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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잡스러운 독서 편력을 보여주는, 도대체 제목을 정할 수 없는 책 읽기 메모...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도전!

 

#. Eduardo Galeno [Open veins of Latin America]

 

Product Details

 
 
1.
저자도 돌아가셨고, 뒤늦게 이 책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우고 차베스도 세상을 떠났다.
책의 추천사는 이사벨 아옌데가 썼다. 그녀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급한 망명길에 오르면서 두 권의 책을 챙겼는데, 그 한권이 네루다의 시집, 또 다른 한권이 Las Venas Abertas de America Latina 라고 했다. 
이 책이 쓰인 것이 1973년, 갈레아노는 망명 중이었고, 이사벨 아옌데가 추천사를 쓴 것이 78년, 여전히 칠레에 어두운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서슬 퍼런 유신독재와 개발/발전의 레토릭이 울려퍼지던 시절이기도 하다.
 
2.
책이 처음 출판된 7년 후, 저자는 후기를 추가했다. 거기에는 출판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책이 어떻게 읽혔는지 작가가 알게 된 이야기들이 일부 소개되어 있다. 보고타의 버스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소녀는 이내 일어나 모든 승객들에게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었고, 피노체트의 총칼을 피해 산티아고를 탈출한 여성 망명자는 아기 기저귀 보따리에 이 책을 숨겼다고 했다. 책을 살 돈이 없었던 대학생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서점들을 일주일동안 전전하며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했다.
알 것만 같았다.이 책이 왜 그토록 사랑받고 오래, 널리 읽힐 수 있었는지...
아마도 명료하고 생생한 글솜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교과서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 도저한 고통과 투쟁의 역사,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역사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갈레아노는 "I suspect that boredom can thus often serve to sanctify the established order, confirming that knowledge is a privilege of the elite" 라고 쓰면서 깊이 있지만, 쉬운 글쓰기를 강조했다....
 
 
3.
정말, 자원자원이 많았던 원치 않은 축복으로 말미암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겪어야했던 장구한 500년 수탈의 역사와, 역시 내내 그치지 않았던 숭고했던,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실패했던 이들의 역사를 지켜보는 건 쉽사리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2005년 무렵에만 읽었어도 하지만 이제는 좀 괜찮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텐데.... 지금 또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린 라틴아메리카 모습을 생각하면... 아이고... ㅜ.ㅜ 그저 곡소리가 날뿐이다....
책의 제목이 그냥 "상징"에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실제로 1970년대 후반 라틴아메리카 독재국가들이 국민의 피를 미국에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황당하기 그지 없다. 예컨대 니카라과 뱀파이어 회사 이름  Plasmaferesis....쿠바 망명자 사업체인 Hemo Caribbean 은 아이티 시민들에게 1리터에 3달러 주고 피를 사서, 미국 시장에 25달러씩 주고 팔았다고... ㅡ.ㅡ 독재국가들은 가끔씩 보면 참 창조적이긴 하다... 상상도 못할 짓들을 많이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4.
돌아보면, (나만의 모자람이 아니라 세대적 특성이기도 한 것 같은데) 국제주의적 관점이 참으로 부족했었다. 어쩌면 라틴아메리카처럼 장기간의 식민지 경험과 세계경제체제로의 밀접한 통합이 적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80년대, 90년대까지도 한국 지식사회의 우물안 개구리 상황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냉전에 눈이 멀고, 해외와 교유할 수 있는 지리적, 물리적 조건이 척박했다고는 하지만.... 요즘에도 여전히 국제 정세에 그닥 관심들이 없는 것을 보면 딱히 조건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하여간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의 상황과 당시의 인식세계를 돌아보는 것은 흥미롭고도 쓸쓸한 경험이었다. 이미 70년대에,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국제 정치경제의 흐름으로 분석해내고 있는데, 그 때 한국사회는......
 
5.
또한 '개발'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Ivan Illich 가 [Medical Nemesis] 를 출판한 것이 1975년이다.  과도한 의료화와 개인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물론 동시대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적용되길 기대했던 건 아니겠지만, 당장 치료약이 없어서 별것 아닌 질병에 목숨을 잃고 비옥하고 광활한 자연이 소수 지주들에 의해 그저 버려지는 '친환경적' 관리에 속을 태웠을 저개발국가 지식인에게 이 책에 담긴 주장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산업개발을 추동해가는 '산업자본가' 가 없는 곳, 지주들이 오로지 지대추구에 골몰하면서 과거의 방식으로 가축을 방목하고 자연자원을 '저개발'하는 곳, 서민들을 비싼 가격에 공산품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변변한 '노동시장'이 아예 성립조차 하지 않는 곳에 발딛고 서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받아들였을 의미 말이다.....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토록 맛나게 먹었던 스테이크는 이런 우발적인 친환경 방목 목축의 결과물 ㅜ.ㅜ)  
"Underdevelopment isn't a stage of development, but it's consequence. Latin America's underdevelopment arises from external development, and continues to feed it."
 
 
6.
볼리비아 여행을 꿈꾸며 아마존에서 안내책자 검색했을 때, 론리플래닛이나 러프가이드를 구매한 독자들이 함께 구매한 상품에 이 책이 떡하니 게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구의 미래가 마냥 어둡지는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드넓고 황량했던 파타고니아와 불평등으로 찢어져가고 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생각이 많이 났다. 볼리비아와 우르과이, 파라과이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새록새록 (하지만 지카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 ㅡ.ㅡ)  만일, 그곳 땅을 밟게 된다면, 다행히도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광에 광년이처럼 날뛰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Potosi 의 원혼들에게도 조금은 덜 미안할 것만 같다.
 
7.
 
History is a prophet who looks back: because of what was and agaist what was, it announces what will be.
 
There are those who believe that destiny rests on the knees of the gods; but the truth is that it confronts the conscience of man with a burning challenge.
 
 
#, 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민음사 2015)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민음사, 2015

 

 
책을 소개해 준 K 기자를 개인 북가이드로 고용하고 싶음.. 취향에 딱...
 
 
읽는 내내, 특히나 후반부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현실에서 조우할 즈음부터, 무너지는 듯한 아련함과 안타까움에 사로잡힌 건, 내가 이 사건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거대한 종말을 모두 알고 있는 관객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상황의 한 복판에서 이 소년소녀는 얼마나 두렵고 혼란스러웠을까?
재능있고, 현명하고, 또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알았던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 소년소년들은 그 역사의 광기 속에서 얼마나 사라졌던 것일까? 이렇게 소설 속에서나 재구성되어 기억되는 삶이란... 
 
베르너는 그냥 과학을 좋아했을 뿐이지만 침략은 인도하는 '첨단' 가이드가 되었고, 새를 사랑한 몽상가, 인간의  존엄함을 사보타지로 실현하고자 했던 프레데리크의 인생은 전선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꺾였고, 월광 소나타를 사랑했던 우직한 폴크하이머의 쓸쓸한 인생은 어쩔 거냐고.... 남들이 다 한다고 너도 할 거냐며 쏘아붙이던 베르너의 여동생 유타의 신산한 삶...
 
용감하고 현명한 딸을 키워낸 책임감 강한 열쇠공 마리로르의 아버지, 유폐당한 삶에서 마리로르와 함께 인간해방 운동에 뛰어든 노인네 에티엔, 용감하게 먼저 나서고 그를 설득한 마네크 부인... 그리고 마리로르....  세상에 침착하고 현명하고 용감한 소녀..... 모름지기 과학소설을, 쥘 베른의 소설을 탐독하고 빠져들 수 있는 소녀라면 그래야 한다고...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마음 속으로 소리내어 응원했는지!
 
 
정말 소설같이, 베르너가 어릴 적 고물라디오에서 듣던 방송의 주인공을 만나고, 누가 듣고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애청자'를 마리로르가 만나고, 그 짧고도 위험했던 순간들이 그냥 헐리우드 영화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베르너가 기적같이 살아있고, 후일 마리로르에게 직접 '집'을 돌려주러 찾아왔다면, 베르너를 만나고는 프레데리크의 의식이 '번쩍' 돌아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고,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겠지....
오히려 질문노트도, 생말로 거리 모형도, 프레데리크에게 주려고 찢은 조류도감 한 페이지를 담은 편지도 결코 마땅한 수신인들에게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더 그럴듯한 현실. 
 
여자아이들이 과학소설을 읽고, 라디오로 다윈의 비글호 탐험 이야기를 들으며 빠져들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이야기, 나이든 여자들이 비밀스럽고 위험한 독립운동에 나서고...
사실 현실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좀처럼 예술작품들에서 등장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서사에 강력한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꿈과 재능,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파괴하는 전쟁과 전체주의적 열정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둘 것인지, 아니면... 그 억압과 절망 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음악, 과학, 소설, 자연의 힘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는, 회고 시점의 기분에 따라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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