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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옛집답사(1)...맹씨행단

  • 등록일
    2005/03/06 15:09
  • 수정일
    2005/03/06 15:09

청주에서 천천히 가면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가늘 길이야 많지만

난 청주에서 조치원을 거쳐 1번국도를따라서 천안방면으로 가다가

행정리에서 광덕사 이정표를 보고 가다가 아산시로 넘어가는 길을 택한다.

 

가기전에 광덕사에 들러 절구경을 하고 난 후

쉬엄쉬엄 고개하나를 넘으면 나타나는 곳이 맹씨행단이다.

 

원래는 고려말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고 했다고 어린 시절 누누이 들었던

그 이상한 사람 최영장군이 살던 곳이다.

뭐 황금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모를까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런 명언을 남긴 사람의 집이니

검소하리라 생각하지만

널찍한 집터에 작은 성이 연상될 정도로 돌담이 인상적인 집이다.

 

 

 

위대한 사람들 특히, 오랫동안 사람들 입과 귀에 오르내리는 사람치고

이런 저런 야담스러운 전설이 없겠냐만은

최영장군의 이런 말은 약간 거스리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실제 최영장군은 그 평가가 극과극을 달리는 사람이다.

 

누구는 이성계에 맞서 끝까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을 높이산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이런 야담 즉, 세상의 명리(이해관계)에 초탈하고 오직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절만이

드높았다는 식으로 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

 

최영장군은 고려를 위해 끝가지 충절을 다한 것은 맞을 수 있지만

다른 부분 즉, 청렴결백하다는 식의 평가들은 충분히 문제가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에 충성을 다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을 왕비 자리에 앉혔고

다라서 어떻게 보면 자신의 딸 혹은 사위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쳤다는 의혹을 사기도 하고

이성계가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세우게 되는데

실은 가장 일조한 인물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군사력을 가졌고 그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딸을 왕비에 앉히고

그리고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려한 것 또한 의혹을 받는 한가지 사실이다.

(아 ! 물론 그런것가지를 포함에서 고려에 대한 충성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면 뭐...뭐라 할 이야기는 없지만 말이다....?...헤헤헤)

 

 

뭐 여하튼 그런 최영장군이 터를 잡았던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최영장군이 옆집에 살던 어린 맹사성을 보고 그 영특함이 탐이나 자신의 손녀를 시집보내고

나중에는 이집가지 물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원래 맹사성은 고려 수도인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온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도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것은 맹사성의 아버지가 당시 개성의 혼란스러움을 피해 이사왔다.

이사 당시 맹사성은 5-10세 사이의 소년이었다.

 

원래 맹사성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에서 관직을 지낸 귀족가문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조선개국후 두문동 72현에 속했을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절이 있는 집안이었다.

두문동 72현 지금의 개성시 인근의 개풍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계곡으로

나중에 이성계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맹사성의 아버지 또한 함께 두문동 72현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살아남아서 이곳 맹씨행단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여하튼 최영장군이 집을 주었다기 보다

최영장군이 이성게일파에게 집안이 풍지박산 난후 이웃에 살던 맹사성 즉,

손녀사위에게  재산이 이어졌을 것이다.

맹사성이 고려파였던 최영장군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도 이러한 집안의 가풍탓일것이다.

 

우선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맹사성 유물전시관이다.

맹사성이 사용하던 옥피리와 기타 맹사성의 글씨들 뭐 그런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평소에는 거의 잠겨있어서 보려면 맹사성 고택안에 있는 집에서 사시는  

21대 후손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면된다.

 

 

주차장 옆길로 바로 나타나는 것이 높게 솟은 대문이고 이 대문을 들어서면

처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21대 후손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이다.

 

 

종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꽤 친절하시다.

다만 할아버지께 이런 저런 설명 듣고나면

할아버지의 은행 좀 사가라는 말을 뿌리칠 수 없어서

5000원 정도라도 투자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뭐 그 정도는 이 집을 감상하는 비용정도로 생각하면 생각보다 많이

듬뿍듬뿍 퍼주시는 그 손길이 더욱더 정겨워 집구경하는 기분이 더 좋아지니

그럭저럭 사가지고 오는 재미도 있다.

(솔직히  집에와서 맥주 안주로 한 움큼 먹으면 그 맛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지만...헤헤)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은행나무 행단과 고택이 나온다

와 ! 하는 탄성이 나올정도로 큰 은행나무가 두그루 있는데

두 그루 모두 몇개의 나무가 함게 자란 형국이라 딱히 두그루라 이야기하긴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따지지 않고 보면 와 ! 하는 감탄이 나온다.

다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때 가면 더욱더 입이 벌어지는 나무다.

이번에 갔을땐 잎도 자라지 않아 좀 그 위용이 실감나지 않지만

언젠가 보았던 가을날의 풍경은 아직도 찐한 여운을 준다.

 


이 은행나무 정면 앞쪽으로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한문으로 공(  )자 형태인데

고려시대 민가양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식이다.

오늘날 흔히 보는 ㄷ자형집의 시조격으로 보이는 구조인데

양쪽 날개채와 가운데 대청마루 부분의 처마선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어서

그냥 지붕만 보면 정사각형의 ㅁ자형 집처럼 보이지만 평면도 상으로 보면 완벽한

공(  )자형 집이다.

 

 

 

그리고 양 날개채는 구들방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날개채는 맞배지붕이고 뒤쪽으로 높게 굴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한옥집을 구경다니면

이런 굴뚝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특히 어느 집이나 거의 대동소이한 집의 구조에 반해

굴뚝은 그 집주인의 취향과 그 집의 집터에 영향을 받아 제각각인 경우가 많고

특히 그 높이나 장식은 마치 절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탑처럼

예술적 감흥을 나에게 준다.

 

                               < 굴뚝의 지붕 >

 

또한 이렇게 날개채가 앞뒤로 약간씩 튀어 나옴으로서 옆에서 본 칸살이는

거의 정사면체의 면처럼 느껴지며 정확히 삼등분된 칸살이를 보여준다.

 

 

보통 ㄷ자형 한옥집에서는 옆면의 칸살이가 이렇게 정확한 3칸살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자형의 중심의 칸살이는 대들보의 길이에 좌우되고 날개채는 도리의 칸살이에

맞추다 보니 생기는 약간씩의 변형인데

이집은 중앙부분의 대들보에 의한 칸살이 길이를 양 날개채로 튀어나감으로써

묘한 안정감을 갖게 된 것 같다.

  

 

고택 뒤로 세덕사라는 사당채가 있고 이런 고택과 사당채를 둘러싸고 돌담이 한 겹 두르고

그 한겹 두른 돌담 밖에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그 밖으로 또 한 겹의 돌담이 두르고 있다.

 

21대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안쪽 돌담은 싸은지 오래되지 않았고

바깥쪽 돌담은 옛날부터 있었던 돌담이란다.

 

 

바깥 돌담으로 짐작해 보는 집의 규모는 상당해서

청백리의 표상이자 지붕이 세어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고불 맹사성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이 부분에서도

실제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서울에서 관직을 갖게되면

서울 도성안 혹은 남산 근처에 자신이 거주할 집들을 구입하였다.

물론 경제적인 차이로 그 크기나 장소가 정해지기는 하지만

한번 이렇게 도성안에다 집을 마련하면 아예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할때까지는 수십년동안 기거를 해야 했기에 요즘같이 전세집을 얻는 방식이아니라

아예 집을 샀다는 것이다.

 

특히 맹사성같이 48년이나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정승들은

당연히 집을 구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맹사성은 가족 대부분을 자신의 세거지인 이곳 아산시에 남겨두고

끝가지 서울에다가 주거지를 마련하지 않은 모양이다.

따라서 서울의 거쳐는 언제나 요즘 전세살이 처럼 허름한 집을

그때그때 옮겨다니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맹사성이 이렇게 당시의 관료들과 다르게 자신의 주거지를 서울로 옮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집안의 내력때문이리라

 

맹사성의 할아버지가 두문동 72현의 한분이고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끝까지 따르지 못한 죄책감과

여전히 조선을 인정할 수 없었던 마음이 남아 있었고

누구보다도 이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맹사성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의 관직에 나아갔지만 언제라도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세거지로 내려갈 생각으로 서울에서의 그런 궁핍한 삶을 살았으리라.

 

실제 이곳 맹씨행단이 있는 곳은 광덕산의 서쪽 줄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조선을 반대하며 죽어갔던 곳이

개성의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이고 보면

같은 지명의 서쪽 기슭에 세거지를 정하면서까지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려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세거지를 서울로 옮길 수 는 없었지 않았겠나 ?

 

이런 맹사성네 3부자의 관계는 당시 매우 유명하여

조선전기에 제작 배포된 효에 관련된 삼강행실도에 삽화와 일화로 소개되었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집이 누추했던 것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던 곳이니 애써 고칠 이유가 없어 그냥 살은 탓일게다.

다만 청백리였던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이는 그 스스로 할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져버리고 조선의 관직에 나간 이상

성리학자로서의 실천에 입각한 활동이외에

스스로 부귀공명을 꾀하기엔 스스로의 모순된 행동이며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해서라도 감히 부정을 탐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고려에 대한 충절과 조선에 대한 충절 사이에서 언제나 고민했던

한 지식인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이 돌담 넘어로 쪽문을 지나면 구괴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원래는 황희정승과 독수 권진이라는 정승, 그리고 맹사성이

이곳에서 서로의 생각과 국정운영방안등을 논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무 3 그루씩 9그루를 심었었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2그루에다가 소마누가 대여섯개 높게 자라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마치 맹씨 고택의 부속된 정원처럼 바로 인근에 있어서

고려시기의 원림 즉, 정원의 조경에 대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듯 보이나

실제 이에 대한 연구나 조사된 바가 없으니 나같은 초짜가 뭐라 말할 순 없겠다 싶다.

 

다만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돌담과 그 인근의 산책로를 겸한 정가가 있는 곳이

언젠가 답사했던 의성군 산운마을의 한 민가의 잘 조성된 원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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