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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업: 착시와 느림의 미학

  • 등록일
    2009/07/08 15:34
  • 수정일
    2010/09/13 12:31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다. 빠른 것이 미덕이 됐다. 컴퓨터와 핸드폰 등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람관계까지 ‘속성’인 시대가 돼버렸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제일 대접받는 투수는 여전히 ‘강속구’ 투수다. 아트 피칭의 대명사 그렉 매덕스나 장호연 같은 투수는 갈수록 긴 머리 찰랑거리는 ‘파이어 볼러’에게 밀려나고 있다. 야구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불우한 환경 속에 우연한 계기로 야구를 접했으나 불같은 강속구를 발견하며 만년 꼴찌 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끄는 이’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강속구는 투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니, 바로 ‘느림의 미학’ 때문이다. 오프 스피드 피치(Off Speed Pitch)라고 불리는 체인저업(Change Up) 계열의 투구가 현대 야구에서 ‘필수 구종’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 이쯤 되면 늘 등장하는 ‘체인지업의 대명사’ 요한 산타나를 다시 불러내 살펴보자.

 

[사진] 요한 산타나의 써클체인지업 그립. 어린 시절 베네주엘라 시골 마을에서 '동네야구'를 하던 아버지를 존경해 야구를 시작한 그는 이 공 하나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Santana's combinations: run value of the second pitch.

 

pitch      previous      times      pitch       cumulative
type       pitch         used       run value   run value
-------------------------------------------------------------

Change-up  Fastball        434      -0.024        -10.57
Change-up  Change-up       198      -0.022         -4.26
Fastball   Fastball        638      -0.006         -3.55
Fastball   Slider           43      -0.066         -2.83
Change-up  Slider           38      -0.035         -1.33
Slider     Change-up        26      -0.019          -0.5
Slider     Fastball         43      -0.007         -0.28
Fastball   Change-up       385       0.009           3.3

 

위 표는 산타나의 두 번째 투구 구질에 따른 실점가능성(Run Value)를 분석한 것이다(2008년 전체 투구, 우타자 기준). 표에서 보이듯이, 산타나가 1구로 직구를 선택한 뒤에 체인지업을 2구로 던졌을 때, 이 체인지업의 실점가능성은 -0.024점으로 나타났다. 산타나는 지난해 이와 같은 공배합을 모두 434회 사용했다. 공배합 사용 횟수와 실점가능성을 곱한 ‘누적 실점가능성’은 무려 -10.57점에 이른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직구-체인지업 콤보는 산타나의 실점가능성을 가장 낮추는 무기다.

 

그렇다면 ‘직구-체인지업’ 배합이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로버트 어데어(Robert Adair) 교수는 그의 저서 [야구의 물리학(The Physics of Baseball)]에서 인간의 시각능력과 지각능력 사이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타격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스윙을 하기 전에 스윙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당연한 이야기다). 타자는 투구 이후 약 225밀리세컨(Milliseconds, 1,000분의 1초) 경에 스윙여부를 판단하게 되고, 150밀리세컨 즈음에 실제 타격동작에 돌입하게 된다. 그 이후 날아오는 공을 보며 동작이나 타이밍 수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그 여지는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림] 어데이 교수가 [야구의 물리학]을 통해 밝힌 투수의 투구에 따른 시간-위치별 타격 전개상황을 표현한 그림.

 

이 공식을 산타나의 직구에 대입시켜보면 어떨까. 직구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을 경우, 타자는 공이 홈플레이트에 닿기 28피트 전에 스윙여부를 판단하게 되며, 19피트에 다다랐을 때 실제 스윙동작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일단 직구를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고정시켜 놓은 뒤, 비슷한 궤적의 체인지업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보면 아래와 같은데, 파란점이 직구를 나타내며 붉은점은 체인지업이다. 스윙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28피트를 기준으로 보면 두 구질은 비슷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지만, 스윙동작에 돌입할 때 체인지업은 직구에 비해 2.6피트 뒤에 있다. 홈플레이트에 다다를 때에는 3.7피트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위 그림은 공의 궤적을 옆에서 바라본 것이라서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으니, 포수 위치에서 본 그림으로 바꿔보자. 아래와 같다.

 

이렇게 보면 직구와 체인지업의 차이를 알아채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세상사, 힘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느리다고 꼭 나쁜것만도 아니다.

 

 

** 이 글은 The Hardball Times에 실린 Max Marchi의 7월3일자 포스팅을 번안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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