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옛집...그 만큼의 사연들...(청원 옛집기행-2)

  • 등록일
    2005/02/13 21:08
  • 수정일
    2005/02/13 21:08

다음에 들른 곳은 이웃해 있는

고은리에서 차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가덕면 인차리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원래는 인차리의 신형호 가옥과

구봉영당(?)인가 해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당이 있다는 곳으로 갈려고 했는데

마침 근처 동네인 계산리 5층석탑부터 보게 되었다.

 

보물 511호로 고려초기 석탑인데

절은 사라지고 오직 탑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 있는 곳이고

왠지 횅하니 사람들 떠난 서글픔만 잔뜩 담고 있는 쓸쓸한 석탑이다.

 

 

뭐 여기저기 금가고 깨지고 파이고

꼭 이동네를 닮은 탑이다.

 

이 동네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이거든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의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고

청주근교라는 이유로 근처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

뭐 하여튼 쓸쓸한 그런 시골도 도시도 아닌 그런 곳이다.

 

뭐 여하튼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곳은 이 정도만 보고

옛집으로 향했다.

 

신형호 고가는

새로 단장된 문화재 알림판에 비해 왠지 좀 안스러운 아니 왠지 초라한 옛집이다.

조선말기 고종 18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엔 집안의 많은 부처럼

안채에 사랑채에 건너채에 행랑채까지 딸린 큰 살림집이었단다.

 

하지만 일제시대 초기

당시 집주인이었던 신장식이라는 사람이

의병들을 집에 재우고 그들의 모임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이 불살라 버려

어렵사리 지금같이 안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집이 되어 버렸단다.

 

이 집은 신형호 선생이라는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생가로 더 알려져 있는데

혹시들 아시나 ?

 

헤헤 물론 저도 모르지요.

뭐 여하튼 신형호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라니 그렇게 알뿐

더 자세히 알진 못한다. 이 모두가 이 무식한 놈의 짧은 지식때문이니

다들 너그러이 이해하시길....헤헤헤

 

참고로 이동네 주변인 

가덕면, 미원면, 낭성면 일대는 고령 신씨 들이 많이 산다.

그 유명한 그래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신채호 선생님도

이 고장의 그 무수한 신씨들 중의 한명이었으니  

이 신씨들의 자긍심과 애국애족정신은 익히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헤헤헤

 

솔직히

나같은 일자무식이 무슨 애국애족을 알겠는가 ?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나의 자랑스런(?) 인생에서

이 곳 고령 신씨들 중 한 분과 매우 친하다는 개인적인 연분 정도가 있다고나 할까 ?

 

달우 아저씨라고

미원면에서 닭을 키우시는데

농민회 일도 열심히 하시고

민주노동당 일도 열심이 하시는 그야말로 열성분자(?)이신데

지금처럼 이름날리기 전의 민주노동당 충북도당을 맡아서

몇년동안 고생고생하셨던 분이다 .

이분은 시골분 답지 않게 또한 산악자전거의 대가이시기도 하다....??...헤헤

 

한번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미원근처의 폐교에서 행사를 하는데

닭을 10마린가 주셔서 다들 행복한 적도 있었고

우리가 미원면에서 대안학교 활동을 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아 그리고 지역 운동(?) 선배들 중 아저씨라 부르는 딱 두분중의 한분이다.

율동이 아저씨랑 달우 아저씨 ......!!

 

이런 훌륭한 달우 아저씨가

이 고령 신씨이니

달리 뭘 더 바랄 것인가 ???? 헤헤헤

 

신채호 선생의 후손 중 이런 훌륭하신 달우 아저씨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이 지방의 고령 신씨는 충분히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다...헤헤헤

순전히 개인적이지만...뭐 내가 이런 생각한다고

손해 볼 사람도 없고 하니

뭐 어떻겠는가 .......헤헤헤

 

 


 

 <신형호 고가 정문 >

 

고령신씨 이야기를 마저 더 하자면

이 곳 신씨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신숙주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세종때에 집현전 학자가 되어

세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

 

그러면서도

맛이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과 비교되어

변절자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이가 신숙주다.

즉, 같은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이나 박팽년, 유응부 등과 같은 사육신이나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생육신등과 비교당하면서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가 바로 이 곳 신씨들의 조상이다.

 

뭐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이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집현전 학자라고 해서 다들 같은 생각들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필히 성삼문 등의 사육신처럼 단종에 대한 충성만이 곡 올바르다고 보지 않기때문이다.

난 솔직히 당시 사회에서 오히려 단종보다는 세조의 정치가

당시 조선사회에 더욱더 필요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기도하고

속직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도 상당부분 조선 후기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일방적인 평가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숙주를 단순히 자신의 안위를 변절을 택했다고 보기엔

이후 그의 주요 업적으로 보이는 경국대전 편찬사업이나 기타 율령반포의 업적은

오히려 신숙주가 자신의 조선사회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뭐 뭘 모르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신숙주는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을 사실인듯 싶다.

다만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여하튼 나의 짧은 여행은

이렇게

항일의병의 유적지 겸 한옥 옛집의 감상으로 가덕면을 떠났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정은 보지도 못하고

또다른 보물인 계산리 석탑으로 대신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