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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4
    정태수 열사 - 열사예배 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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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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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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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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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2/19
    김경숙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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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열사 - 열사예배 120304

정태수 열사

(1968년~2002년)   당시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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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주 출생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전산과 졸업
1989년~1991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싹틈’동문회 연대사업부장
1991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 조직부장
1993년~1998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국장
1995년 3월 최정환 열사 투쟁집행위원
5월 장애인자립생활추진위원회 조직부장
9월 인천아암도 생존권 투쟁 중 구속
12월 이덕인열사 투쟁집행위원
2001년 서울장애인연맹 조직국장
2001년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2002년 서울장애인연맹 사무처장
2002년 3월 3일 ‘제1기 장애인 청년학교’수료식 도중 과로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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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생애는 장애인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당당히 투쟁한 투사의 삶이었다. 동지의 투쟁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싹틈동문회’에서 발행한 소식지를 복지관측에서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지에는 ‘복지관을 졸업한 학생들의 90%이상이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고, 그나마 취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6개월 이상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5 만 원 이하의 교통비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복지관은 서울시에 수료생들의 취업률을 90%가 넘는다고 보고했었다. 동지는 이 사실을 밝히는 농성투쟁에도 결연히 참여했다. 동지는 대학을 준비하던 중에도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정립회관 시설비리 투쟁에 참여했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노점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최정환 열사의 분신과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투쟁에 헌신했다. 동지는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집단이기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세상에서 장애인이 소수자로서 차별받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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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봉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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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차봉천 (당시 나이 62세 : 1947년~2008년)

 

1947년 2월 21일 경남 남해 고현면 갈화리 출생

1974년 부산시 공무원(행정서기)으로 공무원 생활 시작

1981년 3월 국회 공무원 임용시험(행정7급) 합격 근무

1998년 국회사무처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 준비위원장

2000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2000년 공무원연금법 개악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상임대표

2001년 3월 24일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위원장

2001년 5월 7일 공무원·교수 노동기본권쟁취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1년 7월 공무원노조 추진관련 체포영장 발부, 명동성당 농성

2001년 12월 26일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체포·연행

2002년 3월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범

2002년 3월 26일 노조 출범관련 체포영장 발부

2002년 4월 3일 초대위원장 당선 및 인천 산곡성당 및 명동성동 농성

2002년 10월 3일 공무원노조 결성 및 연가파업 주도 혐의로 체포, 구속수감

2003년 공공부문노조연대회의 공동대표

2003년 민주노동당 입당, 강남갑지구당 위원장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강남갑 출마

2004년 12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일만연대 활동

2006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지도위원

2006년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임원-대의원 직선제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운명

2008년 9월 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장.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안장

 

[동지의 삶과 죽음]

 

故 차봉천 초대위원장은 1947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4년 부산시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국회사무처로 옮겨 일을 했는데, 승진과 개인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부정부패 척결과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동료들로부터 잘못된 일은 못 참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단칼’과 ‘차폴레옹’이었다.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굴종과 굴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으로 국민의 공무원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공무원노동자들의 권리와 단결을 위해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발전연구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치열하게 실천하였다. 이러한 헌신적 투쟁과정에서 정부의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고인은 암 투병 중 말기에 이르러서도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2008년 9월 4일 22시 18분 동지들에게 남은 투쟁을 맡겨둔 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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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열사 - 열사예배 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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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29 박태순 (당시 26세)

 

주요 경력사항
1966. 9. 12 경기도 출생
1985. 3.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1985. 3.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7. 노동운동 투신,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 함
1989. 5. 20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 1년6월 복역 함
1990. 11. 13 부산교도소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1991.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1992.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1992. 8. 29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2001. 2. 15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행방불명 되었던 1992.8.29 21:55경 시흥역(서울기점 17.1km지점)에서 광주행 무궁화호과 충돌 두부파열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열사의 삶
85년에 한신대 학생운동 참여 87년 노동운동에 투신. 수원 검찰청 점거농성 구속, 출소 후 수원 부천등지 노동현장 활동. 1992년 8월 29일 오후 역곡소재 수영기계(포장기계제작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직장동료들과 간단히 술자리를 한 후 구로역에서 헤어져 시흥동 소재의 친형(박영순)집으로 귀가하던 중 구로역 인근에서 실종 됨. 당시 박태순은 병무청의 영장 수취 거부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이며, 군기피자로 분류되어 기무사의 집중적인 감시와 추적을 받고 있었음. 박태순 실종 후 집에서는 박태순을 찾기 위해 연락 가능한 친구, 동료, 선후배에게 행방불명 사실을 알리고 소재지 파악에 나섰고, 혹시 불신검문에 걸려 군대에 입영되거나 구속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무부, 검찰청, 경찰관계자 등을 통해 확인했으나 박태순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8월 29일을 전후한 교통사고 사망자 중 20대 후반의 사람을 찾기 위하여 구로경찰서, 석수파출소, 인근 병원 등을 찾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함. 2001년 2월 15일 의문사진상위원회가 행방불명된 날 시흥역에서 열차사고로 무연고자 처리된 것을 밝혀내고, 벽제 무연고자 납골당에서, 행려사망자로 취급되어 9년 세월을 보낸 열사 유골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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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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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23일 충북 괴산에서 출생,
1984년 괴산고등학교,
1986년 경북전문대를 졸업한 후
1992년 수안보파크호텔에 입사

1992년 고인은 수안보 파크호텔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노조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99년에는 한국노총 충북지역본부 충주지부 의장에 당선되어 명실상부한 충주지역의 대표적 노조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


2000년에 충북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2001년에는 전국관광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2년 충주시정 개혁위원, 녹색충주 21 사회 환경요원으로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 전개함


또한 2003년 탄금초등학교 운영위원, 칠금·금능동 주민자치위원, 학교를사랑하는모임 중앙공동대표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전념하였음.


2005년 6월 7일, 충주지역 레미콘노조들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는 레미콘 사측에 맞서 파업에 돌입하였고, 열사는 선봉에서 파업투쟁을 지도하다가 2005년 6월 14일 레미콘노동자 노동3권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마치고, 사조레미콘으로 이동하여 투쟁을 전개하던 중 사측이 동원한 대체용역 레미콘 차량에 치어 현장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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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곳에서 장렬히 쓰러진 동지여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정신이 살아 숨쉬기에
우리의 투쟁을 멈출 수 없고
세상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 차라리 이곳에서
모든 것을 묻으리라.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를 반드시 보여주리라.

- 열사가 남기신 '당신의 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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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열사 - 열사예배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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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주)YH무역에 입사하였고, YH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78년 5월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노조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했다.
1979년 3월 회사측이 악덕기업주의 외화도피, 기업확장 등 부실 경영으로 폐업을 감행하자 YH노조측에서는 폐업 철회를 위한 정상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4월 13일부터 폐업철회를 위한 신민당사 농성에 들어갔다. 이 때 후생부 책임담당을 맡았으며, 이후 '회사정상화추진위원 56명구성' 중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정부 고위층에 보내는 탄원서도 직접 작성하였고, 마지막 부분에 혈서로 '회사정상화 필사'라고 쓰기도 했다.

8월 11일 2천여 경찰의 강제 진압에 맞서 동맥을 끊고 투신, 운명하였다(당시 21세).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 약력

1958년 6월 5일 전라도 광산군 출생

1972년 2월 광주 남초등학교 졸업(누에공장에 다니는 중이었음)

1973년 서울로 상경,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

1976년 8월 YH무역(주)에 입사

1977년 6월 녹지야학 입학

1978년 3월 YH노조 대의원으로 선출, 녹지야학 활동

1979년 3월 30일 YH무역(주)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사건 시발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회 공장점거 농성

5월 YH노동조합 조직부 차장으로 피선

8월 8일 노조 조합원 신민당사 진입, 정부 고위층에 보내는 탄원서 작성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 농성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동맥끊고 투신, 운명


출처: 유가협 홈페이지(http://www.ugh.or.kr/)
출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월간노동관계자료집(창간호).『노동운동』, 1988년 9월.

 

 

 

□ 동지의 삶과 죽음

 
김경숙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수십 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자행하는 회사였다. 이러한 YH무역의 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은 신민당사 농성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를 등에 업고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는 공권력의 위협은 동지를 투신하게까지 만든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라는 동지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YH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이 본디 강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권과 단결권을 지키기 위해 착취당해 왔던 소극성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YH 노동조합의 투쟁은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악덕자본가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결국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18년에 걸친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 김경숙열사가 남긴 글

 

신민당사에 들어가기 직전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던 중에 고향의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ㆍㆍㆍㆍㆍㆍ(전략)ㆍㆍㆍㆍㆍㆍ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굉장히 큰 회사랍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장용호 회장이 미국으로 돈을 외화도피시켜서 저희 근로자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어요. 저희 회사는 외국 수출품으로 인하여 대통령상까지 받게 됐는데 돈많은 회장이나 사장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저희 근로자들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그런데 현재 사용주 사장은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고 폐업공고까지 붙이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저희 힘이 약한 근로자들은 힘을 합하여 단결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저희들의 힘이 강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위로하며 웃으면서 기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저희의 힘이 강하여 회사의 사장은 수단과 방법을 다 활용하여 여러 가지 일을 꾸밀지 모르니 너무 염려하시지 말고 내 편지 아니면 믿지 마시고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우리의 문제는 곧 해결된답니다. 여름의 변덕이 심한 날씨에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그 모습은 멀리 떨어졌다고 잊지는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곳에서 사직하고 다른데 취직하려고 하여도 계속적인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판매되는 옷들이 팔리지 않아 실업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어요.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 실정이예요. 또한 이곳에 일하는 나이 어린 여러 근로자들을 위하여 끝까지 단결하여 저희들은 꼭 승리하고 말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다 할겁니다. 준곤이는 끝까지 누나의 힘을 버리지 않고 도와 주겠습니다. 이 회사문제가 해결되면 어머님 다시 찾아뵐께요.

사장이나 미국에 있는 장용호처럼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 잘살면 돈 없는 자들을 마음대로 하나 보지요. 그렇지만 돈없는 자들은 착한 마음을 지니고서 우리들의 처지를 기억하여 성실하고 정의롭게 사는 일입니다.

 

 

□ 김경숙열사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누구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안환경 관계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다가 나이 8세가 되던해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우리집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당장 날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야만 하셨다.없는 가정에서 어렵게 어머니의 수고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하기 직전 겨울방학 때부터 공장에 취직을 하였을 때 돈에 구애를 받던 나 자신은 이 가난한 우리 가정이 잘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여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맨처음에는 커다란 포부로 꿈을 안고 서울로 왔으나 와서 보니 별 것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생각했던 꿈은 이룩할 수가 없었다.

이 곳에서 내 힘닿는 데가지 힘써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여 말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 피곤하다 보니까 끓임없이 코피가 나는 것이다. 나의 몸은 더욱 약해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약 3개월치를 받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풀빵5원짜리 30원어치로 취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았다. 하청공장에서는 작업관계로 일요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경영부실로 인해 여러 차례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안에서 여러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혼탁한 먼지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생활하는 나 자신을 볼 때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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