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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기는

[고전명구 35] 진정한 용기는 기세를 부려 억지소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고 의리를 들으면 즉시 따르는 데 있는 것이다 眞勇 不在於逞氣强說 而在於改過不吝 聞義卽服也 진용 부재어령기강설 이재어개과불린 문의즉복야 - 이황(李滉), 서답기명언논사단칠정(書答奇明彦論四端七情)/ 《퇴계집(退溪集)》 <해설> 위 글은 사단(四端)·칠정(七情)과 이(理)·기(氣)의 문제에 대해 변론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편지에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답한 글에 있는 구절입니다. 고봉이 자신의 논의를 굽히지 않자 퇴계는 주자(朱子)의 용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주자는 조금이라도 자기 의견에 잘못이 있거나 자기 말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고쳤으니, 비록 말년에 도(道)가 높아지고 덕(德)이 성대해진 뒤에도 변함없었습니다.” 하물며 성현의 도를 배우는 길에 갓 들어섰을 때에는 어떠했겠느냐고 고봉에게 반문하며, 퇴계는 20여 년 아래의 젊은 후배에게 위와 같이 타일렀던 것입니다. 옮긴이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 옛날 매우 뛰어났던 분들도 자기의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고 바로 고치는 것이 용기고,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이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것 또한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위의 글은 내가 다니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메일에서 인용한 것이다.) --------- <사족> : 나는 한문을 공부하지만, 유학을 실천윤리 이상으로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유학이 '관념론'이기 때문이다. 성선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마다 지극히 선한 본성이 있다'라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성인'만 알 뿐이다. 사람마다 마음 속에 진리를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그 사람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지극히 선한 본성이 드러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다. (반면 맑스는 '진리(지극한 선)는 실천이다'라고 설파했다. 순간순간 스스로 올바르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자체가 진리라고 하였으니,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학식이 있든 적든, 자리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설정될 수 있다.(더 나아가면 안 되겠지???)) 둘째, 지나친 윤리관 때문이다. 이 부분만으로도 긴 포스팅 하나를 할 수 있으므로 근거는 다음에 얘기하자. 다만 지나친 윤리관을 개인이 갖는 것은 취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통치자는 그래야 한다'든지, 나아가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세상은 로비에스삐에로나 스탈린 시대와 같은 가혹한 독재체제가 되든지, 아니면 소모적인 당파싸움으로 번진 송나라나 조선처럼 가식적인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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