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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다는 것

한 살 씩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지혜가 급속도로 늘어난다거나 삶의 혜안이 눈부신 아우라로 비추는 일이란 좀처럼 기대도 안 했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나이듦의 가장 분명한 징후는 죽음이 점차 가깝고 익숙한 일이 되어가는 것인듯 싶다.

 

 

후배 J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익히 예상은 했지만 그 젊음이 안타까워서 슬픔보다는 이게 다 뭔가 싶은 허망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작년 2014년은, 많은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으로 기억된 한 해였다.

 

새해를 맞이할 때만 해도, 꿈에도 그리던 파타고니아로의 여행이 가장 한 해의 강렬한 기억이 될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소용돌이...

 

이별의 실감은 일상 중에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아직도 잠정적인 것만 같다.

그냥 오랜만에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어제 만났던 양 수다를 떨수 있을 것 같다.

장과 공유했던 오랜 시간 덕분에 여기저기 남아있는 흔적들 ㅡ 이란에서 사다준 작은 접시, 따가운 남미의 태양에 대비하라고 골라준 선글라스, 대리국에서 새겨다 준 책도장...  심지어 출장 길에 사다준 실론티는 아직 뜯지도 않은 채 선반에 놓여 있다.

 

중환자실로 내려가기 직전, 장이 "나 이렇게 죽는 거니?"라고 물었다. 내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피식 웃어줬다. 드라마 너무 많이 봤다고....  그 전날 밤, 옆자리 환자의 임종에 괴로워하는 문자에,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뭔 위로 같지도 않은 시답잖은 답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모두 거짓말이 된 셈이다. 그렇게 중환자실에 내려가서, 하루 여기서 푹 쉬고 다시 올라가자, 라고 이야기한 게 마지막 대화였다. 그녀가 사그라지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고 무수히 되뇌었지만, 결코 괘념치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주에는 선배 형 부인이 돌아가셔서 광주로 문상을 다녀왔다. 환자 본인이나 돌보는 가족들이나 모두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낸 듯 했다. 형은 생각보다 차분했고, 밥을 먹으면서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형도 최소한 그에게는 스스로 존엄하게 자신의 삶을 종결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종결할 만한 자격"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나도, 형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부고 연락을 받고, 지인들에게 이를 다시 알리고,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상심했을 선배 형을 생각하고, 또 죽음이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재생되는 장과의 마지막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나이든다는 것이란 이 모든 일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정신의 누더기 상태도 좀 더 빠르게 회복하거나, 혹은 그 누더기 자체에 익숙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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