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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9.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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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9. 신자유주의

 

케인즈 주의는 소련 등 사회주의화에 따른 대안으로 제시된 체제다. 이로 인해 케인즈주의는 사회복지를 확대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자본진영은 과도한 세금으로 인한 자본의 이윤율의 하락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에 따라 과잉생산이 해소되었기에 초기 높은 이윤율로 인해 버틸수 있었으나, 60년대 이후 서구유럽과 일본의 경제회복으로 미국중심의 단일시장경제 위협을 받게 되고,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런 무한 경쟁은 이윤율의 저하를 급속하게 가져오고, 이는 독점에 따른 특별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과잉자본의 신규설비(불변자본)에 투하를 가져온다. 이는 또다시 구조조정을 통한 실업률 상승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냉전체제로 인한 대규모 전쟁이 아닌 국지전은 군수산업을 한계지점에 도달하도록 하였으며, 사회복지로 인한 예산의 증대와 도산해가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경기부양을 위한 뉴딜정책, 모두 국가예산의 심각한 적자를 가져왔다.

 

 

1973년, 1979년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인해 1,2차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한다.

이스라엘과 아랍계의 전쟁은 기원 후 135년까지 올라간다. 고대 로마제국에 의해 식민지가 된 이스라엘은 수차례의 항전 끝에 완전히 해체되어 뿔뿔히 흩어져 유럽을 떠다니는 신세가 됐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은 시온주의(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를 가슴속에 품고 온갖 박해(기독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를 이겨나갔다. 그러던 중 1800여년이 흐른 1차대전 중 독일에 맞선 미국, 러시아의 참전을 위한 영국의 유대인 국가 건설 약속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미국 등 자국 금융산업을 장악한 유대인의 압력 등으로 인해 유대인촌이 형성,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다. 집나간지 1800년만에 돌아와 내땅이다라고 선포한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아랍계와 중동전쟁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철저히 이스라엘 편에서 전쟁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아랍국가들은 OPEC을 통해 1973년, 1979년 두차례에 걸쳐 원유의 감산과 유가 폭등을 일으켰다.

 

원자제 가격의 폭등으로 전세계 경제는 경제침체 속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구조적 불황의 원인을 하이에크(198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프리드만 (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라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는 ‘국가 폐해, 즉 관료주의와 이윤원리의 침해, 사회복지의 남용, 자유로운 시장의 훼손’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케인즈주의, 사민주의를 비판하고, 결국 시장으로부터 국가 개입을 축출할 것을 주창한다.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소련과 동구유럽 등 사회주의권의 궁핍화와 몰락의 징후가 주요하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영국의 대처수상과 미국의 레이건대통령이 전폭적으로 수용,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이들은 핵심적으로 자본시장 개방, 탈규제화, 공공부문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으로 나타난다. 즉 독점기업을 위한 감세와 사회복지예산의 감축, 대외적 개방확대와 상품서비스, 자본, 금융의 자유화, 노동의 유연화로 전면화 된다.

 

봉건제

자유주의

국가독점자본

新자유주의

영주/농노의 신분적 불평등

형식적 완전한 평등권 보장

약자에 대한  사회(노동)권 인정

사회권 전면 축소=>노동시장의유연화

농민의 토지 소유권 불인정

생산수단의 전면적 사적 소유권 인정

보호무역, 독점규제, 금산분리 등 사적소유권 제한

국가간, 국가내 각종 규제 전면 완화

생산물의 영주 착취 / 부등가 교환

생산물의 시장에서의 등가교환

사회복지, 공기업 등 부등가 교환

사회복지 축소, 공기업 민영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공황의 책임을 자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제3세계에 전가하며 수탈을 전면화 하겠다는 표현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타겟은 노동자 민중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처수상은 1984년, 1년 내로 20개 이상의 탄광을 폐쇄하고 2만 명을 정리해고한다는 내용의 ‘석탄산업 합리화 계획’을 발표했고, 1년여의 투쟁 끝에 탄광노조를 패배시켰다.

레이건은 1981년 자신을 공개 지지했던 항공관제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돌입하자마자, 시범케이스로 48시간만에 1만2천여명을 일순간 해고하며, 이들이 다시는 항공관제사로 일할 수 없는 조치까지 취했다.

 

두 사건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는 각종 임금 위원회가 폐지되고, 연대파업금지, 단체행동권 제약, 조합비 원천공제 폐지, 노조에게 손배 청구, 실업관련 예산 삭감 등 노동관계법을 대폭 개악, 비정규직 확산, 성과주의 임금체계 도입, 작업장 유연화, 일방적 노동배제 정책을 통해 고용불안을 극대화 시키고, 실질임금을 대폭 하락시켰다.

 

반면 감세정책을 한다며 상위 부자들의 감세(최상위계층 83%=>40%로, 최하위계층 33%=> 25%)를 대폭적으로 단행했고, 긴축재정을 하겠다며 주택기금, 교육예산 등 사회복지예산을 삭감했다. 감세와 긴축재정으로 늘어난 국채를 갚는다며 석탄, 철도, 수도, 전기, 가스, 항공 등 공기업 노동자를 대량해고(영국의 경우 206만명의 공기업노동자를 84만명만을 남기고 해고했다)하고, 민영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출처 : Dumenil and levy, "Neoliberal Income Trends"

미국, 최상위 - 최하위 계층의 조세율

 

 

 

이렇듯 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는 노동자 민중, 제3세계에는 단호했다.

석유자원을 위해 미국정부는 두차례의 이라크전을 감행했고, 지금도 아프카니스탄 전을 수행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하에 석유자본과 군수산업복합체의 충실한 대리인을 자처하고 있다. 레이건 재임기간

국방비는 2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로 급증했으며, 이는 지금까지 미국 재정적자의 주요한 원인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정책은 금융시장의 자유화, 세계화다.

제조업에서의 이윤율의 하락을 견딜 수 없었던 자본은 눈을 돌려 금융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이후 고정환율제가 폐지되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됨에 따라 외환시장도 돈벌이(1992년 9월 파운드화 위기 때 조짓로스는 일주일만에 10억달러(1조2천억원)를 벌었다)가 될 수 있었다. 석유파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중남미에 투자해서 평균 이윤율보다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이제 초국적금융자본을 형성, 돈을 찾아 전세계를 헤멘다. 주식과 외환, 채권, 나아가 옥수수, 원유 등 모든 영역이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카지노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이런 금융자본의 투기자본화를 촉발시킨 것은 바로 컴퓨터 시스템의 발전이다. 그 이전 미국에서 영국의 철도주식을 사려면 지사를 내던지 해서 현지에서 달러를 파운드화로 바꿔 주식을 사야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앉은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만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형성된 금융자본은 세계화를 외치며 전지구를 투기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룻동안 거래되는 지구적 금융자본의 규모는 1조 5천억달러에서 3조달러(한국예산의 10배 규모)라고 한다. 그 중 수출입을 위한 대금결제에 사용되는 5%에 불과하다고 한다. 95%가 투기성 금융자본의 거래인 셈이다. 금융자본은 이윤을 찾아 세계를 떠돌아 다니고 돈이 되지 않으면 그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던, 그 나라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던, 가차없이 떠난다. 1980년 중남미와 97년 동아시아 위기 등이 비근한 예다. 이미 컴퓨터 네트워크로 하나가 된 지구경제는, 어느 한 나라의 위기가 곧바로 도미노처럼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87년 10월 블랙먼데이라 불리는 뉴욕증시 폭락과 그에 따른 전세계 증시 동반 폭락, 2008년 9월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발발한 전지구적 금융위기가 금융자본의 분탕질로 발발한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전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켜낸다.

 

 

금융자본은 이렇게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을 파탄으로 내몰고, 그 처방으로 IMF를 내세워 신자유주의를 강요한다. IMF는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와 각종 금융 등 규제완화,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IMF의 처방은 오히려 각 나라들의 외채 규모를 더욱 늘리고, 긴축재정에 따른 사회복지 예산의 축소, 공기업의 민영화에 따른 외국독점기업의 소유 및 공공요금의 폭등, 규제완화에 따른 독점자본 강화, 유연화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와 빈곤실업의 증가로 귀결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확대되고 각국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으로 내몰린다.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우리나라 역시 똑같은 IMF 처방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된다.

80년 이후 노태우 정부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내세운다. 이어 정확한 의미도 모른체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의 첫걸음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 96년 12월 26일 신자유주의 핵심인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법’을 개정하려다 민주노총의 저항으로 무력화 된 바 있다. 이렇듯 주춤하던 신자유주의는 97년 말 IMF 경제공황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김대중 정부는 98년 2월 노사정 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 근로자파견법 등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를 시작한다. 한국노동운동의 최대노조인 현대자동차에 대한 총공세를 통한 정리해고 수용강요, 이어진 만도기계노조에 대한 공권력 진압을 통해 노동운동의 기선을 제압하고 자동차, 금융, 공기업 등 전반에 대한 산업구조조정을 진행하며대대적이고 폭력적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한다.

 

 

각종 노동법을 개악하며 노동시장을 유연화 한다. 고용의 유연화를 위해 정리해고, 근로자파견법, 비정규법을 도입하고, 성과주의임금 체계 (연봉제, 팀제, 직무직능급제)를 도입해 임금의 유연화를 이뤄낸다.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위해 탄력(변형)근로시간제를 도입하며 다기능화, 배치전환의 일상화, 품질관리운동 등을 통한 작업장 유연화를 완성해 나간다. 나아가 일방적 노동배제 정책을 통해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며, 노동3권을 전반적으로 후퇴시켰다. 노동시장 유연화 결과 구조조정은 일상화되었고, 비정규직은 200만명이 늘어났으며, 일상적인 실업자가 넘쳐나며, 남아 있는 정규직 역시 고용불안에 떨고 있다.

 

꾸준한 감세정책을 통해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개악, 산재보험 개악, 의료보험료 인상 등 각종 복지제도를 축소하고 있으며, KT, KT&G 민영화, 발전소 분할 매각 시도, 철도 공사화를 통한 민영화 추진 등 공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사회공공성을 축소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어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우리은행.대우조선해양.현대건설.하이닉스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 금융기관, 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 등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자본을 위해서는 출자총액제, 금산법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해 준다. 이어 금융시장을 완전히 개방하고, 교육, 의료의 시장화 및 개방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한미FTA 체결을 통해 농산물을 포함한 모든 시장을 개방하려 하고 있다. 자본(주식)시장 개방으로 국내 굴지의 기업 대부분이 외국인 소유지분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이다. (삼성전자 54.35%, 한국전력 30.15%, 국민은행 85.81%, 현대자동차 45.81%, 포스코 68.76% 등한국증권전산 2006. 01 자료)

 

 

결국 신자유주의는 전세계 노동자 민중, 특히나 제3세계에게는 더더욱 가혹하게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전세계 민중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여나간다.

96, 97년 한국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은 전세계 노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8-90년대를 거치며 벌어진 전세계노동자들의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이 패배하는 가운데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맞선 민주노총의 투쟁은 이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어 94년 멕시코 사빠띠스따 무장봉기, 97년 프랑스 실업자 투쟁, 99년 시애틀(WTO각료회의) 투쟁, 2000년 체코 프라하 (IMF 연차총회) 투쟁, 2000년 볼리비아의 물 사유화 저지투쟁, 2002년 독일 노동자 투쟁, 2007년 프랑스 최초고용허가제 투쟁 등 파고를 높여왔다. 특히 2001년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은 매년 신자유주의 맞서 전지구적 대안사회를 논의하는 장올 발전했고, 전지구적 민중들의 연대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인 WTO를 좌초시켰다.

 

또한 남미에서는 베네주엘라와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국가연합(UNASUL, 회원국 12개국, 옵서버국 파나마, 멕시코)이란 새로운 호혜평등에 기반한 시도가 진행중에 있다.

 

 

 

 

 

TIP.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통제되지 않은 초국적금융자본은 2008년 전지구를 고통의 수렁으로 내몰았다.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이어 세계 최대 증권사와 보험, 부동산 회사 등을 보유한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매각됐다. 미국 최대의 보험사 AIG 그룹은 미국 정부로부터 850억달러의 자금을 지원받는다. 이어 9월 28일 미 의회는7천억달러의 공적자금의 단계적으로 투입을 골자로 한 구제금융 합의안을 도출한다. 이를 위해 미국정부는 1조달러를 찍어내며 경제살리기에 올인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곧바로 전세계 증권시장을 폭락으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역시 이날 하루에만 51조원이 넘는 돈이 증권시장을 빠져나갔고, 작년 한해 600조가 사라졌다. 세계적으로는 28조 달러(3경7700조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금융위기는 곧바로 부동산, 자동차, 선박, 철강 등 제조업 전반의 침체를 가져왔고, 달러의 무분별한 발행은 유가와 곡물가의 급등을 가져오는 등 실물경제로 이전되면서 전세계 민중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 사태는 ‘서브프라임모지기론’이라는 파생상품으로부터 시작된다.

1990년 후반 초국적 금융자본은 실리콘벨리의 IT라는 첨단벤쳐사업으로 몰린다. 뉴욕증시는 희망에 넘쳐 과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2000년초 기대와 달리 IT산업에서의 이윤율이 저조하자, 급물살을 타고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며 뉴욕증시가 폭락한다. 경기하락을 막기 위해 미 연방준비은행은 기준금리를 6%에서 3%로 내린다. 시중의 자금을 은행이 아닌 실물경기로 쏠리도록 하기 위한 수단였다. 이 저금리 정책에서 재앙은 시작됐다. 갈 곳을 몰라 헤메던 초국적 금융자본은 주택시장이란 먹잇감을 포착한다. 금융자본들은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란 대출상품을 만들어 신용도가 낮은 도시서민들까지 이 투기 시장으로 내몰았다. 저금리로 인해 이자에 대한 부담이 없는 상황에서 서민들까지 주택 사재기에 가담했고, 주택가격은 2000년부터 매년 20-30%씩 올라간다. IT버블이 주택버블로 전이된 현상였다.

 

 

이런 상황속에 금융회사들은 소위 파생상품이란 돈이 돈을 낳는 기형적 산물을 내놓은다.

주택소유자가 대출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다. 대출은행은 대출채권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총부채상환비율(DTI)등을 통해 주택가격의 40-50%까지만 대출이 되도록 규제를 한다. 미국의 경우 이런 규제가 전무했다. 주택가격의 100%까지 대출이 가능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 대출채권을 소유한 대출업체(모기지은행)는 이를 모기지(주택)담보증권(MBS)으로 증권화 해서 유동화 전문회사에 판매한다. 유동화전문회사는 대출채권 미회수의 위험성을 분산시킨다며 모기지담보증권 중 위험도가 높은 도시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알트에이모기지, 신용도가 높은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프라임모기지 등을 섞어 부채담보부증권(CDO)을 만들어 리먼브라더스, 베어스턴스, UBS, 우리은행 등 투자은행에게 판매한다. 또한 이런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보증해준다며 AIG는 신용부도스왑(CDS, 신용파생상품, 일종의 보험)라는 상품을 만들어 투자은행에 판매한다. 위험성을 최소화 한다는 금융파생상품이 오히려 위험성을 극대화 시켜낸 것이다. 1000만원의 대출채권이 MBS-CDO-CDS를 거치며 뻥튀기가 된다. 이 뻥튀기 된 부채담보부증권(CDO)는 전세계로 팔려나간다.

 

 

그러나 주택가격의 거품은 반드시 꺼질 수 밖에 없다. 가격이 오를때는 대출금 상환에 대한 부담이 없지만 가격이 정체된 상황에서, 프라임모기지보다 3% 정도 높은 변동이자를 갚아야 하는 도시 서민들의 연체가 늘어난다. 늘어난 연체로 인해 2007년 11월 국책 모기기 업체인 프래디맥, 페니메이가 사상최대의 손실을 기록한다. 08년 3월 파생금융상품의 부실에 따라 월가 4위의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즈가 파산한다. 9월 전세계로 퍼진 파생금융상품의 부실은 리먼브라더스를 시작으로 전세계적 금융위기란 폭풍으로 발전한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한 지 1년 만에, 미국 실업자는 무려 216만 명이 증가하여 940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그 사이 6개월 이상 실업상태인 장기실업자는 60만 명이 늘었다. 공식 실업률은 6.1%이지만, 한계실업자와 경제적 임시취업자를 포함한 실질실업률은 이미 10%를 넘어선 상태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앞장섰던 미국, 영국, 스페인, 아이슬랜드 등은 초국적금융자본은 투기적 성격으로 인해 심각한 침체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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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5:17 2010/01/0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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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8. 자본주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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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8. 자본주의 변천사

 

 

공황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 불치병이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이윤추구의 결과이다.

이런 공황은 10년의 파고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의 양상에 따라 구조적 위기로 내몰린다. 1873년, 1929년의 공황과 1974년, 79년의 공황이 바로 구조적 위기이다. 또한 2008년의 공황 역시 구조적 위기이다.

 

 

자본주의는 이 세차례의 구조적 위기속에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873년 공황 까지의 자본주의를 자유경쟁 산업자본주의 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등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력화 시키고, 신분제를 혁파한다. 또한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 노동자들의 탈숙련화 시켰고, 숙련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내몰아 실직적으로 노동자들을 자본에 종속, 자본주의를 완성시켰다.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춰) 방식의 생산은 숙련된 기술 때문에 노동자들이 형식적으로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몬 것이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기계파괴(러다이트)운동을 전개했으나,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러다이트 운동과 관련해서 맑스는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이유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뒤로 돌리는 반동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즉 과학기술의 진보는 노동자들이 적극 수용하며, 그 방식은 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 등일 것이다.

 

 

TIP. 하이패스 달아야 돼? 말아야 돼?

최근의 ‘하이패스’ 장착의 경우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역시 동일할 것이다. 진보진영에 몸을 담은 이들의 경우 톨게이트 입금원에 대한 고용불안을 이유로 하이패스 장착을 기피한다.

정답일까?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하이패스 장착을 미룬다고 ‘입금노동자의 고용’ 이란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그 입금원에 대한 고용을 노조차원에서 일자리를 나누고, 고용을 보장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도로공사노조가 그럴 의지가 없으니까 문제이지만...

 

 

1873년부터 1929년 대공황 까지를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로 구분한다.

1873년 공황으로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약육강식의 무제한적 경쟁, 공황을 거치며 자본은 집적과 집중을 통해서 거대해 진다. 이제 수많은 자본이 경쟁을 통해서 평균적으로 획득하는 이윤 대신에 경쟁을 제한/배제하며 평균 이윤율 이상의 이윤(특별잉여가치)을 획득하는 독점자본이 형성된다.

그에 비해 노동력 역시 소수의 자본가 밑에, 소수의 공장으로 집중되어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이 가능해진다.

 

또한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융합되므로 거대 금융자본을 형성한다. 이렇게 비대해진 금융자본들은 지배계급 중에서도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유력자들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다. 이들은 산업/금융계 뿐 아니라 정치계와 관료집단, 그리고 그를 통해서 국가의 무력까지를 두루 지배하는 금융과두체제로 발전,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한다.

이들은 자국내 전반적인 과잉생산과 화폐자본의 과잉축적을 돌파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다.

제국주의 시대, 자본에 영합한 국가권력은 폭력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켜낸다. 바로 식민지 침탈이다. 식민지는 과잉된 자본의 새로운 투자처이자, 과잉 생산된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팔수 있는 판매처이다. 또한 값비싼 본국의 노동력을 대신할 풍부한 노동력이 널려있다.

또한 과잉자본을 소비할 군수산업이라는 새로운 투자처가 생긴다. 본격적인 식민지 전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제국주의는 제3세계 민중의 피와 땀, 생명을 빨아 먹으며 성장한다.

 

 

선도적으로 제국주의 단계에 오른 영국과 프랑스, 뒤늦게 제국주의 반열에 오른 독일, 이탈리아 등은 이제 식민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결국 이들의 식민지 쟁탈전은 1, 2차 세계대전을 가져온다.

 

 

이런 독점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친다.

거대 독점자본과 금융과두제의 지배에까지 이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대화 됨에 따라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이 심해진다. 한편에서는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의 증가로 인해 자국 내 빈곤층으로 전락한 노동자계급은 빈곤과 무지, 질병, 억압, 무권리의 상황속에서 소비층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극단적인 혁명의 길을 선택한다. 식민지 피지배 계급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도 전면화 된다.

이런 가운데 독점자본의 이윤율이 압박을 받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상품의 생산가격에 의해서도, 상품의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고, 구매자의 욕망과 지불능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독점이윤을 위해 독점자본은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 카르텔은 막대한 설비투자로 인해 과다한 비용이 지출되고, 부문간 경쟁을 차단은 기술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독점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면적 위기가 도래한다.

그 첫 폭발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후발 자본국인 독일 등은 국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본격화 되며, 식민지 피지배 민중들의 민족해방투쟁이 일어난다. 1917년 재정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1919년 조선에서 3.1 운동이,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으로 해소처를 찾았던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시 보다 높은 이윤을 위해 금융자본화, 주식, 부동산, 심지어 농산물까지 투기를 일상화 한다. 과잉설비 투자로 인해 생산은 과잉되고 있으나, 소비를 할 세력이 없는, 1929년 대공황에 빠지게 된다.

1929년의 대공황은 4년간 진행되었고, 전세계 공업생산의 44%가 줄었고, 미국의 실업자는 1200만명으로 국민의 25%가 실업자였다. 또한 이 사이 세계 무역은 65%가 감소했다.

 

상품은 남아도는데 살 사람이 없는, 밀과 커피등 곡물이 대서양 한가운데 그대로 버려지는, 그럼에도 굶주림에 떠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공존하는 이상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1929년 구조적 위기를 둘러싸고는 계급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이 진행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프랑스 군과 독인 해군 병사들의 반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혁명, 헝가리의 독립혁명 승리, 1919년 아일랜드 게릴라전, 1920년 독일 총파업, 이탈리아 공장점거, 1923년 프랑스 루르 폭동, 1926년 영국 총파업(패배), 1929년 미국 증시폭락, 1931년 스페인 혁명, 1936년 프랑스 스페인 인민전선 승리, 미국 CIO 결성, 1939년 2차 세계대전...

 

 

1929년 구조적 위기속에서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투쟁했다. 그 투쟁의 결과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들어섰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했다. 29년의 공황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고, 이 결과 자본주의 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케인즈식 자본주의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식 자본주의로 양분된다.

 

이렇게 1929년 대공황이후부터 1979년 공황까지를 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케인즈식 자본주의라 부른다.

미국에서는 1933년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루즈벨트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도입한다. 뉴딜 정책은 국가가 세금과 국채발행 등을 통해 자본을 형성,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로 사회복지와 테네시강 개발공사 등 국가기반산업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노동3권을 강화시켜 주는 등의 유화책으로 계급 화해를 도모한다. 이렇게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 유효소비를 늘려 과잉생산된 상품을 적극적인 국가개입 정책이다. 이 케인즈주의는 전시국가독점자본주의를 거쳐 2차 세계대전이후 서구유럽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성장한다.

 

반면 패전국가였던 독일에서는 실업과 패전에 따른 배상 등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히틀러는 강력한 자국민에 대한 탄압과 국가주의, 전쟁을 통한 극우 파시즘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이런 가운데 자본주의 사회는 각자 살길을 도모한다. 미국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달러블럭, 영국과 식민지를 중심으로 한 파운드 블럭, 프랑스와 식민지를 중심으로한 프랑 블록 등 보호무역주의로 돌입한다. 식민지를 갖지 못한 독일, 이태리, 일본은 중대한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

 

1939년 5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2차 세계대전은 29년 대공황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29년 대공황의 골칫거리였던 과잉생산과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 문제를 일거에 해소한다. 전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파괴된다. 5,000만명이 사망함에 따라 과잉인구(실업자)가 해소된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12개 나라가 사회주의로 전환했고,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사회로 양분, 격렬한 대립속에 발전한다.

 

미국의 경제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했다. 1917년 미국정부는 군수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쟁산업국을 신설, 전쟁 물자를 유럽의 전쟁국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물론 이 대금은 패전했을 경우 종이 쪼가리로 전락할 파운드화나 프랑이 아니라 금이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전세계 금의 70%를 보유하게 된다. 또한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했고,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후발주자로 전쟁에 가담, 승리를 거며 쥐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력 등 최강대국이 탄생했다.

 

 

미국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내보여야 했고, 이를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신의 주도하에 성장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재편한다.

선 2차세계대전이 영국과 프랑스 등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들의 보호무역주의와 무리한 식민지정책에 있었다는 판단속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경쟁체제의 구축과 민족해방 투쟁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분리, 분쇄 전략을 펼친다.

 

우선 전쟁으로 파괴된 서유럽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회주의 확장을 가로막기 위한 미국의 주도하에 마샬플랜이 기획, 120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원조를 하게 된다.

또한 안정적인 세계 금융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외환거래시 미국의 달러를 전세계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1온스=35달러)를 채택하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회주의권 확산을 막기 위한 제3세계 국가에 대한 경제원조을 담당 할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체제를 구축한다. 또한 보호무역주의를 탈피하여 자유무역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GATT(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를 구축함으로써, 소위 브레튼우즈 체제가 완성된다. 이로서 자본주의 사회는 기축통화로서의 미국의 달러와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우위를 통한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cana.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체제가 확립됐다.

 

 

 

전시국가독점자본주의 형태였던 케인즈주의는 전후 자본주의 나라들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지만 케인즈주의는 사회주의 우파세력인 사회민주당 세력을 포괄하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간다. 일부 산업이지만 잉여가치의 원천인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함으로써 국가가 유효수요를 창출, 자본주의 고유 모순인 과잉생산과 과소소비, 이로 인한 공황을 방지 코저 한다.

국가가 국채발행과 세금 징수를 통해 이윤이 나지 않거나, 막대한 초기비용이 들어가는 석탄, 석유, 철강, 전력, 철도, 전화 등 국가 기간산업을 국유화한다. 이를 통해 사적자본의 이윤추구를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하는 대중들에게도 저렴한 사회적 공공서비스를 제공, 소비를 활성화 한다.

또한 주거,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 국가가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체제를 인정하는 효과와 함께, 노동력의 재생산비(사회적 임금을 억제)를 저렴하게 유지해 줄뿐 만 아니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해 준다. 이런 노동력을 통해 유효수요를 늘려나간다. 이렇게 전후 자본주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발전을 한다.

 

 

그러나 케인주주의는 노동의 소외를 유발하는 단순반복노동의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의 한계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제어하지 못했다. 케인즈주의의 유효수요 창출은 그에따른 국채의 발행과 과중한 세금징수가 필연적이었다.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세금 등은 거꾸로 기업의 이윤을 제약,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한 필연적으로 국가가 돈을 풀어대니 시중의 자금이 항상 넘쳐나는 인플레이션이란 고질적인 병폐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했다. 경제가 잘 나갈때는 인플레이션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반면 74년의 1차 오일쇼크 같은 사태가 왔을 경우는 경기침체 속 물가인상이라는 초유의 스테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됐다.

 

 

1960년대 서유럽, 일본 등의 경제 회복으로 인한 과잉생산, 과잉경쟁이 다시 촉발한다. 서유럽과 일본 등은 경제 회복에 따라 미국과 자유경쟁으로 나간다. 유일한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미국은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대외원조를 위해, 베트남전에 따른 전비 조달을 위해 달러를 발행한다. 이로써 1온스=35달러라는 금태환제가 위협받게 된다. 이 공식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총 금의 보유량과 달러보유량이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달러를 발행한 미국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달러를 보유한 유럽국가들은 달러를 금으로 환전해 줄 것을 요구한다. 달러 투매현상이 일어나고 금의 투기적 매입 사태가 발생한다. '금 가격'의 폭등에 따라 미국은 보유금을 시장에 방출함으로써 '금의 가격'을 '1달러=1/35온스의 금'이라는 '공정가격' 수준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한계치에 다다르면서 결국 자유금시장의 달러화 가치 안정정책을 포기하고, '금의 시장가격'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대로 방치,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의 "특별성명"을 통한 '금-달러 교환' 정지로 구 IMF를 중심으로 한 브레튼우즈체제는 붕괴한다.

 

 

케인즈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자본진영으로부터 주거, 의료, 교육 등 사회보장제도, 공공부문을 통한 공공서비스 제공, 노사정 사회적 합의주의 등을 쟁취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 성과물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임금노동'이라는 착취관계를 안정화/영속화시키려는 자본의 대응이었다. '사회적 합의주의' 역시 투쟁의 산물이었으나, 이후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를 관료화 시켜내고, 회유/매수하는 수단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을 무력화시키는 기구로 전락시켰다.

전투성을 상실한 서구유럽의 노동자 계급과 사민주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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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5:04 2010/01/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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