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상반된 환기의 방식

지금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방식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무한도전 토토가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여기가 과거에 비해 그토록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90년대는 정규직 일자리가 젖과 꿀처럼 넘쳐 흐르고, 대중문화는 백가쟁명의 꽃을 피웠던 태평성대였더란 말이지.....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노랫말이 주는 통찰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사람들은 어쩌면 실재하지 않았던 어떤 완벽한 과거의 재현을 통해 오늘/여기 삶의 신산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다가오지 않은, 혹은 성취해야 할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비추어 오늘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회라면, 참 많이 슬픈 곳이 아닐까 싶다.

 

새해를 시작했던 책 또한, 지금/여기를 돌아보게 했다. 동시대, 다른 공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은유로 가득찬 시간의 목소리를 통해서.

 

#.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거리로 나온 넷우익> 후마니타스 2013

 

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후마니타스, 2013

 

 

이 책은 일본 사회의 평범하고 수줍음 많은 개인들이 어떻게 (전통 우익도 혀를 내두를만큼의 행동력을 가진) 망나니 우익이 되었는지를 분석한 사회심리적 탐구이자,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광범위한 대중의 우경화/보수화 경향의 보여주는 사회학적 분석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이들 일본 넷우익의 개인적 특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적인 사회적, 경제적 박탈과 지지망이 되어줄 사회적 관계망의 취약함. 이들 개개인은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있는 듯 없는 듯 순한 사람들, '유사가족' 혹은 언제라도 나와 함께 있어줄 그 누군가를 기대하는 외로운 사람들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갈망이 표출되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엘리트로 생각하면서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은 자신의 활동을 '계급투쟁'으로 지칭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들이 생각하는 특권층이란 진짜 특권층이라기보다 공격하기에 좋은 취약집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의하지 않지만, 이건 사실 유별난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 위계에서 열세에 처한 이들이 보이는 스트레스 반응 중 전형적인 displacement에 해당한다. 전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독일의 네오나치와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비롯해 북유럽에까지 기세를 떨치고 있는 인종주의 운동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당연히 한국의 일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광주민주화 운동세력, 남성들을 착취하는 여성, 자식 팔아 유세한다는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비난을 관통하는 것은, 사실 억울함 아닌가 말이다. 이들이 받아야 할 '응분의 몫'에 비해 지나친 혜택을 누리고 있어서, 자신들이 손해 본다는 생각.... 이 억울함은 <우리는 왜 차별에 찬성하는가>에 실린 젊은 대학생들의 사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과격하고 (우익마저 고개를 내저을만한) 파렴치한 행동 그 자체라기보다, 이들의 놀라운 자발성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일본 대중들의 거대한 동의가 아닐까 싶다. "재특회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낳은'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100%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은 이런 거였다.

한 교사의 말을 전하자면, "과거에 어른스럽고 교사에게 논쟁을 거는 학생들이 좌파적 성향이었다면, 요즘에는 오히려 우파적인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 전제들을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평등이, 인권이 왜 중요하냐, 저 외국인들을 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대접해야 하냐, 이런 질문에 차근차근하게 대답해줄 자신이 없다. 너무 당연한 가치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을 비롯하여, (실질적 내용은 차치하고) 제도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들에서의 사회운동이 가진 딜레마 또한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예컨대 일본의 평화헌법은 그 정점을 지나 이제 '퇴보' 밖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없고, 소위 좌파는 현재를 지키기 위해, 우파는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익이 변화시키려는 방향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퇴행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지만, 퇴행이든 전진이든, 이들은 변화를 원하고, 좌파는 이에 저항한다. 굳이 유지할 이유가 없다면 바꾸려 하는 것이 진보이고, 굳이 바꿀 필요가 없으면 유지하려 하는 것이 보수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상식을 혼돈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ㅡ.ㅡ.  

 

"사회운동은 이론보다 기세를 통해 확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지키기'보다 '바꾸기'를 원하는 쪽에 붙기 마련이다. 일찍이 학생운동이 기세를 떨쳤던 것은 무엇보다도 체제를 부수자는 데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편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현상'이 생긴 것이다."

 

사회가 자꾸 나쁜 방향으로 퇴행하려고 하는데, 그에 맞서서 그나마 지금의 후진 상황이라도 유지하려고 싸워야 하는 운동은 우울하다. 퇴각과 퇴각을 거듭하면서, "그래도 그 때가 좀 나았던 것 같아"라고 끊임 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어릴 적, 역사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배웠는데, 지금이 바로 나선의 후퇴 혹은 하락 부분인 것일까?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어떻게 돌아보게 될지 두렵다. 엄혹했지만 잘 견뎌서 여기까지 왔구나 하며 흐뭇해할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하고 더 깊은 회한에 잠길지....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김현균 옮김. <시간의 목소리> 후마니타스 2011

 

시간의 목소리
시간의 목소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후마니타스, 2011

 

그 시간이 흘러, 시간의 목소리른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몹시 정성들여 세공한 이 짧은 이야기들은 슬프고 아름답고 유쾌했다. 

예전에 신영복 선생의 책에 "시간이 없어 편지글이 길어졌다"던 이야기를 저절로 떠올렸다. 기껏 반 쪽이 안 되는 짧은 글과 손톱만한 옛사람들의 그림 조각들이 이렇게 풍부한 결을 전할 수도 있구나....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곳곳의 피묻은 역사에 울컥하면서도, 나는 심각한 향수병을 앓았다.

멕시코시티의 소칼로 광장, 쇠락한 아바나의 건물들, 파타고니아의 거친 자연은 그저 이야기의 배경일 수 없었다. 내가 가 본 곳이라 반갑다거나 익숙하다는 감정과는 정말 다른 그 무엇이었다. 직접 여행했던 곳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글들은 그동안 무수히 마주치고 읽었지만, 갈레아노의 책에 등장해서 맥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심상으로 경험된 것이다. 미칠 듯한 애틋함...

 

올해는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갈레아노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려고 생각 중이다. 플러스, 리처드 세넷...

인상깊은 글귀 하나 적어둔다.

 

"나는 나의 자유를 지고 다니노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