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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3

주말에 아내가 광화문에 있는 공원에 갔다.

주말마다 열리는 알뜰시장에 옷가지 몇 점과 이런저런 물건을 갖고.

두 시간 정도 물건을 팔고 번 것은 삼만 얼마.

 

오늘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패물을 처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결혼 반지와 아버지가 끼셨던 반지.

언제가는 이것들도 팔아야 하겠지.

 

서신부님은 끝까지 놓지 못한 것이 책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이런저런 책을 샀는데,

이제 책도 팔아야 하겠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가진 게 많다.

 

얼마 전 꽤나 묵직한 복합기를 얻었다.

부품 하나만 교체하면 쓸 수 있는 아주 멀쩡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부품 가격이 복합기를 새로 사는 가격하고 비슷했다.

그래서 그냥 고물상에 넘겼는데,

아저씨가 말한다. "돈은 못 드려요"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 아래서 사람은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대충 쓰고 버리는 물건.

 

다큐멘터리를 한다는 핑계로 놀면서 사는 나는

재활용도 안되는 폐기물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은 있다.

언제가 숨이 멈추면 어느 나무밑에 묻혔으면 싶다.

거름으로 쓰일 수는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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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가 김형률 활동 일지

* 김형률 활동 일지(2002년~2005년)

 

♢ 2002년 3월 22일

- 한국 최초로 원폭2세 환우임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힘. <대구 KYC>(대구 남구 봉덕3동) 사무실에서 부친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원폭2세피해자 문제에 대한 대책마련을 촉구함.

 

- <한국원폭2세한우회>결성. 한국원폭2세 환우카페(http://cafe.daum.net/KABV2PO)를 만들어 자신의 처지와 조건을 알리고자 노력함.

 

♢ 2002년 5월

 

- 일본 히로시마 원폭건강센터에서 한국원폭2세로는 처음으로 형식적이나마 건강검진을 받음. 담당 의사가 정밀 검진을 권유함.

 

♢ 2002년 8월

 

- <대구전교조>와 <히로시마일교조>와의 역사교류회 참가. 한국가 일본의 역사 교사들에게 한국원폭2세환우의 문제해결을 호소함.

 

♢ 2002년 12월

 

- 부산에서 아오야기 준이치(부산대), 조석현(전교조) 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 결성.

 

♢ 2003년 5월

 

-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에서 한국원폭피해자와 한국원폭2세환우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의, 서울의 관련 시민단체들과 연대 추진함.

 

♢ 2003년 6월 28일

 

- 서울에서 ‘한국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간담회’ 개최 및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구성 결의함.

 

- 8월 5일 <국가인권위원회> 긴정 및 기자회견 가지기로 함.

 

 

 

 

♢ 2003년 7월 26일

 

-부산에서 ‘한일원폭2세회 심포지움’ 참가. 공대위 심포지움 참관 및 공대위 2차 회의 개최

 

♢ 2003년 8월 5일

 

- ‘원폭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발족 및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개최함.

 

- 8개 시민단체와 함께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함.

 

-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함.

 

♢ 2004년 8월

 

- <국가인권위원회>, ‘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 조사 실시

(2004년 8월~12월, 5개월간)

 

♢ 2005년 2월 14일

 

- <국가인권위원회>, 국가기관 최초로 1세, 2세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함. 조사결과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모두 일반인들에 배해 질병발생 위험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남.

 

♢ 2005년 4월 12일

 

- <공대위>와 함께 원폭피해자 진상규명과 지원대책 촉구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의견청원 기자회견 개최. 원폭피해자 단체(한국원폭2세환우회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외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연명하여 국회에 특별법 제정촉구를 골자로 하는 청원서 제출.(소개의원 :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 2005년 5월

 

- <공대위> 확대 개편 결정, 따라서 공대위 명칭을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 위한 공대대책위원회>로 변경(소속단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원폭2세환우회 포함 8개 단체)

 

- 5월 18일, 국회에서 개최한 ‘원자폭탄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입법 방향’ 토론회 참가

 

- 공대위와 함께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피해자를 대상으로 평택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의 사무실과 합천의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한국인원폭피해자 진상규명과 인권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관한 설명회’ 개최

 

- 5월 19일~26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 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움 참여

 

- 5월 27일,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5차 회의에 건강악화로 불참

 

- 5월 29일, 오전9시 5분경, 부산시 동구 수정4동 수정 아파트에서 끝내 숨지다.

 

- 5월 31일, 부산대병원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부산 영락공원에 유골이 안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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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멍하니 텔레비젼을 본다.

쉴새없이 채널을 돌린다.

우스개 소리를 하는 채널에서 멈춘다.

그리고 웃는다.

 

아버지를 찍은 테이프를 하나 보았다.

대관령.

풍력발전기가 있는 곳이 나온다.

아! 저기에도 갔었구나.

잊고 있었다.

눈물을 잊은 것처럼.

 

꿈꾸듯 지나온 시간들이다.

깨지 않는 꿈.

아버지는 그 꿈속에 있다.

나는 꿈도 잊어버렸다.

눈물을 잊은 것처럼.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걸까.

눈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나.

이렇게 지내도 되는 것일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들숨을 끝으로 납작해진 코.

하얗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얼굴.

엉덩이에 생긴 욕창.

굳어가는 몸.

 

두 얼굴의 아버지가 있다.

사진속의 아버지와

마지막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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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빨래

병원에서 돌아오는 어느날

이천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걸음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가지러 갔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한참을 찾았지만 아버지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아버지를 불렀다.

화장실에 계셨다.

 

한참 후에 나온 아버지는 쓰게 웃으셨다.

설사가 나와 급하게 화장실로 오셨다했다.

차에 오르는 아버지를 부축하려고 보니 바지 뒷부분이 온통 누렇다.

씻고 가자고 하니 그냥 빨리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급하게 차를 몰았지만 정선집까지는 하세월이다.

다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씻고 가시죠.

아버지는 힘없이 대답하신다. 그럼 그럴까.

 

문막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지를 벗겨드리고 솟옷을 벗겨드렸다.

배만 볼록하다.

솟옷을 사러갈려고 문을 열었다. 자동문이다.

늦게 닫히는 문이 야속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본다.

솟옷을 사고 다시 문을 연다.

아버지는 빨리 문을 닫으라고 화를 내신다.

장애인 화장실에서는 바지를 빨수 없어서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빌어먹을 자동문, 사람들이 쳐다본다.

 

남자화장실에 가서 아버지의 똥묻은 바지를 빤다.

졸졸거리며 나오는 물에서 한참을 비벼댄다.

젖은 바지를 입고 차에 올라탄 아버지는 창문을 모두 열라고 하신다.

잠시 후 아버지는 바지가 다 말랐다며 쓰게 웃으신다.

바지가 다 말랐다고...

 

며칠 후 엄마가 얘기한다.

아버지가 미안했다고 똥빨래를 시켜서

엄마를 통해 얘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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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들이 무원칙하고 무분별하게 씌여지는 이곳에서

켄로치를 좌파감독이라고 부르기는 어딘지 어색하다.

 

존경은 하지만 영화는 재미없다는 어느 유명 감독의 말처럼 켄로치의 영화를

흥미의 시선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항상 자신의 시선을 잃지 않는 그의 영화는 어쩌면 그의 복일런지도...

 

영화 중반에 재판 받는 고리사채업자 이름이 스위니였다.

<한사람>의 주인공이자 내가 사랑하는 신부님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사채업자로 나오다니. 쬐금 화가 났다.

 

영화의 마지막은 켄로치 다왔다.

감정의 개입없이 그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남는다.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을 리메이크한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조디 포스터와 리처드 기어가 주연했는데, ...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

암튼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리처드 기어가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수대에 선 리처드 기어가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이름을 찾고, 보자기로 머리가

가려질때 긴숨을 쉰다. 나도 긴숨을 쉬었다.

 

보리밭... 중간 쯤에 동지를 밀고해서 처형 당하는 어린소년이 말한다.

무서워 죽겠어

 

영화의 마지막 죽음 앞에 선 동생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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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다가온다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는 걸까?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평균 9개월,

그렇지 않을 경우 3개월.

 

그동안의 치료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견뎌내실 수 있을까?

 

책을 읽어봐도 주변사람들도 항암치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의사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집에 불이 났는데 다리부러진다고 2층에서

안 뛰어내릴거냐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

항암치료를 잘 받으시면 1년이나 2년은 사실 수 있다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어차피 죽는 거 아니냐고...

 

어느날인가 지나가는 투로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너한테 신경질만 내는데, 너는 왜 나한테 잘하냐'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무엇일까?

 

웃음이라곤 없던 아버지가 요새는 자주 웃는다.

며칠 전 자장면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몇 번 갔던

수타자장면 집에 모시고 갔다.

 

하루에 몇 십알씩, 3개월동안 약을 복용한 아버지는 입안이

다 헐었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것을 잘 못 드시고 입맛이 변했다.

 

자장면을 드시고 나서 아버지는 면 만들려고

고생은 하는데, 맛이 영 아니라며 티없이 웃는다.

 

아이처럼...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찡그린 모습이 대부분인데...

 

아버지의 눈물과 웃음은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나에게 말한다.

준비를 해야한다고...

 

눈물을 흘리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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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티벳불교에서 전하는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거나 모른척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 어떤 이유로든 죽음이란

'사실'을 접하게 된다.

 

죽음은 두렵다.

죽음은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왜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에 무관심할까?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공포를 극복하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라고 한다.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마주볼 수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마주볼 수 있을까?

 

아버지가 현대의학으로부터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암 말기.

폐암으로 시작된 암이 전신으로 퍼져 치료방법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어디로?

 

두렵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부재가 두렵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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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웃음을 가졌던 사람

중학교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은 무지 무서워서 생각을 멈췄다.

교수형을 당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꿈이란 대개 깨어나면 잊혀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 지는데, 내가 죽는 꿈은 어제 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다.

 

고등학교 1학년 인가 2학년 인가 였을 때였다.

신문에서 대학생의 분신 관련 기사를 읽고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었다.

좋은 대학을 다녔던 그 사람은 왜 스스로 죽었을까?

그때 던졌던 의문이 이후 내 삶을 지배하리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 아는 선배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작년 겨울 지리산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그를 처음 본 것은 88년이었다.

학교를 1년 휴학했던 그는 나와 같은 강의를 들었고,

집회장에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다.

 

그 선배는 참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운동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저녁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그 선배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그는 항상 웃었다.

웃는 일보다는 우는 일이 많았던 그시절 그는 늘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일헌이만 보면 참 기분이 좋아. 힘내자! 고맙다."

 

1988년 전국의 대학가에서 전방입소 거부투쟁이 벌어졌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입소거부 투쟁를 벌였다.

학생들을 싣고 갈 버스가 학교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한창일 때 학교측은 다른 장소에 버스를 준비시키고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전방입소 4박5일을 다녀오면 군복무기간 45일 단축이라는 혜택이 있었다.

하나 둘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집회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때 그 선배는 버스가 집결된 장소에 가서 몸에 신나를 붇고 분신을 감행하려 했다.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입소시간이 연기되면서 다행히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선배는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전방입소를 거부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그 선배를 다시 본 것은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였다.

시계탑 밑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저 도를...."

선배였다.

반가운 마음에 약속시간을 미루고 선배와 근처 커피집으로 갔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기억이 희미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배는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잘 살라는 건강하라는 애기만 했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팠다. 학교 때 보다 더 마른 그의 체격 때문만은 아니였다.

평안을 얻었다는 선배의 웃음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선배의 웃음은 환했다.

그 웃음은 본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날 선배의 웃음은 아픈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얼마 전 이사 때문에 짐정리를 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인 예전 수첩을 둘추다 선배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봤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처 못했던 말을 해주고 싶었다.

 

"성일이 형! 나 형이 무지 좋았다. 몰랐지^^ 글고 제발 살 좀 쪄라, 너무 말랐잖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지만, 이럴 때는 있었으면 싶다.

나야 천국갈 마음도 없고 자격도 안되지만, 착한 사람들 고생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행복했으면 싶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그 중간쯤 어디에 면회실 같은 게 있을 게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사람을 면회올 수 있는...

그러면 형이 면회를 와서 같이 막걸리나 한사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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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향하여

 

며칠 전 <천국을 향하여>라는 영화를 봤다.

팔레스타인 청년 두 명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려 하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에게 강제로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2쳔년 전에 자신들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폭력과 테러로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중국이 한반도가 한 때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이유로 침략한다면?

일본이 한반도가 한 때는 자기들의 식민지 였다는 이유로 참략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게는가?

 

중국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점렴한 후에 동서와 남북으로 거대한 장벽을 세운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게는가?

 

일본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점령한 후에 일본인들에게 살 집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국 사람들의 집을 불도저로 부수고, 사람들을 죽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게는가?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형이 죽임을 당하고, 친구가 죽임을 당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게는가?

 

중국의 점령에,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고자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형이, 당신의 동생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중국의 북경이나 일본의 동경에서 폭탄을 터트린다면

당신은 그들을 뭐라 부르겠는가?

 

우리에게 안중근은, 윤봉길은, 이봉창은 무엇인가?

만약 그들을 당신이 의사라고 부르고 믿는다면,

오늘 팔레스타인에는 수많은 안중근과 윤봉길과 이봉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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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선물


요즘 남쪽 사람들이 이북으로 선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옛날에는 사냥하는 사람들과 열매를 채취하는 원주민들이 씨족사회처럼 살았다고 한다. 자기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람과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선물로 교환하는 방식이니 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 남북미 인디언,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계 원주민 그리고 에스키모인들은 모두 호혜식으로 물건을 교환했고, 오늘날까지도 자본주의가 그들의 지역에 파고들어가지 않는 한 그 방식을 지켜 나가고 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북미 서북쪽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 : 선물을 분배하는 의식)는 참으로 독특하다. 족장은 자기 부족뿐만 아니라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까지 초대하여 너그럽게 먹이고, 가죽제품, 말, 구슬, 조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나누고 나서도 남는 물건이 있다면 자신들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것들을 모두 태워버린다고 한다. 이 축제의 최고 덕목은 관대함이며 인색함은 죄로 여겼다. 누가 더 관대한지를 겨루는 것과 같다. 한국에서도 이 같은 제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 장례식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잘 대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받게 되면 당연히 보답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만큼 너그러움에는 힘과 매력이 있다. 보답하지 않으면 비인간적이고 체면을 손상하며 소외를 초래하게 된다. 선물을 교환하는 민족에게는 세 가지 자유로운 정신이 있었다. 곧 주는 것, 받는 것, 보답하는 정신이었다.


이러한 제도를 연구하여 1924년 <선물>이라는 유명한 책을 발간한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마우스에 의하면 선물에는 그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나 기가 붙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당연히 그러한 정신이나 기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로 복귀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선물을 받은 사람이 또다시 누군가와 선물을 교환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누었으면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보답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나 감사하지 않거나 보답하지 않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으며 또한 그것을 싫어한다.

이번에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 것은 무엇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북한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그들이 보답하지 않으면 무슨 손해를 볼까봐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북한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선물을 주고 있으니까 뭔가 잘 될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한 부시맨은 선물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로 재미없는 것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다. 서로 좋아하지 않을 때라도 한쪽이 선물을 주면 한쪽은 좀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평화가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준다. 그렇게 같이 살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자유시장 경제 논리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려면 식량 보내기 운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종교계 지도자들과 보통 국민들이며,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정부와 재벌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정부와 재벌은 굶주리는 동포를 외면한 채 북한에 대한 투자와 투기에만 급급해 있다. 종교계는 자본주의 돈 문화에 빠져 있는데도 각자 할 일에 대해 일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호혜와 상호부조를 강조하셨다. 밤중에 빵을 부탁하는 이웃이 너무나 귀찮아 도움을 주는 사람 이야기를 하셨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말씀은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달라는 대로 그냥 주라신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성인들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놓고 가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우리가 주는 선물을 제대로 쓰는지 남용하는지,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자. 왜냐하면 선물을 어떻게 쓸지 소심하게 따지면 주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어제 신문에는 북한 동포를 돕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또 다른 한편에 ‘자주포 브라질에 수출 가능성, 한미 내국용 제한 수정 협상’이란 표제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런 무기가 브라질에 필요한 것일까? 혹시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땅을 착취하기 위하여, 혹은 아마존 강가에 살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원주민을 억압하는 데 그런 무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 무기 판매에서 삼성은 1억6천만 달러를 벌어들일 것이라고 한다. 혹시 미국의 허락 하에 이런 장사가 되는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언제나 배울까? 선물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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