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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3편

홍실이님의 [살바도르 아옌데 2편] 에 관련된 글.

3. 대통령으로서의 아옌데

아옌데 정부 - 인민연합 (the Popular Unity, PU) - 는 야심 찬 사업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정부는 경제적 전략 분야에 위치한 산업들을 국유화하고 소득 재분배를 위한 강력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또한 거대 농장의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단원 입법기구를 설립하여 정치 체계를 변화시켰으며, 경제․정치․사법 체계의 운영에서 민중 참여를 증진시키고,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존하는 헌법 체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즉, 사회주의에 이르는 칠레의 경로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인민연합은 이러한 의문에 절대로 분명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는 인민연합이 전술과 전략에 관한 생각이 상이한 여섯 개 단체의 연합체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대통령은 그 자신의 사회당을 결코 통제하지 못했다. 대체로 당은 아옌데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좀더 급진적인 방식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인민연합이 국회에서 과반수를 점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상원의 경우, 인민연합은 18석을 차지한데 비해 야당은 32석을 차지했으며, 하원에서는 57석 (야당은 93석)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1973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이 얻은 성과는 야당의 점유율을 아주 조금 줄였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경제 정책은 이 모든 문제를 극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년의 성장 후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칠레의 주된 수출품목인 구리의 가격이 폭락했다. 외부적으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전통적인 자금 재원이 말라버린 것이었으며,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식품 수입이 급증하고 이는 다시 지불 잔고 문제를 가져왔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하자, 자본가들은 대개 투자를 거부했다. 생필품 분배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암시장이 성장했다. 매일의 삶은 공급이 부족한 물자를 얻기 위한 줄서기의 연속이었다. 인플레이션을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경제 붕괴와 정치적 갈등은 상호작용하고 서로를 강화시켰다. 유명한 칠레의 헌법 체계는 아옌데 정권에서의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부나 야당이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야당은, 불법은 아니더라도 분명 의회 체계의 관행들에서 벗어나는 행정부의 정책들을 차단할 일련의 수단들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해 있었다. 정부 또한 적법성이 의심스러운 대책들을 채택하고는 했다. 이러한 행위는 상호 의심을 강화시키고, 곤경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정부와 야당은 심각한 대결 국면을 맞이했다. 경제는 통제 불능 상태였으며, 둘 사이를 중재하려다 실패한 군 총사령관은 사임을 했다. 교회 또한 이 둘을 화해시킬 수 없었고, 폭력은 증가했다. 평화로운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아옌데 정부는 처음부터 적대적인 미국에 맞서야했으며, 미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칠레의 반정부 세력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쿠데타의 이유는 무엇보다 내부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73년 9월 11일, 마침내 상황은 종료되었다. 난폭한 군사쿠데타, 대통령궁 폭격, 아옌데의 사망, 수천 명 칠레인의 살해와 함께.


 대통령으로서 아옌데는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1972년에 카스트로를 초청하여 3주간 그와 함께 머물도록 한 것은 실수였다. 아옌데는 중도파의 지지를 필요로 했지만, 이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가 마음에 그렸던 급진적 프로그램은 강력하고 단결된 정부, 허약한 야당, 광범위한 전국적 지지, 우호적인 국제 환경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4. 아옌데의 유산

 

 

 현재 칠레에는 아옌데의 유산의 극소수만이 남아 있다. 거의 모든 그의 정책들은 군사 쿠데타 이후 뒤집혔으며, 그 후 자본가들은 반(反) 혁명을 이끌어나갔다. 피노체트(Pinochet) 정권은 아옌데 정부가 국유화시킨 산업의 대부분을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었으며, 공공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노동조합 운동을 탄압했다. 그러나 아옌데의 가장 인기 있던 정책들 중 극소수는 오늘 날에도 남아 있는데, 이를테면 학동들에게 매일 500ml의 우유를 공급하는 것이나 구리 산업의 대부분을 국가가 소유한 것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지속되는 업적 중 하나는 농촌 지역에서 라띠푼디오스 (latifundios, 대농장)를 철폐한 것이다. 얄궂게도, 이 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개혁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을 제거함으로써 1973년 군사쿠데타 이후 농업 생산의 자본주의적 방식을 확립하는데 길을 닦아준 것이 되었다.


 보다 넓은 정치적 의미에서, 아옌데 시대와 그 후의 독재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에도 칠레인들을 갈라놓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아옌데 정권의 3년이라는 시간은 칠레 역사상 유일하게 노동 계급과 가난한 이들이 국가와 경제를 움직이는데 정당한 몫을 했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나라를 혼돈, 심지어 내전의 위기까지 몰고 간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비록 합의 정치가 우세하기는 하지만, 칠레인들의 투표 방식과 국가 통치를 위한 정치적 동맹의 속성은 모두 여전히 이러한 좌/우 분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칠레 좌파에게 아옌데의 유산은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들은 현존하는 민주주의 체계의 한도 내에서 보다 큰 사회적 정의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아옌데의 모습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인민연합의 패배에서 그들이 얻은 주요 결론은, 사회 변화를 이루려면 광범위한 전국적 합의와 정치적 스펙트럼 상의 좌파, 중도파의 동맹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공산주의자들은 미국과 쿠데타를 일으킨 우익을 비난하며, 인민연합의 마르크스주의적 프로그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 합의의 정치와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옌데의 이상을 폐기했다고 비난한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는 부르주아 출신의 뛰어난 의회주의자로서, 공화국 칠레의 입헌 체계를 굳게 추종했다. 그는 또한 쿠바 혁명과 1960년대에 전반적 의제를 좌파 쪽으로 이동시킨 정치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의 비극은 민주주의 원칙과 급진적 사회변화를 통합하려는 시도 속에서, 칠레가 자랑스러워하던 민주주의 체계의 바탕에 깔려 있는 합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계속: 살바도르 아옌데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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