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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실신한 국보법 : '김용갑 의원 졸도' 사태를 보고

실신한 국보법
  
  김용갑 의원이 국회 단상에서 제 분을 못 이기고 쓰러졌다. 대한민국을 한 몸으로 떠받치던 인간 국보법이 제 풀에 지쳐 졸도했다. 상징적이다. 50년 동안 선무당처럼 펄펄 뛰던 그 악법도 이제 기운이 다 쇠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칼로 제 배를 갈라 그 놈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이 미련한 신체 예술로 그들이 보여준 것은 ‘국산 칼, 더럽게 안 든다’는 사실뿐이다.
  
  언뜻 보면 국보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흐름이 대세같다. 착시현상이다. 촛불도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낼름거리는 법. 우익 시위의 격렬함은 ‘마지막 발악’이다. 그 살벌한 제스처로 저들은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공포는 북한의 안보위협에서 오는 게 아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도대체 이 사회에 자신들이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저들은 그게 무서운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그 또한 착시현상이다. 여론은 추이를 따라 동태적으로 읽어야 한다. 국보법에 관한 여론의 추이는 목하 ‘개정불가’에서 ‘개정가능’을 거쳐 ‘폐지가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게다가 반대론자들의 상당수가 사안 자체에 대한 판단보다는 “경제가 급한데 웬 국보법 논란이냐”는 상황논리에 잠시 설득된 상태.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폐지’에 목숨 거는 것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수호’에 목숨 거는 것도 이해 못한다.
  
  50년 넘게 존속했던 법을 없애자니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완 운운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최근 형사법 전문가들은 국보법의 공백은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뭘 더 대체하고, 뭘 더 보완한단 말인가?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안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국가의 ‘안전’(安全)을 위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유권자의 ‘안정’(安靜)을 위한 심리요법일 뿐이다.
  
  대체나 보완은 필요 없다. 형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유린이다. 고작 “불안감” 따위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은 따로 있다. 국보법을 확실하게 폐지하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미 사문화되어가는 법, 폐지해도 별 일 없다는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하게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이 또 있을까?
  
  여당 내의 기회주의 분파는 제 이름대로 개혁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어영부영 타협하거나 질질 끄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빈틈을 주면 안 된다. 선명하고 명확한 입장을 정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보수층이 국보법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상징성 때문이다. 국보법의 폐지가 기정사실이 되면, 깃발을 잃은 저들의 반항은 순식간에 무력화할 것이다. 국보법은 죽었다. 남은 것은 진단서를 떼고 송장을 치우는 일뿐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표면에 이는 보수의 거센 파도에 불구하고 바다 속의 조류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금 개혁정권은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차기정부의 성격을 묻는 설문에 시민의 56.9%가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라 응답했고, 오직 35.7%만이 “보수안정 성향의 정부”라고 대답했다. 현 정권의 보수화에 실망해 떨어져나간 지지층이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진보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뭘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따위에서 국보법의 대안을 찾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누군가 국보법 폐지의 ‘대안’을 요구하거든, 가령 취약한 정보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 등,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 제시할 일이다.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못 받아들이겠는가. 야당 역시 제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부정적 발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뭔가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 2004.9.25 진중권 (정치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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