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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오끼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1)

사실 갔다온지는 한참 지났는데...

그 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마음도 잡히지 않아 미루다가 이제사 쓰기 시작합니다.

2008년 5월 15일부터 5월 22일까지의 오끼나와 일정.

평화행진에 참가해 걷고, 또 19일 콘서트에 농성장 방문에... 아주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아주 의미있고, 또 많이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1. 출발, 그리고 우라소에

 

 3, 4년 전 10년지기 일본인 친구 이시카와가 한국어 공부를 하러 서울에 왔었다. 

그리곤 6개월정도를 지내고 갔다. 그 때 이시카와는 오키나와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그러니 언제든 꼭 한 번 놀러오라고...

그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96년 꽃다지와 동경에 갔을 때 ‘마요나카 싱야’ 씨가 게스트로 출연을 했었다.

그 때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남쪽으로 튀어(South Bound)>를 읽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태평양 전쟁 때의 격전지였고 미국이 점령했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그러면서 일본의 미군기지는 죄다 오키나와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어찌보면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그런 섬이다.

해마다 반환일을 전후로 해서 평화행진이 열리는데

어떤 해에는 본토에서 몇 만명이나 가서 결합한다고도 했다.

2005년 1월에 동경에 또 갔을 때도 헤노꼬 투쟁을 담은 비디오 [Marine, Go home!!]을 봤다.

정말로 아름다운 섬이었고, 매일 주민들이 보트를 몰고 나가 작업을 방해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2006년 3월 우리(?)는 큰 맘먹고 오키나와로 갔다.

이시카와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면서 배타고 토카시키 섬에도 가고,

바다도 질리게 보고, 또 슈리성과 유리공장, 히메유리 등등의 관광지와 유적지들도 보고,

바닥이 유리로 된 배도 타고, 이것저것 신나게 놀면서 즐겼다.

그치만 꼭 한 군데 가고자 했던 곳이 있었다.

그게 바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였다.

오키나와 평화센터의 야마시로 사무국장을 소개받고

그 분이 차로 우리를 안내해 주며 설명도 자세히 해주셨다.

한국의 평택 대추리 투쟁이 한창이던 때라 참가단이나 공연단을 조직해서

한 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그럴 기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다.

이시카와 역시 아직 오키나와에서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조직하기 어려웠고, 예상했던 국제연대기금도 나오지 않아 진행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시카와의 도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본활동가들이 도움을 주셨다. 고맙고, 또 미안한 일이다.


우여곡절끝에 어찌되었거나 2008년 5월 15일 오전, 일정이 있어 늦게 오는 몇몇 사람을 빼고

17명은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나하공항에 도착해서 이시카와에게 전화를 하자 오전 근무를 하고 오느라고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고 곧 도착한다고 했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서자 너무나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다.

올해 초부터 일본에 입국할 때 지문날인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물론 일본령이니까 예외는 아니었다.

울화가 치밀고 잠시 갈등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일본 방문도 쉽진 않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인천노동문화제 집행위원장인 조광배가

금속노조에 있던 재작년에 홍콩 WTO 반대집회에 참석했다가

홍콩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사실이 인터폴을 통해

오키나와 공항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이를 문제삼아 이것저것 조사를 하는 바람에 모두가 나가고 나와 광배만 따로 사무실에 남아

1시간 반 가량을 억류되어 있었다.

홍콩에서 왜 경찰서에 가게 되었나, 여기는 왜 왔나 하는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일본인인 이시카와가 계속 통화를 하면서 바꿔 달라고도 하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결국 예정되어 있던 첫 번 행사인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행동] 3시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일단 숙소로 이동했다.

선봉형과 일본어를 잘하는 미영이가 택시로 큰 짐을 싣고 가고,

나머지는 모노레일로 숙소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나하에서 가장 큰 거리이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국제거리 중간에 있는

송미관(마쯔오 깡). 국제거리는 온갖 상점들과 음식점, 술집들이 모여있고,

뒤편으로 시장이 몇 개의 블럭을 형성하고 있다.

모노레일 현청앞역(켄조마에 에끼)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숙소는 인터넷으로 봤던 그림보다는 훨씬 좁았다.

하지만 감상은 나중. 우선 짐을 넣어놓고 시외버스를 타고 우라소에로 이동했다.

 나하에서 15분 정도면 되는 거리라고 했는데 차가 많이 막혔다.

일본 본토와 다르게 전철이 없고, 버스만 있는데다가 매우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대만 옆 쪽에 있다.)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다니므로 차가 항상 많이 막힌다고 했다.

4시 10분 경 도착해 서둘러 우라소에 사회복지센터로 걸어가자

류큐신보 기자가 4시에 인터뷰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기자가 바쁘다고 우선 사진촬영을 먼저 하고 몇사람 인터뷰를 했다.

꽃다지 이태수, 더늠 이찬영, 노조를 대표한 김창곤이 준꼬상과 이시카와상의 통역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다 술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꽃다지 식구들은 행사장을 보러 올라갔다.

 *준꼬상 : 고야 준꼬 - 98년 한국에 놀러왔었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오키나와에서 가는 국제선 직항이 대만과 한국밖에 없는데 대만은 가까우니까 한국을 한 번 가보자고 해서 간 것인데. 그 때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공회 교회 목사님이신 아버님의 소개로 노숙자 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5년간 어학연수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대학 때 전공은 법학이었다고 한다) 재작년에 오키나와에 돌아왔는데 그 이후로도 몇 번 한국을 왔다 갔다고 한다. 유학시절 꽃다지를 알게 되었고, 공연도 보았고, 이번 우리의 오키나와 일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내식을 먹은 이후로 점심도 먹지 못하고 서둘러 여기까지 오다보니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주변에 식당같은 건 보이지 않았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사회복지센터 내 구내 식당이 5시쯤 문을 열었고, 거기서 첫 번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소바와 카레를 먹었는데 단무지 하나 없는 식사에 처음인 사람들은

좀 놀라긴 했겠지만 적당히 적응을 하는 듯 했다.

우리가 20명 정도 앉아서 밥을 시키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서비스로 돼지 내장탕을 주셨는데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오키나와에서는 가능한 가보다 싶었다.  

 

 18시부터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시민행동]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민행동은 한 단체가 아니라 여러 진보적인 단체들이 모여 함께 하는 것으로

구성하는 각 단체들의 주요 투쟁내용들을 한 분씩 나와서 연설을 하였다.

사회는 토미야마 상이 봤는데 소아마비 장애가 있으신 분인데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면서

한쪽 다리로만 깽깽이로 뛰면서 왔다갔다 하시는 모습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 분은 평택 투쟁에만 30여 번 정도 오셨다고 한다.

 여는 공연으로 마요나카 싱야씨가 노래를 불렀고,

연설이 계속되던 중간 쯤 꽃다지 15분정도 공연을 했다.

그런 후에 한국에서 전날 도착한 이시우씨가 강연을 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새벽부터 잠 설치고 오키나와로 온 첫날인데다가 점심도 못먹고,

비도 오고 하면서 사람들은 지쳐서 밖에서 주로 잡담을 하면서 잠을 쫒고 있었다.

마무리는 다같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행사가 9시를 넘어 좀 지체되어 끝나고 다같이 뒷풀이를 갔다.

  동경에서 오신 분들도 계시고,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분들, 그리고 이시우일행과 우리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때 일장기를 불태운 지바나 쇼이치상, 토미야마 상, 마요나카 싱야 상,

그리고 사회복지센터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무슨 코스요리를 시킨건지 처음엔 회가 나오더니 그 담엔 계속 볶은 면 요리 종류가

몇가지 나왔는데 정말 먹다먹다 아깝게 많이 남겼다.

재작년에 오키나와를 와본 경험이 있는 정혁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오키나와 음식에 대해 많은 자랑을 했었다. 술안주로 정말 좋다고...

이날도 사람들에게 하는 말

“오키나와 음식은 술안주라고 생각하면 정말 좋은 맥주안주야.

근데 밥이라고 생각하면 술없인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지...” 라고.

술은 오키나와 전통식 소주인 아와모리 1.8L 대병을 여러 병 시켜 얼음과 물을 섞어 마셨다.

혹은 생맥주... 오키나와에서 만드는 맥주는 오리온 맥주이다.

12시가 거의 다되어 정리하고 일어나니 비가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4명씩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한 후 숙소에서 몇사람은 술을 마셨고,

결국 토미야마 상과 이시카와는 거실에서 자고 말았다.


   ** 일장기 소각 사건 : 일본 복귀 15주년에 복귀 반대론의 등장하는 등 일본 본토 · 일본 지배계급 · 천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해졌다. 복귀 무렵 천황에 대한 호감을 가졌던 오키나와인은, 복귀 15년뒤에 천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1987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천황이 참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 소식을 들은 5개의 노동단체가 만든 5者 연락협의회가 1987년 9월 11일 ‘천황의 (오키나와 전쟁에서의) 전쟁책임을 묻고 國體(전국체전)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총궐기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오키나와에서 전국체전을 개최하는데 있어서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요미탄손(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집단자결 장소임)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들이 단상의 일장기를 제거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미탄손에서 열린 전국체전 소프트 볼 대회장에 일장기가 휘날렸고....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요미탄손의 주민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씨가 일장기를 끌어내린 다음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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