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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 2007년 8월 5일 히로시마 도서관에서 열린 '국제연대집회'에서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장의 연설 전문입니다. 

 

 

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정숙희(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이런 행사에 초대해주신 모든 단체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당시에 히로시마에서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 세분께서 피해를 입으셨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한분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후 할아버지 시신은 찾아 화장해서 근처 절에 갖다놨다고 하는데, 고모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겨우 살아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합천 고향으로 나왔지만 먹고 살 게 없어서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시는 동안에 피폭후유증으로 숨이 차고 기침을 자주 하셨고 하루도 약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건너가 검진한 결과 폐에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1990년 일본에서 돌아오시고 3일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4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고, 합천으로 돌아오신 뒤에 폐암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항암치료와 가족 모두 힘을 모아 민간요법 등으로 치료를 해서 차도가 좀 있었지만, 좀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일본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 병원에서 어떤 치료방법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2주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일본측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산 공항에 읍급차를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실 때 아버지의 모습은 중환자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해서 두 다리로 걸어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도 1999년 일본에 건너가 검사받은 뒤에 돌아와서 식물인간이 되어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일본 병원의 실험대상에 불과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피폭자 건강수첩도 가져갔는데 일본쪽은 아버지 죽음에 해명 한마디 없었습니다. 아버지 생전에는 일본에서 수당도 없었고 병원비만 겨우 지원이 되었는데, 일본에 다녀온 뒤에 돌아가셨으니 결국 일본은 아버지를 두 번 죽인 것입니다.


저는 1966년에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잘 엎어졌고, 중학교때부터 빈혈이 심해서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날씨로 따지면 화창한 날씨가 없고 맨날 구름 낀 날이지요. 다리가 아파 두드리면서 자다가 2000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진단결과로 연골이 재생되지 않는 병이라고 하였고, 병명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양쪽 다리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받아 인공관절로 지탱을 하고 있으나 남의 피를 많이 넣고 약을 계속 많이 먹어서인지 살이 쪘습니다. 수술비로 빚을 많이 지고 수술 뒤에도 6개월 이상 걷지 못해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목욕도 혼자 못해서 우즐증도 걸려 3번 죽으려고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원폭으로 뼈가 약한 것이라 생각 못하다가 딸도 내 어릴 때 증상과 비슷하고 남동생도 정신지체장애인 다운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언제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할지 모르는 상태이며 요즘은 더 어지럽고 구토증세가 있어 병원에 의뢰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피가 일반인에 비해 3분의 2정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몸속에 피가 출혈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2세 환우 분들을 찾아보니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픈 분들도 많고, 병원에 가도 병명조차도 없는 분도 계시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병원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몸이 아프니 일을 할 수 없고 생계가 어려우니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정말 모두들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전 회장이었던 김형률씨가 계속 전화를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에서 대구로 저를 만나러 왔을 때도 저는 원폭피해자 2세임을 부정하고 만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제가 다른 2세들에게 전화하면서 형률씨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전 김형률 회장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05년 7월부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고통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또 하루를 살아도 차별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원폭피해자로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며 살아왔기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2,3,4세 앞으로 몇 세대가 될지 모르나 이 고통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치료와 생계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특별법이 꼭 통과되고 2세 등 후세에게도 차별없는 피해보상을 해주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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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촬영2

2007. 8. 5

 

늦잠을 잤다. 다른 일행은 모두 식사를 마쳤고, 혼자서 식당으로 갔다.

밥에 미소국을 말아 먹었다. 속이 시원하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으로 갔다. 공원 한켠에는 조선인원폭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민단에서 주최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식순에는 '국기에 대한 맹서' 가 있다. 남한에서도 예비군 훈련장이나 민방위

훈련에나 가야 들을 수 있는데...

 

정숙희 씨는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로 얼굴이 조금 굳어져 보인다.

더운 날씨에 연신 땀을 훔치는 정숙희 씨를 보니 애잔한 마음이 든다.

 

점심 때가 되어 평화공원 내에 있는 식당에 가니 사람이 많아서 자리가 없다.

노다지로 상의 차를 타고 공원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나의 식탁' 이란 이름의 식당에 들어갔다. 구운 돼지고기와 몇 가지 반찬,

밥이 나오는 메뉴를 시켰다. 일본의 먹거리는 꽤나 간소하다.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음식이 있어야 된다는 우리네 정서와 달리 일본은

조금은 '모자란듯' 먹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오후에는 히로시마 도서관에서 열린 '국제연대집회'에 참석했다.

남한, 일본, 중국, 이라크 국적의 사람들이 발언을 했다.

남한은 중국 다음 순서였다. 김환태 감독의 <원폭 60년, 그리고...>를

상영하고,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장의 발언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 여러 행사를 치르다보니 실내에서 열리는 집회는 조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영상의 힘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정숙희 회장 순서에는

호응이 뜨거웠다.

강제숙 대표는 합천에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 한일 연대서명을 제안했다.

집회 중간에 잠시 짬을 내서 후쿠도메 상과 노다지로 상을 인터뷰를 했다.

두 분다 형률 씨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터뷰 중간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짠해 졌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저녁에는 8.6대행동 실무진들과 교류회가 있었다.

정숙희 회장과 강제숙 대표, 내가 참석했고, 일본쪽에서는 후쿠도메 상, 고바야시 상,

쿄코 상,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이름이...

피곤한 탓인지 생맥주 몇 잔에 취기가 돌아다. 한국이었다면 당근 2차로 갈터인데,

1차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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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촬영1

 

2007년 8월 4일 (토) 비가 내린다.


장마가 끝났다더니 비가 무섭게 내린다. 준비성 강한 김상희는 비가 계속 내리자,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결항 여부는 3시간 전에 결정된단다.(못 말리는 김상희)

처형과 형님과 상희, 이렇게 같이 공항에 갔다.

2시 40분경에 강제숙 대표와 정숙희 회장을 만났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오후 4시. 잠시 공항 밖에 나가서 공항 모습을 찍었다.

출발시간이 되어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히로시마로 가는 비행편이 없어서 후쿠오카로 가서 JR을 타고 히로시마로 갈 예정이다.

비행기 안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후쿠오카다.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비행기가 빠른 건지? 일본이 가까운 건지?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신고를 하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니 오카다 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카다 상은 스톤워크 코리아 때 합천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마른 몸에 좋은 웃음을 가진 오카다 상은 생전에 형률씨와도 만난 적이 있었다. 오카타 상이 작은 차로 우리 일행을 하타카 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히로시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정숙희 회장을 인터뷰 했다.

소감은 어떤지, 일본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떠했는지?

 

담배를 태우려고 흡연객차로 갔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예전에는 한국도 기차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경제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흡연객차가 있는 것이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히로시마 역에 도착하니 작년 히로시마 8.6대행동 때 만난 노다 지로 상이 나와 있었다. 노다 지로 상은 원폭 2세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작년에도 노다 상은 김봉대 아버님과 이곡지 어머님 강제숙 대표 그리고 나까지 4명인 우리 일행의 운전수 역할을 도맡아 해주셨다.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노다상,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노다 상의 차를 타고 숙소인 SOLARE HOTEL로 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로비에서 히로시마 대행동의 실행위원인 타니구치 쿄꼬 상을 만났다. 쿄꼬 상과도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호텔 로비에서 강대표와 정회장 그리고 쿄꼬 상이 내일 있을 국제연대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낭에 삼각대 그리고 카메라 가방까지 들고 다니려고 하니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열흘 일정에 체력이 잘 버텨줄지 걱정된다. 쉽게 잠도 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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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의 꿈

* 예전 하니리포터를 잠깐 하던 시절 쓴 글을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1980년 6월9일의 어린왕자

"과거의 고통을 잊는 것은 고통을 야기한 세력과 싸우지 않고 그러한 세력을 용서하는 것이다...."

[사진]김종태 열사 자화상

1980년 6월 9일 오후 5시경 한 젊은이가 신촌사거리를 걷고 있었다.뜬눈으로 밤을 샌 듯 수척해 보이는 얼굴에서 오직 두 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길을 걷는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더운 날씨에도 바삐 길을 걷고 있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으나 거리와 사람들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청년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무기력한 도시와 사람들 그의 눈에서 언뜻 물기가 고이는 가 싶더니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신촌 역 앞에서 청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몇 사람이 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문뜩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들과 함께 광주로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구수한 남도의 말투와 넉넉한 인심. 넉살 좋은 사람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가 떠나고자 하는 여행은 그곳이었다.".... 하느님, ...... 어머니 ........"

불길이 올랐다.1980년 6월 9일 오후 5시 50분이었다.

다큐멘터리 제작공동체인 푸른영상에서는 1980년 6월 9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신한 김종태 열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연출을 맡은 김성환 감독(32세)은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광주의 의미와 열사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다큐를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올해 완성 예정인 다큐는 촬영이 90% 이상 완료 됐으나 중요한 촬영이 진행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성환 감독은 김종태 열사의 분신을 목격하고 소화기로 불을 꺼준 근처의 약국 약사와 세탁소 주인 그리고 병원으로 열사를 옮긴, 해병대 상병(병원 기록)과 교통경찰(동생 기억) 혹은 방범(열사 어머님 기억)을 찾고 있다.

또한 당시 열사를 간호했던 간호사 중 한명을 찾고 있는데, 성은 이씨이며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1987년경 고대 집회에 참석했던 열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80년 당시 열사를 간호했던 간호사며, 열사로 인해 병원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힌 여자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연락처를 받으려 했지만 갑자기 들이친 경찰의 진압으로 헤어진 후 아직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망각을 거부하고 광주의 의미와 열사의 정신을 알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사명'이라고 말하는 김성환 감독은 열사에게 어린왕자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어린왕자 김종태'

"......나라안에서 자기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 천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 가는 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 내 작은 몸뚱이를 불 질러서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 사 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 (김종태 열사의 유서, 광주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김종태 = 1958. 6. 7. 부산 초량동 출생/80. 6. 9. 신촌역 부근에서 분신/80. 6. 14. 새벽 4시 30분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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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의 끝나지 않은 여행

故김형률씨 2주기 추모식에서 형률씨 조카 김은영양이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삼촌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서 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2년째 힘들게 세상여행을 하고 계실 삼촌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조카들에게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셨던 삼촌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 한편이 아련합니다. 힘겹고 괴로운 병마와의 싸움에서 결국 이기지 못한 삼촌은 결국 이 세상과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소식은 저에겐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식에 엄마께서는 안절부절 하셔서 덩달아 저도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니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삼촌이 보고 싶습니다. 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리에 가족들 모두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눈물도 보게 되었습니다. 삼촌의 영정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저는 눈물 한 방울을 흘렸습니다. 바람을 타고 한 폭의 민들레씨 처럼 하늘과 땅의 정중앙을 날아다니시면서 “우리 은영이가 지금 뭐 하지?” 라고 말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내가 불었던 민들레씨속에는 삼촌과 함께한 많운 추억들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기침을 하던 삼촌, 삼촌의 등을 두드려 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그립습니다. 이제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는데 삼촌께 의젓한 중학생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하게 느껴집니다.

또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도 수술을 하셨습니다. 전 삼촌처럼 아파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눈물이 나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작년 삼촌의 1주년 추모식 날이 생각납니다. 삼촌에 대한 저의 눈물에 모든 사람들이 삼촌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에 눈물 한 방울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반드시 삼촌과의 약속을 지켜 삼촌처럼 아파하며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된 사람이 되어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삼촌께서 하신 훌륭한 일들을 기억해 주시고 아픈 몸인데도 자기 자신을 믿으며 열심히 노력하셨던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삼촌 항상 지켜봐줘!"

 

 

평화박물관(http://www.peacemuseum.or.kr/)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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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어부로 살고 싶다

이강길 감독의 <살기 위하여-어부로 살고 싶다>를 흑빛청소년문화센터에서

상영했다.

 

4시에는 초등학생들이, 7시에는 일반 상영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걱정도 있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이 집중하기에는 독립다큐는 너무 어려웠다.

아이들은 화장실에도 가고, 친구끼리 이야기하고, 조금은 어수선한

상태로 상영이 끝났다.

 

상영 전에 입구에 갯벌배움터 그레를 후원하는 모금함을 놓아 두었다.

상영이 끝난 후 한 아이가 모금함에 용돈으로 받은 돈, 천 원을 넣었다.

천 원을 갖고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

하드 2개 혹은 아이스크림 1개, 과자 1개나 두개...

 

내가 그 아이 또래였을 때, 장사하는 엄마에게 백 원을 졸랐다.

그때 인기 있었던 쭈쭈바는 한 개에 50원.

나는 백 원을 얻기 위해 엄마의 장사를 방해하는 고난도?의 방법을 썼다.

댓가는 혼이 나거나, 돈을 받아내는 것.

돈을 받을 확률은 열 번이면 두 번 정도.

 

그 아이에게 천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았을까? 

모금함에서는 백 원짜리 동전도 있었다.

 

새만금을 막은 어른들, 갯벌을 죽이고 있는 어른들은

모두가 잘 살기 위해 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산을 허물어서 길을 내야하고,

강을 막아 댐을 만들어야 하고, 논밭을 메워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드 2개를 사는 대신 모금함에 돈을 넣은

아이의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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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회(患友會)

대표 김형율


2001년 5월 급성폐렴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면서 살아왔던 삶과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떠안으며 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왜 병마의 고통속에서 내 삶이 발목 잡여야 하는가?'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의문을 품으며 제 존재에 대한 의문과 이대로 묻어두고 살아가기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삶들이 억울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불안하여 퇴원후 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블린결핍증을 앓고 있는 그로인해 20여차례이상 반복적인 폐렴재발로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현재 폐기능이 70%이상 상실되어 있고 나머지 30%만 가지고 호흡을 하고 있는 원폭(原爆)2세환우(患友)인 저는 '한국의 히로시마(저 이치바준꼬,역사비평사)'를 통했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인 저에 대한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존재하게 된 그리고 평생을 병마의 고통속에서 삶이 발목 잡혀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개인의 삶은 물론 가족전체가 겪게 되는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하는 현실속에서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질병으로 병마와 빈곤이 악순환되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자식된 도리, 형제된 도리, 인간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사회적인 냉대와 편견, 차별등 이․삼중의 사회적인 고통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같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삶을 규정하게 만든 일제강점기 36년 경남합천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고찰한 ‘한국의 히로시마’를 통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해방전 합천에서 살고 계셨던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일제의 식민지수탈정책을 견뎌내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일본히로시마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必然)의 역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 36년동안의 경남 합천은 일제의 수탈적인 식민지농업정책으로 합천의 농업형태는 모든 분야에서 왜곡되고 피폐되어 갔습니다.

합천은 전체면적의 8할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로 농가1호당 평균경작지면적이 2,670평으로 조선 전역의 평균인 4,410평보다 휠씬 좁은 경작지면적을 가졌으며 논이 많은 한반도 남부에서 합천은 특히 논도 적은 토지분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농상의 악조건속에서 식민지지배 이전에는 그 영세성을 보충하기 위해 쌀,보리,콩,팥,잡곡,야채,특용작물 등 각종 작물을 골고루 재배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총독부가 밀어붙인 식민지정책인 일본인의 식량확보를 위한 쌀 증산정책 즉 조선의 농업전체를 미곡단작형 농업정책과 조선을 일본의 방적․제사자본의 안정된 원료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육지목화 재배와 양장업의 강제보급정책을 실시하면서 합천농가의 농업경영상태와 농민들의 생활은 식민지지배가 가속화될수록 피폐되어 갔습니다.

또한 합천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킨 또다른 원인으로 매년 합천에 발생했던 자연재해와

식민지농업정책과의 관계을 들수 있을 것입니다.

합천군 총면적의 약18%를 점하는 농경지는 초계분지 및 황강 유역이 평지부와 산간의 계곡부에 산재해 있고, 그 대부분은 천수답(관계설비가 없고, 오직 빗물에 의해 벼농사를 짓는 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강바닥이 얕은 황강유역의 전답은 장마나 태풍의 계절이 되면 홍수피해를 입기 쉽고 그 반대로 산간부에서는 가뭄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합천농민들은 예전부터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는 것으로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왔습니다.

그렇지만(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와같은 합천의 농업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쌀증산정책인 쌀의 단작화를 강요하였으며 재해시 쌀이나 보리의 대용식으로 농민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왔던 조나 메밀, 콩이 심어졌던 밭에 면화나 뽕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쌀이나 면화나 뽕나무만 심은 전답은 자연재해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하며 약간의 홍수나 가뭄에도 합천농민들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홍수나 가뭄이 휩쓸고 가게 되면 이농의 쓰라림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더구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전답이나 도로나 가옥의 복구작업은 모두 농민들이 자력으로 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의한 이농자가 늘어나면 복구작업은 진척되지 않아 농촌의 피폐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생존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향하는 합천농민이주자가 해마다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합천군의 농촌피폐가 극도로 심화되면서 많은 합천농민들이 이농의 괴로움을 겪었으며 당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의한 도항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도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합천농민들중에는 보릿고개를 넘을 수 없게 되어 ‘유리걸식하는 무리’, ‘이촌재민’이 속출하여 전체 합천군 인구의 7할이상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상태에 놓여 있게되며 1930년, 1932년, 1935년, 1940년은 일본히로시마로 건너간 도일자 수가 급증한 해로서 합천에 큰 홍수나 극심한 가뭄이 있었던 다음해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향산천을 떠나 일본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합천군쪽에서 사람들을 히로시마로 ‘밀어내는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이후 일본의 참략전쟁 확대에 발맞추어 군사도시로서의 도시확장공사가 대대적으로 착수되어 군수공장이나 군사시설도 많이 만들어지고, 조선으로부터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1930년대에는 히로시마쪽에서도 합천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수탈정책과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해 생활기반을 잃은 많은 합천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도일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전쟁의 결과로 원자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70여만명의 인명이 살상되는 처참한 인명피해를 낳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항복과 함께 일제36년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잔혹한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이며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해방후 세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원폭(原爆)2세환우(患友)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원폭(原爆)2세환우(患友)라는, 그로인해 겪고 있는 원폭후유증으로 예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을 수 없는, 점점 여위어가는 모습과 상황속에는 20세기 일본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식민지수탈정책이라는 광기(狂氣)의 역사가 지금 이시간까지도 연장되었어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경남 합천은 앞으로 다시 쓰여지고 다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3대 삼보사찰이 있는 해인사가 있는 곳보다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태어난 곳보다는 일제36년의 기나긴 식민지수탈정책으로 생존의 몸부림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처참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당하여 평생을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병마속에 빈곤과 사회적인 소외의 악순환을 겪으며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미국정부,한국정부로부터 아무런 법적인 보호없이 인간답게 살아갈수 없는, 인권이 유린된 역사로서 재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평생을 병마의 고통속에서 사회적인 냉대와 편견을 받고 있는 전국의 2,300여명의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만행이 지금 이 시간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필연(必然)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면 보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 스스로 자발적인 동참속에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문제의식들을 한일시민사회와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간다면 보다 근본적인 해결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시작은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은 국제연합(UN)의 반대와 세계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이라크침략전쟁을 일방적으로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사용한 반인륜적인 무기인 열화우라늄탄을 이번 이라크침략전쟁때도 다시 사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미 1991년 걸프전에서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걸프증후군(Gulf War Syndrome)으로 무고한 이라크민간인과 군인뿐만 아니라 다국적군으로 참전한 미군과 영국군등에서도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심각한 방사능후유증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열화우라늄탄을 아무런 죄의식없이 다시 사용한 것은 미국정부가 지난 59년동안 ‘방사능과 유전‘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을 외면한체 철저히 은폐와 왜곡으로 핵헤게모니에 의한 핵개발 정책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 59년동안 미국정부와 일본정부, 한국정부는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 강요하여 왔습니다. 더 나아가 각 정부가 원폭과 유전 문제를 올바르게 진상규명하지 않고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면서 사회적인 인식도 아울러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만 인식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전국의 2,300여명의 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지금도 자기가 겪고 있는 병으로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병마로 인한 경제적인 빈곤과 사회적인 냉대속에서 병마를 이겨내는 것도 힘겨운 데, 국가권력은 그동안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만 인식하도록 규정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또다른 인권침해이며 인권유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개인 또는 한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난 59년동안 미국정부,일본정부,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없이 은폐와 왜곡속에서 ’원폭과 유전’ 문제를 금기시까지 하여 왔습니다. 그 연장선 위에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방사능 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세계는 미국이라는 일방적인 폭력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유린당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반전의 목소리는 전쟁을 막아내지 못하고 폭력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라크 땅에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여 방사능오염을 초래했습니다.

방사능후유증을 호소하는 어린 시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반인륜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또다시 인권(人權)을 유린한 미국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아울러 전세계 핵과 방사능피해자들과 함께 세계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일방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인 열화우라늄탄과 같은 핵무기 사용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자신 스스로의 인권(人權)과 평화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의 인권(人權)과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금기와 성역'의 벽을 허물고

반드시 반인륜적인 인권유린을 자행한 미국에 대해 법적인 책임과 배상등 더 이상의 열화우라늄탄과 같은 핵무기 사용을 금지 및 폐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인권(人權)의 시대입니다.

인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보할 수 없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며 인류보편적인 삶의 가치입니다. 한국원폭피해자와 한국2세환우들은 지난 59년동안 원폭후유증에 시달리며 보편적인 삶을 박탈당한체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인권의 당위성.....


일본정부는 일본원폭피해자들에게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 의료등에 관한 법률(의료법)'과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법(특별조치법)' 그리고 1994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피폭자원호법)'을 제정하여 자국원폭피해자 35만여명에게 1957년 의료법이 제정된 이래 1998년까지 누계예산 약 25조원(2조5,000억엔)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1998년 한 해 피폭자 예산만 해도 약 1조6천억원(1,600억엔)을 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는 1991년,1993년도에 각각 17억 엔과 23억엔등 모두 40억엔(당시 환율 286억원) 기금을 받았을뿐입니다. 이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속에서 원폭에 피폭당하였지만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로부터 "인권유린"에 가까운 차별정책으로 인간된 삶을 누리지 못한체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전국에 원폭후유증을 전문으로 치료할 수 있는 원폭전문병원을 세우는 등 ‘원폭치료전문시스템’을 58년동안 구축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폭자건강수첩’을 소지하고 있는(일본내 거주하는 재일한국인원폭피해자나 도일할 수 있는 한국원폭피해자 포함) 일본원폭피해자들은 일본 전국의 병원 어디에서나 고가의 검사장비인 MRI, CT등을 통한 각종 검사와 암치료, 수술, 입원등을 무료로 받을 수 있으며, 원폭후유증에 의한 질병에 따른 각종 수당을 수령받는 등 일본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피폭자원호정책은 일본원폭피해자 스스로 원폭후유증을 극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정책적이고 법적인 뒷받침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폭원호시스템을 받으며 일반인들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나갈수 있도록 각종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본원폭피해자들은 '의료법'과 특별조치법' 그리고 '피폭자원호법'으로 의료원호와 생활원호를 받아 건강․치료․생활상태가 나아진 것에 비하여,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질병을 앓고 있지만 한국 어디에서도 원폭후유증을 전문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시스템 부재속에서 열악한 건강상태는 정상적인 생계활동을 가로막아 가족 전체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병고와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며 육체적․정신적․경제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또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고스란히 ‘원폭2세환우’들에게도 미쳐 그들의 건강권과 생존권 더 나아가 생명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한국원폭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원폭피해자1세대 19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원폭후유증’을 호소하는 원폭2세환우들이 전국에 2,300여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6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출판된 ‘핵의 아이들’에 나오는 21명의 원폭2세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삶속에 투영된 모습은 원폭에 의한 원폭후유증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물론이요, 생계의 어려움과 치료받을 기회로부터의 배제된체 기본적인 건강권과 생명권마저 위협당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피폭당한 한국인들은 전체 피폭자 70만여명중 10%에 해당하는 7만여명으로 그중 생존자는 4만여명만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중 약2만3,000여명은 한국으로, 약2,000여명은 북한으로 피폭당한 몸을 이끌고 돌아갔고 나머지는 일본에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일제강점하 36년동안 일제의 수탈적인 식민지농업정책과 강제징집, 강제연행(일본제국주의의 국가적인 납치)등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로 생존을 위해 도일하거나 끌려가게 되며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전쟁의 결과로 원자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70여만명의 인명이 살상되는 처참한 인명피해를 낳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항복과 함께 일제36년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이고 수탈적인 식민지 만행과 침략전쟁에 의해 강제연행, 납치되거나 징집, 경제적 수탈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피폭당한 수많은 한국인원폭(原爆)피해자들은 원폭후유증이라는 전쟁의 상흔(傷痕)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국에 2,300여명의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도 전쟁의 상흔(傷痕)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같은 현실속에는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와 일본사회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졌던 불법적이고 수탈적인 식민지 만행과 침략전쟁과 같은 “가해의 역사“를 철저히 은폐하면서 일본인원폭(原爆)피해자들을 앞세워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의 피폭을 받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 피해국이라는 “피해자 의식”만 강요하며 지난 59년동안 허구적인 일본의 평화주의를 확대 재생산하여 지금 이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기때문입니다.(허구적인 평화주의 확대재생산-보다 구체적이고........)



아울러 작년6월 일본의회에서 통과된 유사법제 3개법안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일본정부와 일본사회가 보수우경화되어 갈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한국원폭(原爆)2세환우회(患友會)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함과 동시에 인류보편적이고 올바른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정부와 일본사회의 허구적인 평화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대안마련과 함께 올바른 역사성과 사회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평화를 한국시민사회구성원과 일본시민사회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연대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물려주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의 핵개발 발표로 한반도에 다시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구체적인 삶들을 담보해내는, 핵무기 피해의 상흔(傷痕)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살아있는 증언과 삶을 통해 무서운 핵무기의 실상을 한국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야 하고 널리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는, 인권(人權)을 중시하는 진정한 평화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통했어 전쟁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체계화하여 다시는 한반도에 핵위협이 상존하지 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인권(人權)을 위한 평화, 인권(人權)에 의한 평화가 한반도와 전 세계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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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6일~29일

 

2007년 5월 26일

저녁 6시 기차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아버님과 통화를 했다.

잠결에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아버님이다.

1시간쯤 더 걸릴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기를 끈다. 하지만

20분인가 3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어디쯤인가 묻기에 창밖이 어두워서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도착하면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1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조선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와 함께 부산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도착하기 전까지 서너번쯤 전화가 울렸다.


형률씨 방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가족들이 내려와 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평화박물관에서 일했던 김대훈씨와 야오야기 교수님과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나 때문에 큰방으로 방을 옮겼다. 미안한 마음.

조석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님, 김대훈씨 그리고 평화박물관 조수효씨와 다른 두 분과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다.

숙소에 들어와 씻고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 서울 → 부산(KTX) 45,000


2007년 5월 27일

빵으로 아침을 먹고 부산민주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일 년 만이다.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인사하고, 조금 있으니 가족분들이 오신다.

둘째 형님과 인사를 하고 큰형님 하고도 인사를 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불편하실 것 같아 그냥 있었는데 먼저 인사를 건낸다.

다행이다.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얼기설기 급하게 만든 추모영상을 틀었다.

부끄러움.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남편분이 아프다는 얘기에 조용한 장내가 더 조용해진다.

강주성 대표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아버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삶아남은 자의 몫.

한홍구 교수님의 인사말.

형률씨 조카의 순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눈물을 흘리는 조카.

방송국 카메라와 어디서 온지 모르는 카메라 한 대, 그리고 환태씨의 카메라까지

조카의 우는 모습을 잡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나는 멀찍이 뒤에서 찍는다. 순간 나도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자리를 지켰다.

추모식이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영락공원으로 이동했다.

일 년만에 찾은 영락공원.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형률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영락공원에서 아버님께 인사하고 헤어졌다.

조석현 선생님 차로 지하철 역까지 갔다.

승이와 환태씨와 함께 부산역에 도착. 표를 끊으려고 하니 매진이란다.

환태씨가 인터넷으로 급하게 고속버스를 예매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구에 다시 가서 표가 있는지 물었다.

특실표가 있다고 해서 2장를 구입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아버님 기사가 난 부산일보를 읽었다.

강주성 대표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한숨이 나온다.

10시쯤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시간이 늦어서 다음날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고생했다는 말씀, 꼭 만들어야 된다는 말씀. 아!!!


* 부산 → 서울(KTX 특실) 67,000



2007년 5월 29일

평화박물관에서 아오야기 교수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종이에 답변 내용를 미리 정리했다면 보여주신다.

좋다고 말씀드리고 편하게 말씀하면 된다고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을 하신다.

인터뷰가 끝나고 근처에서 차를 마셨다.

추모식때 본 영상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 조심스럽게...

아버님이 형률씨 얘기가 좀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신 것 같다.

그렇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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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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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기

26일 6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아버님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여섯번인가 일곱번...

부산역에는 조석현 선생님과 아오야기 교수님이 아버님과 함께 계셨다.

간단한 음주 후 취침.

 

1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민주공원.

어머님을 뵙고 가족들도...

행사의 시작은 내가 만든 간단한 영상이었다.

부끄러웠다. 늘 그렇듯이...

 

다른분들의 인사말씀, 모두들 미안함을 얘기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인듯...

 

영락공원.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형률씨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아버지의 무덤을 장례 후에 한 번 밖에 못 간것이 마음에 걸렸다.

화장을 원했던 아버지를 나는 땅에 묻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매장과 화장.

 

편집을 하다보면 형률씨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듯이

 

살아있다는 것, 죽었다는 것.

나비가 꿈을 꾼 나인가, 내가 꾼 나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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