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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삼시 세끼 무엇을 먹던지 요긴한 반찬이며, 일용할 양식이고
냉장고에 김치가 가득차 있으면 언제나 든든한 마음의 양식이기도 하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양쪽 어머니가 김치를 싸주시기도 하지만
친정이고 시댁이고 어머니들 모두 음식하길 싫어하는 분들이라
우리집에 김치를 조달해주는 분은 아는 후배 어머님.
둘다 직장을 다니면서 집에선 밥을 잘 안먹고, 주로 외식을 하는 부부라
김치가 남으면 어머니께서 또 갖다주실 때 김치가 냉장고 가득 있으면 미안하다고
우리집에 종종 갖다주곤 했다.
그..런..데.. 그게 불규칙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종종 집에서 밥을 해먹는 덕에 우리집 냉장고엔 김치가 씨가 말랐다. ㅠㅠ
그리하여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장을 담구기로 했다.
재작년에는 양수리에서 유기농 고추와 단호박을 하는 후배가 배추를 조금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겁 없이 찾아갔다.
누군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들고 요리를 한다지만 나는 그런 거 잘 못믿고, 봐도 잘 모르겠고...
예전 눈 동냥하던 경험을 믿고 무조건 양수리로 갔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후배는 트럭에 우릴 태우고 밭으로 갔다.
거기서 배추를 한 3~40개 쯤 뽑고 (걔들은 관리가 잘 안된건지 애들이 다 벌어져 있고, 좀 작았다.)
그 옆에서 갓도 좀 뽑고, 오는 길에 마늘도 좀 뽑고(캐고?)
어느 밭엔가는 가서 쪽파를 뽑은 후 돈을 내고,
지나는 길에 김장을 담구고 있는 어떤 집에서 절인 배추에 속을 싸서 막걸리도 한 잔 얻어 먹었다.
마지막으로 농협에 들러 젓갈과 고기를 좀 사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
한켠에서는 마늘과 쪽파를 까고, 집 주인들은 잠시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그 유명한 신안 소금 푸대와 커다란 그릇과 배추를 놓고는 이걸 어떻게 절이나... 잠시 고민...
옆에서 거들어도 심부름하면서 버무리기나 했지 배추를 언제 절여 봤어야지...
일단 배추를 쪼개서 (그래도 생각엔 엎어 놓는 건 아닌거 같고...) 배추를 바닥에 한 판 깔고 소금을 뿌리고, 또 배추를 깔고 소금을 뿌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뭐해? 나면엄마 없어?
(시골에서는 주로 누구 엄마 이렇게 부르는데, 아이가 없는 그집은 달리 호칭이 마땅치 않으므로 아이를 낳으면 엄마 라는 뜻으로 나면엄마, 아빠 라고 그집 부부를 불렀다.)
네... 잠깐 어디 갔는데...
뭐 하는거야?
네... 김장 좀 해볼라구요.
배추 절이는 거야?
네... 근데... 한 번도 안해봐서 이게 맞는건지...
에구머니... 이거 뭐하는 거야? 이러면 안돼.
왜요?
아이고, 배추를 물에 적셔서 해야지... 저렇게 소금만 뿌리면 그 자리만 까매져.
허걱!! 큰일났다. 빨리 다 꺼내!!
할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보시다가 손수 작은 다라에 물과 소금을 풀어 배추를 적셔 주셨다.
그리하여...
절인 배추를 기대하고 당일날 버무리며 막걸리 한잔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밤잠 설치며 들락날락 배추를 뒤짚고 어쩌구...
다음날 사과까지 갈아 넣고 갖은 양념을 하고 먹어보니 갓 향이 톡 쏘는 것이 아주 흡족한 김장이 되었다.
그리고 두 집에서 통에 나누어 집에 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같이 김장을 한 후배집에서는 어머니와 이모님이 열어서 드셔보시고는 싱겁다고 속을 다 털어내고 젓갈과 소금을 더 넣고 다시 버무리셨다는... ㅠㅠ
어찌되었든 우리는 그 맛있는 김장으로 겨울 한 철을 났으니...
그 기억을 못잊고 다시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구는 복(?)도 많아서 친정과 시댁에서 김치를 무한제공해주는 자가 있는 반면
나는 요리솜씨 별로 없는 두 엄마를 둔 덕에 (ㅎㅎ죄송 ^___^*)
김치구경은 거의 못하고 사는데,
안되면 말고, 있는 것으로 때우자는 주의를 갖고 있는 남편과 나는
복많은 후배네 어머님의 김치를 또 재분양 받아 얻어먹고 살았다.
뭐 주기로 한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주면 고맙고, 한동안 안주면 ㅠㅠ 할수 없지.
혼자 집에서 점심 한끼는 반. 드. 시. 면으로 때우는 남편은
나보다 늘 더욱 김치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 오이김치는 좀 쉽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오이김치 담구기를 시도했다.
부추도 함께...(부추 씻는 일은 아주 큰 일이지만...)
굳이 레시피도 필요없고, 계량컵도 필요없고,
오이를 썰어서 절인다음 (기양 맛보고 좀 짜다 싶으면 씻어 헹군다)
대충 집에 있는 고추가루 (분가할 때 시어머니가 싸주신 건지, 누구한테 얻은 건지 불분명한)와
마늘 (찧은 마늘은 시어머니가 항상 제공해주신다) 파 등등에다가
살짝 카나리액젖 (이건 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을 소심하게 뿌린 후
버무리고는 실온에서 하루는 놔둔 뒤에 냉장고에 넣었다.
뿌듯하면서도 조마조마... 하게 하루를 더 기다렸다가 꺼내먹었더니
우와~~~~ 대 성공!!! 우린 해냈어...
첫번째 성공에 힘입어 한두달 후 다시 시도했다.
역시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난 번 기억을 살려 어찌구저찌구...
이번엔 부추 씻는 게 너무 구찮아서 오이만 담궜다.
이틀이 지난 후에 꺼냈더니 우엑~#$%^&!! 켁!!!
너무 짜다못해 쓰다... 지난 번 너무 소심했던 카나리 액젖을 너무 많이 부었다 싶었는데...
먹을 수 없는 오이김치를 바라보다 버리긴 너무 아까워서 고심하다
생각끝에 부추 두단을 사다가 (씻는데 목욕탕 전체가 부추들의 반란이었다) 넣었다.
그래도 들은 건 있어서 오래 묵히면 먹을만 하겠다는 생각에
한 일주일을 방치했다.
먹어볼까? 상의하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김치통을 열었다.
잉? 오이들은 속이 다 삭아서 껍데기만 남아있고, 이건 오로지 아주 푹 익은 부추김치이다.
뭐 어쩔 것이여... 버릴 수는 없고 그래도 먹어야지. 내가 한건데...
아끼고 아껴서(???) 두달만에 겨우 먹고는 일단 포기.
일년쯤 지나 또 한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너무 조심해서 그런지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나 참으로 별 맛은 없는 오이김치
요즘들어 그 후배의 김치도 가뭄에 콩나듯 쪼끔씩만 전해지고 ㅠㅠ
시장 반찬가게에서 그나마 달지 않은 김치를 찾아 두번 사다 먹었다.
그러다가 김치 없이 일주일을 보낸 남편이 참다못해 항의한다. 김치먹고 싶어!!!
무지하게 더웠던 지난 일요일, 큰맘먹고 시장에 가서 오이를 샀다
뭐... 늘 조금씩 담구긴 했지만 한두번의 실패에 더 소심해져서 (그리고 까먹었다. 얼마나 담궜었는지)
오이 12개를 사다가 3개는 무쳐먹으려고 두고 9개를 잘라서 절였다.
이번엔 붉은 고추도 사다가 양파, 마늘이랑 같이 갈고, 고추가루, 액젖등을 넣어
온 집안과 온몸에 고추가루 범벅을 하면서 부추, 쪽파 등과 같이 넣어버무렸다.
하루를 밖에 두었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하루 지나면 먹기로 했다.
근데... 사실 남편도 나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인지 깜빡... 한 것이다.
그렇게 4박 5일이 지나고는 오늘 아침을 먹으려다 갑자기,
아!! 오이김치 먹자!! 그러게... 먹어야 되는데...
꺼내서 기대반 의심반 딱 입에 넣었는데...
흠~~~ 이맛이야~~~ 처음 담궜던 바로 그맛... 성공,성공!!!
근데 좀 너무 익었다... 빨리 먹어치워야겠는데???
또다시 먹어치워야 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오이김치~~~ 우...우...우...
그래도 집에 김치가 있으니 걱정은 덜었다. 나는 이제 김치담구는 게 두렵지는 않아졌다... ㅎㅎㅎ
뭐... 또 담글라 치면 맛은 장담 못하겠지만, 룰루랄라~~~~
올해 5월의 오키나와 행은 심한 강행군이었다.
오키나와는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졌고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이다.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상처가 아직 남아있다.
오키나와인들은 무척 친절하고 상냥하다. 그러면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여유가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에서 색다른 바다와 상냥한 사람들을 충분히 즐기고 느끼지 못한
이번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며 2년전에 갔었을 때 다녔던 곳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오키나와인들의 자신들의 전통민요를 즐긴다. 국제거리에 가면 오키나와 민요, 혹은 섬민요 라는 문구를 적어 놓고 약간의 입장료를 내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주점이 종종 있다.
어김없이 전통민요를 부르면서 손님들과 같이 춤을 추는데, 남성들은 주먹을 쥔 채 손목을 돌리며 춤을 추고, 여성들은 손바닥을 편 상태로 손목을 돌린다.
어떤 부분의 노래들은 일제시대 독립군가 곡조와 비슷하기도 하다.
"아히야~ 옷쏘! 옷쏘!" 하는 여성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의 추임새를 넣을 때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전통악기인 샴신을 만드는 공방. 슈리성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상점.
도자기 말고도 오키나와는 유리공예로 유명하다. 오키나와 남쪽에 유리공장과 이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커다란 전시장이 있다.
히메유리 평화의 공원. 주로 태평양 전쟁 유적지 이기도 하고, 그래서 추모비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공원과 비석을 세웠지만 한국인 희생자들은 1만명정도로 추정하면서도 명단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를 위한 추모비를 오키나와 인들이 직접 돈을 모아 세웠다.
히메유리 전쟁유적지에 있는 어린 소녀의 동상. 부모님이 학살당한 걸 목격하고는 손을 움켜쥔 채 한이 풀리기 전에는 손을 펴지 않으리라고 했다 하여 주먹을 쥔 동상이다. (주먹을 쥐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금기된 일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구덩이
평화의 공원에 있는 추모비, 돌마다 빼곡히 적혀있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한민국이라고 쓰여져 있는 칸에는 몇개의 이름이 없고, 비어있다.
가데나 기지 앞에 있는 고속도록 휴게소 3층에는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에서는 건너편 미군기지를 관람할 수 있다. 마치 관광지처럼...
가데나 기지 근처에 있는 전쟁 유적지. 참호가 파여있어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가라스 보트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 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배)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바다속에서 움직이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다. 남보라색과 자주빛, 노란 물고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단, 고개를 숙이고 계속 보면서 가면 멀미가 심하게 날 수 있다는 거..
배를 타고 갔던 토카시키 시마(섬) 오키나와에서 약간 큰 섬에 속하는데 배를 타고 가다가 운이 좋으면 멀리 고래떼들이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날도 고래떼가 나타났지만 사진에선 잘 볼 수가 없다.
토카시키 섬은 아주 아름답고 조용하다. 여름엔 관광객으로 북적댄다지만 우리가 갔던 3월엔 아주 조용하고 약간 바람이 불어 물에 들어가긴 힘들었다. 하지만 연두빛의 바다와 이끼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조용한 섬 토카시키의 마을과 아주 작은 라면집. 오키나와 전통국수는 두터운 훈제삼겹살을 얹어 주는 데 국수는 칼국수 처럼 납작한 면이라 쫄깃한 맛은 없다. 하지만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 하나이고 또 나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아한다.
누가 주도하는 집회가 아니라 문화예술행동도 그저 하나하나의 촛불이 되어
각자가 준비해서 나가야겠지...
더 작아져야 한다. 백만분의 일, 오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로 점점 더 작아지고 싶다.
그래서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십일년이 지난 6월, 시청 앞에서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저 하나의 촛불이 되어...
입추도 지나고, 설도 지나고, 이젠 정말 봄인가 했더니
여지없이 졸업시즌에 맞춰 강추위 와주시고...
하루이틀 그러고 말려나 했는데 계속 추우니 이건 뭐 정말 살기가 힘들다.
날씨때문에도 그렇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빨리 봄이 왔음 좋겠다.
그리고 우리들 삶에도 봄이 왔음 좋겠고...
지난 11월 문화학교 안산선생님들의 필리핀 연수 및 공연에 같이갔었는데
필리핀의 작은 섬, 거기에 붙어 있는 더 작은 섬, 팡라오...
그곳에 있는 작은 학교에 갔던 일, 아이들의 맑은 눈빛과 예쁜 공연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섬이라서 또 몇장 찍었었는데
생각나서 함 올려 봄다.
<아무도 일행을 찾을 수 없어, 셀카 한 번 찍어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붉게 타오르고>
** 팡라오 로하이 스쿨 (유치부와 초등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가 같이 있다고 한다, 필리핀엔 중학교는 없다) 에서 만난 아이들
<유년부 아이들의 춤공연>
<열띤 독창에 맞춘 댄스>
<고등부 합창단의 춤과 노래> - 이들은 국제 음악콩쿨에서 대상도 받았었다고 한다.
철학이 없으면 장기적 전망 없어 | |||||||||||
[특집-신년인터뷰⑦] 신나는문화학교 이은진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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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별로 희망찰 것 같지 않은 여러 조짐들과 몸과 마음의 상태를 통틀어서
별 기대를 갖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새해는 어김없이 왔다.
시작이라는 설레임에 연초에 계획도 세우고 결심도 하곤 하지만
결국은 작심삼일도 아니고 뭘 계획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일년을 보내고 만다.
그러다 보니 굳이 연초에 별 계획이나 다짐을 하지 않고 지나보낸 때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올해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걱정만 앞서고 짜증만 나니
뭔가를 다짐해보는 게 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다지고 즐거운 계획을 세워
쓸데없는 생각말고 일로 매진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
언젠가 꽃다지 대표를 맡고 있을 때
(그 당시엔 연말 평가 빡시게 하고 신년계획 세워 총회도 빡시게 하면서
정신없지만 힘차게 시작하곤 했다)
연초에 시무식을 하면서 단원 모두에게 새해의 계획을 편지로 써서 봉해가지고 오라했다.
반발도 심했지만 발표하라고 하지 않을테니 무조건 써내라고 했다.
20명이 넘는 단원들이 신년계획을 써서 편지봉투에 봉해서 냈고 난 그것을 책상서랍 깊이 모셔두었었다.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 모두들 그 당시의 불만도 다 잊고 있을 때
송년회를 하면서 편지봉투를 꺼내 각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꺼내 읽은 모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해의 객관적인 평가 외에도 스스로의 자기 삶을 되돌아볼 개인적인 기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이런 거다.
올해로 활동의 20년을 맞는 나.
88년말 삶의 노래 예울림을 시작해서 꽃다지로 통합하다가 98년말에 꽃다지를 그만두었으니
노동가요 전문단체에서 활동을 꼭 10년을 한 셈이다.
그 당시에도 스스로 안식년을 갖고 싶었지만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창립 준비에 결합해서 이것만 자리잡아 놓고 쉰다...면서 미루었고
상근을 접던 2001년에도 프리렌서로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의 기반을 준비해 놓고 쉬자고 또 미루고
그리곤 2002년 꽃다지 10주년 까지 마무리하고는 안식년을 갖자했는데...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인하여 바로 문화단체에 다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다시 지금 하고 있는 신나는문화학교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신나는문화학교가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면 쉽게 쉰다는 이야기를 했겠지만
매해 늘 불안정한 상태에서 조금만 더 애써봐야지... 하는 미련과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올해로 활동 20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20년을 채우고 반드시 안식년을 가지리라... 하는 다짐을 하면서
올해 내가 만들어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다짐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도...
연말연시에 행사도 있고, 사무실 이전을 하면서 정리정돈에 시간을 뺏긴데다가
새롭게 사업계획도 준비하고 하다보니, 또 게다가 몸도 좀 안좋아 겔겔거리고...
어찌어찌 한 주가 가버렸구나... 싶다.
그러나 올해의 목표는 당차게 세웠다. ㅋㅋㅋ
즐겁게 살기 위한 목표와 내년에 안식년을 갖기 위한 올해의 계획을 세웠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크으으~~~
혼자 맘속으로 목표를 세우고 조용히 실천해볼라 하면
늘 일에 밀려가더라는 것이 그동안 살면서 내가 깨달은 바다.
새해엔 사업계획세우고 사람들 만나면서 미루다가
에이 원래 진짜 시작은 구정 설 부터야... 하고
또 봄이 지나 여름에 접어들면 남은 6개월이라도 열심히 목표를 향해 가는거야... 하다가
여름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엔 올해안에만 하면 되는 거지. 난 할 수 있어...하고는
겨울이 되고 연말이 되면 올해만 살고 마는 것도 아닌데 뭐.
인생 다 그렇지... 하곤 무심히 넘겨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소문을 내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뭐냐고? 쫌만 기둘려 주셈... 곧 공개함다. 얏호~~~
내가 결혼할 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다.
그 때만 해도 결혼 적령기라는 게 있었고(지금도 그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이었다.
결혼할 사람들은 20대 초중반이면 짝을 찾아 식을 올렸다.
물론 그 때도 40이 넘어 결혼을 하는 선배도 있었지만 무지하게 늦게 가는 거라고 여겼었다.
그러니 내 나이 20대 중후반이 되자 단체의 동료들은 죄다 나를 일컬어
우리 노처녀 왕언니, 언제 결혼하나...
연초 창립기념일 고사를 지낼때면 고사문에도 그 이야기가 오를 정도로
여성으로서 나의 결혼은 단체 내의 걱정거리였었나 보다.
세월이 10여년 흘러 세상의 인식이 바뀌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고, 또 미혼이 아니라 비혼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그 당시 친구들이 모이면 결혼이야기가 주로 화제가 되곤 했다.
나야 뭐 그런 일에 별 관심도 없고 (내가 이미 결혼을 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역시 결혼한다는 여자 후배에게
"뭐하러 하냐... 우아하게 싱글로 연애만 실컷하고 살아라.
결혼 해봐야 아무리 좋은 남자 만나도 결국 남자는 똑같다"
는 이야기로 뜯어 말리기도 했지만
반응은 대부분 "꼭 결혼한 사람들이 저런 이야기 한다니까" 였다.
심심찮게 해마다 한 두명씩은 결혼을 하니까
결혼하지 않는 여자 후배들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 이야기는
어쨌든 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던 며칠 전...
오랫동안 연락하며 사는 아끼는 후배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첫사랑에 실패한 후 그 상처를 오랫동안 (내가 미련하다고 구박을 엄청했는데) 끌어안고 살았고
누가 주변에서 소개를 시켜줄라 치면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하곤 했다.
연애라도 하라고, 혹시 사귀는 사람 있나고 해도 절대 아니라고 난리를 쳤던 그녀가
갑작스레 결혼을 한다길레 궁금했다. 과연 사실인지...
마침 연락이 와서 만나 사실 확인을 하니 그렇단다.
누구냐니까 어쩌면 알만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나이 차이가 좀 있다고 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하는데 한 번 결혼을 했었던 사람이란다.
"그럴 수 있지, 뭐. 요즘 같은 세상에" 하니 아이도 있단다.
아이는 9살이고, 부인은 3년전에 돌아가셨단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집에서는?"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미 한 번 난리 부르스를 치렀죠"
... ... ...
"누가 먼저 프로포즈 했어?"
"당근 그 사람이죠 ^ ^"
"결혼하자고 해?"
"아뇨, 널 좋아해도 되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안된다고 했어요"
"근데?"
"기다리겠대요, 언제까지래두"
... ...
한참 복잡한 생각에 할말을 잃고 있던 나는 겨우 한 마디 했다.
"그 양반 참 용기있고 당당한 사람이네, 너두 그렇고..."
조만간 같이 만나자고 했다.
헤어져 돌아오면서, 그리고 그 밤 내내 나는 마치 내가 그녀의 엄마인 양 머리속이 복잡했다.
그치만 한편,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걸까?
진심으로.... 축하한다...
행복하게 정말 잘 살길 바란다...
너희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고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두사람이, 아니 세사람이 주위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길 빈다.
근데... 머리속은 계속 복잡하다.
[일본 노래노 카이의 바위처럼 노래에 함께하는
인천 연합노래패 철의 노동자, 목포 삼호중공업 바리케이트 노래분과 '힘찬울림' 동지들]
[일본 노래노 카이의 공연 모습]
내가 이들과 인연을 맺은 건 10년이 넘었다. 96년 메이데이에 꽃다지가 일본 공연을 갔을 때 (그 때 나는 재판중이라 여권이 나오지 않아 갈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5.1 합창단을 꾸렸다.
95년 민주노총 출범식 때 일본 전노협 산하 젠또이쯔(전통일) 노조의 활동가들이 몇 명 한국에 왔었는데 그 전야제 때 꽃다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한국 노동자의 힘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침체되어 있는 일본 노동자들에게 한국 노동자들의 정서를 전함으로써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 꽃다지 초청 공연은 성사되었다.
그 때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있었고, 꽃다지 식구들은 농성을 하면서 매일매일 탑골에서 거리공연을 했었다. 초청 섭외를 한 오자와 씨는 89년 한국 수미다 일본원정 투쟁 때 수십일을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연대와 지원을 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오자와씨를 통해 한국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다.
오자와씨는 70년대 부터 활동을 했던 활동가로 노조 상근 뿐 아니라 일본 내 다양한 투쟁들에 연대하며 활동을 하던 중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한국말을 배워야 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건강이 안좋아져 잠시 쉬는 93, 4년에 한국에 유학을 왔고, 그 때 꽃다지 공연을 보게 되었고 어떻게든 꽃다지 일본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96년 메이데이 때 꽃다지를 초청하자는 젠또이쯔 노조의 의지로 다시 한국에 와서 꽃다지를 섭외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가요 전문패가 온다는 생각에 일본에서도 한국말로 한국노동가요를 부르는 5.1 합창단을 꾸렸고, 여기에 몇몇 노동자들이 함께 해 그 후로도 몇년간 활동을 계속하면서 집회나 행사 때 작은 공연을 하며 한국의 노동가요를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중단된다. 모두가 바쁜 활동가이기도 했고, 강사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해나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우연히 일본어 공부를 하러 한국의 노래강사 박미영이 일본에 갔을 때 이들은 다시 모임을 만들고자 했고, 박미영 강사의 지도 하에 열심히 연습하고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물론 멤버는 많이 바뀌었다.
재작년인가... 한국 야마모또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 때 다시 만났던 몇몇 일본 노동자들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오자와씨를 통해 인천에서 87년 노동자 투쟁 20주년 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연대 공연도 하고 싶었다.
그 바램은 이루어졌고, 일본 노래노 카이는 아주 훌륭하게 공연을 했다.
일본의 노동운동은 침체되었다고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일본 노동자와 활동가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많은 활동력으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며 노동운동을 지켜나가고 있다. 내가 많이 좋아하고 또 존경스럽기까지한 젠또이쯔의 도리이 서기장 동지, 그리고 국철 해고 노동자로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동경에서 계속 투쟁하고 계신 이와사키씨, 한국의 양심수 석방을 위해 또, 수많은 활동에 연대하시는 오자와 아저씨, 그리고 늘 우리를 챙겨주며 정말 우리의 감정까지 전달해 주는 가또씨와 메구미 언니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인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일본의 활동가들도 처음엔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만날 때마다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또 한국의 노동가요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일본을 자주 가지만 일본어가 늘지를 않는다. (공부를 안하니까 ㅠㅠ) 일본에 가면 내 주변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다. 굳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도록 잘 배려해 준다.
이번 인천행사때 오신 분들 중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을 위한 배려는 하지 못했다.
내가 일본에 가서 받는 배려나 대접에 비해 너무나 소홀한 대우를 하고 보내드렸기에 참으로 미안하고 또 부끄럽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 분들을 한분씩 소개하고 싶다.
젤 왼쪽부터...
고구레 씨는 수도국 노동자이다. 96년 꽃다지를 만난 후 꽃사람에 가입을 했고, 해마다 꽃사람 모꼬지에 여름 휴가를 써서 혼자서라도 참여를 하신다. 이번엔 여름 휴가를 아껴서 인천 공연에 오셨다. 노래를 참 잘하시고 내가 처음 만난 일본 분 중에 한국말이 가장 많이 향상된 분이다.
아키모또 씨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고 또 농담도 잘하신다. 모두가 인정하는 대단한 활동가이다. 지난 야마모또 투쟁때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연대하면서 사비를 털어 한국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한국말을 할 때는 모두 농담인 거 같아서 조금 헷갈린다.
신가미 씨는 재일 교포 2.5세 이다. 신가미씨의 딸은 초등학생인데 조선학교에 다닌다. 이번엔 [우리학교] 삽입곡인 <하나>라는 노래를 독창하면서 노래에 앞서 현실을 알리는 멘트를 준비해 읽었는데 (한국말을 아주 잘하시진 못한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흥이 많아서 다음날 풍물대동굿에서도 쉬지않고 쇠와 장구를 들고 뛰어다녔다.
역시 왼쪽부터...
히나따 씨는 오자와씨와 80년대 후반 수미다 원정투쟁 때 함께 연대 했던 분이다. 한국말을 잘 못하시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이 많은 분이다.
오오따 씨는 보기보다 나이가 좀 많으셔서 몸도 불편하시다고 한다. 역시 오자와씨와 한국 수미다 원정 투쟁 때 함께 했던 분이다. 한국을 무척 좋아하고 또 배용준도 좋아하신다. ^^ 한국말 실력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정말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오자와 씨는 가장 오래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분이다. 한국말을 잘 하시기 때문에도 특히 일본과의 연대에 관한 모든 일은 이분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한다. 늘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일이 성사되도록 애써 주신다. 그야말로 일본의 노동문화기획자이다. 70년대 나리따 공항 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수많은 활동을 하신다. 장구도 잘치고, 춤도 잘 추시는데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수미다 투쟁 때 직접 창작한 노래도 있다. (그 테입을 하나 얻어왔다.) .
이 분들 외에 나가이씨(사진은 없지만)는 한국말을 못하시고 노래노 카이 멤버도 아니지만 우리가 일본에 갔을 때 항상 온갖 힘들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다. 소주를 무척 좋아하고 한국의 노동가요를 사랑하는 아주 세심하고 또 재밌는 분이다.
그리고 역시 나로서는 처음 뵙긴 했지만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행사를 찍으면서 함께 하신 츠찌야 씨는 일본 레이버네트워크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번에 두개의 다큐를 선물로 받았는데 하나는 일본 모또야마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비디오로 34년간 투쟁을 해서 복직에 승리를 한 내용이고,
또하나는 일본 기미가요 의식 (우리의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에 반대한 선생님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일본 헌법에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끝이 나지 않은 투쟁이지만 힘겨운 투쟁과정을 담았다.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사흘간의 일정이 앞으로 활동에 활력이 되고 또 일상의 작은 희망이 되길 기대한다. 이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96년 가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오까와 마찌 시네클럽에서 활동하시는 도마쓰 씨가 한국의 노동문화와 노동운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후 (물론 통역을 끼고) 일한 사전을 선물로 주실 때 한 약속, 다음에 일본에 올때는 꼭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그 약속을 11년이 지났지만 이제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워 본다. (정말 가능할까? ㅠㅠ)
* 일본 노래노 카이는 노래라는 한국말을 고유명사화 하고 카이라는 일본말 (모임이라는 뜻)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다. 노래모임이라고 한국말로 하면 일반적으로 그냥 노래 동호회 같은 보통명사로 쓰여지기 때문에 일부러 두 나라 말을 합해서 노래노 카이라고 지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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