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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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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주)YH무역에 입사하였고, YH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78년 5월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노조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했다.
1979년 3월 회사측이 악덕기업주의 외화도피, 기업확장 등 부실 경영으로 폐업을 감행하자 YH노조측에서는 폐업 철회를 위한 정상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4월 13일부터 폐업철회를 위한 신민당사 농성에 들어갔다. 이 때 후생부 책임담당을 맡았으며, 이후 '회사정상화추진위원 56명구성' 중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정부 고위층에 보내는 탄원서도 직접 작성하였고, 마지막 부분에 혈서로 '회사정상화 필사'라고 쓰기도 했다.

8월 11일 2천여 경찰의 강제 진압에 맞서 동맥을 끊고 투신, 운명하였다(당시 21세).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 약력

1958년 6월 5일 전라도 광산군 출생

1972년 2월 광주 남초등학교 졸업(누에공장에 다니는 중이었음)

1973년 서울로 상경,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

1976년 8월 YH무역(주)에 입사

1977년 6월 녹지야학 입학

1978년 3월 YH노조 대의원으로 선출, 녹지야학 활동

1979년 3월 30일 YH무역(주)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사건 시발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회 공장점거 농성

5월 YH노동조합 조직부 차장으로 피선

8월 8일 노조 조합원 신민당사 진입, 정부 고위층에 보내는 탄원서 작성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 농성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동맥끊고 투신, 운명


출처: 유가협 홈페이지(http://www.ugh.or.kr/)
출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월간노동관계자료집(창간호).『노동운동』, 1988년 9월.

 

 

 

□ 동지의 삶과 죽음

 
김경숙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수십 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자행하는 회사였다. 이러한 YH무역의 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은 신민당사 농성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를 등에 업고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는 공권력의 위협은 동지를 투신하게까지 만든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라는 동지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YH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이 본디 강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권과 단결권을 지키기 위해 착취당해 왔던 소극성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YH 노동조합의 투쟁은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악덕자본가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결국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18년에 걸친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 김경숙열사가 남긴 글

 

신민당사에 들어가기 직전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던 중에 고향의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ㆍㆍㆍㆍㆍㆍ(전략)ㆍㆍㆍㆍㆍㆍ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굉장히 큰 회사랍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장용호 회장이 미국으로 돈을 외화도피시켜서 저희 근로자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어요. 저희 회사는 외국 수출품으로 인하여 대통령상까지 받게 됐는데 돈많은 회장이나 사장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저희 근로자들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그런데 현재 사용주 사장은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고 폐업공고까지 붙이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저희 힘이 약한 근로자들은 힘을 합하여 단결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저희들의 힘이 강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위로하며 웃으면서 기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저희의 힘이 강하여 회사의 사장은 수단과 방법을 다 활용하여 여러 가지 일을 꾸밀지 모르니 너무 염려하시지 말고 내 편지 아니면 믿지 마시고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우리의 문제는 곧 해결된답니다. 여름의 변덕이 심한 날씨에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그 모습은 멀리 떨어졌다고 잊지는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곳에서 사직하고 다른데 취직하려고 하여도 계속적인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판매되는 옷들이 팔리지 않아 실업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어요.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 실정이예요. 또한 이곳에 일하는 나이 어린 여러 근로자들을 위하여 끝까지 단결하여 저희들은 꼭 승리하고 말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다 할겁니다. 준곤이는 끝까지 누나의 힘을 버리지 않고 도와 주겠습니다. 이 회사문제가 해결되면 어머님 다시 찾아뵐께요.

사장이나 미국에 있는 장용호처럼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 잘살면 돈 없는 자들을 마음대로 하나 보지요. 그렇지만 돈없는 자들은 착한 마음을 지니고서 우리들의 처지를 기억하여 성실하고 정의롭게 사는 일입니다.

 

 

□ 김경숙열사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누구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안환경 관계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다가 나이 8세가 되던해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우리집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당장 날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야만 하셨다.없는 가정에서 어렵게 어머니의 수고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하기 직전 겨울방학 때부터 공장에 취직을 하였을 때 돈에 구애를 받던 나 자신은 이 가난한 우리 가정이 잘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여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맨처음에는 커다란 포부로 꿈을 안고 서울로 왔으나 와서 보니 별 것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생각했던 꿈은 이룩할 수가 없었다.

이 곳에서 내 힘닿는 데가지 힘써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여 말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 피곤하다 보니까 끓임없이 코피가 나는 것이다. 나의 몸은 더욱 약해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약 3개월치를 받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풀빵5원짜리 30원어치로 취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았다. 하청공장에서는 작업관계로 일요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경영부실로 인해 여러 차례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안에서 여러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혼탁한 먼지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생활하는 나 자신을 볼 때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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