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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기록을 남겨놓지 않으면, 그저 '읽었다'라는 위안 이외의 기억들은 자연스레 소멸되기 마련인지라, 항상 작은 메모라도 남겨 두려 하는데, 그게 또 은근 일이다....
사실 책 이야기 말고도 뭔가 쓰고 싶은 이야기거리는 엄청 많은데, 자꾸 순위에서 밀린다.
널뛰기하는 생각거리들을 늘어놓을 시간 혹은 여유조차 없는 삶이란 도대체 뭐지???
시간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말로, 입으로 다 풀어버려서인가? 그래도 말글이 아니라 손글로 정리하는 건 다른 건데 말이지....
#.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후마니타스, 2014 |
제목에 낚였음 ㅜ.ㅜ
초반부의 문제의식에는 완전 동감...
선택이라는 전제 (tyranny) 가 '자신을 개인적인 기획의 전적인 주인으로 여기면서 정작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들'에 대해서는 잊게 만든다는...
"선택이 개인적 삶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궁극의 수단으로 찬양될 때, 사회적 비판의 여지는 거의 사라지고 만다'는 지적이나, 긍정 이데올로기, '개인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느끼게 될 때, 또 긍정적 사고가 사회적 부정의의 결과로 겪는 불행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제시될 때 사회비판은 점점 더 자기비판으로 대체'된다는 지적, 또한 "경제학 영역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관념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선택 유형으로 미화'되었다는 지적에 크게 동감했으나....
허나!!!!
선택이 합리성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이디푸스 나오고, 히스테리 나오고, 라깡 출현... 아이쿠, 털썩...
이렇게 인간의 무의식과 심리적 근원의 세계로 돌아가서 선택이 그렇게 합리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뭐다?? 그럼 답이 없는 거잖아???
도대체 멀쩡한 성인들의 행동과 심리가 아동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온전히 설명된다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은 다 헛짓인 거여??? 이 정도 되면, 사주팔자론이나 유전자결정론과 뭐가 다른 것이여?
사실 후마니타스에서 출판된 책이라 믿고 선택한 것도 있었는데, 전해 듣자니 책은 나름 인기가 있었다고.... ㅜ.ㅜ
도대체가 검정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후적 설명에만 충실한 정신분석학이 의학 이외 영역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음
#.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사계절, 2013 |
딱히 나쁜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내가 강퍅해진 건지.. 사족이 지나치다는 느낌적 느낌
"상식과 상식이 서로 견제할 때 몰상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양식은 상식 앞에서 무력하다.." 아... ㅜ.ㅜ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지적은 앞의 책보다 통렬.
조종된 "군중을 비난하느라 군중을 기획하고 있는 시틀러나 무솔리니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또다른 노리개로 전락하는 셈"이라는 지적에 깊은 동감하면서 "공감은 동정이라는 따뜻한 감정으로 냉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는 거리를 둔다"는 지적에 공감 ㅋㅋ
그런데, 여기에도 역시 예상치 못한 폭탄이 있었으니, 생뚱맞게 "집단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
오이디푸스를 조용히 잠들어 있게 놔두자... 아.... ㅡ.ㅡ
#. 킴 스탠리 로빈슨 [쌀과 소금의 시대]
쌀과 소금의 시대 1 킴 스탠리 로빈슨 열림원, 2007 |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K 기자와 1년만에 만나서 밥을 먹고 헤어지는 길에 건널목 앞에서 문득 추천해준 책 ㅋㅋㅋㅋ
사실 필립 K 딕의 [The man in the High Castle]에 실망해서, 동양이 역사의 주인공되는 서양 작가의 대안역사 소설에 거부 반응이 있었는디....워메..... 막 빠져들었음...
작가의 그 유명한 화성 삼부작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찾아보니 그는 필립 딕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여 박사 논문을 썼다고... 후덜덜......
이건 그냥 그저그런 오리엔탈리즘이 절대 아님. [티벳 사자의 서]를 기본 프레임으로 하여, 이성과 인간해방, 페미니즘, 생태주의를 이음새 없이 훌륭하게 엮어내고 있음. 불교,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상당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음... 사실 내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오랜 '문화'에 물들어 있듯 우리도 불교 문화에 알게 모르게 침잠되어 있고 그래서 서구인들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설픈 흉내내기를 보면 짜증이 울컥 ㅋㅋ The man in the high castle 이나 어슐러 르 귄의 [어둠 속의 왼손]에서도 나는 음양이론 나오는 게 제일 싫었다고......
그런데 이 책의 첫 머리에 바르도 장면이 등장했을 때, 앗 깜딱이야 하면서 정신이 번쩍....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나만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느낌.
비극으로 끝나는 개인의 삶들이 모여서 사회의 희극으로 이어지고, 천천히, 정말 천천히,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모습이란, 뭔가 묵직한 감동.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가자, 가자 피안으로'라는 첫 장의 메시지처럼 2보 전진과 1보 후퇴를 반복하며 어쨌든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
기독교나 유대교가 거의 사라지고, 이슬람조차 내부로부터의 붕괴해가면서 유일신 종교가 사라져가는 화목한 세상... 과학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 역사학자들이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단서를 주는 세상......
정말 이런 세상에 살고 싶구나... 현재가 이렇지 않으니까 이것이 '대안' 역사 소설이겠지만... ㅜ.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페미니스트들, 앎의 환희가 무엇인지, 그 책임은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달은 과학자들, 이 허구의 인물들 앞에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나는 변태인가???
# 듀나 [아직은 신이 아니야]
아직은 신이 아니야 - 듀나 연작 소설집 이영수(듀나) 창비, 2013 |
많은 과학소설들이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 숙고를 색다른 방식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고는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나같은 독자들이 고도의 맥락성이 있는 서구 과학 소설들을 100% 즐기기란 어렵다고....
국내 SF 작가들의 작품은 바로 이런 면에서 무언가 속속들이 채워진다는 느낌을 주곤 하는데...
듀나의 작품은 단순히 국적이 같아서가 아니라, 짜임새와 개연성 높은 상상력이 촘촘하게 자리한 가운데
언뜻언뜻 드러나는 장소와 인물과, 사건들의 미묘한 익숙함과 뒤틀림이 완전 매력.
왜 듀나가 국내 최고의 SF 작가로 인정받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법한 좋은 작품집 (사실, 언어적 제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서구의 단편들보다 훌륭한 작품들이 많음). 다만, 미스테리는 왜 이런 책들이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느냐 하는 점... ㅡ.ㅡ
# 듀나 [면세구역]
면세구역 이영수(듀나) 북스토리, 2013 |
단편 모음.
경계없는 상상력의 폭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 특히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의 젠더 밸런스 매우 호감!!!!
여러 글들 중에서도 "기녀기담" 특히 좋았음. 엄청 서늘하고 아름다운 초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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