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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세넷의 책들

읽은지 몇 달이 지났는데, 이러다가 메모해놓은 에버노트까지 날아갈까봐 후딱 옮겨놓는다.

요즘 뭐하고 다니길래 이리도 정신이 없다냐..... ㅜ.ㅜ

 

# 리처드 세넷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리차드 세넷
문예출판사, 2004

 

 

어쩌면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인 답을 원했던 건지도...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시시콜콜한 답변 따위는 주지 않았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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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기억해둘만한 문장들이 있다.

"나는 뒤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는 않았지만, 내가 느끼는 자긍심 자체가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 어쩌면 이건 내 이야기이도 하고, 그래서 리차드 세넷을 '우리편'이라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선에는 상처를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연민은 경멸을 낳을 수 있으며, 동정심은 불평등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성과 연대가 필요한데, 불평등사회야말로 이것을 가장 어렵게 만든다. 어쩌면 불평등의 가장 큰 문제는 물질적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우애와 연대의 가능성을 침식하고 민주주의를 왜곡하여, 불평등을 뿌리부터 개선할 수 있는 바로 그 토대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삶에서 상호성은 표현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상호성은 연기되고 연주되어야만 한다."  내가 주변 사람, 특히 암묵지로서 혼자 기대하고 또 혼자 실망하는 이들에게 항상 주장하던 내용이다....  인간이 모두 점쟁이도 아닌데, 표현하지 않는 것까지 어찌 이해해달라는 것인가 말이지... 우애와 연대에서도 아마도 이는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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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책들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주장이기도 한데, "잠재적인 재능은 재주만이 아니라 동기와 의지의 문제로 뒤얽힌 개인적인 평가에 가까운 것. 바로 이러한 차이가 의미심장한 불평등을 낳는다"고 다시금 지적한다. 구현되지 않은 재능을 바탕으로 인간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예와 기능을 토대로 존중을 구축하고, 여기에 타인도 나와 같은 자율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게 그나마 이 불평등 사회에서 상호 존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이야기로 정리하면 될까?

그런데, 그 기예나 기능, 이룩한 업적이라는 것이 '다양성'의 이름으로 포괄하기에는 그것 자체에 위계가 있다는 것이 함정.. ㅜ.ㅜ

또한 "숙련노동이라 지칭할 만한 수양과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한 시기심이 아니라 내적 충만으로 기울어진다"는 것도 동의가 안 되염... ㅡ.ㅡ 저자 말처럼 숙련 기능을 가진 이들이 불평등한 세계에서 자기 존중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그렇게 되기엔, 세상이 지금 너무너무너무 불평등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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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개인적인 돌봄이 사람들이 타인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경우에 상처룰 주기 쉽다는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곤궁에 대한 판단과 반응에서 인간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손목 치료 경험을 이야기하며 의사와 자신의 관계가 비인격적 돌봄이었다면 싫었을 것이라고 함. 하지만 손을 다친 것에 대한 돌봄과 빈곤에 대한 돌봄이 같은 성격을 가져야 하나? 손을 다친 것에는 '도덕적 판단'이 결부되지 않잖여.. 그것 때문에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업적주의로 잘 포장된 사회의 빈곤에는 엄연한 도덕적 판단이 결부되어 있다고...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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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세넷 할배의 의견에 동의는 하지만, 현실의 불평등이 할배가 보는 것보다 더 암울해서 이런 제안 정도로는 도저히 인간 존중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 눈물 포인트....

 

#. 리처드 세넷 [무질서의 효용]

 

무질서의 효용 -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
무질서의 효용 -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
리차드 세넷
다시봄, 2014

 


도대체 도서관 새로 들어온 책에 밑줄 그어 가면서 읽는 인간들의 정신세계는 무엇인가, 깊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 책... ㅡ.ㅡ
1960년대 혁명적 변화의 시기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던 저자가 1970년, 약관 스물 다섯살에 집필한 책..... 누구는 20대에 이런 책도 쓴다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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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새롭게 부상해가던 교외 중산층 가족이 추구하는 것, 혹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결국은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해지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진단, 이는 청소년이 성인으로 가는 과정에 거쳐야 하는 다양한 경험, 특히나 밀집한 도시에서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으로 갖게 되는 삶의 다양한 접점, 그를 통해 경험하는 갈등 속에서 '성장'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제기함.

갈등 경험의 본질이란 "갈등이 생존에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적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점과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고려한다는 점".. 이렇다면 갈등의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성장할수 있겠지....

혁명의 시기를 보낸 풍요로운 백인 젊은이들이 부모들의 보호막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현상을 관찰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싹텄다고 함. 이게 벌써 40년도 더 된 책인데, 한국 사회의 중산층 '가족' 문화와 지역 공동체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닥 커다란 위화감이 없음.  

다만.... 저자는 (그것이 젊은이 고유의 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사회의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는 생각이....  이렇게 더 망가지고, 미국 교외에서 벌어지던 그러한 현상이 심지어 세계화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겠지....ㅜ.ㅜ

 

전반적으로... 알러지에 대한 위생가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 너무 순수하고 너무 안전한 세계 속에서, 좀처럼 갈등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성장한 이들, 혹은 공동체들은 순수의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것에 대해  끊임없는 신경증에 시달리며, 특히나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갈등에 직면했을 때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심각한 폭력으로 대처한다는 것....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 -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과 설명 찾기와, 앞으로 이렇게 하자는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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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진단과 설명이라면..... '순수한' 정체성의 등장과 이를 추구하는 인간발달의 독특한 시기로서 청소년기에 대한 설명, 그리고 다시 '순수한 공동체'라는 신화가 어떻게 나타났으며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 탐구. 여기에서 특히 '풍요'의 역할에 대해 탐색... 그리고, 변화된 도시 (즉 교외로의 탈주)가 어떻게 이러한 순수성의 열망으로부터 촉발되고 혹은 이를 점화시켰는지 조곤조곤 살펴봄....


혁명이고 뭐고 "정체성을 순수화하려는 욕망 속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숨어있다"고 지적했는데, 동질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안전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은 요즘은 뭐 숨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노골적... "뚜렷하고 명료한 자아상과 세계 속 자신의 자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위협이나 고통스러운 불화를 피해야"하며, "불화보다 이미 아는 것들과의 조화가 더 현실적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경험은 순수화"됨.
"알지 못해서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삶의 경험들이 등장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일", 즉 현재의 (당시의) 청소년들이 자발적 제한을 통해 정체성을 순수화하려는 욕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왜 이렇게 방어적이 되어가는가 의문을 가짐.

"능동적으로 위협을 경험하지 않고 경험의 의미만 취하려는 (식의 청소년기 발달은) 일차적인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특징이 아니"며, "이러한 왜곡된 힘은 풍요로운 공동체가 억압을 조직하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남. "풍요로운 현대 도시 공동체의 사회 구조야말로 청소년기의 이런  회피 양상을 연장할 뿐 아니라 성인의 삶도 똑같은 양상으로 묶어두기 위해 개속해서 작용하기 때문." "사람들은 풍요로운 공동체 생활에서 일관성을 향한 욕망을 체계화함으로써 자신에게 자발적인 노예상태를 강요하는 수단을 발견"했는데, (다행히도) 예민한 청년들이 바로 이런 노예상태에서 도망가고자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된 것이라고 진단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플로리언 즈나니에츠키는 현재의 지역공동체가 "경험행동보다는 의지행동으로 굳어지는 공동체"라는 표현했다는데 너무 적절함. 교외 중산층 공동체는 무슨 공통의 경험이 있어서라기보다, 같아지려는 그 의지 자체로 유지되는 공동체... 물론 부동산과 학군으로 특징지워지는 동질적 계급 구성과 그 영속화에 대한 의지, 구별짓기 등 다양한 설명이 추가될 수 있겠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고 공통의 경험도 없는 이들이 같아지려는 의지로 모였다는 것 자체는 참 신비로운 현상임에 틀림없음. 뭔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 같다는 느낌적 느낌.... 아무런 실체는 없지만, 다들 그렇게 믿고,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믿다보니 실체가 생겨남 ㅡ.ㅡ
이런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유대를 통한 존엄'이라는 신화를 갖게 마련인데, 이를 통해 오히려 공동체 생활에 실제로 참여가 줄어들고, 일탈된 사람들을 억압하며, 예상치 못한 문제나 불화가 발생할 때 특히 외부자에 대해서 폭력적인 대결 방식이 나타남.


이러한 신화를 구축해 가는데 풍요의 역할이 중요... 예전에는 누구나 서로에게 의존해야 생존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풍요를 통해서 의존해야 하거나 싫어도 만나거나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사라짐 ㅜ.ㅜ 그리까 공허한 자의식적 유대 공동체가 형성되지... ㅡ.ㅡ

저자는 당시의 청년 세대가 "이 풍요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가게될 첫 세대라고 했지만.... 오늘날의 우리 사회 또한 이 질문에 아직 답을 못하고 있음. 심지어 지금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 '풍요' 그 자체가 다시 사라질 위기에 있는지라....

특히 세넷은 '성장'과 관련하여 가족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교외 중산층의 '강화된 intense 가족 생활'은 두 가지 특징을 가졌다고 진단. 첫째,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사회 세계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상호작용의 소우주로 간주... 하지만 그럴리가 없잖아!!! 둘째, 가족 구성원들이 평등한 수준으로 변형된다는 것 (그래서 부모와 자녀가 친구처럼 지내지 ㅋㅋ), 존엄은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데 있다고 간주하며, 가족끼리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없다고 생각.... 이러한 괴이한 유대감은 '모호한 것과 고통스러운 미지의 존재를 방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생겨난다고 지적.....

이러한 강화구조 때문에 가족이 맞닥뜨릴 경험의 다양성이 제한되며, 가족 갈등은 '갈등에 대한 죄책감 증후군'으로 자리잡음. 사회질서를 위해 가정에서는 다양성과 뿌리 깊은 불화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바람 ㅋㅋㅋ 가족 질서를 위해 가족 구성원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탈과 분열을 억누르려는 시도라니, 오늘날 한국 중산층 가족을 본다면 세넷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ㅋㅋ

 

부모가 가정이나 학교 외부 사회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고 차단해야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로 생겨나는 가족 생활은 분명 자연스럽지 않고 '강요당한 친밀성'일 것이라는 진단에 완전 동의... 게다가 '오늘날의 청교도들은 두려움, 즉 알지 못하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억압한다. 강화된 가족은 이런 두려움을 유지하는 왕도'라는 진단에 완전 격하게 동감....


세넷의 주장은 '친밀한 작은 규모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라 작은 규모의 다양한 중심점들이 사라진 것'이 문제라는 것...  도시의 성장과 함께 친밀성이 양극화되면서 '개인은 새롭거나 알지 못하는 사회관계를 스스로 배척하는 강력한 도덕적 수단'을 얻게 된 것임. 참여 구조의 관료화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음. 정치조직이 인간적인 특징을 잃고 관료화가 되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효하다고 믿은 정치적 영향력의 유일한 통로로부터 고립. 소위 '소외된 유권자'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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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반복적으로 낭만적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훌쩍 지나쳐버린 그 당시의 환경을 오늘날, 그것도 긍정적 측면만을 되살릴 수 있는지는 의문일세..... 

그는 '인간적이기 위해 도구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면서, "인간 발달의 본질은 낡은 틀이 무너질 때, 즉 오래된 부분들이 이제 새로운 유기체의 요구를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주장. 그리하야... 새로운 아나키즘을 주창....

이 때의 아나키란.....
"도시가 새로운 성인기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장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 - 한 때 도시의 특징이었던 다양한 사회적 접촉점이 풍요에 적합한 조건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다양성과 무질서를 경험하기 위한 몇몇 통로가 사람들에게 다시 열릴 것이기 때문에... 도시 생활의 위대한 약속은 도시 경계 안에서 가능한 새로운 종류의 혼란, 즉 사람들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더 풍부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아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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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이런 풍요가 얼마나 취약한가가 아니라 풍요를 활용하는 방법이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세넷은 풍요가 가진 사회적 가능성을 낙관함. 즉, '경제가 가진 물질적 토대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관련된 당사자들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비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ㅡ.ㅡ
그럼 이러한 물질적 토대는 어디에서 가져오냐고? (베트남) 전쟁에 쓸 돈 가져오면 되지 ㅋㅋㅋ "아주 간단한 문제"라고 확언해버림... 물론 틀린 소리는 아님 ㅋㅋ
그리고 과연 지금과 같은 경향이 계속될까라는 질문에도 그렇지는 않을 거야라고 판단..  갈등 경험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사람들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도 당근... 이라고 대답... "아마도 현대 사회의 특징인 '지루함'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 부분이야말로 이 책의 저자가 20대라는 점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냄 ㅋㅋㅋㅋ

그런데 젊은이의 대책없는 낙관이라고 오구오구 하면서 책을 덮기엔 현실이 너무 시궁창이라 한숨....

 

 

# 리차드 세넷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문예출판사, 2002

 

 

뉴캐피털리즘을 비롯한 이전 책들과 역시 일관된 주장.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급속히 변화된 노동과정, 고용형태가 단순히 일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어놓았고, 그 핵심에는 '시간'의 본질이 변화했다는 점을 지적.

"사람들이 직장 밖 정서생활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은 첨단 데이터 송신이나 전세계 증권 시장, 자유 무역이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시간대. '장기(long-term'는 안 돼'라는 표어는 계속 움직이되 한곳에 정신을 팔지 말고 희생하지도 말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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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업과 일자리의 어원을 설명해주는데,

직업 (career) = 마차가 다니는 길, 즉 평생 한 우물을 판다는 의미
일자리 (job) = 짐수레로 실어 나를 수 있는 한 덩어리나 한 조각의 물건...

유연성이야말로 커리어의 길을 막아버리고 job 의 고색창연한 의미를 오늘에 되살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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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약 30년, 강력한 노동조합과 복지국가, 대규모 기업이 작동했던 그 시기가 소위 '안정적 과거 (stable past)'라는 세넷의 진단을 놓고 보자면... 오히려 그 시기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이상 시기가 아닌가 싶음. 현재의 모습이 정상이고.... ㅡ.ㅡ 사실 한국사회에서 안정된 고용이라는 것이, 일부 대기업과 공무원들 빼고 근대 이래 존재한 적이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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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조직에서의 단기적 시간 개념 틀은 '비공식적 신뢰'가 성숙될 여유를 주지 않음. 일터에서의 신뢰, 충성, 상호 헌신 같은 가치들은 개나 줘버리자고... ㅡ.ㅡ  '단기 자본주의'는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가능한 자아의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을 훼손시킴.. ㅜ.ㅜ
"방황하는 경험과 고정 불변의 의지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실종되는 것은 그의 행위에 계통을 세워줄 수 있는, 사건의 전말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명은 뭔가 엄청나게 슬픈 진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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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형태의 유연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의 세 가지 구성 요소 - 첫째, 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둘째 생산의 유연 전문화, 셋째 중앙 집중이없는 힘의 결집

"새로운 질서는 기술 축적에 필요한 일정한 시간과 연륜이 개인에게 직장 내에서의 입지 확보와 권리를 부여해준다고 보지 않으며, 대신에 실질적인 면에 가치를 둔다. 경험의 시간적 길이를 중시하는 것은 연장자라는 권리로 인해 조직 체제를 경직시켰던 옛 관료주의적 악습의 한 가지라고 보며, 현재의 능력을 중시하는 체제를 선호"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구 관료주의도 비판해야 하고, 새로운 유연성도 비판해야 되는 몹시도 곤란한 지점에 서 있는 게지...ㅡ.ㅡ


"노동윤리는 기다리는 훈련을 쌓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정된 제도적 토대에서만 가능. 만족에 대한 자제력도 급속히 변하는 제도 속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함"
"팀에 대해 SCANS 이 제시한 이미지는 한 마을에 산다기보다 특수한 당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소집된 사람들의 모임" -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으며, 단기간의 불안정 노동이 갖는 사회적 관계망과 정신건강에 대한 탐구가 필요해보임 ㅡ.ㅡ

 

"사회적 결속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 감정에서 시작. (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찬양하는 말들을 보면 의존성은 수치스러운 조건. 염격한 관료주의적 계급에 대한 공격은 의존성에서 벗어나 구조적으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며, 리스크의 감행은 주어진 것에 대해 복종하기보다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인다는 의미...." 바로 이러한 의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부터 복지 국가에 대한 공격이 힘을 얻음. 복지 수혜자들은 사회 기생충이라고 의심하고 무시하게 됨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된다" 철학자 폴 리퀘르의 이야기. 신뢰가 없더라도 큰 문제가 없이 잘 굴러가는 현대의 경제 체제에서, 즉 신뢰를 필요로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무관심이 확산. 그리고 사람들이 일회용품처럼 취급받는 조직의 구조 조정을 통해서도 무관심이 확산. 그러한 관행들은 인간으로서의 중요성, 즉 남에게 필요한 존재ㄹ는 의미를 명백하고도 잔혹하게 감소"시킨다는 진단은 얼마나 정확한가 말이지...

 

"다만, 나는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깟 정통성이야 개나 줘버리라고,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세인 것 같아서 이것도...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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