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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4/01
    강민호 열사 - 열사예배 1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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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4/01
    김기욱 열사 - 열사예배 1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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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4/01
    김미영 열사 - 열사예배 1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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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4/01
    박영진 열사 - 열사예배 1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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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4/01
    계훈제 열사 - 열사예배 1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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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3/04
    유순조 열사 - 열사예배 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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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3/04
    정태수 열사 - 열사예배 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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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2/27
    차봉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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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2/27
    박태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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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2/19
    김태환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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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 열사 - 열사예배 120401

강민호 열사 
(1966년~1990년)   당시 25세 노동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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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16일 전북 출생
1985년 3월 한신대 경영학과 입학
1986년 10월 건국대 애학투사건으로 구속, 집행유예로 석방
19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개표 사건으로 2년 선고
19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석방, 복학
1990년 3월 28일 대붕전선 입사
1990년 4월 4일 야간작업 중 기계에 휘말려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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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한신대학 시절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하여 많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다. 동지는 이 땅의 구체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왔으며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에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하다가 2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동지는 노동운동을 하고자 대학졸업장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삶을 자기의 삶으로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동지는 입사한지 7일째 되던 날 야간작업을 하다가 연신기 주위에 있는 폐선을 치우기 위하여 1.5m 되는 연신기 기계 사이의 통로를 지나다가 매고 있던 폐선이 회전하는 연신기에 휘말리면서 몸도 따라 들어가 비명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이와 같은 참변은 기업주가 안전실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안전교육과 안전시설에 대해 점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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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욱 열사 - 열사예배 120401

김기욱  열사
(1962년~2002년)   당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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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출생
1987년 6월 23일 대우종합기계(전 대우중공업) 입사
1988년 노래패 노둣다리 결성 및 3대, 9대, 11대 회장
1989년~1995년 대우중공업 11~13 노조운영위원,회계감사, 복지실장
1996년 인천지역 금속노동자 노래패연합 ‘철의 노동자’ 결성 및 초대회장
1996년~1998년 대우중공업 14대 노동조합 복지실장
1999년 인천지역 노동자 노래패장회의 2대 회장,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준) 운영위원
2000년 인천지역 노동자 노래패장회의 3대회장
               제13회 인천노동문화제 공동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
               대우중공업 15대 노동조합 대의원
              간암으로 판정, 투병생활 시작
2002년 4월 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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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대우종합기계(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라는 존재가치를 알게 되었고 오랜 기간 노동조합 간부로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노동문화운동이 노조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영역이길 바랬던 인천 노동문화일꾼들의 노력으로 인천노동자 노래패 연대체계는 차츰 독자적인 사업을 창조해 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동지는 ‘노둣다리의 일원으로서, 인천 노동문화연대체계의 대표로서 활동했다. 이런 노력 속에서 인천의 노동문화운동은 전국적으로 모범이 되기도 했으나, 동지의 업무는 늘 과중돼 있었다. 동지는 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 중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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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거동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어 대우자동차 집회에 몇 번 참석을 하였더니 주변에서 환자가 돌아다닌다고 난리가 아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회사 동료를 만났더니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집회 참석한다매'라며 걱정어린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닌가. 집에서도 아내와 자주 말다툼을 한다. 또 시작이냐고....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들을 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더 건강해지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동지가 남긴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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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열사 - 열사예배 120325

김미영  열사
(1969년~2007년)   당시 39세 노동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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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인천에서 출생
1988년 문성여상을 졸업하고 주안 삼기전자에 입사
1990년 노동조합을 결성. 92년부터 93년까지 노조위원장을 맡아 활동함.
1994년 서흥산업 입사하여 활동
1999년부터 전국여성노조인천지부에서 조직부장, 사무국장, 부지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와 권리 확대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함.
2007년 3월 26일 저녁 조합 활동 중 돌연 운명
2007년 3월 28일 고 김미영 동지 인천민주노동자장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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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이래 믿음직한 여성노동자로, 밝고 당찬 성정으로 세상의 차별과 맞서 싸웠다.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비정규직 차별과 저임금으로 고통받는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장을 발로 뛰면서 조직하고 열성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
동지는 전국여성노조 인천지부 사무국장으로 조합원의 근황과 고충처리에도 앞장서는 등 역할을 충실히 하여, 조합원과의 조직을 견고히 유지하며 진정한 노동운동가로 성장하였다. 특히,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과, 열악한 청소 분회의 근로조건 개선 교섭투쟁은 뛰어난 선동력과 현장지도력을 발휘하여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내며 노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살아왔다. 그러던 중, 동지는 조합 활동을 하다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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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열사 - 열사예배 120325

박영진 열사
(1959년~1986년)   당시 26세 노동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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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배문중학교 중퇴 후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어렵게 생활
1984년 1월 (주)동도전자에 입사
1984년 7월 (주)동일제강에 입사
1985년 9월 18일 (주)신흥정밀에 입사
1986년 3월 17일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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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어린시절을 중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왔다. 그러나 동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23세 되던 해, 야학을 다니면서 진실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시흥에 있는 동도전자에 다니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동일제강에 입사해 민주노조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신흥정밀은 당시 부당노동 행위 및 임금 착취에 대하여 조금만 항의를 해도 구타를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해고시키는 무법천지의 회사였다. 동지는 동일제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작업과 현장 실태 파악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여러 상황들이 동지를 힘들게 하였지만 동지는 노동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탁월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86년, 신흥정밀은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했고 공권력이 투입됐다. 그 과정에서 동지는 경찰과 회사 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했다. 동지는 병원에서 동지는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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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훈제 열사 - 열사예배 120325

계훈제  열사
(1921년~1999년)   당시 78세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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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 출생
1940년대 일제시기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50년대 말 ‘진보당’ 사건으로 위축된 운동진영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4.19시기에 학생운동의 대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
1960년~1961년 교원노조 결성, 국학대 강사
1962년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1970년~1979년 ‘씨 의 소리’ 편집위원
1973년~1974년 구화고등학교 교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투옥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전국적 전 계층적 열망을 묶어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내란음모죄로 수배, 2년여 도피생활
1982년 포고령 위반, 내란음모 사건 관련 투옥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통련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1987년 6월항쟁 시기 민통련의장 대행으로 6.10 항쟁을 선언한 성공회 농성을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됨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1995년 고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
1999년 3월 14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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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동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민통련 부의장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혁명적 변화와 민주화를 위해 평생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동지는 지난 ’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옷차림이 말해주듯 동지는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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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조 열사 - 열사예배 120304

유순조 열사

(1949년~2002년)   당시 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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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출생
1987년 이천전기 입사
노동자 대투쟁 관련 투옥,해고
1998년 구조조정 반대투쟁 관련 투옥
2002년 3월 8일 투병 중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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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50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노동을 시작, 20대에 참담한 노동현실에 눈을 뜨고 많은 노동현장을 전전하다 ’84년 이천전기에 입사했다. 동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투옥되었고 3차에 걸친 해고를 투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 후 ’98년 금융위기 때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생존권을 지키려다 다시 투옥됐다. 저들의 해고와 투옥 등 모진 억압으로도 진실을 향한 동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천전기 해고이후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인천지역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동지, 자그마한 체구에 푸른 수의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입가엔 늘 귀까지 걸리는 웃음을 짓던 동지, 동지의 말과 행동은 화려하고 분주하지 않았지만 그 환한 미소로 해고투쟁을 같이하는 동지들에게 늘 커다란 힘을 주었던 동지, 투쟁과 긴장으로 점철된 동지의 삶에 어느새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찾아들었고 처절한 투병 끝에 ’02년 3월 8일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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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열사 - 열사예배 120304

정태수 열사

(1968년~2002년)   당시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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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주 출생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전산과 졸업
1989년~1991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싹틈’동문회 연대사업부장
1991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 조직부장
1993년~1998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국장
1995년 3월 최정환 열사 투쟁집행위원
5월 장애인자립생활추진위원회 조직부장
9월 인천아암도 생존권 투쟁 중 구속
12월 이덕인열사 투쟁집행위원
2001년 서울장애인연맹 조직국장
2001년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2002년 서울장애인연맹 사무처장
2002년 3월 3일 ‘제1기 장애인 청년학교’수료식 도중 과로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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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생애는 장애인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당당히 투쟁한 투사의 삶이었다. 동지의 투쟁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싹틈동문회’에서 발행한 소식지를 복지관측에서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지에는 ‘복지관을 졸업한 학생들의 90%이상이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고, 그나마 취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6개월 이상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5 만 원 이하의 교통비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복지관은 서울시에 수료생들의 취업률을 90%가 넘는다고 보고했었다. 동지는 이 사실을 밝히는 농성투쟁에도 결연히 참여했다. 동지는 대학을 준비하던 중에도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정립회관 시설비리 투쟁에 참여했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노점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최정환 열사의 분신과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투쟁에 헌신했다. 동지는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집단이기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세상에서 장애인이 소수자로서 차별받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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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봉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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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차봉천 (당시 나이 62세 : 1947년~2008년)

 

1947년 2월 21일 경남 남해 고현면 갈화리 출생

1974년 부산시 공무원(행정서기)으로 공무원 생활 시작

1981년 3월 국회 공무원 임용시험(행정7급) 합격 근무

1998년 국회사무처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 준비위원장

2000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2000년 공무원연금법 개악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상임대표

2001년 3월 24일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위원장

2001년 5월 7일 공무원·교수 노동기본권쟁취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1년 7월 공무원노조 추진관련 체포영장 발부, 명동성당 농성

2001년 12월 26일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체포·연행

2002년 3월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범

2002년 3월 26일 노조 출범관련 체포영장 발부

2002년 4월 3일 초대위원장 당선 및 인천 산곡성당 및 명동성동 농성

2002년 10월 3일 공무원노조 결성 및 연가파업 주도 혐의로 체포, 구속수감

2003년 공공부문노조연대회의 공동대표

2003년 민주노동당 입당, 강남갑지구당 위원장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갑 출마

2004년 12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일만연대 활동

2006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지도위원

2006년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임원-대의원 직선제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운명

2008년 9월 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장.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안장

 

[동지의 삶과 죽음]

 

故 차봉천 초대위원장은 1947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4년 부산시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국회사무처로 옮겨 일을 했는데, 승진과 개인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부정부패 척결과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동료들로부터 잘못된 일은 못 참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단칼’과 ‘차폴레옹’이었다.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굴종과 굴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으로 국민의 공무원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공무원노동자들의 권리와 단결을 위해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치열하게 실천하였다. 이러한 헌신적 투쟁과정에서 정부의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고인은 암 투병 중 말기에 이르러서도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동지들에게 남은 투쟁을 맡겨둔 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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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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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29 박태순 (당시 26세)

 

주요 경력사항
1966. 9. 12 경기도 출생
1985. 3.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1985. 3.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7. 노동운동 투신,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 함
1989. 5. 20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 1년6월 복역 함
1990. 11. 13 부산교도소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1991.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1992.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1992. 8. 29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2001. 2. 15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행방불명 되었던 1992.8.29 21:55경 시흥역(서울기점 17.1km지점)에서 광주행 무궁화호과 충돌 두부파열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열사의 삶
85년에 한신대 학생운동 참여 87년 노동운동에 투신.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구속, 출소 후 수원 부천등지 노동현장 활동. 1992년 8월 29일 오후 역곡소재 수영기계(포장기계제작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직장동료들과 간단히 술자리를 한 후 구로역에서 헤어져 시흥동 소재의 친형(박영순)집으로 귀가하던 중 구로역 인근에서 실종 됨. 당시 박태순은 병무청의 영장 수취 거부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이며, 군기피자로 분류되어 기무사의 집중적인 감시와 추적을 받고 있었음. 박태순 실종 후 집에서는 박태순을 찾기 위해 연락 가능한 친구, 동료, 선후배에게 행방불명 사실을 알리고 소재지 파악에 나섰고, 혹시 불신검문에 걸려 군대에 입영되거나 구속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무부, 검찰청, 경찰관계자 등을 통해 확인했으나 박태순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8월 29일을 전후한 교통사고 사망자 중 20대 후반의 사람을 찾기 위하여 구로경찰서, 석수파출소, 인근 병원 등을 찾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함. 2001년 2월 15일 의문사진상위원회가 행방불명된 날 시흥역에서 열차사고로 무연고자 처리된 것을 밝혀내고, 벽제 무연고자 납골당에서, 행려사망자로 취급되어 9년 세월을 보낸 열사 유골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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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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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23일 충북 괴산에서 출생,
1984년 괴산고등학교,
1986년 경북전문대를 졸업한 후
1992년 수안보파크호텔에 입사

1992년 고인은 수안보 파크호텔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노조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99년에는 한국노총 충북지역본부 충주지부 의장에 당선되어 명실상부한 충주지역의 대표적 노조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


2000년에 충북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2001년에는 전국관광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2년 충주시정 개혁위원, 녹색충주 21 사회 환경요원으로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 전개함


또한 2003년 탄금초등학교 운영위원, 칠금·금능동 주민자치위원, 학교를사랑하는모임 중앙공동대표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전념하였음.


2005년 6월 7일, 충주지역 레미콘노조들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는 레미콘 사측에 맞서 파업에 돌입하였고, 열사는 선봉에서 파업투쟁을 지도하다가 2005년 6월 14일 레미콘노동자 노동3권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마치고, 사조레미콘으로 이동하여 투쟁을 전개하던 중 사측이 동원한 대체용역 레미콘 차량에 치어 현장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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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곳에서 장렬히 쓰러진 동지여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정신이 살아 숨쉬기에
우리의 투쟁을 멈출 수 없고
세상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 차라리 이곳에서
모든 것을 묻으리라.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를 반드시 보여주리라.

- 열사가 남기신 '당신의 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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