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_ 한강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

하지만 그 꿈은 이토록 생생해,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

 

언어는 정점을 찍었을 때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는다.

하지만, 그 정교함이 완전한 전달을 보장하진 못한다.

세상은 희랍식 논증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고, 삶은 매순간 성립 불가능한 오류.

 

말은 얼마나 불완전한지.

언어가 세계와 결합하는 회로는 아슬아슬하다.

 

술어가 주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희랍어의 중간태.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문장은,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 영향을 받아 변한다는 의미이기도.

 

언어 이전-

 

말이 사물과 대응하기 이전-

숱한 감각들.

그 모든 감각들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순간- 이데아.
 
하지만 말은 불가피한 매개이지 않을까.
...듣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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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도 머리에 남는다.
보이지 않는 이와 말을 잃은 이가 만나려면?
 
한강 소설은 이게 처음.
 
2012/04/25 20:20 2012/04/25 20:20

2012/04/25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 부터 생각난다.

혼자 타는 기구이고, 누워서 타는 건데,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고, 위에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서 레일을 죽 내려간다.

아찔아찔 레일을 내려가면서 신이 났다.

그러다 아래에 아는 사람 얼굴과 마주친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인사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손잡이를 놓고 뛰어내린다. 땅에 발을 딛으니, 어지러워서 빙글빙글, 자세를 못잡다가, 바로 서서 멋쩍게 인사한다. 꿈 속에 등장한 이는 거의 친분이 없는, 대학 같이 졸업한 사람인데, 여자친구와 같이 걷고 있었다.

 

레일이 있는 곳은 뭔가 유원지? 그런 곳인데.. 상황으로 보면 학교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 쪽에 격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경찰들이 넓게 포위하고서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이걸 본 건 아닌데, 그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까 만난 사람과 기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여러 사람이 함께 걷는다. 계단을 올라가면 두짝 유리 여닫이 문이 있다. 그 문 너머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우리가 계단을 올라가니, 문을 지키고 섰던 전경? 아무튼 두사람이 위협한다. 그 중 한 명-어제 돈바꾸러 간 우체국 경비였다 -0- -이 자루가 긴 도끼를 들고 유리문을 내리친다. 유리가 깨지면 위험할 것 같다. 사람들이 뒤로 한발짝 물러서는데, 난 맨 앞에 태평하게 서있다. 유리문이 통째로 내쪽으로 넘어지고 난 가볍게 받아낸다. 여유있게 능글거리면서, 가방을 놓고와서 가방 가지러 간다고, 길 터달라고 말한다. 아까 놀이기구에 놓고 왔다고. 경찰?이 안된다며 막아서고, 내가 계속 우기니까, 그럼 자기가 가져다 주겠다며 가지러 간다. 이제 지키고 섰던 사람은 한 명 남았고, 바깥이 어수선한 탓에 우리에게 집중을 못한다. 그 사이 난 밖으로 밀치고 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빨리 따라 붙으라고 소리지른다. 모두 우루루 나갔고 같이 뛴다.

 

그런데, 들으니 다른 곳에서 싸우던 시위대들과 경찰이 싸움을 중단했다고 한다. 경찰이 시위대의 신변을 보장했고 포위된 곳에서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버스에 한가득 사람들이 타고 지나간다. 다들 기뻐하고 있고, 그 버스 안에 아는 사람 얼굴이 둘 보이는데 지나갈 때 환하게 웃으면서 만세를 한다. j군이 앞에 먼저 보였고, 그 뒤에 y양도 보였다.

 

문제는 남아 있는 우리 일행. 곳곳에 전경들이 깔려 있다. 신변보장을 약속했다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까지 그렇게 해줄지 모르겠다. 태연한 척 경찰들을 무시하며 막 걸어나간다. 그런데, 그렇게 이동하면서 가방이 떠올랐다. 아, 내 가방 아까 걔가 들고 갈텐데, 어쩌지?

 

대충 여기까지-

 

이렇게 꿈이 디테일하게 기억난 것도 정말 오랜만.

전반적으로 재밌었다. 그리고 너무 현실적이다 -0-

2012/04/25 10:10 2012/04/25 10:10

화차

영화를 보기전에 소설을 읽었다.

 

음.. 재미있게 읽었다.

차근차근 접근해가는 게, 그리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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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반에 대해서보다,

'신용'에 대해 좀 이런저런 생각들이 있었는데,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는 애초에 생산과 소비에 시차가 있기 때문에 미래의 팽창을 담보로 부채는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한 투표, http://blog.jinbo.net/neoscrum/524)

저 역자 블로그 말미에 달려있듯이, 부채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느냐는, 계급 역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실물영역에서 이윤율 저하 때문에, 금융부문으로 자본이 집중되는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미래를 담보로 부채는 계속 늘어가는데, 실물영역이 뒷받침되지 못하니, 그만큼 거품은 가속화되는 것. 그 과정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 일본은 버블이 꺼지면서, 한국보다 10년일찍 그 과정을 겪은거고, 소설은 그 시기가 배경이다. 팽창한 부채를, 개개인-그러니까 노동자계급에게 책임을 넘기는 게, 또 하나의 핵심. 

 

그러니까, 화차에서 다른 이의 신분을 뺏었던 그 사람의 동기를, 행복해지고 싶었다,라는 일반적인 욕망, 혹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외로운 투쟁으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더욱 역사적, 경제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는건데,

그냥 소실이니까, 싶기도 하고..;;;;

 

 

 

화차
화차
미야베 미유키
시아출판사, 2006
2012/04/05 15:44 2012/04/05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