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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어야하는' 책을 내팽겨쳐두고 '읽고싶은' 책을 읽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
러시아의 여성혁명가가 아닌, '레닌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그녀.
저 대문짝만한 빨간 글씨가 거슬리는 표지.
누군가의 부인, 연인, 엄마가 아닌 여성의 이름은 없는걸까.
이네사는 부르주아 출신의 계급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실은 첫번째 결혼했던 알렉상드르가 공장을 갖고 있는 자본가였다. 둘 사이엔 네 아이가 있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이네사가 11살이나 어린 알렉상드르의 동생(시동생)과 연인이 되어 함께 살고 애까지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이 이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이네사가 곤경에 빠질때마다 알렉상드르가 도와준 걸 보면, 지금 우리네 시각에서 봐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알렉상드르의 동생, 볼로댜가 병으로 죽고 난 후, 이네사는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이네사를 신뢰했고 그녀에게 많은 중요 업무들을 부탁했다. 이네사와 레닌은 서로를 사랑했고, 나디야(그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받아들였다한다. 근데, 정말 받아들인걸까?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던 걸까.
사실은 그전에 레닌에게 떠나겠다했지만, 레닌이 붙잡았고 나디야는 이를 받아들였다. 레닌과 나디야의 관계는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라기보단 신뢰하는 동지 사이 정도로 보인다. 사랑이 혁명의 대의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생각한 레닌은, 결국 이네사에게도 결별을 선언하고, 이 일로 이네사는 매우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둘은 계속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고,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저격했을때 다시 둘은 연인이 된다.
10월 혁명 이후 이네사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인민위원으로, 중앙위원회 여성분과 위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제 1회 국제여성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한 것도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네사와 콜론타이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성격도 많이 달랐던 것 같고. 1920년 일에 지친 그녀가 요양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이네사는 레닌을 울게 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억된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그녀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레닌 얘기가 많긴 하다.
(저자는 <봉인열차>라는 책을 쓰다가 이네사에 대해 알게된 마이클 피어슨이란 사람인데.
혁명가들과 혁명을 이상적인 혹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관점'과 '편견'을 감안하더라도
레닌이 정말 성격이 안좋았던 인간이라는 건 진실인 듯하다. 하하.)
하지만 레닌이 없다면 그녀는 기억될 가치가 없는 혁명가였을까. 결코 그렇진 않을텐데.
콜론타이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의 많은 여성혁명가들은 레닌을 비롯한 남성혁명가들의 여성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에 대해 외롭게 분투했다. (6호가 나올때까지 여성노동자 신문인 '라보트니차'에 글 한편 안 실었던 레닌에게 어찌 분노하지 않으리오!)
여성주의나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그와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문제제기 하고, 그들의 '편견'과 맞서싸워야 할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왠지 그녀의 일생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늘 사랑에 목말랐고 외로워했던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평생을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도 잊혀진 안타까움 때문일까.
몇가지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
<이네사는 레닌이 어떤 남성 동지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자신에게는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신뢰와는 달리 혁명 과업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일들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느낌은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같이 일생을 혁명에 바친 여성들도 그녀와 같은 견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문제에 관한 모든 논쟁과 연설들이 시사하는 교훈은 법은 바꿀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자리잡아 온 관습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1926년 이후 이네사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제 신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 레닌과 그녀와의 의심스러운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젊고 부유한 여성이라는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이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네사가 개선하려고 그처럼 열심히 일했던 여성주의적 진보들은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가부장제의 반동으로 이내 사라져버렸다. 엘우드는 "이네사는 '생각으로 들끓는'-스탈린에게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던 지적인 여성 공산주의자-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썼다. 1930년에는 탁아소와 공공 식당과 세탁소가 사라졌다. 자유이혼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은 한때 사라져야 할 부르주아 결혼이라고 조롱당하던 기존의 결혼제도로 되돌아가길 강요당했다. 콜론타이의 전기 작가인 베아트리체 판스워스가 논평했듯이 "가족의 소멸은 그저 또 다른 사회주의의 신화가 되어버렸다.">
Inessa Armand
이네사 아르망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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