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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의 탄생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②] 새 세상 염원하는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 ||||||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그러던 1975년에는 이른바 초헌법적인 긴급조치가 내려집니다. 영화 <고고 70>을 보신 분들은 대충 이해를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통행금지가 있었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집단적으로 모여 춤을 추는 것 역시 풍기문란 등의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긴급조치' 낳은 블랙코미디
예를 들어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중략…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라는 가사로 이뤄진 <길가에 앉아서> 라는 대중가요는 “이런 바쁜 시절에 왜 하릴없이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여자를 쳐다보냐”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눈물도 거짓말’이라는 가사의 <거짓말이야>는 “국민에게 부정적인 사고를 심어주고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김민기 씨의 <아침이슬> 역시 이 중 하나입니다. 이미 음반으로 발표가 돼서 많은 대학생과 젊은이가 듣고 부르고 하던 노래였는데도 말이지요.
민중가요의 탄생
미칠 것 같던 그때 |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①] 트롯에서 록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불나비' | |||||||
이글은 레디앙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2010년 2월) | |||||||
부르는 사람이 주인인 노래, 천의 얼굴을 가진 '불나비'
사실 노래는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고 다니는 주체가 있어야 보급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노래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리지 않으면 의미와 정서가 공유되지 못하지요. 어떤 식이건 음원(정식음반이 아닐지라도)이 있으면 보다 많은 이가 듣고 부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민중가요와 노가바
누군가의 창작에 의해 탄생한 곡을 노동자들이 함께 불렀거나, 불리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가사나 일부 악곡을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70년대 후반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입니다. 청계 피복노조를 시작으로 동일방직, 원풍모방, YH 등의 민주노조가 설립되거나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배, 언니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운동으로, 1978년 동일방직 투쟁과 민주노조 와해, 1979년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 사건 등은 노동운동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대학생 노래와는 다른 '불나비'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을 소재로 다룬 민중가요가 어둡고 비장하며, 가련한 느낌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노동자 스스로가 느끼는 노동자 삶은 희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측의 간극이 다소 존재하지요.
'불나비'의 변천 |
오랜만에 대학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중간에 88학번 후배가 다리를 놔서...
그니까 올해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이 10학번인데,
84학번인 나하고는 26년 차이가 난다. 헉!!! @.@
그러니 누군가 중간에서 브릿지를 해주지 않으면
대화도 잘 안될 거 같았다.
그리하여 88학번 후배와 같이 09학번, 06학번들을 만났는데
이 친구들이 80년대 이야기를 듣고 싶단다.
왜 노래동아리에 들어왔냐고 하니까
노래가 좋아서, 그리고 어릴 때 부모님이 공연을 같이 보러다녔다고...
요즘은 신입생 때 노래동아리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대학 2학년에 집행부를 맡고,
3학년이 되면 취업을 위한 자기 스펙쌓기에 들어가느라
동아리 활동은 모두 정리할 수 밖에 없다는 친구들.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워서
최대한 졸업을 늦추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기다리는 건 대부분이 비정규직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지...
9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세대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자신들은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게 저주받은 거 같다고...
그런데 이 친구들은 90년대 후반 세대들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잡히지는 않지만
이들의 부모세대가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약간 윗세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모세대의 영향을 받은?
이 친구들이 7, 80년대 민중가요의 역사와 동아리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았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가 듣고 싶단다.
흠... 뭘 이야기해야 할까?
선배랍시고 나서서 그 당시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노래가 있어 힘이 되었고
아직도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게 공감이 갈까?
일제시대 만주에서 개타고 말장수하던(우린 이렇게 써먹었었다.) 전설이나
1.4 후퇴 때 피난내려간 소설같은 이야기로 듣지 않을까?
날짜를 잡고, 계속 고민만 맴돌았다.
당일 날은 10학번부터 05학번까지 열 두어명이 모였다.
민중가요라는 노래문화가 시작된 시절의 역사와 활동
긴장의 연속이었고 과도하게 비장했던 80년대 학생운동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면에 얽혀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했다.
1시간 40분을 혼자 떠드느라 노래는 몇곡 듣지도 못했고,
또 명색이 노래패인데 같이 노래한곡도 제대로 못부르고 서둘러 뒷풀이로 향했다.
휴우~~ 이 친구들이 어떻게 느꼈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각자 고민하고 서로 함께 나누며 풀어가야겠지 싶었다.
뒷풀이 때도 이런 저런 질문을 계속해온다.
그러다보니 뒷풀이에서도 또 혼자 떠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85학번 후배들과 90.91학번 후배들이
그래도 선배가 나섰다고 지원을 와주었다.
삼삼오오 붙잡고 서로 고민을 나눈 거 같다.
뒷풀이비도 감당해줬다. ㅎㅎ
그런데 담에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달란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노래는 무엇인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란다.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으랴.
25년, 딱 한 세대를 넘어 공감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 취했을 때 문득 든 생각 하나.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고 엄혹했던 80년대를 지내면서
존재가 이미 대학생, 기득권층인데, 노동자민중의 삶을 어찌 이해하고 함께하냐고,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며 울부짖었던가...
생각해보면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엄청나게 높은지위에 올라가는 줄 알았던거다.
아마도 대학을 나오면 모두 자본가가 되는 거라 여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워했지,
졸업을 하고도 결국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텐데...클클클~~~
그래도 그 시절은 참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니
우리 후배님들도 열정을 품고 치열하게 함께 고민하면서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길 바란다.
한반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게릴라성 폭우와 눅눅한 날씨가 절정을 달하던 2010년 8월 13일.
오랜만에 꽃다지가 콘서트를 올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콘서트가 오랜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소극장 규모의 극장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올린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럼 그동안 꽃다지가 공연을 안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꾸준히 신곡창작 작업을 하고 1년에 한두번 정도의 소규모 공연을 홍대앞 작은 클럽에서 열긴 했었다.
하지만 꽃다지 활동은 점점 더 위축되어 갔고,
공연도 점점 더 소규모화 되었고, 그러다보니 홍보도 수세적으로 밖에 하지 못했다.
전국에서 파업과 투쟁은 여전히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고, 또 장기투쟁도 아주 징하게 길게가는 현실인데도,
파업현장, 노동자 집회현장에서도 노동가요를 부르는 일은 아주 의례적인 일일 뿐
그 자리에서 함께하는 이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화로 선택하고,
스스로 즐기며 부르는 건 드문 일이 되어갔다.
이런 현상들은 꽃다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반적인 노동문화운동의 침체 내지는 정체현상이 2003~4년 이후부터 계속되어왔고,
노동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들은 과연 있는지,
노동문화운동집단이 구분되어 존재는 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문제제기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문제를 받아 같이 논의할 단위는 있는지...
불확실한 세월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열린 꽃다지 콘서트는 그야말로 나름대로의 대 성황이었다.
모처럼 많은 이들이 함께하며, 홍보도 잘 되었고,
과거에 꽃다지를 아끼던 분들도 많이 모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과거의 명성에 기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꽃다지가
지금의 멤버들의 힘으로 스스로 다시서기에 성공했다고나 할까?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두 시간을 내내 서서 공연을 봐야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고,
하나하나 공들여 만든 공연을 보면서, 그리고 그자리를 가득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그 사이에 꽃다지가 활동을 게을리 했다거나, 쉬었던 적은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꽃다지가 아직 있냐?는 질문은 많이 받아온 나로서는
꽃다지가 보다 존재감 있게, 자기색을 갖고 활동하길 기대했었다.
이제 꽃다지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줬고, 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것임을 다짐했다.
꽃다지 민정연 대표에게 용기를 준 네오의 말은
'꽃다지는 존재자체로 아직 충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 였다고.
꽃다지 노래들은 나에겐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때론 위로가 되어주었고,
때론 단결의 무기로, 투쟁의 무기로 함께 해왔다.
꽃다지 선배로서가 아니라 꽃다지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친구로서
또, 과거의 노래부터 현재의 노래까지 꽃다지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꽃다지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기를 늘 기대해왔던 바이다.
물론 꽃다지 활동 방식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음악에 있어서도 확실한 자기 정체성과 지향이 부족함에 아쉬워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 꽃다지가 주변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지해주고, 응원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좀 더 치열하면서 한편으로 여유있게,
미래를 향한 계획과 삶에 대한 고민을 음악으로 풀어가길 기대해본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꽃다지 음반 사전 구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주는 일이겠다.
팬들도 이제는 그냥 공연을 보러오는 팬이 아니라,
꽃사람에도 가입하고, 음반 사전 주문도 해서
노동가요를 지켜가는 주체가 되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예전에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유기농에 비유해서
다품종 소량생산방식이나 주문생산방식으로 가는 것이
우리문화를 지켜가는 거라고 이야기한 분이 있는데,
그말에 동의하던 안하던 간에 음반 사전구매운동을 통해
꽃다지가 좀더 좋은 음악을 생산해내고,
오래오래 더 많은 자리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지기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아~~ 끝은 광고로 마무리
음반 사전 예약은 http://ihopesong.tistory.com/ , http://ihopesong.tistory.com/203
민정연 대표에게 010-4190-6600 / 트위터 @ditsela_
연초부터 레디앙에 노래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일단 부담이 먼저 앞섰다.
노래이야기 연재를 기획하면서 알아보다가 박 모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데
사실 마땅히 넘겨줄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질 않는다.
예전에도 인터넷 방송을 한 2년 넘게 진행했는데 그 때도 두주에 한 번 올리는 거였다.
처음에는 쉽게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나름대로 구성을 했는데,
주제를 찾고 그것을 이야기로 엮는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두주에 한 번 올리는 건 그야말로 나에겐 엄청난 노가다였다.
그리곤 2년 반 가량을 허덕거리다 도저히 더이상의 여력이 없어 끝내버렸다.
그 땐 90% 정도는 내 기억속의 것들을 기록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이미 한 번 경험을 하지라 더더욱 자신이 없어 계속 고사하며 여러가지 우려의 말을 붙였다.
근데... 많은 부분을 담당자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고,
뭐 꼭 간격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핑계댈 말이 마땅치 않아 수락을 했다.
그리곤 2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두주는 정말 빨리 돌아왔다.
헐...
근데 문제는 그 이상이었다.
자유롭게 주제를 잡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가
노래운동사를 정리할 때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거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접근을 했던 반면
이번에는 노래에 얽힌 이야기와 시대 상황,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편하게 풀다보니
꺼내고 싶지 않은 어지러운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굳이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도 그 시절의 개인사와 감정들이 꿈틀대며 기어나왔다.
애써 저 밑바닥에 꼭꼭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한놈 머리를 쳐들더니
마치 칡뿌리 엉킨듯 줄줄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다시 꽁꽁 싸매 놓으려 하는데, 머리의 의지와는 달리 감정은 나도 모르게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꿈도 꾸고, 잠을 설치기도 하고,
한동안 그 기억을 붙잡고 자학을 하고 만다.
언젠가는 다 풀어내리라 마음을 먹고, 어떨 때는 연습도 해보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는 풀어내 보기도 했다. 그러곤 어쩌면 좀 가벼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랬나?
어쨌든 이 연재는 연말까지 계속될 거니까
좋든 싫든 이렇게 한 번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이 끝이 어떤 결말이 날지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끄집어 낼 기회를 또 만들기는 쉽지 않기에...
그리고, 또 이미 시작은 되어 버렸기에...
이판 사판... 가는데까지 가보는거다.
힘내자... 힘.... 힘... 힘...
며칠전 낮에 걸려온 전화...
이렇게 좋은 날 왜 사무실에 앉아있냐? 노트북 들고 강가에 나가라...는...
친절한 조언이나 다들 정신없이...
강의안을 쓰다가 머리가 아파 조금 일찍 퇴근하는데
눈앞에 들어오는 하늘이 너무나 황홀하야...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강변...
카메라를 안가져와서 핸펀으로 찍었는데
그러다가 해질때까지 약 2시간 가까이 있다가 왔다는... ㅠㅠ
덕분에 원고는 못썼지만
13년만에 오는 맑은 날이라는데, 13년 전엔 언제였는지 난 모르겠고
한국에 살면서 생전 처음 보는 하늘 색...
써비스로 사진 몇장 올립니다.
즐감하삼~~~
매화는 봄을 불러오지 않는다 -박지연 씨*를 추모하며 - 박일환-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매화가 피면 봄이 멀지 않다는 사실 만고불변의 진리라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 이제부터 기대와 소망 따위 품지 않기로 했다 남쪽에서 매화가 한창 북상 중이던 3월의 끄트머리를 밟고 네가 가버린 그날 그 순간부터 꽃 피는 봄날이라는 말, 함부로 읊조리지 않기로 했다 어떤 눈보라가 쳤던 건지 어떤 비바람이 불어왔던 건지 살아생전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너는 가버렸고 속절없이 꽃이 핀들 눈길은 너를 더듬어 하늘로만 향하는데 드디어 봄이야, 고운 네 목소리로 들려주지 않는 한 봄이 어찌 봄이겠는가 꽃이 어찌 꽃이겠는가 네가 없는 지상에선 한 줌 햇살마저 차마 부끄러워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지더라도 봄바람이 대책 없이 살랑대더라도 꽃 같은 것 예뻐하지 않기로 했다 봄 같은 것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여고 3학년 때부터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던 중 2010년 3월 31일에 만 스물셋의 나이로 숨졌다.
예울림 초기 시절인 89년인가, 90년인가...
자주가는 신촌의 술집에서
우리가 공연을 하면 많이 도와주고 같이 노래를 부르던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한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 선배가 있던 한국음악극연구소에 피아노 연주자로 그날 들어온 친구였다.
세종대 피아노과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긴 생머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앉아서 술자리 내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질문을 하면 고개짓으로 끄덕거리거나, 씨익하고 웃기만 했다.
4시간을 내내 같이 앉아 있으면서 말은 한두마디 했을라나?
그런데, 그날 술자리에서 우리가 예울림에 들어오라고 막 꼬셨더니
술자리 끝날 때쯤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배도 약간 황당해 했지만 우리를 너무 좋아하고 친했던 터라 그러라고 했다.
하루에 두 군데 단체에 입단을 하게 된 친구.
하두 말이 없어서 김호철 선배가 붙여준 별명이 '심심이' 였다.
피아노 실력은 뭐 두말하면 서러울 정도였고 편곡 실력도 뛰어나 예울림 활동에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술자리도 좋아하여 늘 말없이 술자리에서 홀짝홀짝 들이키면서도
내노라 하는 주당들을 다 쓰러뜨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술취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는데...
그 때부터 꽃다지로 이어 계속 10년을 같이 활동을 하곤 어느날 의정부로 들어갔다.
거기서 음악하는 친구들하고 밴드를 만들고 지역 활동도 하고, 또 창작활동도 계속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가끔씩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 말고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았고, 그렇게 마주쳐도 활동 공간이 다르다 보니 그저 안부나 물을 뿐
술한잔을 한 번 같이 못했다. 그렇게 잘 살고 있으려니 하고 신경을 못썼었다.
그러던 올 해 초 그녀는 몹쓸 병에 걸려 버렸다.루푸스 라는 참 희한하고도 어려운 병에.
한달이 다 지나서야 겨우 소식을 접하고 병원에 찾아가서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완전 뻐밖에 안남았고, 얼굴이고, 손발이고 피부가 모두 거뭇거뭇 죽어 있었다.
열도 심하게 나고, 기억도 왔다갔다하고, 숨도 가쁘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거란다. 이전 병원에 있을 땐 병실도 못찾아 발칵 뒤짚어지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퇴원을 했다.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얼마나 아파서 고생을 했는지 집에 오니까 그냥 저절로 몸이 다 나은 것 같단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싶단다.
인간 사는 거 뭐 별게 있다고... 서로서로 챙겨주고 나누고 살았어야 하는데...
대단한 일 하는 듯 사람도 못챙기고 정신없이 살아온 게 많이 많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의사 한테 불어보니 삶의 방식과 환경을 완전히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고
특별한 치료법은 없지만 잘 관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단다.
활동에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한 우리 친구들과 다같이
정말 어디 공기 좋은 곳에 내려가 공동체 마을을 꾸리고 살아야 하는데...
선배들도 친구들도 다 그런 꿈을 꾸곤 있지만 다들 꿈이기만 할라나?
그냥 아직은 이 자리에서 좀 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서로 보듬으며 천천히, 즐겁게 일을 하며 사는 게
하루하루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
몸도 건강하고, 관계도 건강하게~~
심심아~~~ 아프지 말고, 잘 이겨내~~
힘내~~!!!!
이번엔 지난 번의 기억을 되짚으며 다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반드시 “절인배추”로 김장을 담구고, 그날 술을 먹고, 다음날 천천히 올라오리라...하는...
그런데, 재작년 멤버들과 통화를 하며 김장 준비를 하는데...
참내... 얘네들은 김장을 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갔었냐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뭐를 우리가 준비해 가야 하는지 물어보랬더니
그집에 다 있으니 김치통만 들고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 번엔 젓갈도 샀고, 과일은 그집에 없어 다른 친구가 가져왔었는데.. 싶어서
못미더운 마음에 직접 전화를 했다.
그 집에 있는 것은 절인 배추와 무, 그리고 고춧가루... 나머지는 다 사가지고 오란다.
그러면서... "누나... 걔네들 남자잖어." 한다.
더군다나 채칼도 없고, 고무장갑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이런... 쯧쯧...
이런 남자애들을 데리고 내가 무슨 김장을 하겠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김장을 하러 간 것도 기억을 못하는 후배녀석이
자기 어머니께서 이왕가는 거 한 7~80포기 해오라고 했다고... 그걸 다 하겠단다.
누굴 잡을 일있어? 우린 초보라구...
절대 안돼. 그리고 우리끼리야 괜찮지만 그렇게 했다가 다 망치면 두고두고 누굴 욕할라고... 겨우겨우 말려서 40Kg(우린 고작 기껏해야 15Kg 정도 할건데 쒸이~)만 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래도 전체 해야하는 김장이 최소 60Kg은 되는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어쨌든 이것저것 재료와 준비물을 챙겨 출발~~
그런데... 불상사가 또 생겼다. 총 4명이 3집 김장을 하는 건데,
그 중 한 후배가 회사에 일이생겨 밤에나 온다는 거다.
허걱!!! 내가 못살아... 완전 또 밤새겠네...
걱정은 태산이고, 완전 초짜들 두 남자 데리고 별 경험도 없는 내가 그 많은 김장을 헐~~
뭐... 그집에서 좀 알아서 코치해 주겠지...하면서 일단 시작!!!
재료는 농사짓는 후배가 동네에 아주 경험많고, 맛있게 김장 담구기로 유명한 분한테서 전달받은 분량에 따라 준비했다.
특히나 지난 번 오이김치 담굴 때 부추와 쪽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남편이
손질된 대파, 쪽파를 사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마늘도 농협에서 다 갈아 주었다.
주인마님이 제공한 배까지 양파와 같이 갈아서 넣고는 흐뭇. ^^
총괄 지휘를 하며 무채를 썰게하고, 양념을 만들고 배추를 버무려 통에 담으면서
한쪽에서는 돼지고기를 삶기 시작했다.
배추는 속을 너무 많이 넣어 뚱뚱해서 접어지질 않고,
어떤 배추는 소금에 덜 절여져 애들이 밭으로 뛰어갈라하고...
얘네들을 이리저리 갈무리하며 한통한통 채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가져간 10Kg 김치통 5개와 약 7~8Kg되는 김치통 4개가 다 채워졌다.
그런데 먹으면서 모두 하는 말... 아유... 너무 맵다.
원래 안매운 고춧가루 다섯근과 매운 청양 고춧가루 1근을 섞기로 했는데, 우릴 위해 남겨두었던 안매운 고춧가루를 동네 형이 급히 어디 보내주기로 한 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가져가는 바람에 다시 다른 분한테 5근을 샀는데, 그게 아마 매운고추였다보다 한다...
헐... 쫌 많이 맵긴하네.
그래도 유기농 배추와 무에다가 갓과 쪽파를 한껏 넣고, 최고의 양념까지 더했으니 어찌 맛이 좋지 않을 수 있으랴... 더군다나...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만든 김장이니 뭐 말할 나위 없었다.
냉장고가 좁아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25Kg 정도의 김치를 누나가 하는 부동산 김치 냉장고에 갖다 넣고, 필요할 때마다 남편이 배달을 해오기로 했다.
올 겨울은 이제 정말 몸도 마음도 든든하게 날 수 있게 되었다.
맛 보고 싶은 분은 연락하시라~~ 단 좀 맵다는 거...
무채를 썰을 뒤에 쪽파를 썰면서 생각을 빻고 있다. 생강을 까먹고 같이 갈지 않아서 저렇게 수공업적으로 ㅎㅎㅎ 자기가 마치 선수인 양 하던 후배, 생강 씻어오랬더니 원형그대로 보존하면서 사이사이를 다 파내서는 한 시간에 걸쳐 400그램의 생강을 씻었다. 어차피 찧을건데... 쯧쯧...
쪽파는 어찌나 크게 썰었는지, 애들이 따로 논다. 흐으~~
버무리기는 서로 선수란다... 손이 보이지 않게 마구 문질러 대면서 배추들을 혼절 시키고 있다. 아마 이 속도로 갔으면 이틀을 꼬박해도 아마 끝나지 않았으리...
먹는 재미를 빼면 어찌 김장을 하자 했을까 싶은... 먼저 막걸리 한잔하고, 잔 건넨뒤 자신은 얼른 배추 싸서 먹고, 또, 먹여주고... 주거니 받거니... 아마 술 먹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면 절대 김장하잔 소린 안했을 거다.
주인장 가족. 태어난지 19개월된 소담이... 어찌나 말도 잘하고 귀여운지... 댄스는 정말 압권!! 소담의 재롱 덕에 웃음꽃이 활짝~~~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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