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지키고 싶은 공동체 - 웰컴 투 동막골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극작가중에, 우리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라는 시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도 있습니다. 그는 아직 독일에서 활동하던 젊은시절에 '민중의 의지' 라는 잡지에 당시 뮌헨 지방에서 유행하던 부르조아 연극 들을 통렬히 비판한바 있으며 몇년 뒤 자본론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인간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이란 상품으로 전락했으며 인간의 본질을 잃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맑스주의 극작가라고 볼수 있겠죠.


비록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변증법적' 연극을 지향했으며, 그 방법론으로 '서사극 이론' 을 주장했습니다. 서사극 이론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현실의 좌절,불만 등의 상황에 서사성을 가미함으로써 무대위의 배우나 이야기 전개에 관객이 감정이입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거리두기' 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원래는 연극을 위한 이론이었지만 지금은 영화계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거리두기' 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것은 라디오방송 '정음임의 영화음악' 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입을 통해서 들은것일 겁니다. 제 기억으로 그는 (아마 지금까지도) 이 '거리두기' 를 열정적으로 주장하던 사람이었죠. 그의 영화평은 대부분 어렵다고들 말합니다만, 그 중에 '시네마천국' 에 대한 평은 어렵다거나 난해하다는 이유가 아닌, '감수성을 짓밟았다' 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정성일씨는 시네마천국에 대해서 거리두기를 하고 본다면 거의 봐줄것없는 영화이며, 시네마천국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영화에대한 감성적인 자세' 는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죠.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거리두기' 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드리는것은 제가 그 이론에 대한 거의 무비판적인 지지자이기 때문입니다 ^^; 방송에서 정성일씨의 그 말을 들은뒤로는 영화볼때 의식적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거의 대부분 실패하거나 설혹 성공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읽어내지를 못하는게 문제지만 말이죠 --;

 

웰컴투 동막골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 을 보면서는 어쩐 일인지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눈물이 찔끔 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동막골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울리는, 이른바 '최루성' 의 영화는 아니고 그런 장치도 없습니다. 사실 제가 찔끔거린것은 '슬픈' 장면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장면 이었으니까요. 왜 그 장면이 그렇게 애달프게 느껴졌는지 모를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감정이입한 대상은, 성은 스 씨요, 이름은 미스 였던 그 사람이었던거 같습니다.


동막골에 들어와서 동화되어가는 군인들은,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도피한 사람들입니다. 남한군인 표중위와 문상사는 적극적으로 도주한 케이스고,  반대로 리수화가 이끄는 북한군들은 한국군들에게 이리 저리 쫓기며 북으로 도망갈길을 찾다가 동막골 사람을 만나고 들어오게 되죠. 그렇지만 스미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스미스가 동막골에서 이질적인 존재인것은 단지 인종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것 뿐만이 아니죠. 그는 도망치다가 들어가게 된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되는 관객처럼 말입니다. 관객중 어떤 이들은 스미스처럼 울면서 돌아갔을지도 모를일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고대 중국의 장자는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것인지, 나비가 내가 되어있는 꿈을 꾸는것인지 알수 없다' 고 하였다지요. 그 뒤로 나비는 종종 환상이나 이상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처럼 사용되어 오곤 했습니다. 그것은 동막골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는거 같습니다. 스미스가 추락할때나 표 중위, 리수화의 앞에 나타난 나비들은 동막골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곧 동막골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이상향임을 암시하고 있죠.


실제로 동막골은 이상향 같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먹고 살 식량이나 기타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협동해서 만들어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동막골 사람들 중 누구도 더 잘살거나 더 못살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촌장이 있지만, 특별히 촌장으로서의 귄위나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 동네 아이들은 예일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만약 예일과 같은 인물이 현실에 있었다면, 엄마들은 그 옆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릴것이고, 아이들중 어떤 애들은 '미친년, 꺼져' 라며 돌을 던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와같은 행동들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동막골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 곳은 '머리에 꽃을 꽂은' 예일도 중요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곳이니까요. 그녀는, 그런 동막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웰컴 투 동막골


말하자면 동막골은 누구나 꿈꿀만한 그런 곳입니다. 숨가쁜 일상에서 경쟁에 치여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그야말로 '전쟁같은 하루' 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동막골과 같은 곳은 그 '전쟁' 에서 비켜나 있는 존재로, 사람들이 한번쯤 '그런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하는 곳이죠. '웰컴 투 동막골' 의 미덕은 그와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존재를 구체화 시켜서 단 2 시간 동안이나마 제공해 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막골을 지키겠다며 나서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전혀 상투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들의 행위는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써 먹었던 장면이지요. 아이들을 살리기위해 티라노 사우르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던 '쥬라기 공원' 의 그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했던 것과 같은 것이고, 친하게 지내던 전우가 죽자 흥분하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입니다.  그렇지만 동막골은 그 군인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기 때문에 그 장면을 보면서 진부하다는 느낌 대신에 감동을 느낄수 있는 것이죠.


'웰컴 투 동막골' 은 우리가 꿈꾸던 공동체가 전쟁으로부터 도주, 혹은 회피 하던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뒤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면 그땐 어떡하죠? 전쟁은 그 시점으로 부터도 대략 2 년 가량 지속되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도주와 회피' 의 전술을 사용하던 소수 몇명의 손에 의해 마을을 지켜낼수 있을까요? 저는 충분히 비관적입니다. 동막골이 머리속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라면,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 마을만 독야청청하게 지켜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총알과 폭탄이 난무하는 그런 전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겁니다.


어쨌거나, '웰컴 투 동막골' 은 개인적으로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극장개봉작 중에서는 가장 좋은 영화였던거 같습니다. 상영시간이 두시간 가까이 되던데, 전혀 길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비록 '스미스' 처럼 이상향을 떠나 현실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것이 서글펐지만 말입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