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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6호] 미국 대법원의 노동계급 여성에 대한 공격

미국 대법원의 노동계급 여성에 대한 공격 :

오직 노동계급의 투쟁만이 여성의 출산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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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대 웨이드( Roe v. Wade) 판결의 번복은 노동하는 여성의 출산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 계급전쟁의 가장 최근의 공격이다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미국 자본가계급이 점점 더 여성 노동자를 착취할 새로운 노동자를 만들고필요하다면 제국주의 경쟁자들에게 던져줄 새로운 총알받이로 보는 세계적인 전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그것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 여성을 억압받는 임금 노예의 상태로 더욱 종속시키기 위해 이른바 '전통적인가치를 다시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지배계급 자유주의자들은 이 판결을 모든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하려 하지만이는 부르주아 여성이 아니라 노동계급 여성에게 주로 영향을 미친다매우 반동적인 임신 중지 반대법이 있는 국가에서도 부르주아 여성은 여전히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서 임신 중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적은 임금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휘발유와 식료품 같은 기본적인 상품의 가격 상승으로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익명의 유출자 덕분에 대법원이 로(Roe) 판결을 언제 번복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그러한 일이 발생한 후 거의 두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평소와 같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가짜 연대의 트위터를 보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민주당은 로(Roe) 판결이 번복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왜냐하면이는 현재 11월의 선거에서 노동자의 투표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그리고 일단 민주당에 투표하면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범한 게임으로 돌아갈 수 있다민주당은 출산의 자유를 위한 여성 노동자의 투쟁에 실제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그들은 단지 노동자 여성들을 목 졸라 죽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관리하고이러한 문제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여성 노동자와 모든 노동자의 분노가 민주당과 협동하는 기계로 다시 유입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우리는 그들이 2020년에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을 저질렀던 일을 지금 그들이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우리의 투쟁은 공화당이나 정부의 어느 한 부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우리의 투쟁은 지배계급의 모든 정당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착취당하는 노동과 억압된 삶 덕분에 사는 이 성차별적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모든 정당에 대항하는 것이다우리의 세계적인 계급인 남성여성그리고 모든 성별과 성적 정체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삶과 노동에 기생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투표함이 아닌 직장과 거리에서 투쟁하자성차별적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곳그들의 이윤을 타격하자착취당하고 무급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없다면이 체제는 중단될 것이다!

 

단순히 체제를 중단시키는 것 이상으로우리는 그것을 전복해야 하며모든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 억압의 악몽을 끝내기 위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오직 자본주의를 전복한 세계에서만 여성 노동자가 모든 것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즉 자기 몸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모든 성별의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에 맞서 함께 투쟁해야 하며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국가를 전 세계적으로 전복할 목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전체 계급을 혁명적으로 이끌고 안내하기 위한 국제 혁명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에 달려 있다.

 

국제주의노동자그룹(Internationalist Workers' Group)은 노동계급의 미래 정당을 건설하고 세계 노동자평의회 체제를 위한 자본주의 전복에 헌신하는 혁명적 노동계급 정치조직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의 미국 지부이다.

 

2022년 6월 25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이 글은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판결에 대한 대응으로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과 지지자들이 시위 중에 배포한 전단이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6-25/scotus-attacks-working-class-women-only-a-struggle-by-our-class-can-sec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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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폭탄 -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다

난방비 폭탄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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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너지 파동은 자본 축적 위기의 또 다른 모습

 

북극권의 초강력 한파에 이은 난방비 폭탄이 북반구의 겨울을 덮쳤다환경위기기후위기의 도미노는 물가상승과 맞물려 에너지 가격 폭등을 더욱더 부추기고 있다에너지 가격 폭등 원인으로 지목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기보다는 자본 위기의 산물이었다그런데도 세계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산업 적자라는 명분으로 가격 폭등을 밀어붙이고 있다윤석열 정권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공공요금 인상을 예외 없이 진행하고 있다.

 

난방비 폭등에 책임 있는 정부와 부르주아 정치권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책임회피를 위한 네 탓 공방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이는 지배계급이 에너지 자원과 환경/기후위기에 대한 원인진단과 대책을 내놓을 능력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지배계급은 오로지 생존과 축적에만 관심을 둔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된 세계 경제 대공황을 대자본은 오히려 집적과 집중의 기회로 이용했고노동계급에는 노동강도 강화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임금 감소생계비 위기의 고통을 떠넘겼다따라서 자본 축적 위기를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과 착취로 해결하려는 지배계급에 에너지 자원에 대한 근본 대책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전 세계적인 환경/기후 위기는 자본 축적 위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인플레이션실질임금 하락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의 단적인 사례가 난방비 폭등이다난방비 폭등으로 드러난 국내 LNG 직도입 자본(GS에너지, SK E&S, 포스코에너지한화에너지발전사 등)은 천문학적인 영업 이익과 당기 순이익을 올렸지만노동계급은 삼중의 고통 속에서 추운 겨울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

 

앞서 말했듯이 난방비 폭등은 노동계급에는 재앙이지만자본에는 이윤 창출 기회이기도 하다에너지 자원의 폭등 현상은 환경/기후위기가 일반화된 자본주의 쇠퇴기에 언제든 나타난다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배계급은 이러한 자본 축적의 지속적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하고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계급전쟁을 선포하며 선제공격을 하고 있다.

 

에너지 위기에 맞닥뜨린 지배계급은 얄팍한 땜질 처방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면서도 본질에서는 자본 축적의 기회를 창출하고 보장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윤석열 정권의 에너지 빈곤 가구에 에너지 바우처 지원 확대와 민주당의 횡재세 논의 모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생색내기 처방이다특히 윤석열 정권은 에너지 위기가 핵발전에 대한 저투자에서 기인한다며핵발전 확대안을 제시했다이것은 기후위기와 에너지 자원에 대한 자본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이윤 추구 체제에서 비롯된 환경/기후위기 상황에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위기를 이윤 창출 기회로 활용하는 데에만 몰두한다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축적과정이 위기라는 점을 보여준다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작용하는 자본구성의 고도화와 평균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자본 축적 과정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그 결과 에너지 대란에서 나타나듯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과 사회의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생산의 근본적 필요성 사이의 모순은 더욱 격렬해진다.

 

앞으로도 빈번하게 발생할 에너지 대란에서 이윤이 목적인 생산체제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책을 요구한다고 해결책이 나올 리는 없다그것은 오직 자본 운동을 정지시키고 파괴해야 가능하다에너지 가격통제와 에너지산업 국유화공공주도의 재생에너지 전환 요구 또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공주도는 자본 주도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고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목표가 아닌 체제 내에서의 국유화와 가격통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으로 작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착취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환경/기후위기에너지 대란과 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코뮤니즘만이 인류와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계급전쟁으로

 

대공황팬데믹제국주의 전쟁기후위기 속에서 자본 축적의 위기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면서 노동자들은 난방비 폭등과 물가 폭등으로 실질임금 감소와 생계비 위기의 고통을 겪고 있다윤석열 정권은 대자본에 대한 세금은 인하해주면서 복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산은 삭감했다자본가 정권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본 위기에 대한 비용을 치르기를 거부할 때마다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그것은 노동계급의 잉여노동을 착취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본이 더 많은 잉여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경쟁으로 전쟁환경 파괴와 기후위기를 일으키면서도 모든 위기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려 공격에 나서는 것이다지배계급이 계급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제 노동계급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원인인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기 위해 계급을 조직하고 싸워야 한다현재의 모든 위기는 자본이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국가를 넘어 노동계급의 국제연대로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사회적 필요에 의한 생산을 건설해야 한다.

 

난방비 폭탄물가 폭등실질 임금감소생계비 위기복지 축소노동강도 강화노동자 운동 공격... 이 모든 것을 계급전쟁이라고 부르자이제 노동계급이 이 전쟁에서 반격할 때이다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에 의지하지 말고 독립적 조직인 파업위원회대중집회노동자평의회를 구성해 반격해야 한다.

 

난방비 폭탄자본주의가 원인이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 전면화!

노동자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3년 2월 14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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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재앙의 이름은 자본주의다 - 오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연대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재앙의 이름은 자본주의다 오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연대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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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는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에 대한 튀르키예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그룹」 동지들의 성명서를 소개한다끔찍한 재앙 앞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고이 "자연적재앙의 본질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와 투쟁을 호소한 동지들에 경의를 표한다.

 

 

지난 2월 6일 카흐라만 마라슈(Maraş)에서 발생해 이웃 지방과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의 파괴적인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이미 언론은 만 명 이상의 사람이 잔해 아래에서 사망했고수만 명이 부상했고만 채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발표했다지난 이틀 사이에 일부 도시와의 통신이 끊겼다도로다리공항이 파괴되었고이스켄데룬(Iskenderun) 항구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많은 지역에서 전기수도천연가스 연결이 끊겼다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혹독한 겨울 환경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튀르키예의 군사 점령하에 있는 시리아의 지진 지역에서도 매우 심각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연달아 발생한 두 차례의 대지진은 확실히 이례적이다그러나 지배계급과 그 정당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진으로 인한 파괴가 정상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야당과 집권 자본가정당 모두의 "국민 통합"에 대한 역겨운 요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자본주의와 국가가 이 파괴의 주범이다.

 

1.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으로서 지진 지역에서 집을 잃고부상당하고친척을 잃은 사람들과 행동으로 모든 종류의 연대를 보여줄 것을 알고 있다수백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이미 지진 지역에서 수색 및 구조 활동에 자원하여 참여했다이미 전 세계에서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노동자들과 수색 구조대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인 이 연대는 필수적이다프롤레타리아트는 서로를 제외하고는 믿을 사람이 없다우리는 지배계급과 국가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계급적 단결을 통해서만 해방을 기대할 수 있다.

 

2. 튀르키예의 과거 지진 경험은 자본의 사회적 재생산을 목표로 발전한 도시화의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의 증거이다지진 부적합 건설사람들이 지진 지역의 다층 건물과 인구 밀집 도시에 밀려드는 유일한 이유는 수도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20년 전(마르마라 지역)에 발생한 괴뢰크(Gölcük) 지진과 뒤체(Düzce) 지진 이후이번 지진은 국가가 취한 모든 '조치'의 미흡과 지배계급이 흘린 악어의 눈물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이 지진과 그 영향은 이미 국가의 존재 이유가 빈곤층과 프롤레타리아 인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임을 고통스럽게 증명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왜 재난이 정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체 생산 인프라를 파괴하는 데도 영구적이고 견고한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는 것일까자본주의하에서 건물도로항만요컨대 인프라 투자는 일반적으로 영속성이나 인간의 필요를 염두에 두고 건설되지 않기 때문이다자본주의에서 모든 인프라 투자는 국가가 하든 민간 기업이 하든 수익성과 임금노동 체제의 지속을 목표로 구축된다밀집된 인구는 살기 힘든 도시로 몰려든다지진이 없더라도 기껏해야 100년을 버틸 수 있는 건강에 해로운 콘크리트 건물들이 도시와 농촌을 가득 채운다지난 40년 동안의 끔찍한 자본주의 도시화는 튀르키예 전역의 도시와 마을까지도 그러한 콘크리트 무덤으로 만들었다잉여가치 생산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는 가능한 한 많은 살아있는 노동력즉 프롤레타리아트를 고용하고 고정 자본 투자즉 인프라를 최소한으로 유지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자본주의에서 건설은 지속적인 활동이며건물의 영속성환경과의 조화인간의 필요에 대한 반응은 완전히 무시된다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약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선진 서구 자본주의의 규칙이다자본과 국가의 유일한 사회적 목표는 계속 증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를 영구화하는 것이다.

 

4. 자본주의 질서는 자신의 착취 질서를 재생산할 수 있는 해결책조차 내놓을 처지가 못 된다. "자연재해 앞에서 자본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기까지 하다우리는 국가의 통제하에 있는 구호 조직들의 조정 부족과 긴급 구호 분배에 대한 국가의 무능력에서도 이러한 무력감을 볼 수 있다우리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더 깊은 튀르키예와 같은 나라뿐만 아니라 2년 전 홍수 앞에서 무력했던 독일이나 인프라 투자를 소홀히 하여 홍수로 도로와 다리가 무너진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중심 국가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5. 부르주아 야당의 일부 분파가 국가가 지진 피해자를 "돕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국가의 본질에 대한 기만적인 관점을 제시한다국가는 구호 기관이 아니다국가는 소수 착취 계급의 집단적 폭력 기구이다국가는 자본의 이익을 보호한다확실히재난 지역에서의 혼란의 통치는 지배계급의 약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본 자체의 재생산을 방해하기 때문에국가는 최소한의 "지원"을 조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최소한의 지원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다재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무엇이든그 주요 기능은 프롤레타리아트를 통제하고 국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하는 것이다국가는 자본 축적을 돕는 이념적물리적인 기계이며노동자들을 치명적인 콘크리트 관()집으로 밀어 넣고재난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는 상황의 수호자이다.

 

6.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경험하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받은 감염병기근전쟁은 "자연스러운현상이 아니다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그 순간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지진 단층선과 가능한 규모는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이 모든 재앙에 책임이 있는 주체는 자본주의와 민족국가즉 잉여가치와 임금노동의 착취를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군국주의-민족주의 경쟁을 심화시키며 인류의 존재와 미래를 위협하는 기존의 지배계급 전체이다자본주의가 계속 지배하고인류가 민족국가와 계급으로 계속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이러한 재앙은 계속 일어날 것이며점점 더 치명적이고 파괴적이며 빈번해질 것이다이것은 자본주의의 고갈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징후이다전 세계적으로 지배계급은 인류를 전쟁끔찍하고 살기 힘든 도시기아와 기근거대한 세계 기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마라슈와 그 주변에서 발생한 지진은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제공할 긍정적인 미래가 없다는 마지막 구체적이고 고통스러운 증거이다그러나 이것이 비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이번 지진에서 우리 계급이 보여주고 앞으로 보여줄 연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재앙이 참혹한 것은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우리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세상을 바꾸고 자본의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인류와 지구의 자원은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영구적이고 안전한 주거지와 정착지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이를 향한 길은 해방을 위해 세계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자신감을 키워 부패한 자본가계급으로부터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세계적인 투쟁에 참여할 때 열릴 것이다.

 

2023년 2월 8

튀르키예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그룹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310/name-disaster-capitalism-only-proletarian-class-solidarity-can-sav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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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7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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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7주기 추모제

 
● 박일수 열사 19주기 추모제와 합동으로 진행
● 일시|2023년 2월 11일(토) 오전 11시
● 장소|솥발산열사묘역(하북면 삼덕로 288)
● 이동편|운영위원들이 차량을 운행할 예정이므로 동승 가능합니다.
● 문의|010-5135-7957
● 참가신청| bit.ly/윤웅태7주기
 
직접 참가 못하셔도 위 링크에서 윤웅태 동지를 기억하는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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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6호] 국가 통합을 위해 봉사하는 자본주의의 선전

국가 통합을 위해 봉사하는 자본주의의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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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은 반동적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이나 자유주의적인 가디언(Guardian)의 기사에서든가장 우파적인 토리당 정치인이나 가장 좌파적인 노동조합 지도자 입에서 나오든국가 통합의 '서비스'에서 '의무희생회복력'의 중요성을 거듭 반복하면서 부르주아지 전체가 선전의 광란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신호였다캔터베리 대주교부터 지역 교구장에 이르기까지 영국 교회는 같은 곡조로 노래하고 있다대중의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지배계급과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그러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즉 학자소설가역사가예술가배우스포츠맨신문 칼럼니스트들은 이 열흘간 긴 슬픔의 카니발에 그들 자신의 작은 공헌을 추가하고 있으며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겉치레만큼 독립심이 강한 마음이 아니라 왕실의 제복을 입은 보병만큼이나 멍청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의 눈사태는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에게 유익한 교훈을 준다많은 부차적인 분열과 갈등에도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없는 국가 방위에 직면하여 지배계급과 국가기구의 모든 부분좌파와 우파자유주의자와 포퓰리스트왕당파와 노동조합주의자들이 하나로 뭉친다.

 

이 캠페인을 노동계급 타파를 위한 클럽으로 활용하는 것은 여왕 사망이 발표된 직후 현재 영국의 파업 물결에 관여하고 있는 3개의 노동조합인 RMT(철도), CWU(우편)과 TSSA(교통)가 국가 애도 기간 계획된 파업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한 직후에 강조되었다. RMT의 "급진적지도자인 믹 린치(Mick Lynch)는 “RMT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전국에서 동참한다. 9월 15일과 17일에 계획된 철도 파업은 중단한다우리는 그녀의 가족친구그리고 나라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노동조합의 총지도부인 TUC(노동조합 총연맹)는 파업을 조정하는 척하려던 회의를 10월이나 11월로 연기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터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한 이래로 위기 시에 국가 통합에 대한 존중이 노동조합의 특징이었기 때문에이러한 계급투쟁의 '중단'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노동당은 항상 우파에서 좌파로 입헌군주에 충성을 맹세해왔다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좌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야당인 노동당 전 좌파 지도자 제러미 코빈은 2017년 "군주제 폐지는 자신의 의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고며칠 전 여왕에 대한 공식적인 조공을 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

 

부르주아지는 위기에서 이익을 얻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며 찬송가와 설교행렬경례감동적인 조공 등으로 투쟁적 노동계급이 국익즉 이윤과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중요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주입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이 사회가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 분열을 감추기 위해 이 캠페인을 사용하려고 하는 반면그것은 또한 영국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포퓰리즘 부상과 브렉시트 재앙으로 증폭된 제국주의적 입장의 깊은 균열 중 일부를 덮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스코틀랜드의 독립에 대한 위협과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관계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하여애도 주간의 침울한 의식은 여왕의 관이 에든버러(Edinburgh) 거리를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새로운 왕의 첫 번째 임무는 북아일랜드의 힐스버러(Hillsborough)성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부르주아지즉 영국과 치명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의 지배계급인 그들은 왜 이 애도의 가면을 쓰고 조기를 게양하는 가장무도회에 참가하는 것일까심지어 블라디미르 푸틴조차 애도를 표했다.

 

여왕은 영국의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의 적인 프롤레타리아와 맞서는 모든 부르주아지의 세계 자본주의 전반을 위해 국가의 연속성안정성지속성을 대표했다는 것이 그 답이다그녀와 영국 왕실은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지 질서의 인간적이고 친근한 겉모습이었으며식민지 잔학 행위제국주의 대학살파괴적인 경제 위기노동 대중의 착취와 빈곤화를 "국가 공동체"에 대한 단결과 봉사의 이름으로 모호하지만 조용히 정당화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는 근본적인 부르주아지 질서와 연속성의 존재로 상징되었는데이는 현재의 생산 방식이 어떻든 간에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세계 자본주의 불안정성이 깊어지고모든 수준에서 재앙의 눈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봉건적 잔재

 

영국 혁명 당시 영국 부르주아지가 집권했을 때 절대왕정의 대표이자 옹호자였던 찰스 1세 국왕은 1649년 혁명적 의회 의원들에 의해 참수되었다그러나 상승기의 영국 부르주아지는 완전히 새로운 국가기구를 통해 그 통치가 유지되고 안정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군주제는 귀족들의 오랜 외교적정치적군사적 경험과 함께 다시 가져와야 했지만이번에는 헌법에 따르는 부르주아지 의회에 복종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만일 부르주아 국가가 자본주의 지배계급 이익을 위해 통치한다면 그것은 전체 국민의 대표자로 등장해야 하며현실에서처럼 비교적 최근에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라항상 태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그러므로 국가는 사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쟁 계급의 이익보다 높은 것으로 보여야 한다착취당하고 학살당한 사람들에게 착취자와 전쟁 숭배자는 그렇게 보여서는 안 되며궁극적으로는 당신과 나처럼 살과 피가 있고 인간의 감정을 가진 가족으로 보여야 한다[1]. 이러한 군주제와 같은 봉건 제도의 보존이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정한 현금 지급"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임금 노예제는 착취당하는 사람들조차도 국가 가족의 일부라는 환상에 의해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3세기가 넘는 동안 이러한 가부장적 통합의 외관을 완성해 왔다그러나 세계 자본주의 모순은 겉모습조차 새로울 게 없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에 대해 아첨하는 논객들은 그녀의 후계자들이 그녀의 통치에 대한 환상을 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웨일즈의 왕자로서 항상 정치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던 새 왕은 부르주아지 특정 부분에서 인기가 있었던 적이 없기에 정치적 분열을 넘어 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현재 국가 통합의 축제는 제국주의 영국이 열렬한 선수인우크라이나의 자본주의 간 대학살이 모든 국방과 애국심에 대한 위선과 시대착오를 드러냈을 때 열리게 된다미래는 국익이 없는 계급국제적 계급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달려 있다.

 

2022. 09. 15

코모(Como)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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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우리는 국가 통합의 자본주의 종교가 사상과 감정 조작에만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빨랐다런던과 에든버러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군주제를 폐지하라" "나의 왕이 아니다."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던 시위대 2명이 체포되었다거리 시위 가능성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2022년 경찰·범죄·양형 및 법원법이 체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동되었다.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249/capitalist-propaganda-service-national-unity-workers-have-no-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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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권리투쟁,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다

장애인 권리투쟁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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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비마이너

 

장애인 권리투쟁의 배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새해에도 지하철 탑승 시위에 이어 지하철 선전전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전장연은 단순히 장애인 이동권 보장뿐만 아니라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해 4대 법률(장애인 권리보장법장애인 탈시설지원법장애인 평생교육법장애인 특수교육법개정과 이와 관련된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장애인 권리 요구는 최근의 지하철 탑승 시위로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알려졌지만사실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내용이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전장연이 요구한 증액 예산 중 106억 8,400만 원(고용노동부 장애인 고용관리 지원 사업)만을 반영했다이는 전장연 요구안의 0.8%에 불과하다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장애인 권리 관련 예산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자적 자세는 다르지 않았다더 정확히는 방치와 무시억압으로 일관하였고결국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 반영되었다게다가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을 상대로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 6억여 원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했다.

 

지난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과 화물노동자 파업을 제압한 이후 윤석열 정권의 강경 대응 기조는 자신감을 얻었고 서울시의 대응도 그 연장선이다서울중앙지법은 민사에 대해 전장연이 시위를 중단하는 대신 서울시가 19개 역사에 내년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조정안을 내놓았다시위가 5분 넘게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면 전장연이 공사에 회당 500만 원씩 지급하는 조건도 달았다하지만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거부했다윤석열 정권과 서울시는 장애인들의 절박하고 정당한 투쟁을 불법’, ‘민폐로 매도하고 혐오를 조장하면서장애인들을 대화 상대가 아닌 제거 대상지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원천으로 지목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위한 전장연의 시위가 비장애인의 불편과 비용 낭비를 초래한다라는 논리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손실을 초래한다라는 자본가계급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권리는 이동할 권리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일할 권리교육받을 권리 등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이다이런 점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허울뿐인 정의와 공정으로 치장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에도 해당한다이는 장애인 권리투쟁에 노동계급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간 협상은 계급적 역량과 투쟁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데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요구가 협상테이블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계급적 연대가 필요하다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는 노동자의 파업과 같이 장애인 권리예산 증액을 위한 실질적인 협상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지난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은 장애인 권리 요구와 함께 20년 넘게 지속해왔지만이번처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 탑승 등 노동과 일상 공간으로 나와 자신을 집단으로 드러냈을 때 그나마 사회적 관심과 논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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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비마이너

 

투쟁을 통한 권리 쟁취의 역사

 

한국보다 장애인 권리가 훨씬 더 보장되는 이른바 장애인 복지 선진국의 장애인 권리도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결과이지자본주의 사회와 정부의 선의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에 장애인 운동단체가 건설되면서 장애인 권리투쟁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 1995년에는 장애인들이 버스와 기차를 점거했다약 1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장애인들은 이 싸움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을 만드는 거라고 주장하며 교통수단에 자기 몸을 수갑으로 연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이어갔다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 2015년 6월에는 중증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정부 보조금인 자립생활기금(ILF)을 폐기하려는 정부 계획에 항의하기 위해 장애인 활동가들이 영국 의회 하원 건물 로비를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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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리브콤

 

· 2017년 영국의 철도노동자는 자본의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공공 안전 조치와 평등한 권리를 후퇴시키는 정책에 맞서 파업을 진행했다장애인에 대한 공공안전 조치의 후퇴는 철도 이용객들에 대한 안전 조치 후퇴철도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건물을 점거해 26일 동안 농성을 벌인 역사적인 투쟁과 1978년부터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장애인들이 버스 운행을 막은 것을 시작으로 십수 년간의 장기 투쟁 끝에 '미국장애인법'(ADA)을 관철했다.

· 2006년에는 청각 장애 학생들이 워싱턴 DC의 갤러뎃 대학교(세계 유일의 청각 장애인 대학)에서 점거 투쟁을 벌였다학생들은 청각 장애인 문화 발전에 전념하지 않겠다는 차기 총장의 임명에 반대하여 시위를 시작했다학생들은 모든 입구를 막고 대학 건물을 점거하여 학교를 폐쇄했다이에 경찰이 점거 건물을 습격해 130명 이상의 청각 장애 학생들을 체포했다경찰은 1960년대 이후 워싱턴 DC에서 가장 큰 대규모 체포라고 밝혔다하지만점거는 계속되었고다른 청각 장애인들은 갤러뎃 대학과 같은 청각 장애인 '텐트 도시'를 만들어 지지를 보여주었으며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50개가 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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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리브콤

 

<폴란드>에서는 2014년 장애인 부모들이 폴란드 의회를 점거했다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지급하는 적은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부모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의회를 점거한 이들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언론인들이 우리의 행동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우리는 지금 우리의 행동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자녀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 간의 투쟁 끝에 이러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우리는 여전히 실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만약 우리가 지금 승리하지 못한다면분명히 패배 후에 다시는 우리 자신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우리는 또한 이 나라에서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고자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한 두려움 없이정상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우리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지만우리의 사랑으로 음식 문제를 해결하거나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의회에서의 이러한 시위는 정부가 듣지 못하거나 적어도 모른 척하는 우리의 결단력과 절망의 외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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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리브콤

 

이처럼 장애인 권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수많은 투쟁과 연대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대공황 시기에 견고한 단결과 파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점거 투쟁을 시작했고자본가들은 그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법률에 호소하며 경찰을 동원했다하지만자본가에 맞서 파업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맞서 투쟁을 지속했고 투쟁 형태를 발전시켜왔다장애인들의 대중교통과 입법기관 점거 투쟁은 생산의 주인인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생산을 멈추듯이 사회의 주인인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동 수단을 멈추고 법 제도에 압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수단이다.

 

자본주의의 장애’ 개념과 노동계급의 연대 필요성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한 잉여노동이 이윤의 원천이 된다이윤추구 압박은 노동강도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난다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노동강도는 높아지며이러한 노동강도와 노동생산성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의 대상이 된다이것이 장애 개념에 대한 기원이었다.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다장애는 우리가 가진 손상 위에 부과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 없이 사회에 대한 완전한 참여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됨으로써 초래된 것이다이렇게 장애인은 사회 안에서 억압받는 집단이 된다.” (영국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1976)

 

이러한 개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모자보건법 14조에서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예비 부모의 낙태를 허용유도하고 있다지난 문재인 정권에서는 형법상 낙태죄를 남겨 두고 낙태 허용 범위만 일부 확대한 형법 270조 낙태금지 조항이 있다겉으로는 상충되어 보이지만낙태금지법과 모자보건법은 한편으로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인간의 결혼 및 출산을 장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등한 인간의 출산을 금지하는 국가통치 장치이며자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이다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의 문제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문제 제기뿐만 아니라 가치 창출 기여도에 따른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필요하다.

 

장애인 권리투쟁은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파괴해야 하는 싸움이다장애인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결코 따로 일 수 없다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한 권리투쟁은 장애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고 노동계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국가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삭감한다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 권리투쟁이 약해질 때도 마찬가지이다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밀리면그 고통은 가장 취약한 곳으로 향한다장애인과 노동자들이 견고하게 연대하지 않으면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리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를 통해 공격을 강화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는 사람들이 할 수 있어야 할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특정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자본주의는 특히장애인과 노동계급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잉여와 생산의 논리를 만들어냈다코뮤니즘은 사람들이 각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는 원칙에 따라 생산의 자체 관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배타적 관행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기반이 되는 소외의 논리를 극복한다손상과 같은 요소를 떠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재생산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통합되는 것이 코뮤니즘의 목표이며각각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이것은 장애해방과 노동해방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장애인 권리투쟁이 장애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이 필요하고이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장애인과 노동계급이 연대하여 장애인 권리 쟁취하자!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자!

장애인과 노동자의 희생이 아닌 자본가계급과의 계급전쟁으로!

 

2023년 1월 19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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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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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더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년 1월 15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그 이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전후 1918년 11월 8룩셈부르크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년 11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노동자 탄압 시기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떠나고 싶지 않았지만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일자리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1919년 1월 15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는 후에 나치 정권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몇 년 후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진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그리고 오히려 독일 국민을 비난했다.

 

이 독일 멍청이들은 무릎을 꿇고 노스케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거리와 광장은 모두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15일의 살인은 시작일 뿐이었다이후 몇 달 동안 노스케 치하의 수천 건의 살인의 시작이자 히틀러 시대의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건의 살인의 시작이었다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호였다.

 

이러한 잔학행위의 90주년을 맞아 독일자유당은 베를린에 노스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애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포팔라는 노스케의 행동을 공화국의 용기 있는 방어라고 극찬했다. (2009년 1월 11일 베를린 신문 Tagesspiegel에서 인용)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수학경제학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참여했다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대대적 파업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 되어야 했다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독일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고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혁명가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결국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동지들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오늘날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사실로 만들며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더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수감 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도 다루었는데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한 점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는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했고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에게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에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있었다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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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그리고 이렇게 썼다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과 학살로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한 것이다나치즘의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거 자신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사회민주당(SPD)과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독일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결국 세 곳 모두 결사 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 만다결국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나는 그래왔고지금도 그러하며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비하하고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그것의 1946년 제목(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칼 카우츠키에밀 반데벨드루돌프 힐퍼딩칼 레너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음모의 대상이 된다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국가와 혁명, 1917)

 

지배계급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다비록 문명화된 야만인들스스로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유럽의 심장에서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고 할지라도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열망의 원천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제국주의 개념국가에 대한 질문 등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계급전쟁에서 살아 있다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4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고 있지만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나고 있다.

 

탄압받는 상황에서 자본의 질서에 관하여 쓴 마지막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은 질서를 되찾았다!” 비겁한 아첨꾼들아너희들의 질서는 모래성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내일혁명은 다시 일어나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고불타오르는 트럼펫 소리가 너희를 공포에 떨게 하며 증명할 것이다.

 

나는 그래왔고지금도 그러하며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3년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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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5호] 볼셰비키 중 가장 비타협적인 인물: 가브릴 미아스니코프, 「노동자 그룹」과 러시아혁명의 퇴보Ⅱ

볼셰비키 중 가장 비타협적인 인물:

가브릴 미아스니코프노동자 그룹과 러시아혁명의 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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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가브릴이 볼셰비키 당에서 제명되면서 노동자 그룹은 연서명을 받기 시작했다그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 그리고 스탈린의 제명을 요구했다. (아브리치레닌에 대한 볼셰비키 반대파레닌이 없을 때노동자 그룹이 비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장 열심히 움직인 사람들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였다그들이 선동한 피해망상으로 인해 가브릴은 체포되어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런데도당은 노동자 그룹」 선언문 사본이 러시아 전역그리고 심지어 국제적으로 배포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소그룹은 성장하기 시작했다불과 몇 달 만에 거의 300명에 달하는 성원은 거의 대부분 당을 떠난 '고참 볼셰비키'들이었다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였다노동자 그룹은 주로 공장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그들은 점점 더 자주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적인 파업 물결에 동조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남아있는 노동자 반대파」 일부가 파업에 참여했지만선동에 관여한 가장 중요한 조직은 노동자 그룹이었다고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는 지적한다어느 순간그들은 크렘린에 있는 모든 붉은 군대 수비대의 충성심을 얻었고정부는 즉시 스몰렌스크(Smolensk)로 옮겼다.(아브리치레닌에 대한 볼셰비키 반대파다른 분파들과는 달리노동자 그룹은 볼셰비키 당의 지도력을 획득할 수 없고러시아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략을 세웠다회원 자격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볼셰비키당의 반체제 인사들도 두 조직에서 '이중 카드'로 허용되었다박살난 다른 반대파들과 달리노동자 그룹은 볼셰비키와 함께 지하에서 차르에 대항하는 그동안의 투쟁에서 얻은 성원들의 많은 경험을 이용했다공개적인 행동과 비밀스러운 행동이 혼합되어 GPU에 의해서 탄압을 받았던공개 그룹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반체제 유고슬라비아 코뮤니스트인 실리가(Ciliga)는 노동자 그룹과 그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터내셔널의 맑스 표어인 "노동자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업이어야 한다."라는 강령의 기초가 된 노동자 그룹은 '당의 독재'라는 레닌주의 개념과 혁명이 쇠퇴하는 초기에 레닌이 창안한 관료적인 생산조직에 전쟁을 선포했다레닌주의 노선에 맞서 그들은 공장 그룹을 시작으로 대중 스스로 생산을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정치적으로 노동자 그룹은 노동자의 권력과 당의 통제를 요구했다이 나라의 진정한 정치지도자들은 당이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어떤 정당에서든심지어 코뮤니스트당에서도 권력을 철회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레닌또한실리가)“

 

독일 망명기간 동안미아스니코프는 KAPD와 접촉했고그들은 노동자 그룹과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둘 다 많은 문제에 대해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코민테른이 승인한 KPD의 좌파와도 접촉이 이루어졌다그는 심지어 KPD의 아카디 매슬로우(Arkady Maslow)를 노동자 그룹」 외국 지국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고까지 했다매슬로는 거절했지만, KAPD와 KPD의 좌파 모두 러시아에서 금지되었음에도 미래 노동자 그룹의 문학을 출판하는 것을 돕는데 동의했다.

 

1923년 초 독일에서 미아스니코프와 함께, N.V. 쿠즈네초프(Kuznetsov)는 노동자 그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그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옛 노동자 반대파들과 많은 모임을 가졌다독일에서미아스니코프는 쿠즈네초프에게 반대파가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이전 동맹인 실라피크노프(Shylapiknov)가 약하다는 것 그리고 이때쯤이면반체제 노동자 그룹 성원들을 당 지도부로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경고했다. (알렉산더 슐라프니코프, 18851937: 늙은 볼셰비키의 삶바바라 알렌쿠즈네쵸프는 또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영입하려고 시도했지만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사람을 엄밀히 영입하는 데는 거의 운이 없었다이것은 또한 아마도 GPU에 의한 매우 강도 높은 보안 감시로 인해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 해에대규모 파업의 새로운 물결이 러시아의 산업 중심지를 강타했고노동자 그룹은 정치적 자유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선동하기 시작했다이에 대해서볼셰비키당은 이들을 "()코뮤니스트"로 규정하고 GPU에 이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트로츠키는 노동자 그룹의 일부 성원들과 개인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음에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GPU가 노동자 그룹」 지도자를 확인하게 되면그들은 체포되거나 자동으로 해고되었고 당과 노동조합에서 쫓겨났다.

 

이에 대응하여공장 노동자들과 심지어 지역당 지부의 평당원들에 이르기까지 종종 항의하곤 했다사이먼 피라니(Simon Pirani)가 얘기한 바와 같이, GPU 탄압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이즈음에 항의하는 것조차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노동운동가무소속 그리고 반대파 사람들은 가끔 체포되어서 고문을 당했다보기를 들어 보면, 1921년 그가 처형되기 전에 아나키스트 파냐 바론(Fanya Baron)은 좌파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좌파그리고 독립적인 활동가들과 함께 부티르키(Butyrki)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그 죄수들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선동한 죄로 모두 체포되었다죄수들은 독방에 감금되어 구타당했다여자들은 남자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수용되었다특히 끔찍한 고문 중 하나는 죄수들을 알몸으로 벗기고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구덩이외부에 두고찬물을 부어 영하의 온도에서 밤새 방치하는 관행이었다유령 처형대는 또 하나의 일반적인 고문 기술이었다체포된 노동운동가들의 수가 천문학적은 아니었지만그러한 협박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막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그룹은 모집뿐만 아니라 가장 용감하고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그들은 파업을 지원하고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미 추방된 모스크바 공장의 수백 명의 코뮤니스트당원과 같은 그룹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이들은 당 지도부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던져진 계급의식적 노동자였다만약 당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않는다면노동자 그룹은 그들을 조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계 미국인 악기 공장고스몰로코(Gosmoloko) 유제품 공장바우만(Bauman)의 옥티아브르(Oktiabr) 엔지니어링 공장모스크바 중포 공장 등 산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사이먼 피라니퇴보한 러시아혁명, 1920-24)

 

 

미아스니코프는 결국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23년 후반에 그는 지노비예프에게 러시아에서 그의 존재가 용인될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연락했다그는 안전을 보장받았지만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GPU에 체포됐다. GPU 책임자인 "아이언 펠릭스(Iron Felix)" 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개인적으로 미아스니코프스의 체포를 감독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9월 28일 노동자 그룹」 회원 28명도 체포되었다이들 중 14명은 국외로 추방되었고나머지 14명은 징계를 받았다쿠즈네초프를 포함하여 그 나라에서 추방된 사람들 대부분은 조직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GPU의 최종적인 탄압은 노동자 그룹이 모스크바에서 하루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촉구하면서 촉발되었다그들은 1917년의 급진적 입장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며 레닌의 초상화가 그려진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을 이끌 계획이었다.

 

미아스니코프가 납치된 다음 날슐라니코프는 일상적인 방문을 위해 그의 아파트에 들렀고누가 나타날지 기다리고 있던 여러 GPU 요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알렌알렉산더 슐라니코프, 18851937: 오래된 볼셰비키의 삶그는 며칠 후에 풀려났지만훨씬 더 어두운 운명이 미아스니코프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다시 한번 구금되었고 즉시 단식 투쟁을 선언했다열흘 만에 GPU는 강제로 음식을 먹여서 그의 항의를 약화시켰다미아스니코프는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근에 들어서야 프라우다(Pravda)가 폴란드에서 그러한 대우를 가장 야만적이고 터무니없는 절차로 규정했다그러나 그것은 폴란드 부르주아계급만을 지칭하는 것 같다그러나 톰스크(Tomsk)에서 이를 적용하면 이는 분노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코뮤니스트 문화의 꽃이다.”라고 말했다단식투쟁 13일째 되는 날, GPU는 새벽 2시에 그를 침대에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데려갔고그곳에서 그는 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대 때문에 '미쳤다'라고 판정되었다.

 

"사실그러한 행위는 폴란드의 파시스트도 실행하지 않는다그들은 아직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지만여기서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누구든 항의하는 자는 미쳤고 미친 자들에 속한다특히 그가 노동계급이고 20년 동안 코뮤니스트였을 때 말이다파시스트는 이러한 종류의 프롤레타리아 윤리에 대해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 교도소에서 온 편지에서 인용)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전술은 정권이 더 권위주의적이 되면서 소련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다.

 

역사학자 폴 아브리히(Paul Avrich)와 사이먼 피라니(Simon Pirani)에 따르면이것은 노동자 그룹의 붕괴였다그러나 반대라는 것을 제시하는 증거가 있다노동자 그룹은 케이트 루마노바(Kate Rumanova)가 운영하는 망명 지부를 수년간 유지했다. 1924, GPU는 모스크바에서 금지되고 불법화되었던노동자 그룹의 구성원들과 만나 토론한 한 무리의 붉은 군대 병사들을 체포했다. (헤베스1920년 이후 러시아 코뮤니스트좌파헤베스(Hebbes) 또한 1924년 노동자 그룹과 관련된 많은 사건을 열거한다. 11월 7일 모스크바에서 참가자들이 모두 체포된 시위도 여기에 포함된다. 12월 8이 그룹은 11명의 조직원이 혐의 없이 체포되어우랄에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단을 발행했다그들은 체포의 이유를 공개하고공개적으로 재판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12월 27노동자 그룹」 성원들은 GPU 감시하에 챠르딘스크(Tshardynsk)로 추방되었다다수의 붉은 군대 병사들이 NEP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착취‘(노동자 그룹」 슬로건)라고 부르는 문서를 만들어 탄압받는 노동자 그룹과의 연대를 선언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GPU에 체포되었다이 그룹은 해산되었고 반체제 인사들은 스몰렌스크(Smolensk)로 이주해야 했다.

 

1928년 노동자 그룹은 모스크바에서 지하 회의를 열 수 있었다살아남은 성원들은 사프로노프(Sapronov: 민주중앙집중주의 그룹 전 회원)가 이끄는 이른바 15인조가 입안한 안을 표결에 부쳤다이 제안은 15개 그룹의 성원들과 노동자 그룹그리고 남아 있는 소수의 노동자 반대파들이 (노동자 그룹의 모든 입장과 매우 유사함공통 강령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결의안은 채택되지 않았지만회의는 노동자 그룹의 중앙 지국을 "구소련 코뮤니스트당 조직국"(올리버볼셰비키 좌파와 노동자 권력)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이 회의 이후 러시아 밖에서 온 노동자 그룹」 문서들이 구소련 코뮤니스트당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비록 참가자의 수가 매우 적었다 할지라도우리는 이 회의가 실제로 열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또한이 그룹은 1930년까지 노동자의 권력으로 가는 길과 KAPD 및 영국의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만든 '노동자 전함(Workers Dreadnaught)의 두 신문에 실렸던 많은 기사를 출판하는 데 성공했다.

 

실리가(Ciliga)에 따르면북극권 북쪽에 위치하고 유럽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추정되는 석탄 채굴 도시 보르쿠타(Vorkuta)의 감옥에 있었던 노동자 그룹」 운동가들의 증거도 있었다노동자 그룹민주 중앙파트로츠키주의자들 등 25명의 개인이 노동자 그룹이 제시한 강령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1933-37년 사이에 좌파 코뮤니스트 연합을 결성했다. 15인의 강령은 테르미도르(Thermidor: 프랑스 혁명력의 제11; 7월 19-8월 17전야에 맑스주의 철학자 칼 코르쉬 조직의 코뮤니스트 폴리틱이 국제적으로 출판하였다. (올리버볼셰비키 좌파와 노동자 권력)

 

노동자 그룹이 1923년부터 지하에 계속 존재했다고 해도가장 두드러진 저항을 한 '반대파'는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였다. 1923년에 결성된 좌익 반대파는 평회원을 영입하는 데 몇 년이 걸렸는데이것은 대부분 이전의 반대파해체되고 나서 남은 반체제 노동자들그리고 관료주의에 불만을 품은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이 연합한 것이었다. 1926년 좌익 반대파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와 함께 연합 반대파를 결성했다. 26년 말트로츠키는 카메네프와 함께 정치국에서 추방되었고, 1927년 트로츠키지노비예프와 8,000명의 다른 반대파 당원들이 코뮤니스트당에서 추방되었다그리고 1929년에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좌익 반대파가 결집했을 때정권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반대하는 실질적인 저항을 하는 창구는 기본적으로 막혀 있었다좌익 반대파는 약간의 저항을 했는데, 1929년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된 후에는 관료들이 당을 숙청하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좌익 반대파」 지도부는 주로 당내에서 지배적인 경향에 도전했는데미아스니코프가 보기에는 이는 사실상 점점 더 반()혁명적인 정권에 대한 거의 소극적인 지지로 보였다확실히그는 큰 차이를 보지 못했다최근의 속임수」 서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83인의 강령(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주의자)은 일국 사회주의 건설론을 비판하고산업성장률이 9%인 스탈린의 5개년 계획 대신 20%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국제주의 5개년 계획을 제안한다. 20% 산업생산의 증가는 국제주의이고, 9% 증가는 '작은 민족주의 정신의 전형적인 보수주의로 보일 것이다.” (미아스니코프최근의 속임수)

 

좌익 반대파」 자체는 분열되었고, '사회주의 축적'이라는 형태를 중심으로 한 내부 논쟁이 있었다부하린과 이른바 "우익 반대파"는 농업의 잉여가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시장 메커니즘을 사용해야 하고 보다 꾸준한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좌파는 대규모 집 산화와 대량의 중공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스탈린의 "중앙분파는 관료주의와 '소비에트정권에 대한 통제를 공고히 하면서 두 입장 사이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였다스탈린이 마침내 당에 대한 중앙의 통제권을 공고히 하고 집단화를 강요했을 때다수의 초기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한 많은 코뮤니스트는 정권을 지지하는 태도로 돌아갔다노동자 그룹과 같은 초기 코뮤니스트좌파와는 달리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에그들은 소련이 어떤 면에서 여전히 혁명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좌익 반대파가 흥망성쇠 하는 동안미아스니코프는 망명지에 묶여 있었다. 1927그는 정치 활동을 자제한다는 조건으로 망명지에서 풀려났다항상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는 풀려난 즉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그러다 GPU에 다시 체포될 것이라는 제보를 받고 아마도 한밤중에 서류 가방만 가지고 도망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가브릴은 이른바 '마지막 유고'(NKVD와의 인터뷰 녹취록)에서 그가 투옥 말기에 작성해서 몰래 가지고 나온 새로운 정권 전복 소책자를 출판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그룹」 중앙본부가 그에게 해외로 탈출할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이론적으로그는 그룹의 새로운 국제 대표 역할을 맡았다그는 노동자 그룹」 문서를 물이 새지 않는 서류 가방에 넣고한밤중에 강을 헤엄쳐 건너서 국경을 넘었다그는 탈출하여 페르시아로 향하게 되었고그곳에서 계속해서 경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어느 날 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당국은 그가 가지고 온 서류 대부분을 소련 경찰에 넘겼다그는 몇 가지를 간신히 건질 수 있었지만이것들도 결국 KGB가 그의 아파트를 급습하여 탈취해 갔다.

 

미아스니코프의 '마지막 유고'를 번역한 말콤 아치볼드(Malcolm Archibald)에 따르면탈취된 문서에는 "현대 러시아 계급에 관한 것", "VKP[코뮤니스트총연합당(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간략한 비평", 그리고 코민테른 이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지노비예프부하린과 서신 왕래 그리고 소린(Sorin)이 노동자 그룹에서 쓴 책에 대한 답장도 있었다결국 노동자 그룹의 다큐멘터리 같은 역사의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그의 자서전그가 왜 로마노프 왕자를 죽였는지에 관한 장서, "청산주의와 맑스주의", 그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패배또는 10월을 배신한 사람"과 같은 다른 책들은 번역되지 않은 체 KGB 기록 보관소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로 가는 길을 찾은 미아스니코프는 편지로 다른 러시아 망명자들과 연락하려고 노력하면서 몇 년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1929년 그는 아들인 레프 세도프(Lev Sedov)를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가브릴과 트로츠키는 만나게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가 프랑스에 가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었다미아스니코프는 "최근의 속임수"라는 새로운 소책자를 트로츠키에게 주었다그리고 그는 소련은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론을 제시했다그는 트로츠키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했지만트로츠키는 이를 거절했다그 후 트로츠키는 다시는 미아스니코프와 정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사실 트로츠키는 노동자 그룹을 파괴하는 것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제11차 당 대회에서 미아스니코프를 비난하는 '검찰 역할'을 맡았었다이 시점에서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스탈린에 대한 증오와 코민테른 좌파에 대한 그들의 견해였다.

 

그들의 반대 기간미아스니코프와 트로츠키는 한 가지 비슷한 생각을 했다진정한 혁명 활동을 하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설립. 1930미아스니코프와 노동자 그룹에서 남아 있던 활동가들은 새로운 "코뮤니스트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꿈꿨다이것은 제3의 강령에 굴복하지 않았던 모든 혁명적 코뮤니스트 인자들을 통합하려는 의도였다노동자 그룹과 그들의 인터내셔널은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로 보게 될 것이고그들은 '또 다른 11'에 프롤레타리아가 소련을 전복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동시에 다소 모순되는 방식으로미아스니코프는 소련에 개혁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그러나 이것은 또한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독립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소련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로 이해한 것을 전제로 해서새로운 제인터내셔널을 설립한 사람은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가 도와준 몇 파운드는 미아스니코프가 터키에서 탈출할 때 도움이 되었다하지만 훨씬 더 많은 도움이 해외에서 있었다독일에서는 그를 지원하기 위한맑스주의 철학자 칼 코르쉬가 이끄는 위원회가 설립되었다그들은 그가 독일에서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독일정부는 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그러나 프랑스 CGT 건설노조 위원장 루이스 셀리에(Louise Sellier)가 프랑스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가브릴은 간신히 파리에 정착했다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나키스트 신문인 "로브리에 코뮤니스트(L'Ouvrier Communiste)"의 편집자인 프라우도모(Proudhommeaux)와 접촉했다프라우도모는 그를 다른 아나키스트 지굴레프이리닌( Zhigulev-Irinin)에게 소개해 주었고그는 그를 위해서 창문 닦는 일을 알선해 주었다지굴레프-이리닌은 또한 그의 논문 "노동의 목소리"에 미아스니코프스의 글 중 일부를 발표했다그들은 개인적인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고(이리닌은 프랑스 비밀 경호국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브릴은 금속공장으로 돌아갔다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생디칼리스트 CGTU의 성원이 되었다그리고 종종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단체와 행사에 참여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코뮤니스트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미아스니코프는 볼셰비키 정치(보기를 들어 노동자 국가 개념에 대한 일관된 옹호)를 분명히 유지했기 때문에 아나코 생디칼리스트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제 안정된 장소에서 거주하고 또 일하면서그는 현재 이름이 바뀐 코뮤니스노동자당 국제 서기국을 운영하는 역할을 잠시 맡았지만러시아의 모든 반대 세력이 무너지면서그 그룹은 다시는 지속되지 못했다그는 1931년에 "최근의 속임수원고를 완성했다그 소책자에는 많은 새로운 통찰이 담겨 있었다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묘사한 것 외에도미아스니코프는 1920년 볼셰비키당의 제8차 당 대회에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그는 볼셰비키가 9차에 이르러서는관료주의적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노동 농민감시단의 설립이 그러한 보기 중 하나였다부패를 억제한다는 의도였지만대신에 새로운 사찰단은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고 자기 자신의 잇속만을 챙겼다그뿐만 아니라전 세계의 다른 많은 코뮤니스트가 규정한 바와 같이적어도 '1인 경영'의 시행은 더 큰 문제가 되었다미아스니코프는 비록 그가 실제로 헤어지는 데는 몇 년(그리고 실제로는 추방)이 걸렸지만이것이 볼셰비키당과 영구적으로 결별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마침내그는 인민위원회의 설립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비록 그 당시에 그것이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모든 러시아 소비에트 행정부 위에 조직을 설립하는 것은혁명의 퇴보 기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 국가 전체에 권력을 이양했다.

 

 

흥미롭게도미아스니코프와 노동자 그룹아마도 러시아의 다른 코뮤니스트좌파 세력과 그들의 결합으로 인하여많은 문제에 대해서 그들의 태도를 바꾸었다그들은 여전히 소비에트가 생산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협동조합에 맡겨진 분배를 통제해서는 안 되고 또한노동조합에는 "일반적으로 노동자와 농민 감시관이 행사하는 국가 관료적 통제 기구의 기능"이 할당되어야 한다게다가인민위원회는 "부르주아 국가 내각의 먹지 사본"이었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4탄압은 다시 시작되었다이번에 미아스니코프는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프랑스 내정에 간섭한혐의로 기소되었다그는 출국 명령을 받았지만, CGT의 비서가 개입하여 판결을 뒤집을 수 있었다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직장을 들락날락했고정비공으로서 그리고 직물 염색공장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이 기간에 그는 사회주의 과도기러시아 혁명그리고 그의 고향에서 노동 운동의 역사에 관한 많은 저작을 완성했다.

 

독일의 점령기 동안가브릴은 직장에서 체포되었다아마도그는 자기 아들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소련 대사관에 갔을 것이지만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 붉은 군대에 입대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어느 쪽이든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았고 그는 게슈타포의 감시 아래 있었다그래서 그는 독일 점령지역이 아닌 곳으로 탈출했고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경찰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그들은 1941년에 명령을 받았는데도 그가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고 비난했고그런 다음 그가 법적으로 사면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그들은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그는 1943년 8월에 탈출하기 전까지툴루즈(Toulouse)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다그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파리에서 숨어 지냈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가브릴은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와 루스 피셔(Ruth Fischer)와 같은 다른 코뮤니스트 망명자들과 친구가 되었다그리고 그는 재혼했다그러나 미아스니코프 생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1946년에 그는 당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유인되었다그러나 그가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그가 유혹을 받았다면그의 전처인 다이아 그리고르예브나(Daia Grigor'evna)와 그의 아들(Miasnikov)을 만나겠다는 약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하지만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아들들은 이미 2차 세계대전에서 붉은 군대를 위해 싸우다가 사망한 상태였다아들이 사망한 후 그의 전처는 신경이 쇠약해져서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천천히 회복하고 있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친구들에게 그가 프랑스를 떠나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그는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즉시 체포되어 악명 높은 부티르키(Butyrki) 교도소로 보내졌다그곳에서그는 코뮤니스트좌파 가브릴 미아스니코프의 마지막 유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던 유언을 했다.” 소련 당국은 미아스니코프와 별거 중인 러시아인 아내에게 그가 소련으로 돌아왔다고 알렸고 그녀는 감옥에 있는 그를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그녀는 그가 1946년 11월 16소련 당국에 의해총에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도착했는데남편을 보기 위해서 도착하기 하루 전에 그는 살해당했다.

 

노동자 그룹에 대한 성찰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의 노동자 그룹이 그들이 직면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아있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일관되게 의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미아스니코프와 노동자 그룹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리 작더라도 역사에서 행동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행동을 통해 사회 환경을 재편할 수 있었다노동자 그룹은 그 계급 구성 때문에 이러한 맑스주의적 개념에 매우 열렬히 헌신했을 가능성이 크다철저하게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그들은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말하는 혁명적 진정성에 대한 추상적인 보증을 믿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최근의 속임수’ 전반에 걸쳐있는 미아스니코프가 비판한 많은 부분은 의미 있는 민주주의 개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관료가 "비판과 자아비판"을 정확히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것을 겨냥하고 있다그러나 노동자 그룹이 그렇게 철저하게 계급에 기반을 둔 것은 의식의 발전을 통해서가 아니었다차라리 가브릴 미아스니코프와 같은 주요 인물들에게서 목소리를 찾은 것은 노동계급 자체 내에서 저항이 더 거세어지게 되는 자발적인 산물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렇게 많은 탄압을 받은 조직인 노동자 그룹이 체카/GPU를 적절하게 비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들은 결국 1931년 소책자 "최근의 속임수"의 8가지 프로그램 일부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비밀 기관을 없애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GPU에 대한 비판은 비밀경찰의 지배에 도전하는 다른 조직들에 비해 다소 약했다보기를 들면내무부의 고위 관리로서 그의 짧은 재직 기간 동안 좌파 사회혁명당의 듀쿄브스키(Dukhovsky)는 체카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했다하지만그는 계급적 기원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바탕을 둔 사람들을 처벌하는 체카의 방법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그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의는 여전히 개인의 범죄(파버스탈린주의 이전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흥망성쇠)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체카의 처형을 승인한 위원회 일부로서그는 종종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의지에 반하는 결정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체카는 소비에트가 아니라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고 억압 기구를 노동계급 보다 우선시했다체카에 부여된 독립적 권력은 비슷한 역할을 했던우크라이나 저항군의 콘트라즈베다(Kontrrazvedka)와 비교가 된다콘트라즈베카의 행동이 통제 불능이 되자소비에트 평의회는 그들을 개혁했다그리고 역할의 제한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개혁은 즉시 실행되었다. (러시아 내전의 네스터 마크노마이클 말렛비록 이 개혁이 우크라이나 좌안(左岸)에서만 시행되어러시아와는 다른 규모였지만그런데도 억압적인 기관들이 정당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불가피했을 수도 있지만그들의 구조와 한계의 측면에서도 여전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볼셰비키 정권 초기 또는 테르미도르 기간 노동자들의 탄압을 에어브러시로 이용하지 않는다미아스니코프와 같은 투사에 의해 확인된 초기 실수를 무시하는 것은 미래의 사회주의 실험이 의심할 여지없이 직면하게 될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다자본주의 야만주의로 여전히 황폐한 세상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시도는 적어도 고립과 침해의 기간과 싸워야 할 것이다우리는 혁명이 국제적 날개를 펼칠 때까지 무엇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과거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일어날 수 있었던 반()혁명뿐만 아니라 과거 반혁명도 비판하지 않으려고 한다가브릴 미아스니코프와 노동자 그룹의 이야기는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그것은 노동계급 자체인 볼셰비키당이 처음으로 무기를 휘두른 지점에서 강요된 새로운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된 것에 대한 노동계급의 많은 반대 중 하나였다. <>

 

2021년 9월 12

Tommy Lawson

옮긴이 이명수

 

 

참고문헌

 

:

스탈린주의 이전소련 민주주의의 흥망성쇠사무엘 파버

알렉산더 슐랴프니코프, 1885-1937볼셰비키의 삶바바라 알렌

레닌 하의 레닌주의마르셀 리프만

작업장의 단두대, G.P 막시모프

노동자평의회안톤 판네쿡

1920-24년 러시아혁명사이먼 피라니

무장을 한 예언자아이작 도이처

크론슈타트레닌트로츠키 외

레닌그리고안톤 실리가

러시아혁명의 아나키스트폴 아브리치

급진적 전통리처드 곰빈

러시아혁명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내전 속 네스토르 마흐노미하엘 말레

혁명가의 회고록빅토르 세르게

러시아 교도소 국제 정치범 위원회로부터 온 편지

 

기사:

볼셰비키 좌파와 노동자 권력’, 미셸 올리버

레닌의 유아적 무질서’, 프란츠 펨페르트

레닌에 대한 볼셰비키의 반대파’, 폴 아브리치

코뮤니스트’ 1918년 4월 2일자

‘1920년 이후 러시아의 코뮤니스트 좌파’, 이안 헤베스

 

미아스니코프 원본 저작:

같은 길유일한 다른 방법, 1920년 12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노동자 그룹 선언, 1923년 2

코뮤니스트당 국제노동자 연서 초안, 1930년 3,

최근의 속임수, 1930년 10

좌파 코뮤니스트 가브릴 미아스니코프의 최후의 유언, 1945

22인의 호소슐리아프니코프콜론타이미아스니코프 등, 1922

 

<출처>

http://libcom.org/history/most-intransigent-bolsheviks-gavril-miasnikov-workers-group-degeneration-russian-revolut

 

 

<이전 글> 

볼셰비키 중 가장 비타협적인 인물 : 가브릴 미아스니코프(Miasnikov), 「노동자 그룹」과 러시아혁명의 퇴보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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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5호] 「숨을 참다 “코로나 시대의 우리 일”」을 읽고

숨을 참다 코로나 시대의 우리 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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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걸리면 안 돼.’ 엄마는 한동안 이 말을 달고 살았다코로나는 바이러스인데 그게 개인의 의지로 되는 거냐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엄마는 짐짓 심각해져서 걸리면 회사 못 다녀라고 했다회사는 안 다녀도 그만이지만 동료들에게 죄인’ 될 것이 더 무섭다는 말 또한 잊지 않았다. 100여 명이 같은 공간에서 하루 8시간 이상 붙어 앉아 있으면서도 전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어떤 긍정에서 나오는 믿음일까동료들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두려움이 면역력을 높이고 있는 걸까

 

혜숙 씨는 지금까지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문자를 서너 차례 받았다그때마다 상담사들은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런 연락이 꼭 금요일이나 주말에만 오는 것이다.”

 

누구는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었고운 좋게(?) 살아남은 누군가는 일이 너무 많았다일곱 명이 하던 수업을 혼자 떠맡다 보니 10개 수업을 연달아 하면서 쉬는 시간조차 사라졌다. ... 아이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네버엔딩 스케줄’ 때문에 졸 때도 있었다하지만 학생이 더 줄어들까 봐 전전긍긍하는 원장을 보면 힘들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해고보다는 과로가 나았으니까” (책속에서)

 

이 책이 나온 시기만 해도 하루 수천 명 단위로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한 시기였지만글을 쓰는 현재는 오미크론 변종바이러스 확산으로 연일 수십만 명이 확진되고 있고, 2022년 4월 20일 누적 확진자는 1,600만 명을누적 사망자는 2만 명을 넘겼다.

 

더구나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족친구직장 동료들마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목격하면서 나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은 신문이나 일반 매스컴을 통해 우리 사회가 코로나를 통해 특히 사회적 약자가 고통을 받고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숨을 참다 코로나 시대 우리일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여러 분야의 사회적 약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특수고용 노동자이주 노동자장애인프리랜서영세자영업자를 비롯해 코로나19 재앙을 직접 맞닥뜨린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를 르포형식으로 당사자들이 느끼는 고통과 수많은 어려움을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고 실감 나게 표현했기에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장기화한 자본주의 경제 위기 속에서 맞이한 코로나19 재앙은 사회적 약자의 삶을 더욱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또한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점점 더 벌어져 자본주의 모순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코로나 시대에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11편의 글로 담았고마지막에는 현장 분석을 통해 코로나 시대에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유럽 복지국가가 현재 코로나 극복을 위해 실행하는 정책을 비교 분석하면서 일부 대안까지 제시해 주면서 마무리한다.

 

 

물론 대안 문제에 있어서 나와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코로나 시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자본주의 체제 문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그러한 본질적인 문제가 빠졌기 때문이다르포형식이라서 생생한 현실 전달이 탁월하지만코로나19 발생의 근본 원인과 체제의 문제를 좀 더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왜냐하면 코로나19 발생의 원인이 기후 위기환경 문제 등 자본주의 이윤 체제에 있다면그 피해 또한 가장 취약하고 착취가 심한 곳에서 커지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을 내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 분석에서는 나름 몇몇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글을 통해 코로나 발생과 노동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수치와 표를 통해 좀 더 객관적 분석을 시도하고일부 서구 복지국가 정책을 우리 사회에 도입하자는 방향 제시가 현 정부의 무능과 위선을 폭로해주는 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다만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서노동자의 피해와 희생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만큼 더욱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룬 이야기는 더 다양하고 깊은 내용으로 후속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코로나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결국은 자본주의 철폐라는 대명제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자본주의 자체를 폐지하지 않고는 현재의 코로나로 고통 받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겪고 있는 이 지옥 같은 벼랑 끝 고통은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2022년 4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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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6호] 코뮤니즘, 김일성주의, 자유주의

코뮤니즘김일성주의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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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입니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김문수의 발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민주당과 노동단체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그 비판의 핵심은 김일성주의라는 과대 표현과 반공에 매몰되어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극우 유튜버인 김문수가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의 주장을 중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2015년에도 김문수와 같은 논란이 국회에서 있었다공안검사 출신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대표는 공산주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이에 코뮤니스트 오세철 동지는 문재인노무현은 공산주의자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혁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로 규정한다.1)

 

자유주의는 반()봉건 부르주아 해방이념으로서 부르주아들이 쟁취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천부 인권으로 선포하고 국가권력 질서로 부르주아 권리를 보장하기 적합하도록 개편한 정치이념이다이때 부르주아 권리의 핵심은 사유재산권과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영리 추구의 자유다그리고 법치국가란 부르주아적 권리를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국민 기본권으로 보호하는 국가체제로서오직 이러한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대표기구가 합법적으로 위임하는 바에 따라 국가 행위가 이루어지는 국가이다법치국가의 전제로서 권력 분립국가 집행 기구에 대한 부르주아 개인들의 대표기구인 의회 통제력사법권이 존재해야 한다반봉건투쟁 속에서 부르주아들이 수립하려 한 정치질서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사회 전체 해방이 아니라 유산자들의 자유 공화국이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1998년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가 여러 번에 걸친 개명을 거쳐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노사정 3자주의를 통한 사회적 대화 원조는 국제노동기구(ILO).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 고조로 국제 부르주아에게는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ILO는 이러한 부르주아의 위기감을 반영하여 1차 제국주의 전쟁 직후인 1919년 출범하면서 세계 전쟁 억제와 코뮤니스트혁명을 예방하고자 하였다한국의 경사노위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사노위 위원장은 극우 유튜버가 아니더라도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친자본적인 인물이 선임되었다가령 노동운동 출신 인사를 위원장에 인선하더라도 그는 친자본적인 성향에서 활동할 뿐이다계급사회에서 대화를 통해서 피지배계급의 최소 권리를 획득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따라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면 김문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사노위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하며 계급투쟁의 역량을 증대시켜야 한다그런데도 경사노위 참가 전제 중 하나로 노동계급 의사를 국가기구에 반영하는 제도가 경사노위뿐이라서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하지만 계급사회에서 계급 간 대화는 대등한 힘이 바탕이 되었을 때 일시적인 순간은 가능할 수 있다하지만 계급 간 이해관계에서 절충이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용어는 이데올로기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주장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김일성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전제가 깔려있다왜곡의 시작은 단어기호에서부터 비롯된다. ‘바이든이 아니고 날리면이라는 해명은 처음에는 웃음거리였지만지배계급의 반복된 선전 진행으로 어느새 진실이 되고 역사가 된다간접제와 민주주의는 다른 개념이지만 19세기 미국에서 조합하고 조작한 간접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어느새 학교에서책에서 민주주의 인양 재생산되고 있다이처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왜곡된 용어는 수없이 많다스탈린주의김일성주의가 코뮤니즘과 등호 관계로 선전되고 이데올로기화되는 것 역시 노동계급에 혁명의 경로와 전망을 침탈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 (수구기득권)지배세력은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정적 제거와 노동자·인민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사용해왔다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좌경빨갱이김일성주의라 낙인찍으며 탄압해왔다심지어는 자유주의적 주장까지 좌경빨갱이로 몰아붙이고 있다이렇듯 그들의 마녀사냥과 거기에 더해 스탈린주의마오주의김일성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낙인은 공산주의에 대한 엄청난 혼란과 왜곡을 낳고 있다탄압의 강도가 얼마나 혹독했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다르다를 틀리다로 사용하는 언어적 습관과 사고까지 재생산되고 있다.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

 

코뮤니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기계적이고 맹목적이며스탈린주의와 김일성주의 영향으로 비민주적봉건적기본권 억압경제난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이다.

 

코뮤니즘은 … ()사회에 내재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그러나 코뮤니즘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비록 코뮤니스트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제적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의 산물이라 할지라도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의식적인 창조물이다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이것이 코뮤니즘이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도 아닌 이유다코뮤니즘은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결과가 될 것이다.“ (”코뮤니즘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9)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철폐해 나가는 조직되고 의식적인 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상품 생산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를 철폐해 나간다.

 

코뮤니즘은 계급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어떤 종류의 개인적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이다이러한 결과로 결핍 철폐와 필요에 의한 생산과 계급 철폐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가능하다코뮤니스트는 이처럼 투쟁과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동자와 활동가들이다.

 

김일성주의와 코뮤니즘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일성주의는 코뮤니즘과 아무 관련이 없다북한은 김정은이 3대 세습하면서 현시점에서 절대 권력이 혈족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봉건적 성격의 국가이다김일성주의는 맑스주의에 사람 중심의 사상이론방법을 부가했다고 한다그러나 맑스는 사람 중심의 세계관과 이른바 인간(의 속성)론은 맑스주의에 없던 어떤 것그리고 이후 시대의 발전에 수반하여 부각되는 새로운 합리적 요소가 아니라 맑스가 이미 1840년대에 포이에르바하에게서 배웠다가 그의 사상의 발전과 함께 비판하고 폐기해버린 비합리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북한의 절대권력 세습과 맞물린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그럼 북한은 코뮤니즘 국가인가마오주의의 중국혁명이 부르주아 인민혁명인 것처럼 스탈린주의가 위로부터 강제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가자본주의의 변형에 불과하다." (“북한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가 종착된 봉건적 주체주의”, 코뮤니스트」 창간호)

 

공산주의가 아닌 코뮤니즘

 

한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은 이념과 논리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이다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획득하기 위해서는 극우 이념도 갖다버리는 세력이다그럼 수구기득권은 왜 자기주장에 반대한 세력을 공산주의김일성주의로 낙인찍을까이것은 ILO 창립 배경과 비슷한 이유이다코뮤니스트혁명의 방지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지배계급 내 다른 분파에 대한 권력 독점에 있다그래서 자유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로 낙인을 찍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특징짓는 비참함결핍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다그러면서 자본주의 경쟁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이러한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왜곡과 편견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이것이 부르주아가 취하는 이득이고 낙인찍는 이유이다

 

나오며

 

이처럼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스탈린주의김일성주의와 혼동으로 국제 부르주아에 의한 악의적인 선전으로 이용된다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와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의 근거이다따라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맑스주의 탈을 쓴 온갖 사이비(스탈린주의마오주의김일성주의)와 구별하기 위해공산주의가 아닌 코뮤니즘을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기나긴 자본과의 투쟁에 첫걸음이다.

 

2022년 11월 10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ㅣ 윤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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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짜 공산주의자 오세철 교수가 본 문재인·노무현 공산주의자 논란”, 경향신문, 2015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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