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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5/27
    대중을 따르라(4)
    젊은바다
  2. 2009/05/26
    단 한 사람!
    젊은바다
  3. 2009/05/20
    허병섭 · 이정진님 병원비 마련 후원의 날
    젊은바다
  4. 2009/05/05
    가난한 행복(2)
    젊은바다
  5. 2009/05/05
    말..글..(~2009.5.4)
    젊은바다

대중을 따르라

대중을 조직할 수 없다면.....

억지부리지 말고 대중을 따르라!!! 

 

자기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거든

섣부르게 떠들기 보다는 좀 길게 생각하고 생각하라!!!

 

대중과 대화하지 않는 자기만의 성난 목소리는

그저 억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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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오늘도 여러차례 바뀌었듯

언제 또 바뀔지 모를 이런저런 평가들은 더 후의 일로 남겨두자.

 

그저 단 한 사람,

명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단 한 명의 대통령...

 

그저 오늘은 그렇게만 그를 존경하고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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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섭 · 이정진님 병원비 마련 후원의 날

 

허병섭 · 이정진님 병원비 마련 후원의 날

두 분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모아 주민(빈민)운동의 선·후배들이 마련하는 자리입니다.
티켓 판매가 시작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09년 6월 20일(토) 오후 12시 - 밤 10시
장소 : 여의도 BTB 호프 - 유화증권 지하 (5호선 여의도역 3번 출구, 도보 3분 거리)

공연 : 가수 홍순관 / 449 프로젝트밴드 외


주최 : 후원의 날 준비위원회
입금계좌 : 488401-01-199036 (국민은행 /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기타문의 : 02) 766-9051 오미옥
* 티켓은 1만원, 5만원 권이 있습니다.

 

 

 

허병섭 목사, 이정진 선생 투병 근황

이정진 선생이 2009년 1월 6일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간병중이던 허병섭 목사도 1월 12일 갑작스레 병증이 생겨 입원하였다. 강남성모병원에서 두 분이 모두 '상세불명 뇌손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번의 MRI 촬영 결과 뇌 전반에 뇌백질이 끼었고 치매, 일산화탄소가스 중독 증상과 비슷하나 확증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현재 이정진 선새은 미소들병원에, 허병섭 목사는 애린실버요양병원에서 증상을 호전시키기 위해 양방, 한방, 대체의학 등 적극적인 치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정진 선생은 사람을 알아보고 간단한 말씀과 의사표현은 가능하지만 스스로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허병섭 목사는 사람을 못 알아보고, 말씀도 못하시며 거동 또한 불편한 상태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모아 두 분의 쾌유를 위하여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허병섭 목사, 이정진 선생의 삶을 되돌아 보며

허병섭 목사는 1941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 군목(軍牧)으로 입대. 군복무중에도 청계천에서 빈민들을 만났으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청계천 꼬방동네에서 중랑천 뚝방의 도시빈민들과 어울리며 가난한 자의 벗과 형제가 되어 무료 진료를 알선하고, 당국의 무자비한 철거정책에는 몸으로 맞서 싸우는 주민운동(CO) 조직가로 활동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20여 차례 연행, 구금, 고문을 받아야 했고, 도피생활을 반복했다.

1976년 하월곡동에 동월교회를 설립하여 민족적, 민주적, 민중적 교회를 지향하며 국악찬송과 판소리 설교 등을 통해 예배의 한국화를 시도하였다. 교회가 단순히 예배드리는 곳, 자선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지역주민들 스스로 참여하고 깨닫고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1982년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의 보육의 짐을 덜어주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모아 교회안에 똘배의 집이라는 탁아소를 세웠으며 이는 1987년 탁아소 입법화의 기반이 되었다.

1988년 소속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고 성직자가 가지는 권위, 사회적 위상 등을 벗고 진정한 빈민으로 살기 위해 막노동판에서 미장공으로 노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 하월곡동 노동자 15명과 최초의 건설노동자생산협동조합 '건축일꾼 두레'라는 공동체 조직을 만들었다. 노동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스스로 노동을 통해 천대와 자기멸시를 떨쳐 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허병섭 목사의 실천적인 활동을 모형으로 현재의 자활지원센터의 제도화가 행해졌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정치를 위해 생활경제연구소를 만들었다.

1996년 무주 안성면 진도리로 귀농,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소비의 근원지인 도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나눔과 섬김, 공생의 가치가 담긴 생태적 관점으로의 전환 없이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자본주의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보고 생태 생명운동을 전개하며 골프장 등 무주지역 개발에 맞서 주민과 함께 싸웠다.

1998년 민중 교육을 실천으로 옮겼던 그는 생태주의에 근거한 교육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진도리 근처에 푸른꿈 고등학교가 들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03년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모여 설립된 최초 대안대학 녹색대학교(現, 온 배움터)가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개교 이후로도 학교와 물(학생)들과 함께 하며 학교가 안정화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생태적 삶의 방식을 알고 익히기 위해서, 왜곡된 문화를 생태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생태문화 공간을 창조하는 일꾼을 양성하는 생태적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다. 현재 온 배움터 공동대표와 생태교육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2008년도에는 두 분 명의의 땅과 산 등을 자연환경국민신탁에 증여하면서 무분별한 개발경영의 사회에 아름다운 귀감이 되었다.


이정진 선생은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70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72년까지 The Stuendet Times 기자 활동을 하였다.

1990년 해직교사 후원회, 참교육 학부모회 자원활동을 하다, 1993년 참교육 시민모임 사무처장으로 활동하였다.

1996년, 허병섭 목사와 뜻을 같이 하여 무주로 귀농, 땅을 일구며 생활하며 지역 어르신들께 한글 등 공부를 가르치며 봉사하였다.

2007년 만나지역아동센터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지역의 아이들을 돌보았다.

2008년 주민들의 권유로 지방선거에 민주 노동당 후보로 군 의원에 출마하였다.

두 분의 밀알노동을 통해 경험한 삶을 엮어 「허병섭 이정진의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함께 읽는 책, 2001)을 출판하였다.

두 분은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민중교육과 생태생명운동에 헌신하시다 지금은 두 분 모두 힘겨운 투병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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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행복

가난한 사람은 이 땅에서 행복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행복을 빼앗아야만

자기이윤을 챙길 수 있는 자본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어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그대로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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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2009.5.4)

 

모르는 것을 확인시키지 말라 그저 자기도 모르게 알게 하라.


혼자 부자 되는 교육 말고 함께 잘사는 교육

혼자 치열하게 사는 교육 말고 함께 부지런히 사는 교육

혼자 욕심 부리는 교육 말고 함께 꿈꾸는 교육

혼자 외로운 교육 말고 함께 신나는 교육


천천히 따지고 빨리 풀라.


당황스럽다 소통하자고 하는 짓이 소통에 문제를 일으킬 듯 하다.

거쳐야할 과정일까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72시간 기다려 나를 의식하지 않게 되어야 할 것은 사슴만이 아니다.

더 오래 기다려서라도 나 스스로 나를 의식하지 못할 때 그때 나도 사슴도 진정 자유롭다.


앙갚음은 자신이 입은 상처만큼 상대를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것이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처를 치유할 어떠한 노력도 할 수 없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하게 살 수 있는지 참 우숩다.

난 그저 멍청할 뿐이다.


리더는...

꿈꾸는 사람

마음 읽는 사람

한 걸음 앞서거나 뒤서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


대화의 실효성은 대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난 누구와 대화 하고 있는가?


한부모 여성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이 속에서 그들의 자치모임을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 스스로 일상에서 살아내지 못하는 내 생각과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관념에 불과하다.

관념만으론 감동을 불러오지 못하고 감동 없는 창조는 거짓이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 운동은

이슈의 정당성이나 방법의 기발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실패하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의 성찰과 행동 없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당장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결국 누가 그 일을 해내게 될까?

 

누군가 내가 믿는 이를 내 앞에서 비난한다면

난 그를 편들어 변호하는 게 옳을까 그저 '나 참 민망했어요' 라고 이야기하는 게 옳을까?

난 여전히 내 느낌보다 생각에 집착한다

 

 

피침략자가 침략자를 모방할수록 침략자의 지위는 그만큼 더 안정된다.

ㅡ프레이리 페다고지


조직가는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되지만 지도자는 조직가가 될 수 있다.

지도자는 혼자이면 안 된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면 안 된다.

지도자는 푯대다.

지도자는 증거다.


망나니나 붙들고 늘어지는 투쟁은 이제 그만....

2MB가 잘리면 자본이 코피라도 흘리고 대일밴드라도 붙일까 ?

구태의연한 정권 퇴진운동은 자본을 더 똑똑한 괴물로 만들 뿐이다.


늘 자신만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똑같은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다종다양한 환자들이 민중의 마음과 몸을 몰아세우고 있다.


색다른 미래 색다른 선택 , 반송사람들ㅡ산지니


민중의 힘을 빌려 자신들만의 자유를 성취하고 멀리 떠났던 이들이

다시 민중의 고난에 기대어 자신들만의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으려하고 있다.

제기럴~~~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그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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