2년 전에 이런 메모를 남겨놨는데, 자칭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께서 밀턴 프리드먼을 끔찍이 떠받드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어야 함. 뭔 시련인가!!!)


하지만 정치학 영역에서 이탈은 '변절, 반역'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범죄행위로 낙인찍히기도 함.. 이것도 진짜 꼴불견이자 세상 망조의 지름길. 변화를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일단 우리가 남이가 해서 결속만 외치는 것도 꼴보기 싫기는 마찬가지..

근데 현실에 이 두 가지 극단 정말 분명한데,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이를 어느 한쪽만 지켜봤다는 것도 좀 의외이기는 함 (1970년 이 저작 이후는 좀 달라진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잖여)

  • 이탈 exit : 경쟁(즉 이탈)이 하락한 성과를 회복시키는 기전으로 작동하려면 예민한 고객과 둔감한 고객이 혼재되어 있어야 함.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가거나 아무도 이탈하지 않으면 그냥 망해버리거나 아니면 개선의 기회를 놓치게 됨. 이런 면에서 모두가 초예민하고 정치의식, 참여의식이 드높은 것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마치 가슴속에 시말서 품고 다니는 직장인이라도 되는 양, "내 이럴 줄 알았다" 며 돌아서는 행태가 떠오르지 않냐고... ㅜ.ㅜ)
  • 항의 voice: 물품을 구매하는 기업보다는 자신이 속한 '조직'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역할. 당연히 후자의 숫자가 더 적기 때문이기도 함. 경쟁이 적어서 마땅히 이탈할 곳이 없...ㅜ.ㅜ 이탈이 '이것 아니면 저것'의 확실한 구분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항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는 예술 (이 아니라 '기예' 아님??? art?)
  • 이탈과 항의의 결합: 품질 변화에 가장 민감한 소비자들이 신속하게 이탈. 공립학교 교육 질 나빠지면 교육에 관심많은 중산층 이상이 빠져나가는데, 문제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활발하게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해 항의할 수 있었던 사람들. 사립학교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니 이들은 항의 기전을 더욱 열심히 활용 (사립학교에서는 이탈이 강력한 원상회복 기전). 반면 공립학교에 남아 있는 이들은 목소리 내기 어렵거나, 이탈이 발생해도 반응성이 낮다는 문제.  이는 한국의 공립학교, 공공병원이 가진 문제 그대로... 결국 사적 부문을 축소하여 이탈의 가능성을 줄이고 공공부문의 이탈/항의에 대한 반응성을 높여야 하는디.. ㅜ.ㅜ 삶의 질과 관련된 기본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의 방식이 특히 중요! (그런데 대개 고품질 범주에서 이탈보다 항의가 쉽게 발생하기 때문에 계층 간 간극이 더욱 커짐)
  • 게으른 독점의 문제: 경쟁은 예상과 달리 독점을 억제하기보다 말썽많은 고객을 제거함으로써 부담을 덜어주는 경우가 많음 ㅜ.ㅜ '일종의 '전제적' 독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이 경우, 강한 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게으른 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즉 독점에 대한 야심은 없지만 동시에 독점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한 까닦에 더욱 견고하고 억압적 ㅜ.ㅜ (라틴아메리카 독재 국가들이 언어나 문화가 비슷한 이웃 국가로의 망명을 적극  부추겼던 사례) 하지만 다른 곳에서 거래 상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기업/조직이 자신의 욕구화 취향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혹하고  협박하고 유도하는 소비자들의 힘 존재

 

쉽게 이탈할 수 있으면 항의 방식에 호소하는 일이 줄어들 것 같지만, 항의 방식의 효과는 이탈의 가능성 덕분에 강화됨. 즉 이탈의 위협 덕분에 항의가 작동함.

충성파가 조직을 떠날 시점을 판단할 때, 이탈 시 감내해야 할 도덕적 혹은 물리적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떠나면 이 조직이  악화일로에 처할 것이라능 생각 때문에 쉽게 이탈하지 못함...  (ㅜ.ㅜ 한국 운동조직의  또 다른 일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망할 조직이면 진즉 망해야 ㅡ.ㅡ)
또다른 문제는 조직의 산출 혹은 질이 구성원들이 떠나간 후에도 문제가 되는 경우인데, 즉 완전한 이탈이 불가능한 경우를 나타냄. 이를테면 중산층이 자기 자녀를 사립학교 전학시키는 방식으로 공교육에서 이탈해도, 이 지역 공교육의 질은 공동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공립학교 문제는 내 알바 아니라고 할 수 없음. "빠져나올 수 없다"는 표현이 쓰임. 이것이 바로 공공재의 외부효과 아니겠나 싶지만, 이것조차 감당하기 싫어서 더 멀리 떠나는 것이 현실이기도....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탈의 국가.  유럽 맘에 안 든다 - 미국 신천지로 이민 - 미국 동부가 마음에 안 든다 - 서부로 진출... 이는 기묘한 순응주의와도 연관되며, 떠나가는 이민자라기보다 항상 떠나온 이민자들이라 할 수 있음. 떠나고 나면 이전에 속했던 공동체에 더이상 신경 쓰지 않음. (다만 저자가 이 책을 쓰던 시점의 히피 운동은 이탈의 방식이되 기묘하게 항의와 결합되어 있었음) 어쨌든 싸우지 않고 이탈하는 습성 때문인지 미국 베트남전 관련한 정부의 잘못에 대해 어떤 관료도 항의하며 그만두기보다 개인사, 가족사 등을 언급하며 도망치듯 이탈하는 것에 저자 화냄 ㅡ.ㅡ  '공직자들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책에 항의하여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반대자의 순치'가 존재함. 베트남 정책에 회의적인 관료들에게 '공식적 반대자' 혹은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부여한 것. 회의자들은 이를 통해 스스로 양심의 위로는 받겠지만 그의 입장은 명확하고 예측가능해지며, 이들의 권력은 심각하게 손상되고 입장은 무시당함. 반대자들은 그저 팀의 일원으로서 역할분담에 참여하고 있다는 조건 하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게 됨. 이를 통해 강력한 무기, 즉 반대의견을 제시하며 사퇴위협하는 행동이 사전에 포기당함... (나도 주류 학회에서 이런 거 여러 번 느꼈음. 너에게 비판자의 역할을 기꺼이 줄테니 이 경계 안에서 마음껏 말하려무나..... ) 이 경우, 기회주의는 공식적 의무감으로 합리화될 수 있음

"좀더 미화하자만 비밀스러운 순교라는 가면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달콤하고 복합적인 동기유발이 주어진 상황에서 비들기파는 자신의 정당화 논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한층 강도높게 지속적으로 기회주의 행동에 빠져들게 된다. 비둘기파는 자신의 이탈이 상황에 미칠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조직원의 
강력한
반응 양식
이탈
아니오
항의
자발적 결사체, 경쟁적 정당, (예) 소수 구매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
가족, 종족, 국가, 교회, 전체주의 아닌 일당 지배적 정당
아니오
고객과의 관계에서 경쟁적인 기업
전체주의적 단일정당, 범죄조직

 

가능한 조합
조직이 퇴보할 때 구성원 반응
이탈
항의
조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피드백 방식
이탈
경쟁적 기업 
반대가 허용되지만 그것이 (순치를위해) '제도화'되어 있는 경우
항의
대체제의 경쟁에 직면한 공기업, 게으른 과점체계, 기업-주주 관계, 도시 중심부 등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상당히 확보하고 있고 민주적으로 반응하는 조직

 

그니까.. 대체 언제 갈라서야 하냐구 ㅜ.ㅜ  나는 그게 알고 싶은데...

 

이런 종류의 책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저자는 글을 마침

"이 책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현재 무시되고 있는 반응 유형의 숨겨진 잠재력을 이끌어내 이탈 혹은 항의 방식을 택하도록 고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글쓰는 자의 꿈이 적으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쫌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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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혹은 빈곤에 대한 책들 (2)

트랙백 기능 없어진 거냐.. 왜 뭐가 안 되지.. ㅡ.ㅡ

 

# 빈곤 과정 (조문영, 2022)

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글항아리, 2022

 

몹시 흥미롭게 읽었으나 3부 인류세의 빈곤에서 기후위기 나오고 코로나 이야기... 는 아직 저자의 생각이 정리가 덜 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음

국내의 빈곤 관련 서적들이 대개 서사 중심의 현실 드러내기, 그들도 사람이었네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좀더 학술적으로 정제되어 상태로서의 빈곤이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으로서의 빈곤 문제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음.  제1장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역사, 2장 '의존의 문제화'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가까운 한국현대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고, 노동-자립 / 빈곤-의존의 견고한 이분법이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님을 보여줌

장소와 시기는 다르지만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중국의 빈곤문제를 통해 보편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게  한 부분도 좋았고, 한국의 글로벌 반빈곤 산업이 청년 봉사자들의 열정덕분에 집합적 퍼포먼스로 부상한 점, 청년들의 자원봉사가  타국의 경제적 빈곤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시대 실존의 빈곤을 보듬는 '치유'기제가 되버린 아이러니를 보여준 것도 너무 이해가 되었음


학생들과의 인류학 수업을 통해  소위 '말할 수 있는 프리케리아트'로서의 엘리트 대학 학생들의 현실 빈곤 인식론, 안전 담론을 들여다본 부분도 흥미로웠음. 나도 관심이 있던 문제라....

그런데 네그리/하트, 이진경, 바우만, 들뢰즈, 지젝.... 같은 사람들 -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ㅋㅋ  이 사람들을 왜 이렇게 많이 인용하는 것인가.  이들이 멀쩡한데 하도 남한사회에서 이상하게 소비되는 것 때문에 내가 편견을 가진 것인가? 근데  인용한 부분도 보면 뭐 특별한 개념의 구축이나 혁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전히 미슷헤리

몇 가지 메모

  • 캐나다 메슈 D 상카르티에 '비난 테크놀로지 denunciatory technology' - 대중 자체를 통치의 도구로 삼으면서 국가는 숨어있는 '적' 숨겨진 '비밀'을 캐내도록 시민들을 부추기고 동료 시민을 서로 고발하는 통로를 열어둠 (부정수급 신고센터, 부패공익신고)
  • '열정적 빈민 the passionate poor' 인정의 정치에 물질적 정동적 에너지를 과하리만치 투입하는 이들에 대한 저자의 개념화
  • "복지가 직업화, 제도화, 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 (67쪽) - 이는 오코너의 지식산업 역사, 대런 맥가비의 빈곤 사파리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 문제
  •  "노동의지에 따라 다른 형태의 빈민 통치가 작동했다는 점은, 빈곤이 단순히 부wealth에 대응하는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품행의 심사장이었음을 뜻함"'(69쪽)
  • 글로벌 빈곤 레짐의 특징 1) 초국적 (불법) 노동 및 난민 이주가 증가하고 911 이후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팽배하면서 (냉전 시기 서구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던) 빈곤과 안보 security의 연계가 뚜렷해짐 2) 잇따른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윤리적' 자본주의가 일시적 위선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기업의 필수적 생존 전략으로 공론화되면서 글로벌 빈곤 레짐에서 자본과 기업의 역할 급증 3) 글로벌 빈곤 레짐은 빈곤 퇴치의 '전문성'을 물신화하는 방식으로 작동 4) 전문성 뿐 아니라 대중성을 권장하면서 전세계 평범한 시민들을 빈곤퇴치 무대에 등장시킴 5) 2000년대 이후 글로벌 빈곤레짐은 단순히 서구와 비서구, 글로벌 북반구와 남반구의 비대칭적 위계를 강하하는 대신 세계화,국제정치의 역동에 따라 더욱 복잡한 지형을 보여줌

 

# 결핍의 경제학 (2014)

결핍의 경제학 - 왜 부족할수록 마음은 더 끌리는가?
결핍의 경제학 - 왜 부족할수록 마음은 더 끌리는가?
센딜 멀레이너선 & 엘다 샤퍼
알에이치코리아(RHK), 2014

 

미국에서 교양 사회과학책 쓰는 진보 리버럴들이 공유하는 무슨 대본이 있는 건가. 정말 이 분위기 미치도록 싫음. 쿨하고, 자기비하의 농담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알고,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흔한 사실/경향을 예리하게 콕 집어내는 천재성을 갖춘 자뻑 명문대학 남자 교수들....

마감을 앞두고 집중력이 폭발하는 것을 집중 배당금이라 하고, 터널 시야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고려하지 못해 생기는 손실을 굳이 터널링 '세금'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참으로 경제학 전공자 답다 싶음...
심지어 담배/술 같은 유혹 상품에 지출되는 생활비 비중을 '유혹의 세금'이라고 표현했고, 당연히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이런 상품의 소비 비중이 더 높은 것도 마치 결핍 때문에 이런 유혹에 쉽게 휘둘리는 것처럼...
이런 단어 만들어내고 자기네들끼로 신나서 하이파이브했겠지?
심지어 요점을 계속 반복하면서 책의 분량을 한정없이 늘림...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이야기인가????

사실 책에 나열된 사례들은 저자들의 핵심 개념인 '결핍'이 아니라 'distraction' 혹은 'cognitive burden' 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문제들이 대부분이었음. 경제적 빈곤층이 왜 근시안적 결정,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지,  시간/마감에 쫓기거나 다른 데 정신팔린 사람들이 왜 엉뚱한 오답을 내놓는지...
이건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서의 결핍 때문에 그 결핍의 대상에 사로잡힌 게 아니잖아,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소 때문에 그야말로 prefrontal cortext 의 인지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린 거라구.. ㅜ.ㅜ  그게 경제적 결핍일 수도 있고, 관계의 갈등일 수도 있고, 응시하는 성적 시선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내적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proprioception) 부정적 정서와 부적절한 인지적 반응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이미 많은 연구가 이야기하지 않았음?

대체 행동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넌센스임..  homo economicus 라는 말도 안 되는 전제에 대한 반발이 겨우 애들 장난 같은 심리학으로의 귀결이라니...????? 인도 시장의 노점상들이 행동만 다르게 했다면 얼마든지 덜 가난해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 용기를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다 인도에서 행동경제학 실험은 왜 그렇게 많이 했다냐?  이런 연구들은 어떻게 IRB 를 통과한 것인감?
연구한다고 개인들한테 막 백만원씩 나눠 주고 그래도 되는 거임??????

이 책의 결론이 뭐냐면... ㅋㅋㅋ 1) 당신의 대역폭을 관리하라 2) 결핍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라 (동기부여나 교육, 당근, 채찍이 아니라 대역폭 확대에 집중하라는 것 - 어차피 인센티브 줘도 성공 못한다는 말씀) 3) 풍족함은 결핍과 맞닿아 있다

진짜 지랄도 풍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지... 빈곤 문제의 해결이 결국 일체유심조로 귀결되는 이 해괴한 현상을 보면서, 정말 빈곤지식산업이 얼마나 세상을 망치는지 실시간으로 감상한 느낌...

게다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 엄청난 타자화는 뭐람?
'이 문제는 지독할 정도로 오래 방치되었고 그러다보니 이제는 어쩐지 지겹기까지 하다. 바로 이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이토록 형편없이  굴까" 이것이 바로 방안에 있는 코끼리, 누구나 문제임은 인식하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난감한 문제이다'

아마도 이런 책을 사서 읽는 사람 중에 빈곤층 '당사자'는 없을 것이고, 독자들은 빈곤층의 이해할 수 없는 바보같은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양식있는 동료시민이라 가정한 것인가? We/Others 가 이렇게 분명한 책도 참 오랜만일세....


이 책에 진심 감화받은 리버럴들은 (빈곤층을 돕는것에 진심인!!!) 빈곤층의 왜곡된 인지체계와 '마음가짐'을 교정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려나???
"결핍의 덫에서 해방되려면 자원을 욕망보다 평균적으로 많이 가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커다란 충격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느슨함을 가지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ㅋㅋ 우리는 이것을 버퍼링이라고 부르구요... 그래서 소득만큼이나 자산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왔어요. 근데 가난한 이들은 바로 그 가난 때문에 이렇게 자산을 축적할 수가 없잖여... ㅜ.ㅜ

아우.. 매번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결국 스스로를 원망하며 끝나는 이런 책들.... 끝까지 읽기는 했다만 진정 책을 고르는 나의 안목이 퇴화한 것인가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네 ㅜ.ㅜ


사족으로... 1999년 나사의 화성탐사선 실패는 '영국식 측정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일상에서 미터법metric이라는 표준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이미 영국에서도 폐기된 imperial measure 를 사용하기 때문에 벌어진 사고였잖아.. 국제적 웃음거리 되었다고... 똑바로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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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혹은 빈곤에 대한 책들 (1)

그나마 블로그마저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에버노트와 블로그를 보조 저장장치 삼아가며 살아간다.

 

작년 올해를 거치며 가난에 대한 책을 몇 권 읽고 세미나도 했었는데, 에버노트 끄적임이라도 여기 옮겨놔야겠음

 

# 가난의 문법 (소준철, 2020)

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푸른숲, 2020

 

학술 커뮤니티나 교양독서 커뮤니티 안에서 엄청나게 상찬을 받았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윤영자 씨의 생애사가 나에게 그닥 새로울 것이 없어서 다소 놀랍기는 함... 내 주변에 너무 많았고 익숙했던 이야기들...
뭔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가난해지는지, 책을 읽어야 겨우 알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인가... ㅡ.ㅡ


마치 어디 머나먼 이국의 낯선 풍습과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을 하듯, 이제 우리 내부의 빈곤도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누군가가 "본격적으로" 탐구해야 알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 매우 씁쓸함 ㅜ.ㅜ


생애사를 그리고, 하루의 활동을 시간별로 촘촘하게 쫓아가면서 어떻게 밥을 먹는지 누구와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일감을 어떻게 얻고 처리해나가는지.... 아주 꼼꼼한 관찰과 기술을 통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난에 대한 전반적 그림이 그려질 수 있도록 했음
 
저자는 가난의 어원을 어려울 간 + 어려울 난 / 빈곤은 가난하여 곤한 상태. 즉 가난하여 살기 어려운 상태로 정의하며, 가난은 주로 현상을 묘사할 때, 빈곤은 분석에 동원된다지만 글쎄올시다..... 학술적 사용괴 일상어의 차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노인 빈곤에서의 젠더 차이를 설명하며 남성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기존의 경력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여성노인의 경우 숙련되 기술이나 장기적 경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쁜 환경과 조건의 서비스업으로 전환하거나 진입... 한다고 기술하는데, 일견 타당한 진단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궁금과 걱정이 한 가득.
과거에 미숙련 중장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식당보조, 간병/돌봄, 청소 등이었다면 우리 세대는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했고 과거와 달리 완전 "허드렛일"보다는 제도화된 요양/돌보미 서비스, 마트캐셔, 콜센터 같은 일들을 해왔는데 과연 노년에 어떤 일자리로 이행하게 될지... 

남성들이야말로 오히려 돌봄의 와해, 산재 등의 이유로 중고령에 더욱 취약한 상태에 처하는 경우도 많고 게다가 경비 같은 일은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니 과연 어디로 갈꺼나...

빈곤의 '쓸모'가 단순히 '스스로의 안정감을 확신하고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우만의 주장처럼) 실질적으로 사회가 돌아가게 만드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함 ㅜ.ㅜ

 


# 가난 사파리 (대런 맥가비, 2020)

가난 사파리 - 하층계급은 왜 분노하는가
가난 사파리 - 하층계급은 왜 분노하는가
대런 맥가비
돌베개, 2020

 

여러 모로 힐빌리의 노래와 대조되는데 빈곤층 당사자의 성장 서사라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하지만
현재 글을 쓰는 시점에서 계급의 상향이동이 확정되었느냐 아니냐, 그리고 탈빈곤을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계급정치, 사회운동 맥락에 배태시켰는가 여부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임.
밴스의 사례에서 '정치'가 공백이었다면, 대런의 경우 매우 어린 나이에서부터 빈곤/박탈에서 비롯된 분노는 정치화의 경험 속에 단련되고 혹은 좌절됨.

당사자로서 저자는 빈곤층/지역에 대한 대상화와 타자화, 소위 좌파에 의한 '전유', 빈곤을 자원 삼아 생계를 이어가는 복지 서비스 조직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대단함. 그  서비스가 빈곤층에게 소중하다는 것은 알지만, 복지 서비스 조직들은 바로 그 빈곤층이 있기 때문에 생존이 가능한 것임. 그리고 이러한 냉혹한 진실을 서비스 수혜자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음 ㅡ.ㅡ
게다가 선한 의도를 가진 연구자들의 '채굴' 행위에 대한 비판은 매우 신랄함.

"이런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이들의 삶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조직이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채굴할 데이터와 서사를 담고 있는 자본 말이다. 선의를 가진 학생, 학자, 전문가들이 줄줄이 가난 깊숙이 내려와 필요한 걸 뽑아내고는 고립된 자신들의 집단으로 물러가 가난 사파리에서 가져온 인공 유물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곳은 빈곤 산업이다. 이 산업에서는 선량한 사람들도 사회적 박탈로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 이 부문의 모든 사람이 경력을 유지하고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문제가 남아 있어야 이 산업이 성공할 수 있다. 가난을 뿌리 뽑는게 아니라 낙하산으로 와 '업적'을 남겨야 상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원과 전문지식을 철수해 훌쩍 떠날 때 뚜렷한 업적이 없더라도 간단히 조작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게 이 부문의 전통이다. 이 부문에서 일을 하는 방식은 보고도 못 본체하는 것이다. 실패하거나 일이 잘 안 되더라도 아무도 시인할 수 없다. 모두가 재정지원이 끊기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가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난하지 않음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가난,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대중들이 '기대하는' 것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ㅡ.ㅡ

 

"어떤 사람들에게 가난은 헤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 인력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것을 헤어날 길 없이 우리를 집어삼핀다. 빠져나가려 애쓸수록 우리 목으로 더욱 차오른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먼 산비탈에 사는 괴물이다. 우리가 겪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 가난 서사를 거듭 반복하도록 유도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가 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대본에서 벗어나면, 수수께끼같이 커튼이 닫히고 수수께끼같이 조명이 희미해지며, 수수께끼같이 마이크가 멎었다."

 

자본주의 '체제'와 '구조', '정치'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엘리트 좌파에 대한 비판, 그러면서 빈곤층 스스로의 자기혁신과 지역사회의 변화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당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통렬한 비판... 외부자들이 이런 '요구'를 할 수는 없잖여 ㅜ.ㅜ

"정치인들이 진정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못하고 심지어 이 문제를 정직하게 논의하지도 못하는 이런 절망스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거짓 희망이나 거짓말로 채우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제3의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 여기에 없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보편적 기본소득이 시작되는 걸 보지 못할 사람들에게 말이다. 나는 우리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아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하층계급이 된다는 건 20년 전에 알았던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가디언' 기사로 가득한 뉴스 피드를 허구한 날 스크롤하고 앉아 있는 걸 의미한다."

 

다소 놀라운 점은 저자가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이라지만, 빈곤의 건강영향, 스트레스의 생물학, 정체성 정치 같은 소위 중간계급 좌파 혹은 리버럴 필자들이 활용하는 논거와 주장을 시의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 문화정치, 정체성 정치에 경도된 엘리트 학생 운동에 대한 비판은 매우 단호함.... 아마도 1980-90년대 학생운동을 대하는 현장 노동자들의 애증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함. 왜냐하면 나도 대학 들어가서 부잣집 운동권 선배들이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며 노동의 신새벽 노래 부르고,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민중, 현실과 동떨어진 "내일 당장 혁명".. 이런 거 맨날 읊어 대서 어안이 벙벙하고 황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맨날 민중 운운 하지만 내가 학비 때문에 아르바이트 해야 해서 농활 못가겠다고 하면 그렇게 짜증을 내더라고 ㅋㅋㅋ 그래봤자 다들 20대 초반이었으니 이제는 다 용서함 ㅋ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 발전한 활동가 단체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 억압과 불평등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정체성 정치가 사회정의 문제에 접근하는 양식이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은 문화 추진력을 피해자와 소수집단의 서사에 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정치 안건을 추진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인 셈이다. 이런 형태의 행동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 운동이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집단이나 학대 생존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논의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건 우연이 아니라 고의다."

 

"전반에 걸쳐 교차성을 적용하면 우리의 다문화 사회에서 작동하는 역학관계를 좀더 충실히 보여주는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소수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교차하는 차별과 편견과 학대가 포함된다. 성소수자 내 인종주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의 동성애 혐오, 페미니스트 사이의 성전환 논쟁, 이슬람교 공동체 내 여성의 종속성, 레즈비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 그리고 엄마가 아이들을 방치하고 학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금기 또는 공격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교차성을 통해 백인 남성의 특권만이 아니라, 서구 엘리트 대학의 풍족한 학생들이 우리 스스로 우리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방식을 통제하려 드는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대화에 끼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모슨이나 비정상을 지지하면, 활동가들은 멸시하는 말이나 독설을 쏟아부어 비판을 묵살하고 더 이상 논의를 하지 못하게 한다. 활동가들은 말 자체가 폭력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겠지만,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이면 무엇이든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협박, 괴롭힘, 신체 폭력 행위가 용감하게 '기득권층에게 한 방 먹이는 일'로 여겨진다. 모든 상호작용을 교차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고, 따라서 권력의 역학 관계로 여긴다.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감정 과잉 상태에 빠진 이 활동가들은 자주 자기 행동이 낳은 인간적 결과가 자신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전해들은 정보나 소셜미디어의 소문을 근거로 다시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한 사람의 평판을 망치거나 취업을 방해하려 든다. 결국 이런 문화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반면 이 문화 자체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특권집단은 자신의 언어와 행동이 어떻게 사회적 배제를 강화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소외가 계속된다고 활동가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 활동가들은 문화적 출입제한이 있는 자신들의 논의가 하층계급 사람들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계급'이라는 말이 '백인 남성'과 동의어가 되면서 계급이라는 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제쳐두기가 더 수월해졌다. 최근 극우가 부상하면서 더욱 그렇다. 사회적 배제와 악습을 겪고 있는 많은 하층계급 출신 백인 남성이 특권계급 학생들 대신 비난을 받고 있다. "


"사람들은 미치광이처럼 구는 나를 응원했다. 내가 하는 말이 진실하거나 유익해서가 아니라 박수치는 사람들의 정당성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외에 세상 모든 게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어느 순간 나의 생각, 감정, 행동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믿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모두 나를 학대하고 배제하는 체제의 부산물이었다. 또 사회가 내가 처한 상황에 개입하거나 사회를 해체해 재구성해야만 내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 변화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나는 자라면서 내가 느끼는 모든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단지 내가 하층계급이라는 사실만으로 말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분노 자체는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방식으로 표출해야만 쓸모가 있었다.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알맞게 사용할 때라야 정당했다. 그래도 분노의 유용성은 한시적이다.술, 담배,  약물, 정크푸드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분노의 새로움은 곧 사라지고 충동만이 아남아 우리의 감정을 격화시키고 괴롭히는데, 이 때 대개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 코앞에 놓여 있다. 이것은 좌파 사람들한테는 인기가 없겠지만 솔직한 이야기다. 이 경우에 나는 내 이기심을 감추는 연막으로 정당한 분노를 이용했다. 나 개인의 의제를 제기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로 '노동계급'을 이용했다. 게다가 개인적 분노가 어떻게 교묘히 내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내가 아는게 많고 대단히 도덕적이라 생각하면서 이 모든 일을 했다."

 

사회적 맥락이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어쩌다 가난해졌나 혹은 빈곤의 실상은 무엇인가... 라는 종류의 르포라기보다는 가난에 대한 내부자와 (심지어 우호적인) 외부자들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의는 아니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음. 매우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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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랩스 책읽기

예전에 읽었던 책들 메모랑 요즘 읽은 책이랑 순서 뒤죽박죽... 그래도 정리해두는게 안하는 것보다야 낫지..  나를 위한 글인데 순서가 엉망이면 뭐 어떤가

 

# 전국축제자랑 (김혼비, 박태하, 민음사 2021)

 

전국축제자랑 -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
전국축제자랑 -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
김혼비.박태하
민음사, 2021

 

 
재미있게 가볍게 읽었으나.... 좀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
일관되지 않음과 온갖 부조리극, 혼돈의 카오스가 사로 잡은 K-축제란 것이 신기한 박물지처럼 그려졌다만... 나는 사실 이런 축제에 아마 저자들보다 많이 가본 사람 ㅡ.ㅡ
 
일부러 찾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절기에 맞춰 열리는 축제는 기가 막히게 그 시기가 한창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역 담당 공무원의 명운이 걸려있다!) 어떻게든 최고의 순간은 누리면서도 인파를 피할 것이냐에 초점을 두고 스케줄을 짜본 경험이 허다할뿐 아니라 (특히 산수유축제, 매화축제, 벚꽃 축제가 그러하다!!!) 별 생각 없이 절기를 맞아 찾아갔는데 현장에 가보니 예상치 못했던 지역 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갑분싸 강제로 축제를 즐기고(?) 왔던 적도 많았던지라... 이를테면 강진 갈대밭 축제, 김제 지평선 축제, 보성 차 축제...
 
이 책의 저자들이 경험했던 초현실적 순간이 못지않게 많았음.  최근 기억나는 것은 우연히 찾게 된 김제 지평선 축제. 분명히 축제 개시 전날이라 했는데 난데없는 인파에 놀랐고, 어이없어하던 공군 에어쇼 리허설을 넋놓고 보던 우리들의 얼간이 같은 모습에 놀랐고, 총성없는 전쟁터처럼 진심으로 경쟁을 벌이는 마을 부녀회 먹거리코너의 고퀄에 놀랐고, 안내부스에 가서 어디 가면 지평선 보이냐고 물어봤다가 찐따 된 경험 ㅋㅋㅋ 여기가 지평선이라고 ㅋㅋㅋㅋ 네??
 
새벽 첫 버스 타고 내려가 화개장터에서 화개장터에서 재첩 수제비 먹고 쌍계사 벚꽃길 걸어올라가 차 한잔, 그리고 다시 장터로 돌아와 비빔밥이랑 메기 들어간 참게탕 먹던 기억이 아련하구나...
 
 
# 월간주폭초인전 (dcdc, 알마 2019)
 
월간주폭초인전
월간주폭초인전
dcdc
알마, 2019

 

월간영웅홍양전, 주폭천사괄라전은 예전에 단편집 모음에서 이미 읽었던 것이고,
수정초인알파전까지 묶어서 경기여성히어로 연대 3부작으로 묶임.
 
터지는 현웃과 더불어 건전한(?) 관점, 권선징악(?)까지 모두 챙길 수 있어서 순식간에 읽어치움.
dcdc 님은 왜 본명으로 돌아온 게야 헷갈리게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아작 2020)
 
아주 가까운 근미래, 기술은 놀랍게 진보했으나 사회질서는 여전한 K 사회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고도 씁쓸하게 그려냄. 
제목 단편의 내용이 마냥 놀려먹을 수 없는지라 마냥 웃을수만도 없었다구... ㅜ.ㅜ
이제 이입하는 세대의 연령이 달라진 걸 느꼈다니까....
 
그런데 한편으로.. 대학원과 학문세계에 대한 묘사들이 어쩐지 특정 계층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 마음이 좀 불편.... 이건 세대 차이일까???
 
어쨌든 드디어 90년대생 작가들의 글을 읽게 되는구나   
 
 
# 왕은 안녕하시다 (성석제, 문학동네 2019)
 
 
왕족 죽고 나서 어떤 복식을 얼마나 오랫 동안 입을 것인가 가지고 끝도 없이 싸워제끼는 양반들 모습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임금 찜쪄먹는 (왕은 진정한 나의 조국 송나라의 총독에 불과하니 우습지!) 사대부들 힘겨루기나, 눈하나 깜짝 안하고 사람 목숨 날려버리는 왕이나 다 꼴보기 싦기는 마찬가지.
복잡한 시대 속에서 하필 '성'씨라는 성을 가진 ㅋㅋ 액자소설 속 주인공이자 아마도 액자소설의 필자인 '파락호' 출신 '어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가 느꼈던 감정들에 깊이 공감했는데, 이건 뭐랄까.... 정나미가 떨어지지만 결코 버릴 수는 없고, 그토록 미워했던 상대이지만 애잔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사, 인간관계의 복잡함게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닐까 싶음
 
하필 중요한 역사적 장면마다, 인물마다 함께 하는 허풍선이에다 (숙종의 비밀 형님에, 장옥정, 송시열과 때를 같이 하고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전파했다!!!) 심지어 여러 스승을 (돌아간 아버지까지 한 표) 거치며 절세 무공을 깨우쳐 마침내 이기어검의 경지에 이르고 (현웃 터짐 ㅋㅋ) 무협소설답게 멍텅구리라는 절대 무기도 우연히 얻게 됨. 고대소설이니까, '성'씨가 주인공이니까 가능한 일 ㅋㅋㅋ
 
아 진짜 성석제 작가 웃김...  박태보와의 플라토닉 러브는 갑분 또 무엇이여...  소설 읽다가 여러번 현웃 터지면서도 애잔함과 씁쓸함과 뭐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이래서 성작가를 좋아함
 

 

예전에 읽다가 중간에 어찌 휴지기가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음.

소설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토록 헛헛한 마음으로 끝날 줄은 몰랐네..

Ares 에서 phobos 를 거쳐 처음 화성에 착륙하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모든 것을 만들어내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기술적 도전, terraforming 의 흥미로운 실험들이 이어질 줄만 알았다구.. ㅜ.ㅜ  2편 3편이 green & blue mars 아냐.... 테라포밍 어렵지만 착착 진행되고 그 다음으로 이어질 줄 알았지.... 하아.....

 

자원이 있는 곳에 탐욕이 몰려들고, 더할나위 없이 강해진 자본의 전횡과 착취, 극단적 불평등. 그리고 저항과 혁명의 시도들, 실패.... 아니, 실패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SF는 역시 사회실험 쟝르... 

예전에 [쌀과 소금의 시대] 읽을 때 진즉 깨달았지만, 작가 필력이 후덜덜.... 

 

결국 자신의 손으로 힘들게 건설한 모든 것들,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하고 동지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the first hundred 들의 심상에 너무나 깊이 감정이입....

Nadia 가 space elevator 추락하는 모습에서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마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거대한 DNA double helix가 춤추는 듯한 모습을 그렸을 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줄 알았다구... 대홍수와 지각변동의 엄청난 파괴력에도 후덜덜....  Frank Chalmers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찔끔.... 

 

후속 시리즈도 읽어야겠는데, 이제는 문고판 사이즈 글씨가 너~무 읽기 힘들어서 (특히 밤에 침대에서 읽으면 글씨가 안 보여... 쓸모 없는 눈 갖다버리고 싶음 ㅜ.ㅜ) 어쩔 수없이 아마존 킨들 버전 다시 사야 함...  소설에서 DNA repair 치료 하는 거 보니까 쏠쏠해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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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혹은 마음에 대하여

오래(?) 전 급하게 남겨놓은 메모만으로 당시의 고민과 감정을 유추해서 '추리'하며 써내는 독후감의 쟝르는 대체 무엇인가... ㅜ.ㅜ

 

# 리사 배럿. 감정(emotions)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연구소 2017)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생각연구소, 2017

 

 

뭔가...  내 세대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 비슷하게 공통의 문제에 직면하고 새로운/하지만 비슷한 시각을 취하기 시작한 것 같음. 자동적 지식과 타동적 지식의 구분, 우리의 감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value-laden, idea-laden, 혹은 affection-laden 인식에 대한 공통된, 메타적 자각이랄까???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반드시 정확한 반영이 아니고,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취하게 된다는 점.  이것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 각자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님. 이러한 비판적 실재론 패러다임을 통해서 "구성된 감정이론" 또한 이해할 수 있음.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고,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감정조차 개인과 사회적 문화, 관습, 학습에 의해 (그리고 내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뇌의 신경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구성'된다는 것...

이러한 개념은 몹시 흥미롭고 설득력있는데, 다만 기우라면 우리가 '스스로 감정을 구성하는 설계자'라는 관념이 마치 합리적/이성적 과정을 통해 감정을 연출하고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할 것 같음 ㅡ.ㅡ . 그래서 사이비 마음수련이나, 엄연한 고통의 실재가 존재하는데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일체유심조 순응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지 않을까..... 너무 지나친 걱정이려나???

 

* 구성된 감정이론 theory of constructed emotion

"감정은 내장된 것이 아니라 더 기초적인 부분들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에 따라 다르며,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것. 즉 신체 특성, 환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는 유연한 뇌, 이 환경에 해당하는 문화와 양육조건의 조합을 통해 출현. 감정은 실재하지만 분자나 뉴런이 실재하는 것과 같은 객관적 의미에서 실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화폐가 실재하는 것과 갆은 의미에서 실재. 감정은 착각은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의 합의의 산물"

"감정 개념이 있어야만 관련된 감정을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음"

즉, 공포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공포를 경험할 수 없고, 슬픔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지각할 수 없음

구성된 감정이론에 포함된 구성은 사회적 구성 (문화와 개념의 중요성) + 심리적 구성 (감정이 뇌와 신체의 핵심체계에 의하여 구성된다고  간주) + 신경 구성 (경험에 따라 뇌의 배선이 달라진다는 견해 수용)의 세 가지를 포함


* 감정 입자도 emotional granularity

 

내면의 감정 상태를 얼마나 정확히 판독할 수 있는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도록 훈련시켜서 감정입자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함. 이는 자기 객관화와 메타 인식의 세계이며, 묘하게 불교의 마음수련과 닮아있고 실제 저자도 자주 언급함.
신체 반응이나 표정으로 감정을 예측하거나 읽어내는 것은 매우 부정확함. 동일한 감정 범주가 상이한 신체반응을, 반대로 다른 감정이  비슷한 신체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음.

"일관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표준"

감정 지문은 신화! 이런 면에서 개인의 표정이나 신체 반응을 통해서 감정상태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위험

 

* 정동실재론 affective realism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개념

  • 내수용 (interoception) - 감정의 핵심 성분이지만 감정 경험에 비하면 훨씬 단순. 신체에너지의 예산 통제 담당
  • 정동 (affect): 하루 종일 경험하는 일반적 느낌. 감정이 아니며 훨씬 단순한 느낌. 1) 쾌감 혹은 불쾌감 - 유인성 valeence, 2) 평온 또는 동요 - 흥분도 arousal
  • 정동은 내수용에 의존. 가만히 있거나 잠들어 있을 때도 끊이지 않는 연속적 흐름. 감정적으로 경험하는 어떤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켜지거나 꺼지는 것이 아닌 의식의 근본적 측면.

정동을 모른 채 정동을 경험할 경우, 정동을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 아닌 세계에 관한 정보로 취급할 확률이 높음. 하지만 우리가 세계에 관한 사실로 경험하는 것의 일부는 우리의 느낌에 의해 만들어짐. 화창한 날이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는 보고를 더 많이 하지만, 날씨에 대한 질문을 노골적으로 받으면 이런 편향 사라짐.

"우리는 뇌가 느낀 대로 믿는다"


사람들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 감정을 극복할 수 없음. 왜냐하면 신체 예산 상태가 모든 사고와 지각의 기초이며 내수용과 정동이 매순간에 개입하기 때문.

이렇게 보면 인간 뇌의 진정 놀라운 점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과 통계적 학습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 아닐까 싶음. 이런 면에서 베이지안의 a prior/posterior 확률 추론은 뒤늦은 깨달음 같기도 함. 오히려 머신러닝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인간의 가장 주목할만한 적응 특성 중 하나는 인간 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배선을 위해 모든 유전물질을 후세에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점 이는 생물학적으로 엄청 많은 비용을 초래할 수 있음. 인간 유전자는 뇌가 주위 사람들의 뇌를 바탕으로, 즉 문화를 통해 발달하는 긋을 가능케 함!!! 인간의 문화는 진화의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우리는 후손의 뇌를 배선(!)함으로써 그들에게 문화를 전수

지각, 시각이든 청각이든 사실 객관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발견하는 신체와 이런 변화의 의미를 구성하는 뇌가 세계와 상호작용할 때 구성되는 경험

 

감정의 기능 - 1) 감정 개념이 다른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구성한다는 사실에서 비롯, 2) 개념이 행동을 명령한다는 사실에서 비롯, 3) 신체예산을 조절하는 개념의 능력과 관련

 

* 다양성에 기초한 개체군 사고

 

동일성에 기초하는 본질주의와 다양성에 기초하는 개체군 사고는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 하지만 본질주의는 반대 증거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음.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 아녀??? 본질주의가 감정이론에 적용될 때 이는 학설 이상의 것이 됨. 이는 인간존재의 의미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즉 인간본성에 대한 고전적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

감성지능의 핵심은 우리의 뇌가 특정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감정개념의 가장 유용한 사례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감정을 구성하지 않을 때는 가장 유용한 다른 개념의 가장 유용한 사례를 구성하는 것!


바이러스는 신념, 성실, 가치관에 관심이 없고 인격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지만, 정동은 내수용 감각을 우리 자신에 관한 어떤 것으로, 나의 잠정과 단점이 결부된 어 떤 것으로 변모시킴. 그러면 감각은 인격적인 것이 되고 나의 정동적 적소 안에 머물게 됨. 불편은 순전히 신체적인 것이지만 괴로움은 인격적인 것이며, 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함.

 

* 올바른 법률 제도를 위한 조언 "법률제도를 위한 정동 과학의 선언"

저자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혹은 과도하게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현실, 특히 법률체계에서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안을 제시함

  • 감정표현: 감정은 표현되지도 표출되지도 않으며, 그밖에 어떤 식으로든 얼굴, 신체, 목소리 등을 통해 객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무죄/유죄 또는 처벌을 결정하는 사람은 이를 알아야 한다
  • 실재: 시각, 청각, 그밖의 감각은 언제나 느낌의 영향을 받는다. 가장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증거조차 정동 실재론의 영향을 받는다
  • 자기통제: 자동적이라고 느껴지는 사태는 반드시 완전히 당신의 통제밖에 있지는 않고 반드시 감정적이지도 않다. 예측성 뇌는 당신이 감정을 구성할 때 사고 또는 기억을 구성할 때와 똑같은 정도의 통제를 제공한다,
  • '내 뇌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변명을 조심해야 한다. 특정한 뇌 부위가 나쁜 행동을 직접 야기했다는 주장을 의심해야 한다,
  • 본질주의를 유념해야 한다. 모든 문화는 성인, 인종, 민족적 배경, 종교 같은 사회적 범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을 자연 깊숙이 경계산을 가지고 있는 물리적, 생물학적 범주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감정의 고정관념은 법정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진화의 결과이지만 동물조상으로부터 물려밭은 본질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감정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이런 경험의 수동적인 수취인은 아니다. 당신은 따로 지시를 받지 않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지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타고나거나 학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타고난 것은 개념을 사용해 사회적 실재를 구축할 수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실재를 통해 다시 뇌가 배선된다. 감정은 사회적 실재의 매우 실제적인 창조물이며,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의 뇌가 다른 인간의 뇌와 협조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개념들을 가진 보편적인 마음이 있어야만 우리 모두가 같은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에 따라 배선이 진행되어 결국에는 여러 종류의 마음을 산출하는 대단히 복잡한 뇌로 충분하다."

 

* 인간의 마음에 설정된 세 가지 모드 

  • 1) 정동 실재론 - 당신이 믿는 대로 경험하는 현상은 뇌의 배선 때문에 필연적.  내수용 신경망의 신체예산 관리부위는 뇌에서 가장 강력한 예측자이고 일차 감각부위는 열렬한 청취자.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정동이 실린 신체예산 예측이야말로 당신의 경험과 행동을 좌우하는 주요 운전자! 정동 실재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음 정동실재론을 점검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사람들은 절대적 확신과 고집불통에 빠질 것! 정동 실재론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당신이 이것에 대해 속수무책인 것은 아님!!! 정동 실재론에 대한 최선의 방어책은 호기심!!!!!  불확실성을 어색해하지 말고 수수께끼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의심의 함양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조언. 이런 습관은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신념에 반하는 증거를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지식 탐험의 기쁨을 경험하는데 도움을 줄 것임. 넵! 명심하겠슴다!
  • 2) 개념 - 인간의 뇌는 개념 체계를 구성하도록 배선. 하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것은 당신이 '특정'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 개념은 단순히 '당신의 머릿 속에' 있지 않으며 감각 입력이 예측과 상호작용하면서 예측과 행동이 동기화되고 서로의 신체예산을 조절. 개인적 경험은 행동을 통해 능동적으로 구성됨. 우리는 우리 경험의 설계자일 뿐 아니라 예산을 직접 담당하는 전기 기사이고ㄷ 함. 개념은 인간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개념을 통해 본질주의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함!!!
  • 3) 사회적 실재 - 갓 태어난 아기는 신체예산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누군가 대신 해주지만, 이 과정에서 아기 뇌는 통계적으로 학습하면서 개념 창조하고 환경에 따라 배선 작업 진행. 이 환경에는 사회적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해놓은 다른 사람들이 가득. 그래서 이 사회적 세계가 아기에게도 실재가 됨. 사회적 실재야말로 인간의 막강한 능력. 인간은 순전히 정신적 개념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회적 실재로 필연적인 것은 아님. 이는 해당집단에 기여하는 하나의 실재일 뿐이며 물리적 실재의 제약도 받음

마음의 이런 세 가지 필연적 측면을 통해 구성적 견해가 주는 교훈은 바로 '회의적 태도'!!!! (반면 본질주의는 확실성을 깊이 신봉) 우리가 파악할 단 하나의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뇌는 주위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에 대해 하나 이상의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음. 적당량의 회의주의는 고전적 견해의 요전적으로 공정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낳음. 사회에서 당신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작위로 결정된 것도 아니지만 필연적인 것도 아님. 예컨대 인종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은 사회적 실재에서 뇌 배선의 물리적 신재로 변화할 수 있으며 그래서 빈곤이 유전자 탓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음. 이 대목에서 필자가 스티븐 핑커 까대서 기분 급 좋아짐 ㅋㅋㅋ 흑인이 백인보다 복지 수당 받을 확률이 더 높다고 믿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게, 이게 현실에서 맞기 때문. 다만 핑커는 과학자들이 정치적 공정성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석하는데 비해서, 바렛은 복지 통계가 맞는 것은 '우리가 사회를 통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함.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소박실재론과 확실성에 뿌리를 둔 직관적이고 본질주의적 이론으로 시작했으나, 이런 이론을 넘어서는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낡은 관찰이 특정 조건에서만 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이에 따라 개념의 대체 작업이 이루어짐. 정치 혁명을 통해 새 정부와 사회질서가 들어서는 것처럼 과학혁명은 특정한 사회적 실재를 또다른 사회적 실재로 대체. 과학의 개념들은 본질주의에서 다양성으로, 소박 실재론에서 구성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음

다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무언가 실재론과 구성주의의 양날개가 크게 펼쳐지고 지금의 학문 세대가 거기에 함께 올라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됨....  

 

# 마샤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알에이치코리아 2020)

 

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왜 원서의 제목을 이따구로 바꾸었는가.. The monarchy of fear -  두려움이라는 군주...  책을 쓰게 된 동기이자 전반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좋은 제목이었는데 말이지

뜻밖에 누스바움의 생활세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밤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좋은 아이디어도 컴 앞에 바로 앉아있을 때 차근차근 떠오른다든가 ㅋㅋㅋ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선 결과를 해외에서 맞이하면서 근심과 불안에 시달리다가 이 두려움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현재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라는 것을, 이 감정에 대해 더 정리해보아야겠다는 "행복한 발견"으로 "희망을 품고 잠에 들었다"는 뭐랄까... 탈인간급의 경지를 엿보게 되었는디 ㅋㅋㅋㅋ 진짜 서론에서 육성으로 현웃 터졌음....


글쎄. 이런 차분함을 전선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활동가들은 누릴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팔자 좋다'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이 이렇게 한발 떨어져 문제를 숙고하고 장기적 전망과 근본적 질문을 던져주는 철학자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나아갈 수 있는 것...  향수를 불어일으키는 역사상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도 없었고, 지금의 상황이 '우리의 행진이 뒷걸음질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재앙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 을 말하면 지금의 현장에서 절박하게 싸우는 이들에게는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오랜 역사를 두고 본다면 그래도 진실....  

 

절대 군주제 국가라면 복종을 가능케 하는 두려움만 있으면 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지적부터...

"선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 민주주의를 좀먹는 증오와 혐에오 맞서려는 결심입니다. 저는 이 증오, 혐오, 분노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민주주의 개 피곤하고 어려움.... ㅜ.ㅜ

 

감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규범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지적은 중요함. 이 대목에서 배럿의 연구를 인용했고, 그래서 오랫동안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던 책을 드뎌 읽게 되었음.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 좋음

"인종 혐오, 여성 멸시, 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 장애인을 혐오하는 감정들 중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결코 없다. 지금까지는 그래왔을 수 있으나 앞으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움의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해방되는 과정을 인간발달을 비유로 설명. 하지만 개인들의 관계에서든 사회와의 관계에서든... 두려움의 군주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은 얼마나 만연해있는가 ㅜ.ㅜ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요구 이상으로 타인을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는 능력,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원할지 상상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의 노예가 아닌 분리된 삶을 허락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는 절대 왕정에서 민주주의적 관계로의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기의 분노는 근본적인 모순에 입각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이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무력하고 우주는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과, 나는 독재자이며 모든 사람이 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한다. 무력한 신체, 자기애,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의 조합이 그 모순을 만들었다."

 

분노는 확실한 생각을 동반하는 명환한 감정으로, 강하고 남성다운 중요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분노는 두려움의 산물. 그 이유는 1) 인간은 타고난 취약성 때문에 자신이 곤란해지지 않는다면 절대 분노하지 않을 것 (문제는 두려움을 잃으면 사랑도 잃게 된다는 점 2) 두려움은 상대적 지위에 대한 집착에도 불을 붙인다는 점.


마찬가지로 혐오 또한 비인지적 감각반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드러진 인지능력.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면 흔한 전략의 도움을 받을 수있는데, 특정 집단을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라고,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나고 성적이며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집단이라고 규정하면.. 그런 집단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지배하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ㅋ . 이것이 바로 투사적 혐오 개념의 토대 (projective disgust).. 사람들이 혐오를 느낄 때  원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

 

진보적 운동에서 중요한 점은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것이라는 지적에 이성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음. 타인의 인간성을 포용하면서 그들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해야 함. 그래야 동료 시민의 말과 행동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친구로 여길 수 있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전래 속담이 바로 이런 철학적  숙고를 담은 내용이었다니.. ㅡ.ㅡ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에 대한 연구가 말해주는 타깃 선택의 이유는 뿌리 깊은 증오보다는 오히려 단지 경찰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그들을 공격해도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 이런 면에서 법과 규제, 통합과 가시성이 중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보다 많이 커밍아웃해야 한다고 메시지..  그러면서 소셜미디어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코미디가 소중한 반혐오 장르라면서 그리스의 희극 시인을 데려왔는데 ("몸의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에 웃을 수 있다면 소수자들의 신체도 불안함 없이 바볼 수 있게 된다") 한국의 다수 코미디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말씀 못하실텐데?

 

시기와 비판의 차이? 시기는 적대감과 함께 파괴적 소망을 담고 있어 소유한 자들의 기쁨을 망치고 싶어한다 ㅋ

최근 성평등을 둘러싼 백래쉬 중 여성들의 평등, 공적인 삶에서의 완전한 평등을 방해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1) 의무를 다하지 않는 여성 (집안일 안 하는 여자들 ㅋ) 이데올로기, 2) 육체성을 가진 여성 존재의 강조 (그래서 여성을 단속해야 함 ㅋ) 3) 성공한 경쟁자로서의 여성 ㅋㅋ (그래서 더 이상 여성우대가 필요 없다!) - 이는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옹일하게 적용 가능 하지만 1, 2가 결합하면서 여성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짐 하지만 누스바움의 반론은 간단.... "여성이 타고난 본성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없다" ㅋㅋ

성차별주의자와 여성 혐오자의 구분도 명쾌한데, 전자는 '불쌍한 여성들, 언제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라고 말하는 반면 후자는 '빌어먹을 여자들이 못 들어오게 해' 라고 표현함 ㅋㅋㅋ 이런거 보면 한국의 중장년세대는 성차별주의자, 떠오르는 이대남들은 여성혐오자로 분류하는게 맞을 것 같음


여성혐오와 성차별주의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며, 성차별주의자들의 믿음은 증거로 반박할 수 있고 실재로도 그래왔음. "진짜 문제는 조롱, 혐오 표현, 고용과 선출의 제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존중 거부 등의 방법을 써서라도 구시대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남성들의  결심!" 하지만 '여성혐오는 순간의 위안일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혐오 자체가 여성들을 위축시키고 제약하는 칠링 효과가 엄청나잖아.. ㅡ.ㅡ 누스바움 전반적으로 낙관적이심....

 

희망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으며, 둘다 불확실성에 반응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 희망은 전진하고 두려움은 물러선다, 희망은 취약하고 두려움은 자기방어적이다... 두려움은 타인의 독립성에 대한 믿음보다는 통제하고자 하는 군주의 욕망과 비슷.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통제하려는 사람, 군주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음. 내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도 좋지 않으며  불확실성과 취약성의 여지도 없고, 희망도 없다! 뭐 이런 논리...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역으로 추천해준 것이.... 시와 음악을 비롯한 예술, 교육기관이나 다양한 토론 집단의 비판적 사고, 타인에 대한 사람과 존중을 실천하는 종교단체 (????), 폭력을 지양하고 대화로 정의를 추구하는 연대단체, 그리고 (그런 단체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정의에 대한 이론들..

 

허나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ㅋ '혐오와 수치심'에서도 그러했지만 '사회정의를 으뜸으로 삼는 유대교'를 향한 신실한 신앙... 이 양반 사상에서 제일로 이해 안가는 것이 종교.. 고상하고 진보적인 엘리트 유대교회 신도라서 그런가... 당최 이해불가.... 존재론적 유신론도 아니고...

"철학자들은 종교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척 종교적인 나라인 미국에서 철학자들이 대중적 영향력을 거의 끼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리석거나 천해서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종교를 믿는 개개인이 그 안에서 분열과 보복보다느 포용과 애정이라는 희망의 요소를 찾길 바라야 한다.  철학은 적을 존중하는 법은 알려주지만 적을 사랑하는 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이, 또 많은 이들에게는 종교가 필요하다"

네? 뭐라구요???????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초월하는 공동의 목표를 생각해내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공공업무 의무복무 제도 제안....  계급분리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나도 동의함.. ㅜ.ㅜ  하지만 이게 체험학습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하...

 

전반적으로 찬찬히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은 과연 이 방법이 통할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묵직하면서도 희망적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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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그리고 갑자기 조지오웰

블로그 포스팅이 거의 매년 일정하게 오른쪽 꼬리가 길게 늘어진, 전형적인 skewed 패턴의 분포를 따르고 있음. 

 

# 마이클 영. 능력주의 (이매진 2020)

 

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마이클 영
이매진, 2020

 

 

IQ + effort = merit

인간 본성과 가치의 수많은 측면 중 단일 능력, 즉 지능으로 모든 것을 판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마이클 영은 일종의 대안역사소설을 썼지만,
어째 그 내용이 풍자로 읽히지 못하고 모름지기 능력주의란 이래야 하는구나... 로 오해받는 현실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네 ㅡ.ㅡ  한국사회 가져올 것도 없이, 토니 블레어가 능력주의 사회로 나아가겠다고 했을 때 노인네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놀라운 것은 이런 막무가내 능력주의로 몰아붙였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보여준 내용들이 이미 한국 사회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들.... 이러면 웃을 수가 없잖아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정교한 (점점 앞당겨지는) 지능 측정 시스템, 그에 다른 성과의 배분, 무엇보다 이제 모든 것이 공정하다는 (객관적 차이에 의해 응분의 몪이 돌아가고 있으니!) 정당화 이데올로기.... 어째 능력으로 평가했는데 선별적 결혼 전략과 조기투자  (심지어  입양, 납치, 유전자 조작) 능력 자체가 세습화되는 기현상.....

책이 쓰여진 시점을 생각한다면 정말 예리한 통찰... 어쩌다보니 예언서 ㅜ.ㅜ

 

어쨌든 마지막 '혁명'이 여성들로부터 시작된 것은 의미심장... 이 가상의 필자는 혁명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며 낙관했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는 점 또한....

 

"특정한 가족의 성원으로서 시민들은 자기 자식이 모든 특권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누구의 자식이든 특권을 누리는 데는 반대한다. 시민들은 자기 자식만 빼고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가족이 하는 저항을 과소평가했다. 가정은 지금도 가장 비옥한 반동의 온상이다."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아동기가 계속 짧아지고 교육적 의미에서 말하는 아동기는 계속 길어지면서 딜레마가 생겨났다."


"불공정한 교육 때문에 사람들은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불균등한 기회 때문에 인간의 평등이라는 신화가 자라났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신화라는 점을 알지만 우리 조상들은 알지 못했다"


" 오늘의 상층 집단이 내일의 상층 집단을 길러낼 가능성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높다. 엘리트 집단은 이제 세습화되는 중이며, 세습의 원리와 능력의 원리가 결합되고 있다."

 

# 리차드 리브스. 20 vs 80 의 사회 (민음사 2019)

 

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민음사, 2019

 

내용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으나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하고, 능동태로 쓰여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음. 그동안 불평등에 대한 수많은 교양서적들이 마치 상위 1% 문제만 해결되면 (심지어 상위 20% 속하는 이들조차 마치 자신은 서민이고 1%만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 혹은 타자화된 모습으로 그려진 빈곤층 문제만 해결한다면 될 것처럼 그리고, 정책 또한 어디선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할 그 무엇처럼 비인칭으로 쓰이곤 했음


허나 이 책에서 저자는 본인이 속한 계급, 중상류층 엘리트들이 이기적 의도는 아니었지만 개별적으로 합리적이었던 행동이 집합적으로 불평등, 특히 기회불평등, 인적자본의 불평등에 엄청나게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자각하고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공자님 소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기득권이 있고 그걸 일부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


상대적 지위를 갖는 계층 구조에서 누군가 상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 상향 이동성이 생겨나겠음.. ㅜ.ㅜ 당연한 소리이지만 마치 그동안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샹향 이동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누군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대놓고 이야기하기 꺼려했던 걸 생각하면 속이 씨~원함

 


"중상류층은 자신의 막대한 권력을 공정성이나 형텅성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의 지위와 자리를 지키기 위해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지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기적이 되었다. 이웃이나 동료를 대한는 태도가 이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더 큰 그림에서 이기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이게 주어지는 조세혜택을 당연한 특권인 듯이 받아들이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기회ㄴ를 차단하는 식으로 이기적이다...... 퍼트넘은 그의 저서 '우리아이들'에서 이책은 상류층을 왁마화하는 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중상류층은 비난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약간은 말이다. "

 

자신의 자녀들이 더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깔아준 유리 바닥은 (대학은 부유하고 덜 똑똑한 아이들의 하향이동을 막는 효과) 그 아래 계층의 아이들이 올라오는 것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되어버림. 그리고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의 효용, 노동의 질도 떨어짐. 덜 능력있지만 집안 좋은 아이들이 상층을 차지하게 될테니까... 물론 사회가 어찌 되든 개인은 알 바 아니겠지만 ㅡ.ㅡ 최소한 정책결정자들은 신경써야 하는 일 아닌감??


"우리는 누구도 가난하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체적 능력이 약한 사람을 배제했다. 가난한 사람이 신체도 약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상위 20% 중상류층 엘리트들은 상위 1%에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계층이면서 (그렇지만 본인들은 상위 1% 아니라고 생각) 동시에 강력한 문화자본, 사회자본, 지식권력을 통해 미디어, 여론, 정책/제도를 주도하는 계층.
한국에서도 이원재 대표의 글이 보여주듯, 자본의 삼위일체화 (부동산 자산, 학력 지위자산, 현금소득) 경향이 뚜렷하고, 그동안 경제학자 (소득과 부), 사회학자(직업지위, 교육수준), 인류학자(문화와 규범)들이 계급 분화를 두고 다양한 분석을 해왔지만 지금은 모든 추세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함

 

 

대부분의 중상류층은 착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재능을 활용해서 지위를 획득하는 경향. 하지만 현 세대에서의 소득 격차가 다음 세대에서 기회의 격차가 된다면 경제적 불평등은 영속적 계급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음.
부모는 아이가 잘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할 권리가 있지만, 아이에게 '경쟁우위'를 부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권리는 없음. 내 아니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잘 사는 것을 도우면 안 된다는...  근데 이게 항상 뚜렷이 구분되는게 아니라는 문제... 그래서 개별 개인 선택의 총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사회적 규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함.


영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지위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능력본위 시장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능력을 가져야 하고, 이렇게 능력만 갖춘다면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능력을 들고가는 시장의 공정성이 아니라, 그 능력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 중상류층 아이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할 무렵이면 이미 다른 사람보다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능력대로 경쟁하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됨... '세습적 능력 본위제'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대한민국 중상층 엘리트들의 자녀교육 군비전쟁의 의미를 잘 보여줌.


"대졸 엄마들의 노동공급에 대한 의사결정이 자신의 시간에 대한 금전적 가치보다 가정의 효융극대화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목표들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내가 현재 시장에 나가서 벌어오는 돈보다, 직장 때려치우고 헬리콥터 맘이 되어 아이 교육에 몰빵하는 것이 계급 지속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음. 그래서 어이없게도 교육에서의 젠더 평등화, 여성의 교육 성취가 희안하게 교육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되는 기이한 현실...  한국에서는 고학력 여성들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애달픈 현실과, 그 고학력 여성의 배우자들이 전업주부를 유지할만큼의 경제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교육투자를 통한 지위 경쟁에서의 우위 선점 삼박자가 만나서 대폭발.. ㅜ.ㅜ

모름지기 여자들 다 노동시장에서 일해야 한다... 여성 자신들의 사회적 성취도 이루고, 교육 불평등 악화도 막고,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녀...  ㅡ.ㅡ

 

게다가 그토록 '공정' 좋아하는 수도권 명문대 청년들의 능력분위주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함의와 문제점도 이 책을 통해 한발짝 떨어져 돌아볼 수 있음

저자가 특히 문제라고 지적한 기회사재기 (Tilly 영감님의 opportunity hoarding)의 세 가지 유형 - 사실 이는 커다란 기계 작동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들의 작은 선택과 미시적 선호가 누적되어 생기는 결과.... 하지만 이것이 사회전반의 문화에 큰 영향...
1) 배타적 토지용도 규제 - 고밀도 개발 반대 (한국인으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 ㅋㅋ 고층 럭셔리 아파트 들어오는 걸 왜 반대해 ㅋㅋㅋ) 2) 불공정한 대학입학 절차 - 특히 동문 우대, 3)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분배 (이를테면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자녀와 직장에 가는 날... 행사만큼 역진적인 게 없음 ㅜ.ㅜ)- 미국이라고 인턴 제도, 특히 무급 인턴 제도가 비판받지 않는게 아님. 한국은 희안하게 미국 나쁜 거 엄청 빨리 수입해옴. 미국 유학에 기초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자기성찰 부족과 관련있다고 생각함

 

그래서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노동시장 규제로 불평등을 사후 교정하려 하기보다 생애 첫 25년 동안 인적 자본 축적에서 격차를 좁히는 걸 목표로 삼자는 것!!! 한국과는 맥락이 몹시 다르지만 참조할 부분이 적지 않음.. 근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냐구 ㅜ.ㅜ 정치를 만들어내는 엘리트들이 모두 이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들인데... ㅜ.ㅜ   그나마 법/돈/염치를 활용해보자는 제안, 특히 엘리트들의 '염치'를 활용하자는 제안이 눈물겹기까지 한데..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지식 엘리트 계층에 과연 염치라는게 있는지 매우 회의적.....
(1) 인적자본 육성 측면 - 경쟁 준비과정을 더 평등하게 만드는 것 1) 계획하지 않은 임신 줄이기, 2) 육아 격차 좁히기, 3) 열악한 한교에서 더 훌륭한 교사가 일할 수 있게 하기, 4) 대학 학자금 조달기회를 더욱 공정하게
(2) 기회 사재기 감소 측면 - 1) 배타적 토지 용도 규제 철폐, 2) 대학 입학자격 확대 - 대표적으로 동문자녀 우대제도 철폐 (여기에는 '법, 돈, 염치' 이 세가지 무기를 활용해야 함 ㅋㅋ), 3) 인턴제도 개혁

 

# 조지 오웰 전기 그리고 1984

 

조지 오웰
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마농지, 2020

 

왜 갑자기 이 책을 읽게 되었나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급발진... 하지만 계기를 까먹음...

그런데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여태껏 오웰의 본명을 알지 못하고 있었음. 에릭이라니... 어쩐지 X-men 의 매그니토가 저절로 연상되잖아 ㅋㅋ


몰락한 귀족/양반의 자제로서 지적 재능을 가진 그가 만일 식민지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했거나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자책하며 자기파괴적 기행을 일삼는 '도련님'이 되었겠지만
어쩌다보니 그는 제국 영국에서 태어났고, 그런 계급적 속성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 선택지를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니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참....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렇게 심플한 일러스트와 짧은 글들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정수를 전할 수  있다니 매우매우 놀라웠음!!!!.
자유로운 정신이 마냥,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겠으나... 그럼에도 그처럼 꾸준히 자유롭고 싶음.....

책을 읽자마자 1984를 당장 다시 읽고 싶다는 열정이 들끓어 순식간에 읽어버림.. .(무료 전차책!)

어릴 적 아마도 필독도서 쯤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와 다시 읽으면서 정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음. 무려 1949년.....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어느덧 현실의 일부가 되었고, 그 출구없는 우울한 전망을 너무나 절실하게  경험했던지라... ㅜ.ㅜ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좀
무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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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장창 밀리는 독서일기

출퇴근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새로운 직장의 장점 ㅋ

의식적 노력 없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책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어서 행복해요 ㅋㅋㅋ 뭔 소리냐

책은 좋은데 정리는 귀찮고, 정리를 안 하면 좋은 내용과 감흥을 영구삭제하게 되니... 이게 숙제여...

 

# The great influenza: the story of the deadlist pandemic in history (by John Barry, 2005)

 

The Great Influenza: The Story of the Deadliest Pandemic in History

 

내가 뭘 읽은 거냐 ㅋㅋㅋ 인플루엔자는 핑게일 뿐.
역사물을 가장한 과학 아라비안 나이트, 아카데미 버전 무뜬금 사랑과 전쟁, 영웅호걸들의 웨스턴 삼국지냐 뭐냐..
와, 인플루엔자를 다룬 책인데 내내 미국 의학계의 후진성 이야기하다가 90쪽에 와서야 처음 유행 시작됨. 그래서 이제 뭔가 스토리가 나오나 했더니 다시 160쪽 될 때까지 1차 세계대전 미국 뻘짓 이야기 ㅋㅋㅋ 그리고 나더니 이제 수십 페이지에 걸쳐 미국 방방곡곡 유행이 본격화되면서 진짜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이 쓰러져감...  보스턴 외곽 군대 훈련소에서 중서부의 작은 시골, 알라스카의 에스키모 마을까지..  일단 유행이 시작되니 정말 생생하게 비극과 공포와 좌절을 방대한 사료를 이용하여 손에 잡힐 듯이 그려냄...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너무 큰 비극이었지만, 엄청 흡인력 있게 빨려들어가며 읽었음.. 진짜 이야기꾼일세!!!

 

유럽과 비교하면 후발주자였던 미국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해서도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19세기 말 무렵 최대 20% 정도의 의대는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요구하지 않았고 등록금만 내면 누구나 받아줬다 ㅋㅋ 예컨대 1981년에 하버드 의대에서도 9개 과목 중 4개 낙제해도 의사 졸업장 ㅋㅋ
대학과의 관련성도 적었고 (직업학교니까!!!) 병원과의 연계도 없었음. 플렉스너 리포트 이전의 참상을 아주 상세하게 소개해줌...  사실 이런 거 읽을 때마다 히포크라테스 전통 이야기하며 천부의권 운운하는게 떠올라 정말 실소가 나옴....
존스홉킨스는 교수도 뽑았고 병원도 열었지만 돈이 없어서 의대를 아직 못 열고 있었는데 ㅋ 여학생을 받아주면 50만 달러 기부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지만!!!) 이들을 받아주면서 겨우 개교.... 이건 또 뭐냐.. 돈 앞에서는 성차별도 무너지는구나 ㅋ 홉킨스 문 열던 1893년, 대부분의 의대는 수련병원이나 대학과 연계가 없었고 대부분의 교수 월급은 등록금으로 충당하고, 환자는 만져보지도 않고 졸업 ㅋ 어쨌든 홉킨스가 개교하면서 미국 의학교육의 새로운 장이 열림...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1차 대전이 인플루엔자 대유행에 기여한 부분이 훨~~~씬 더 컸다는 것도 깨닫게 됨. 전쟁 총동원 체제 하에서 군사훈련, 이동, 밀집환경을 통해 전파가 가속화되었던 것은 물론 언론 통제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일본에서만 적십자가 군대의 하수인으로 일했나 했더니만,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음. 특히 간호 인력을 전선에 투입하는 핵심 기구.... 앙리뒤낭 어디 간 거냐???
한편 민족 자결론으로 한민족에게 유명한 윌슨.... ㅡ.ㅡ  실상은 기독광신도..... 평화협정 체결하러 파리에 갔다가 인플루엔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제정신 아니었던 것 같음 ㅋ
 

학생 시절 왜 바이러스 인플루엔자와 헷갈리게 Hemophilus influenza로 이름 지었을까 궁금했던 것도 풀림.
당시 정말 많은 과학자들이 인플루엔자의 병원체를 밝히기 위해 애썼고 그 시도 자체는 당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부수적으로(?) 거두었다는 것도 알게 됨. 그 중의 하나가 무려 DNA를 통해 유전이 이루어진다는 것!!!
어쨌든 병원체는 아니었지만 2차 세균감염을 저지하기 위한 폐렴구균 백신이나 혈청의 대량 생산도.. 내 막연한 추측보다 너무 본격적이라 깜놀함. 당연히(?) 공중보건체계도 강화되고 통계학적 연구도 발전!

 

1918년 봄의 1차 유행이 비교적 마일드했다면 (증상이 매우 마일드해서 1918년 7월에 출판된 란셋 논문조차 아무래도 인플루엔자는 아닌 것 같다고 결론.. 하지만.. ) 가을 2차 유행이 엄청 폭발적이고 사상자를 많이 냈는데, 특히 군대를 중심으로 청년 집단의 피해가 극심했고 cytokine storm 에 의한 ARDS 가 하도 급격하게 나타나고 청색증이 심해져 심지어 인종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고... ㅡ.ㅡ 사람들이 '흑사병'이라고 오해할만했다고 하니... 그래도 오늘날 코로나 유행에서 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됨. 사실 유행 시작 1년도 안 되 백신이 개발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음 ㅡ.ㅡ 예전에 영화 contagion 보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 바로 신속한 백신 개발이라고 그랬었는데...

 

인간사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이렇게 무서운 유행이 몰아치고 매장을 할 수가 없어 집안에 시체를 두고 살아가는 환경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또 익숙해졌다는 것....... ㅡ.ㅡ
그리고 흥미로우면서도 좀 서글펐던 것은 인류의 바보짓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이 발간된 것은 이번 코로나 유행 한참 이전인데, 마치 지금 유행을 보고나서 글을 쓴 것 아닐까 의심할만큼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음.


빠른 시간에 급격히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워 관을 쌓아두고, 구덩이를 크게 파서 시체를 한꺼번에 매장하는 모습, medical surge 때문에 의료인, 특히 간호사 부족으로 난리가 나는 모습, 모이지 말라는데 말 안듣고 모여서 전파 확산시키는 모습, 괜히 겁주는 게 더 위험하다며 별거 아니라고 가짜 안심을 주는 모습 ("이제 피크는 지나갔다!" ㅋㅋ), 가짜 뉴스 ("독일인이 바이러스를 몰고 왔다!" ㅋ), 탑 저널도 제대로 된 과학적 검증이나 리뷰 없이 말이 될만한 논문은 어지간해서 다 실어줘서 아무말 대잔치 난리가 난 모습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쓰는 것까지 똑같네 그려.. ),  섬나라 호주 빗장 걸어잠그고 초기에 전파 차단에 성공했던 것... ㅋ  무엇보다 백미는 웰치가 1920년에 이 유행 사라지고 나면 다 까먹게 될 것이라는 예측 등등....
이렇게 인간 사회의 도저에 자리한 본성, 의식, 사회적 질서가 좀처럼 변하지 않으니까 '고전'이 사랑받는 것이겠거니... ㅡ.ㅡ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를 다룬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발견.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공포 (홀로코스트, 전쟁)에 대한 책은 많지만 자연이 초래한 공포는 글쎄올시다 아니었을까라고 해석. ...
 

널리 알려져있든 1918 팬데믹은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과 달리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음. 그 기원은 1918년 초 미국 Kansas state, Haskell county 로 강력 추정됨. 다만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은 1차대전에 총력전 펼치며 대부분의 부정적 뉴스를 검열하던 미국이나 유럽 다른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은 아직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았고, 유행은 오히려 덜 심각했지만 맨날 뉴스 대서특필했기 때문 ㅜ.ㅜ
현재 역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은 최소5천만 명, 어쩌면 1억명 사망. 이는 겨우 2년에 걸쳐, 그것도 2/3의 사망이 24주, 특히 그 중 절반 이상이 1918년 9월 중순에서 12월 사이에 발생했다고 함. 중세 흑사병이 한 세기 안에 죽인 것보다, 에이즈가 24년에 걸쳐 죽인 것보다 24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 ㅜ.ㅜ
미국에서는 유행 동안 총 사망의 절반 정도가 인플루엔자와 그 합병증 연관되었고, 평균수명을 10년 이상 깎아먹을 정도였다고 함. 젊은이 피해가 컸으니 그럴 만도 ㅜ.ㅜ 당시 추정값을 지금 미국 인구에 대입하면 약 175만명 사망 규모라고 하는데, 2월 23일을 기점으로 미국의 코로나 누적 사망자 수가 50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의학기술의 발전은 다 무엇인가 싶음 ㅜ.ㅜ

 

유행 당시 영아와 노인의 사망률이 당근 높았지만, 청년층 사망률도 높아서 W 모양을 보였는데 아마도 가장 치명률이 높았던 것은 임산부.. ㅜ.ㅜ 입원환자 중 치명률이 23-71%에 이르고, 생존한 이들 중에서도 26%가 유산을 경험했다고 함....  이후 후유증도 적지 않아서 그 유명한 수면병 (encephalitis lethargica)...  칼 메닝거는 인플루엔자와 조현병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는데, 2/3의 사례에서 5년만에 완전히 회복됨...
저자는 인플루엔자 감염이 너무나 보편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종이나 계급에 따라서 패턴을 보여주지는 않았다고 해석했는데, 밀집도와 분명히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계급과 사망률 사이에서는 연관성 관찰됨. 물론 치료제가 변변치 않았고 유행이 워낙 대규모여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좀...  게다가 그동안 높은 인구밀도로 도시가 개발되지 않아 면역 수준이 낮았던 저개발국가, 에스키모 등에서 그 피해는 심각..

 

코로나 유행 초기에 아마도 이 책을 읽었으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내용을 좀더 많이 알았더라면 조바심이 덜 났을 것 같은데....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  

 

# 이욱연. 루신 읽는 밤

 

루쉰 읽는 밤, 나를 읽는 시간 - 그냥 나이만 먹을까 두려울 때 읽는 루쉰의 말과 글
루쉰 읽는 밤, 나를 읽는 시간 - 그냥 나이만 먹을까 두려울 때 읽는 루쉰의 말과 글
이욱연
휴머니스트, 2020

 

대학생 때 루쉰 선생의 번역서를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던 것 같은데. 세세한 내용들은 기억이 안 나고 (길이 원래 있던 게 아니라는 그 구절만 기억!)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날이 서 있고 막 야단맞는 느낌이었다는 "분위기"만 기억 ㅋㅋㅋ
심지어 닉네임 노신 님께서 선물해주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아직도 책꽃이에 있는데 시집조차도 마음이 촉촉해진다기보다 또 야단맞는 느낌이었던 기억 ㅋㅋㅋ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신기방기한 느낌... 아니 왜 나랑 생각이 이렇게 비슷한 거야???
나는 내용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했던 고민, 그가 썼던 글들이 어느 덧 내 생각의 회로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버렸던 것이여????
마치 내 생각을 들킨 것처럼 익숙했는데, 그게 내 생각인지, 아니면 그동안 읽었던 글들이 결국 이런 방향으로 체화되어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 건지 구분이 안 됨...

전집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생각.. 대학생 때 그 느낌, 불편하고 생경하고 야단맞는 느낌과는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구..

 

이욱연 선생님의 해제도 깊이 있어서 좋음.

"저마다 삶에는 트라우마가 있다.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이후다. 루쉰이 전하는 삶의 지혜는 치유를 위해서 지금 이곳의 삶을 응시하면서 말하라는 것, 글을 쓰라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시작점으로서, 새롭게 자신을 만드는 차원으로서 능동적인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루쉰이 전하는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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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교양'서적 이야기

작년에도 연초에 반짝 열심히 포스팅하고 하반기로 갈수록 흐지부지하더니 ㅋㅋ

매년 비슷한 패턴 반복...  올해는 뭔가 더욱 어수선한 것이 과연 월드와이드 질풍노도 시대 다운 현상이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시공사, 2019

 

뭘까... 도전적 문제제기에 동의하고 이걸 어떻게 풀어갔나 궁금해서 책을 골랐을 뿐인데 스티븐 핑커, 조너선 하이트, 피터 싱어 줄줄이 딸려옴...  모두 석연치 않은 사람들... ㅜ.ㅜ

그리고 책은 조금 실망스러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서론'만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온갖 좋은 것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다 가져다 붙이고,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는 점, 도덕적 동기가 마치 유일하게 공감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는 나도 백퍼 동의.
나도 공감 싫어함. inequality of what? 이라는 아마티야 센의 질문처럼 누구에게, 무엇을 공감할 것인가에 따라 공감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수도 있고, 세상 무서운 흉기일 수도 있음. 공감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 공감이 도덕적 잣대로 쓰이고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 도덕적 판단은 꼭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아도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않아도 가능하고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이 있음. 예컨대 정의론이 그렇잖여?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는 저자의 비유에 "공감" (이 때의 공감이란 '동의'라는 뜻). 다수의 피해를 두고 눈앞의 생생한 서사를 보여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인식가능한 희생자 효과'로 명명할 수도 있음.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공감(empahy)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 . 애덤 스미스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는 이걸 sympathy 라고 지칭했는데 저자는 이를 '연민'으로 개념화 (나는 전자를 감정이입, 후자를 공감이라고 부르겠소만.. 번역 상의 문제인 것 같음). 즉 empahty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고, sympathy or pity 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개인의 반응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듯함, 관심, 배려의 감정. 연민은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님 (심지어 명상수련자가 참여하여 이걸 functional MRI 로 실험한 연구도 있음 ㅋ)

"직감에 의존하는 판단에는 결함이 있다... 우리가 공감과 같은 직감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직감의 노예는 아니다. 전쟁에 돌입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치면서 내자식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생판 남에게는 특별한 온정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내 자식의 삶이 중요한 만큼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판단도 행동도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못생긴 사람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선호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호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도 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 행동, 우리의 추론 능력,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줄 알는 능력이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다."


도덕의 범위는 역사를 거치며 확장되었고, 소수자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 또한 포괄성 쪽으로 번화해왔는데 이는 ".. 역사과정을 거치며 우리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증조부모 세대보다 공감을 더 잘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더 추상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란 부분이 한꺼풀 벗겨내면 몹시도 취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심리학 실험들이 간단한 암시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줌), 그토록 취약한데 학문은 왜 존재하나? ㅋㅋㅋ 사실 이성조차도 환경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성의 우수함이라고 생각하는디 ㅋ

공감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극단적 사례가 소시오패스인데, 이들은 타인의 마음 헤아리기, 즉 인지적 공감능력이 매우 빼어나지만(그래야 가학도 할 수 있음) 이를 조정하고 필요한 곳에 이용 (정서적 공감은 취약).  이걸 두고 '특정한' 공감능력 결핍을 문제삼기보다는 얕은 감정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게낫다고 설명

 

책 자체는 공감=선 이라고 하는 헛된 믿음(마치 종교가 없으면 도덕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프레임)에 균열을 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인데 너무 논의가 얄팍해서... 에잉...

 

# 벤스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흐름출판, 2017

 

 

전반부 어린이, 청소년 시기 힐빌리로서의 직면했던 현실에 대한 담담한 서술은 낯설고도 낯익은 이야기. 지구 반대편 러스트벨트의 쇠락은 피부색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그대로 디트로이트  흑인 이주민의 이야기.
불행을 경쟁할 필요는 없다만 백인의 피부색을 갖고도 깊은 절망과 박탈에 직면하며 무너져가는 힐빌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에 더해 비자발적으로 뿌리뽑힌 고향없는 삶과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제약에 갖힌 흑인들의 삶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멀리 부르디외 센세의 '세계의 비참',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Thomas Sugrue의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그리고 최근의 영화 Moonlight, Florida project 까지 동시에 떠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한숨...

하지만 한국의 사당동25 그리고 내가 만났던 underclass 청년들이 직면한 삶도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나는 아직도 택배 상하차 일이 제일 쉽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음. 남들은 지옥, 노예노동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번듯한 졸업장과 인지적 자원, 사회적 자본, 정서적/사회적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덜 부담스러운 일.....

그나마 닻이 되어주는 (그야말로 anchoring) 버팀목 하나만 있어도 아주 심연으로 추락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삶의 공통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역사 속에 배태된 개인의 회고록. 풍부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분석'에까지 이르지 못함. 아마도 이것이 세계의 비참, 혹은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와 다른 점.
이웃 힐빌리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당사자성이라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이 아무리 정신차린다 해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타고난 금수저들이라면 대충 해도 가질 수 있는 자원들과 기회들인데, 모든 존재를 갈아넣어서야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다면 wear & tear - 출발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밖에...

 

이 책이 인기를 얻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심지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좀 불편.... 

만국문화박람기도 아니고 남의 나라 빈곤과 불평등 내러티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고통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세상에 이런 비참함이? 내가 모르는 어떤 세계, 그곳이 아마존 밀림의 어느 수렵채집부족일 수도 있고, 미국 내륙 깊숙이 힐빌리일 수도 있고.... 인간 자체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쁘다 할 수 없으나 (나도 엄청 집중해서 읽기는 했음), 최소한 이 책이 (한국) 연구자를 위한 책이거나 (한국) 연구자에게 울림을 주는 책이어서는 안 될 것 같음. 연구자의 계급적 성격이 점차 상층 편향되면서 이런 종류의 생생한 '체험'담이 연구자들에게 간접 경험과 정서적/인지적 자극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님.. 책 그 자체보다 책을 둘러싼 국내 사회과학 연구의 풍토, 연구자의 계급성, 출판 시장 등등.. 이런게 불편함. 연구자의 책무라면 이 책을 읽고 추천글을 남기는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underclass 의 삶을 탐구하고 분석해야 하는게 아닐까 말이지...

 

 # 최종희 [대구경북의 사회학]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최종희
오월의봄, 2020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과연 이것이 대구경북만의 특별한 속성일까?
이를테면 다른 비수도권 지역 호남, 충청 사람들은 전혀 다른 마음의 습속을 가지고 있을까?
책이 보여준 마음의 습속은 내가 그동안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왜 이런 습속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것이 어떤 점에서 다른 비수도권 혹은 전근대의 잔재로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움 ㅜ.ㅜ

 

# 마크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리시올, 2018

 

90년대 초중반에 이런 종류의 문화/정치 비평을 엄청 읽은 것 같은데.. ㅡ.ㅡ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관점에서 대중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마치 끝판왕처럼 보이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과 틈새를 찾아내고 급진적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움직임에 몰두했던 일련의 '세대'가 한국사회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나에게 추천해주신 분들은 어떤 새로움을 보았던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저자가 선호하는 이유 -

1) 포스트모더니즘 테제가 처음 발전된 1980년대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깊고 훨씬 더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볼모의 느낌'. 그 때는 그래도 현실 사회주의가 존속하고 있던 시절. 80년대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독트린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 시기, 2) 그래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더이상 모더니즘과의 대면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극복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 3)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온전한 한 세대 경과.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외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 ===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역시 끝판왕이라고 진단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진단 어디에서 급진성을 찾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음 ㅡ.ㅡ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아포리아

1) 정신건강 -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체계이기는 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 2) 관료주의 - 관료주의는 스탈린주의적 유물이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쇠퇴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관료주의는 일상의 일부이며 새롭고 탈중심적인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 이 두 가지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두는 이유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영역인 교육을 특징짓고 있기 때문 ===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는 커녕,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성장했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는데??? 정신질환은 과연 자본주의의 징후인가? 지나친 일반화 아님? 영국적 맥락에서는 그럴 법도 하다만,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말여..  유로센트릭 관점은 사실 책 곳곳에 드러남. 읽는 아시아 사람 기분 나쁨 ㅡ.ㅡ  영국 교원노조가 팔레스타인 인권 고만 이야기하고 계급 이슈에 좀더 천착하다는 것 등...  무슨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말이지.

이를테면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의 바깥 테두리를 표지'해주는 상태라면 양극성장애는 자본주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질환이라는 설명..... 응? "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정신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게 된다 1)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 강화, 2) 다국적 제약회사에 수익성 높은 시장 제공 "  === 지배적 담론이 생물학적 설명에 기울어져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미 학술 커뮤니티 안에서도 사회적 기원 혹은 사회적 요인에 의한 영향에 대한 논의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닌데 너무 느낌적 느낌으로 기술하신 것 같음 ㅋ

 

아니 관료주의 비판하면서도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식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라니, 뭔  하나마나한 공자님 훈계말씀인가. 이미 1980년대에 앙드레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질환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근데 여성들은 자본만큼이나 가부장주의가 더 문제인 거 같은데? 무슨 생뚱맞은 자본주의 대환원론인지.. 20년만에 이런 거 보니 좀 참신하기는 하다 ㅋㅋㅋ 20년전 혈기왕성하고 마음 앞서나가던 마르크스주의 새내기 비평가 글을 보는 느낌적 느낌...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의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 사실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계급적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데올로기를 수반했고, 항상 당대에 대안은 없다는 이념 하에서 작은 균열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준 것이 사실.. 이것이 비단 자본주의만의 일은 아니잖여???
 

반성적 무기력 (reflexive impotence) - 사태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음. 이는 영국 청년, 청소년의 집단적 병리로 우울증적 쾌락 (depressive hedonia) 상태에 빠지게 만듦.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상태를 일컫는 개념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랑 안 맞음 ㅋㅋㅋㅋ

실증 자료도 없고, 현실 정치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는 '전략'이나 주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없고, '부재'로부터 도출해낸 가능한 미래에 대한 상도 없고...
온라인 상에서 손꾸락 놀리는 살롱 좌파들의 평론가 놀이가 나는 싫은 거임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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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야기

# 대니얼 서스킨드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대니얼 서스킨드
와이즈베리, 2020

 

 

번역서 제목이 안티 아닌가... ㅡ.ㅡ
저자 자신도 "일은 한까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줄어들 뿐"이라고 쓴 마당에

 

  • 기술적 실업 (technological unemployment) - 아마도 구조적 실업 중에서도 특별히 기술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상황을 지칭한 것일텐데, 이미 1930년 영국의 케인즈가 이 용어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함. 근데 무려 이보다 100년 전 리카도가 1821년에 '기계장치에 대하여'라는 챕터에서 이 문제를 언급
  • 저자는 기술적 실업의 시대 특징으로, 기술 진보를 통해 모든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는 크게 해결할 것이지만 세 가지 문제, 1) 불평등, 2) 기술 대기업의 정치적 힘, 3) 삶의 목적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것

 

  • 기술 진보를 통해 서로 다른 두 방향의 힘이 작동. 첫째 노동자를 대체하는 해로운 힘, 둘째 노동자를 보완하는 유익한 힘 (1 생산성 효과, 2 파이확대 효과, 3 파이 탈바꿈 효과) - 지금까지는 이 두 가지 힘의 싸움에서 후자가 대개 승리했고 언제나 인간 노동을 찾는 수요가 충분히 컸기에 이를 '노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음
  • 21세기 들어 숙련도별 고용율 변화를 보면 대개 고숙련과 저숙련이 늘어나고 중간 숙련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 관찰 . 이를 양국화 혹은 공동화라고 부르고 ALM 가설 (Autor-Levy-Murname)로 설명가능. 그동안 사람들이 흔히 '일자리'에 집중했지만, 상향식으로 일자리보다 '업무' 단위로 쪼개 보면 기술에 의한 대체 '업무'가 보다 명확해짐. 대개는 교육이나 숙련 수준보다는  "틀에 박힌" 업무, 암묵적 지식보다는 '명시적' 지식에 의해 의존하는 업무들이 자동화되기 쉬움. 어떤 일자리든 단일 업무만 하는 직종은 없으며, 따라서 어떤 직종이나 일자리가 통째로 자동화된다기보다 이러한 '업무'들이 자동될 가능성
  • 그런데.... 인공지능에서 나타난 실용주의 혁명이 이러한 ALM 가설마저 무너뜨림.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는 자동화가 쉽지 않을 것이고, 그 예가 트럭 운전과 의료진단이었는데 지금 보면 가장 앞서나가는 분야 중 하나. 절차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간지능을 굳이 모방하지 않아도 기계학습에 의해 얼마든지 업무 수행 가능.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기계가 모방하기 어려운 인간 능력이나 처리하기 힘든 업무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추세를 확인하는 것! 시간이 지날 수록 기계는 서서히, 끈질기게 발전에 인간 업무 영역으로 발을 넓힌 것이 분명. 이것이 '업무 잠식'인데 인간이 일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능력, 신체/인지/정서 능력 모두 기계의 압박

 

  • 하지만 이는 전세계에서 지역적으로 시차를 두고 발생. 그 이유는 1) 과제의 차이 (특정 산업 비중), 2) 비용 차이 (영국에서 지난 10년간 오히려 기계세차가 감소하고 손세차가 늘어난 것은 값싼 이민자 노동력 때문 ㅜㅜ. 상대비용), 3) 교제 및 문화의 차이
  • 마찰적 frictional 기술실업 -  일자리가 몽땅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거리는 있는데 모든 노동자가 일감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 그 이유는 1) 숙련 기술의 불일치, 2) 정체성의 불일치 (기술진보가 반드시 매력적인 일자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 신기술 때문에 제조업에서 밀려난 남성노동자들이 핑크칼라 일자리로 들어가지 않는 현상), 3) 장소의 불일치 (기술이 지역적 거리를 무위로 만들것 같지만, 예컨대 '거리의 종말, 평평한 세상'이라고 해도 현실은 다름. 러스트벨트 vs. 실리콘밸리)

 

  • 기술적 실업의 문제는 직접 실업률을 높이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의 성격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음 1) 사람이 몰리면 임금 하락, 2) 일부 일자리에 질의 하락, 3) 일자리의 지위 하락
  • 구조적 기술 실업은 기술진보의 '보완하는 힘'의 약화 때문인데, 그 이유는 1) 생산성 효과가 사라져가고 있음 (노동자 생산성이 올라가면 가격 인하나 고품질로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다른 분야에서 노동 수요가 높아지는데... 이제는 노동자 생산성이 올라가도 노동 수요 증가 일어나지 않음) 2) 파이는 분명히 커지겠지만, 그러한 상품 생산에 필요한 업무 수행에 인간이 유리하지 않음 (업무 잠식 효과), 3) 파이탈바꿈 효과가 소비와 고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 ==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어떤 기계보다 나을 것이라는 '우월성 추정 superiority asusmption'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즉.. '노동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판단. 이제는 열등성 추정을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상황.
  • 구조적 기술 실업 시대 불평등은 두 가지 자본, 전통자본과 인적 자본 모두에서 나타남. 인적자본과 전통자본 둘 다 없는 경우에 세상 암울해지는데 ㅜ.ㅜ  두 가지 모두 갈수록 불공평하게 분배됨 1) 권력을 이용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 (상위 1%, 0.1%의 독식) 2) 노동소득 분배율의 감소 == 결국 분배 문제가 핵심

 

  •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결국 큰 정부 big state. 큰 정부가 맡은 역할은 생산이 아니라 분배.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나 소득 부양 정책들은 모두 고용이 일상이고 실업은 어쩌다 나타나는 예외라는 전제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이제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고용이 일상이지도, 실업이 예외인 것도 아님 ㅜ.ㅜ  큰 정부는 1) 가치있는 자산과 소득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크게 매기고 (노동자, 전통자본, 대기업), 2) 그렇게 모은 돈을 자산과 소득이 없는 사람과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함. 필자는 보편적 기본소득보다는 조건부 기본 소득 주장
  • 1796년 토머스 페인이 기본소득 처음 주장하고 그동안 각기 다른 이름으로 이 개념이 회자됨. 지역 배당금, 보편수당, 시민소득, 시민급여, 정부상여금, 국민보조금 등등.. 그런데 기본소득의 '기본'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 (즉, 기본소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인간다운 삶이냐, 최저 보장이냐)과 더불어 보편성에 해당하는 구성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함 == 글쎄올시다??? 생산 영역에서 공공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디??? 그래서 저자는 정부가 '전통 자본의 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자본은 그대로 둔 채 소득만 분배하고 인적 자본만 폭넓게 분배한다면 경제불균형은 해결될 수 없음.
  • 또한 정부는 노동을 지원해야 함. 왜냐하면 일에는 경제와 상관없는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 기술 대기업 문제도 심각하게 여겨야 함. 그들의 문제는 과거처럼 독과점 같은 '경제'이슈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대개 경제적 측면과 관련 없는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함. 구글의 알고리즘이나 페이스북의 데이터 거래 등등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 그런데 현재는 신기술을 어떻게 어디에 이용할지를 이런 기술 대기업들에게 맡겨놓고 있음 ㅜ.ㅜ 이들의 정치적 힘을 감독할 수 있는 기관, 소비자가 아닌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함. 물론 정부라고 다 선은 아님. 중국의 기술 국유화가 가져온 끔찍한 감시사회를 떠올려보면...

 

  • 인간은 왜 일에 의미를 부여할까...  싫의 의미와 일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님. 고대에는 일을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보기도 했고, 구약성서에서 일은 인간에 내려진 징벌. 반면 프로이트와 베버는 삶의 의미와 연관성을 찬양했지만 산업혁명 시대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함을 안겨주었음 "가끔은 이런 의심이 든다. 일이 줄어든 세상을 두려워하는 글을 쓰는 학자들과 평론가들이 사실은 자기가 일에서 얻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의 경험에 잘못 투사하는 것은 아닐까?" ㅋㅋㅋ 나도 항상 이런 우려를 하기는 하지만, 일 자체를 잘 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부정할 수 없음.
  •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편'. 마약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목적의식이 솟구치게 하지만, 동시에 일에 취해 갈피를 못잡게 함으로써 주의를 흩뜨려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만들기도 함. 일이 마음속에 워낙 깊숙이 뿌리내린 탓에, 일에 몹시 의존하는 탓에 일이 줄어든 세상이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흔히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실제로 생각하더라도 중요한 내용을 전혀 표현하지 못함. 일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것은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더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 말처럼 우리는 "노동이라는 족쇄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노동자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이 사회는 이런 자유를 얻어낼만큼 값진 더 고귀하고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케인즈 걱정대로 "어떤 나라도, 어떤 사람도 여가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를 두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기대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즐기기보다 죽어라 애쓰도록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 여가가 끔찍한 선물이 되지 않으려면 1) 교육 재검토하기, 2) 여가 형식 결정하기, 3) 다시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 - 유급 노동이 줄어든 세상이라 해도 일이 아예 없는 세상은 아니기에
  • 그동안 경제적 목표에 집중했기에 파이가 얼마나 커질지를 알고자 현대의 기술자인 경제학자들에게 의지해왔지만,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근본적 목표를 다시 검토해야 함. 풀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사느냐'이며, 의미 있는 삶은 사는 것이 어떤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함

 

디지털시대 일자리의 퇴조와 관련하여 매우 차분하고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함. [노동의 종말]에 비해 훨씬 최근에 쓰인 책이라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부합하기도 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림...  (사실 내가 이거 읽고 있을때가 아니었는데 말야.. ㅜ.ㅜ)

그런데, 뭔가 대안 쪽으로 오면 갑분싸.... 법인세 높이고 전통자본에 세금 높이는 것 다 동의하는데, 이걸 대안이라고 제시하면... 여기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이미 디지털경제로의 전환 이전에도 이야기해왔으나 노-자간 역관계 때문에 안 되고 있던 건데.. 다시 공자님 말씀 들먹이면 뭐하나 싶은 생각이....

어쨌든 생산의 재배열과 국가의 적극적 분배 개입, 기업 통제를 종합해보자면  '공공성'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하지 않았지만 결국 '민주적 공공성'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 같음.

참, 눈에 띄는 잡상식 ㅋ '틈새의 신  god of the gaps'이라는 표현 너무 적절 ㅋㅋ 종교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신으로 정의한다는 의미 ㅋㅋ

 

#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

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정진
후마니타스, 2020

 

아빠가 건물 경비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순수한 독자의 마음만으로 읽을 수는 없었지.. ㅡ.ㅡ

일단 사회 구조고 뭐고.... 사람들이 참 못됐다는 생각!!!
스스로 응분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비대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통해서 나의 상대적 지위를 구축하려는 이들의 생생한 사연에 진정 환멸.....
마침 부산에서 노숙인, 이주민 단체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온 다음날이라, 인류에 대한 환멸이 한층 더 심했던 듯..  아오 정말 미친 새끼들... 욕도 아까움..

  •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 그들은 걸핏하면 나에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재를 입은 직원을 치료해주는 것은 그들이 알아야 하는 세상 물정이었다. 그들은 세상 물정이라는 말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버렸다.
  • 사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 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낙엽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입사 첫날, 나는 별 생각없이 미세먼지 마스크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더니 돌아섰다. 등 뒤로 혼잣말이 들렸다. "염병.. 다 늙은 경비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서..."
  •  추위를 견디다 못한 경비원들이 파카를 지급해달라고 좀 더 높은 사람에게 건의해봤다.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노인도 추위를 탑니까?"
  • 주치의는 나의 노동이 과로를 넘어 자해 행위였다며 나무랐다. 몸이 힘들면 자각 증상이 있게 마련이고 바로 대처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나와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한 것 뿐이었다. 자해가 아니라 살기 위한 자구노력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 젊은이들이 견뎌 내지 못하는 일과 기피하는 일은 고령자의 차지가 된다. 젊은이가 못 견디는 일을 노인들은 견대내기 때문이다. 견딜 만해서가 아니다.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 나도 젊을 때 같으면 이런 일을 견디지 못했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은 견뎌낸다. 육체적 고단함도, 정신적 학대도 나이를 먹으니 견딜 수 있게 됐다. 나이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나이가 들면 견뎌야 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고령자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더 주신 걸까. 그러나 견뎌야 할 것들은 참 많았다.
  • 그때는 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노동을 하는 줄알았고 그래서 삶이 더욱 고단했다. 그러나 이 책의 편집자를 만난 후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그 책에서 생명이 위협받는 엄혹한 여건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훨씬 힘들고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내 도동의 강도화 환경은 그대로지만 이런 깨달음 덕분에 이제는 덜 힘들다. 이 점이 더욱 감사하다.
  •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땅의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보고자 쓴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는 내가 빠져나온 (최소한 학력자본과 사회자본 측면에서) 그곳을 다시금 돌아보며,
겨우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나의 부모, 이웃들에 대한 연민, 사명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멸, 인생은 고해라는 현타 때문에 세상 하직하고 싶은 마음까지....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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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찜찜한 책

# 조너선 하이트, 그레그 루키아노프 [나쁜 교육] (2019)

 

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너선 하이트.그레그 루키아노프
프시케의숲, 2019

 

아..... 진짜 애~~~매 한 책...

미시적인 부분에서 많은 내용에 동의하는데, 왜 굳이 우익의 혐오와 차별 행동에 대한 비판보다 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소위) 진보주의자, 좌파에 대한 비판에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좀 이해하기 어려움. 대학이 진보주의자 일색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의 다양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걸 보면 과연 글쎄올시다...  한국 대학, 특히 교수진의 보수성이야 그렇다치고 미국도 우파 씽크탱크가 그렇게 차고 넘치고 시카고학파 같은 우파의 이데올로그가 그토록 강고한데 이건 너무 과도한 걱정 아닌가 말여? 파편화된 정체성 정치나 극단적(?) '정치적 올바름' 에 비판적인 것도 사실 아슬아슬....  예컨대 정체성의 정치가 보편적 인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black lives matter 에 all lives matter 로 물타기하는 세력, 페미니즘이 아니라 보편적 휴머니즘이어야 한다며 물타기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영 찜찜할 수밖에 없음 ㅜ.ㅜ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주장을 하는 방식, 그것의 정치적, 이성적 동기보다는 '심리적/정서적 반응'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학생들이 예민하거나 피해자주의에 물들어서라기보다, 분명히 개소리하는 인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과거라면 넘어갔을 문제들도 오늘의 높아진 인권감수성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많아졌기에 문제제기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할진데 말이지... 

당장 한국의 상황만 봐도, 학교에서의 성차별 발언, 성추행, 심지어 성폭력 사건들이 과연 요즘 아이들이 예민해서 문제 삼는 건가? 우리 때도 그게 뭔가 불편하고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아무개 선생 '변태'다 피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걸 설명할 안어가 없었을 뿐.... 요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소위 '한남 문학'도  이미 예전부터 이건 좀 아닌데, 여자가 무슨 남성 주인공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야, 맨날 겁탈이나 당하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하여 이현세 만화에 질색팔색했던 것이나, 일제강점기 남성 지식인 자의식 과잉 소설에 갸우뚱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다만 이걸 문제로 개념화하지 못했던 거지...   마치 예전에는 다 너그럽게 받아들였는데 요즘 애들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이런다고 본다면 진정한 지적 게으름이거나 너무 꽃길같은 안온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


그럼에도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동의하는 바가 적지 않았고, 나도 '안전주의' 문화에 대한 우려가 있기에 몹시 흥미롭게 읽기는 했음...  사실 이런 책은 혼자 읽을 게 아니라 술 마시고 같이 까대면서 읽어야 하는데 ㅋㅋ 아쉽네 그랴.. 예전에 스티븐 핑커 책 보면서도 같이 까댈 사람을 찾지 못해 한동안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주변 사람들보고 제발 읽고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을 같이 나누어보자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ㅋㅋ  

 

책의 내용을 좀 정리해보자면...
 
*

미국사회에 두루 퍼져나간 '대단한 비진실 great untruth'을 크게 세가지로 정리.

1) 유약함의 비진실: 죽지 않을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2) 감정적 추론의 비진실: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3) '우리 대 그들'의 비진실: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

이들은 여러 비진실 명제들 중에서도 고대(?)의 지혜와 모순되고, 현대 심리학 연구결과와 모순되며, 이 명제들을 끌어안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입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비진실'로 명명됨. 근데 바로 여기부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고대의 문헌이라고 다 진실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고통과 도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자원이나 레질리언스가 갖춰졌을 때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잖여. 건강불평등 업계에서 allostatic load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도 20년이 넘었는디.... 심지어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 요즘애들 고생 안해서 물러빠졌다는 지적은 자칫 "나 때는 보리밭에서 일하다 애만 쑥 잘 나았다고.. 내가 군대 있을 때는 말이야..." 이런 '라떼' 꼰대가 되기 십상 ㅡ.ㅡ  
하지만 두번째 '느낌'에 대한 신봉 (한국에서는 KIBUN ㅋㅋㅋ)이나 선/악 구도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

 

*

이 책, 그리고 책의 모티브가 된 아틀란틱 칼럼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대학들의 연사 초청과 관련한 폭력(?)사태와 교과 과정에서의 '트리거워닝' 요구 점증 때문... 


우익적 선동을 일삼는 논객들의 교내 초청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간혹 폭력사태로 진화하는 것에 대해, 저자들은 공론의 장에서 논박하는게 바람직하지 아예 물리적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 (대학은 무엇보다 '제도화된 부당성 증명'의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1991년 정원식 계란투척 사건으로 희대의 패륜 세대라고 싸잡아 욕을 먹었던 90년대 대학생 세대의 일원으로서 한 마디 보태보자면, 당시 전교조 탄압을 비롯한 문제적 인물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대해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음. 겨우 계란이나 던진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과 의사표현의 방법이었는데,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민주화 운동을 억압해온 정권이 학생들을 패륜 운운하며 이 사건을 부각시킨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어이 상실.. ㅡ.ㅡ


단,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학생들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좀 다른 이유 때문임. 학생들의 반대행위가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이나 실천이라기보다, 이것이 학생들의 '감정을 격발'시키거나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반대에 나서는 것이라는 점에 우려....  이러한 비판에는 나도 완전히 수긍함...  학생들이 교정 안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규범이지만, 미성년자도 아닌 대학생들이 그토록 '정서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지는 진정으로 모르겠음...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좀 후덜덜한 것이, 유혈낭자하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혐오와 차별이 그득한 고전문학을 배우거나 법학과에서 성폭력 사례를 포함한 판례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고 트리거워닝을 요구하거나 리딩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논쟁적 연사들의 발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입을 수있기 때문에 안전공간을 마련하는 것 등은 매우 황당.... 뭔 다들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들인가 ㅡ.ㅡ  (아마도 압권은 영국 초등학교에서 눈싸움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 눈 만지기를 금지시킨 거 ㅋㅋㅋ)  

이렇게 보호받다가 사회로 나가면 어찌 되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학 공간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대비를 하고 멧집을 키워서 사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사실 SNS 상에도 다큐멘터리나 영화에 대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트리거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트라우마는 회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여 ㅜ.ㅜ 그리고 현실 사회에서 언제까지 회피할 수 있남...  


안전주의는 다소 위험한 개념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함. 제일 안전하려면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 됨 ㅡ.ㅡ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

 

*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란 개념도 소개함. '매일의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언어적, 행동적, 환경적 차원의 멸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간에 유색인종을 상대로 적의, 경멸감, 혹은 부정적 뉘앙스의 인종적 혐하와 모욕을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개념이 지나치게 대중화하고 오만군데 적용되고 있다는데 문제의식. 그런데 사실 이것도 애매~한 것이... 실제로 노골적이지 않은 암묵적이고 일상화된 차별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 타인의 행동/발언 하나하나를 맥락으로부터 거세시키고 과잉해석하여 미세공격이라 비판하는 것도 과도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모두 예민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점. 한국사회에서 일상화된 온갖 차별적 발언들, 심지어 자기 딴에는 선의에서 내뱉었지만 편견 가득 담긴 발언에 짜증이 두 배로 났던 경험들은 다 있지 않나...

 

그런데 또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심하다 싶기는 함 ㅋ 소수자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누가 봐도) 선의에서 비롯된 발언들마저 미세공격으로 과잉 해석하고 소셜미디어 상에 앞뒤 맥락 없이 공개해서 (일명 '가해자 지목 문화') 더 나은 해결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사례는 너무 익숙함. 여기에 일종의 피해자의식 문화가 결합하는데, 이는 독립성과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가지며 세 가지 특징이 있음. 첫째 개인이나 집단은 사람들이 범하는 무례에 대해 고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둘째, 제3자에게 항의하는 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애쓴다... 이 세 가지는 당장 몇 개의 구체적 사례가 떠오를만큼 최근 몇 년간 사회단체들에서 극심한 갈등으로 비화되고, 문제제기한 당사자를 포함하여 소모적 상처만 입고 끝나는 (아니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음. 심지어 대학원생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목격. 왜들 그렇게 자신을 가장 취약한 약자이자 피해자로 포지셔닝하는지 가끔 어리둥절해질 때도 있음. 학생 때, 전공의 때 문제제기해서 해결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한번 맞붙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극심한 권력 불평등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마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말은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ㅋㅋㅋㅋ 여보시오들.. 나라고 갓 스무살 때 나이많은 남자 선배들, 전공의 때 교수들이 오냐오냐  내 이야기 잘 들어주어서 그런 거 아니라오 ㅋㅋㅋㅋ
하여간... 저자들의 비판에 동의하는 부분이 적잖으면서도 시종일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세대 후려치기, 리버럴 후려치기에 불안불안...  

 

*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저자들의 원인진단은...

  • 정치적 양득화와 정당 간 적개심의 심화 - 근데 이것도 한국이랑 좀 비슷한게, 계급적/사회경제적 이슈보다는 이념적, 규범적 이슈를 둘러싼 양극화라는 점에서 계급전쟁보다 '문화전쟁'에 가까운 것으로 보임, 미국 민주당이 뭐 그렇게 진보적이라고 ㅋㅋ
  • 십대의 불안증과 우울증 수준 증가 - 대학이 문제라기보다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단 일명 i 세대가 '소셜 미디어의 거대한 사회적, 상업적 실험 속에 푹 담긴 채 인격 형성에 중요한 십대 시절을 보냈던 첫번째 세대'라는 점이 단서 이들은 어른의 감시 없이 보낸 시간과 오프라인 생활 경험이 과거의 그 어느 세대보다 적었던 시대라는 진단...  븍히 여자 아이들이 이러한 상황에 취약하며 우울증도 남자아이들에 비해 급증, 어느 정도냐 하면 불안증으로 고충을 겪는다는 학생이 2016년이 되면 51%  한국도 과연 이럴까?
  • 양육 방식의 변화 - K 스타일의 입시교육 몰빵.. 특히 미국 중산층 엘리트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고, 그러니 미국의 명문대 입학생들에게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는
  • 자유놀이의 감소 - "사회적 상호작용이 성글어지면 이 세상은 더 많은 갈등과 폭력에 물드는 곳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보다 다른 누군가의 강압에 의지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가장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 이 부분은 세넷이 '무질서의 효용'에서 극도로 강조했던 부분으로, 한국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
  • 캠퍼스 관료주의의 성장 - "대학생들이 극단적 좌파 성향이거나 정치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학생을 소비자로 대하는 시장지향적 결정을 내리고, 학생들을 1년에 6만 달러 거금을 지불하고 수업과 각종 진미, 안락한 편의시설과 신나는 학교 생활을 즐기는 고격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동의하고, 결국 이 관료주의라는 것은 책임회피의 정치...
  • 정의에 대한 고조된 열정 - 글쎄올시다?? 이건 마치 한국 학생운동의 이념과잉과 비슷한 것 아닐까 싶은디...

 

*


자, 그럼 저자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바람이 불어오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더 거세게 타오르는 횃불이 되도록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에는 깊이 공감...
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처받지 않기를 선택하라. 그러면 상처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말라. 그러면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ㅋㅋㅋㅋ 뭐래, 원효대사 해골물이냐...

저자들은 1) 자기 힘으로 할 수있게 준비시킨다, 2) 감정적 추론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 3) '우리 대 그들'을 넘어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4) 학교가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같은 양육 방법을 안내하면서, 자신들의 전공답게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될 것으로 소개.


인지행동치료에서 말하는 왜곡된 자동사고 유형이란.. 1) 마음 읽기 2) 미래 점치기, 3) 재앙화, 4) 딱지 붙이기, 5) 긍정적인 면 깎아내리기, 6) 부정적 필터링, 7) 과도한 일반화, 8) 이분법적 사고, 9) 당위적 사고, 10) 자책, 11) 남 탓하기, 12) 불공평한 비교, 13) 후회 지향, 14_) 상황 가정, 15)  감정적 추론: 감정이 현실 해석을 이끌도록 내맡기는 것, 16) 부당성 증명을 못 받아들임, 17) 판단 위주 사고


내 주변에도 이런 종류의 인지왜곡 대장들 몇 명 있고, 트위터 세상에는 한 백만 명 있는 것 갈음 ㅋㅋ   이것이 과연 사회적 수준의 대응으로 적합할지는 의문이지만, 이들이 이러한 인지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개선될 것임은 분명해 보임 ㅋ

아우.. 누구 이 책좀 읽고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캠페인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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