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비바리 신령님께 바람맞다!
처음 타보는 한성항공. 정말 악몽의 한시간이었다. 굉음과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진동. 여기서 한성항공 타는 법 Tip. 스튜어디스에게 반드시 귀마개를 달라고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1시간의 비행이 그리 괴롭지 않다. 올 때 코를 골며 잤다.
제주도 공항에 내리니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기사가 그런다. 정말 행운아들이라고... 저토록 한라산이 자신의 자태를 보이는 게 1년에 60일도 안된다고, 늘 안개에 쌓여 있다고...한라산은 머리를 풀어헤친 비바리(처녀)산이라고 귀뜸해준다. 내일 저 산을 간다.
그런데 저녁 매일 노동에 지쳤던 심신이 제주도에 오니 광분을 한다. 치열한 교육과 회의를 마친 일행이 늦은 10시부터 뒷풀이에 들어간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어울리다보니 눈을 뜨니 8시다. 씻고 숙소에서 상판암까지 가는데만 1시간 반이 걸린단다. 관리사무소에서 9시 이후 입산을 통제한다고 한다. 억울하지만 내일로 미룬다.
일행들과 제주도 여행을 하고 저녁. 간단히 한잔하고 자려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왠 산이냐고... 계속 술로 유혹을 한다. 뿌리치니 강압이다. 내일은 5시 비행기라서 3시까지는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결국 1시까지 질질 끌려 다니며 술을 먹다가 탈출했다.
5시 알람에 깬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입에서 술냄새가 진동한다. 그래도 간다. 씻고 5시 30분 콜택시를 불렀다. 배낭을 차 트렁크로 실으러 가다가 젠장 오른쪽 등산화 끈이 왼쪽 등산화의 고리에 걸려 그대로 전방에 꿍하며 포복을 한다. 재수가 정말... 손바닥이 다 까졌다. 간단히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뜨거운 물, 밴드를 사서 상처에 붙이고 상판악에 6시 30분 도착한다.
몸속의 배설물을 버리고 700m 고지의 약수를 보충하고 산에 오른다. 아직은 주변이 어둠에 휩싸여 있다. 삼삼오오 몇 팀이 산에 오른다. 정말 완만한 오름을 산보하듯 오른다. 지도에는 약 8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하니 부지런히 오른다.
부스럭! 오른쪽에 뿔 달린 사슴인지 노루(나중에 알았는데 산양이란다)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횡재다. 조심조심 배낭속의 떡팔이(니콘 D80)를 꺼낸다. 어! 렌즈 캡이 열리질 않는다. 이거 뭔 일이냐? 캡과 씨름하는 사이 요놈이 유유히 사라진다. 간신히 여니 렌즈가 깨져있다. 윽 여행간다고 빌린 렌즈인데 큰일났다. 자세히 보니 다행이다. 앞의 UV렌즈만 깨졌고 렌즈 본체는 건재하다. 새벽에 꽈당하면서 깨진 것 같다.
해발 1000고지를 가니 눈밭이 보인다. 구름이 낀 건지 주변은 아직 햇볕을 보여주지 않는다. 1200 고지를 지나니 눈이 1m는 쌓여 있는 것 같다. 등산로를 통제해 주던 1m짜리 기둥이 다 잠겨있다. 50cm 정도 산꾼들이 다닌 길만 탄탄히 다져져 있고 바로 옆은 눈수렁이다.
워낙 완만한 오름이라 어렵지 않게 8시 40분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다. 여기선 무조건 컵라면 먹어야 한다고 해서 컵라면을 먹는다. 안내판엔 2시간 50분이 걸린다고 되어 있는데 2시간 10분정도 걸렸으니 시간은 많이 단축시켰다. 이 페이스면 충분할 것 같다. 20분정도 쉬고 다시 오른다. 속도에 자만한 나를 운동복에 런닝화 차림에 달랑 손에 생수한통 든 나그네가 나를 홱 제치고 오른다. 잠깐 사이 안 보인다. 장난 아니다.
드디어 1800고지 나무계단이다. 한라산신령이 훼방을 놓는다. 자욱한 안개비 속에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지금까지 맞아본 바람중 으뜸일 것 같다. 얼른 배낭커버 씌우고 오버트로즈를 입는다. 정말 장난 아니다. 바람과 싸우며 죽어라 오른다.
10시 아! 드디어 정상이다. 우씨 암 것도 안 보인다. 시야가 채 5m도 안 된다. 백록담은 아애 자취도 안 보인다. 고도계는 1930으로 나와 있는데 나머지 20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도무지 불가능하다. 포기다. 그래도 내가 남한 땅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 지리산 천황봉보다 10m 더 위에 있으니까... 런닝화 차림의 양주 나그네에게 사진 한방 부탁하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관음사 하산길에 접어든다.
한라산 비바리 신령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술에 취해 이를 거부한 나에 대한 보복인 것 같다. 어제 아리따운 자태를 보여준 것만으로 만족하라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찾아오면 나중에는 자신의 신비를 다보여주겠다고....
시간을 보고 속도를 계산해 보니 점심은 아래서 먹어도 되겠다. 부지런히 가자. 터덜터덜 내려오는 하산길... 여긴 딴판이다. 경사가 꽤 급하다. 우씨 이리로 오르는 건데... 산을 좀 빡세게 타고 싶은 이들은 관음사에서 올라라. 중간 중간 운동화 차림의 젊은 학생들과 가족이 오른다. 어, 절대 안 된다고 말린다. 이런 산을 어찌 아이젠도 없이 올 생각을 했을까? 한라산이 만만해 보이나 보다. 1500고지에 오니 아뿔싸 해님이 머리위에 환하다. 우씨...
말이 계곡이지 물하나 없는 화산으로 구멍 뻥뻥 뚫린 탐라계곡을 부지런히 걸어 12시 50분 18.3km 6시간의 한라산 산행을 마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발 담에 올 땐 한라산 비바리 신령님이 나를 진정한 동반자로 그 넓은 품으로 안아주길 바라며 아쉬움을 달랜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기 전에 남한 최고봉을 갔다 왔으니 나름의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연부네 집 2008/03/23 13:28
와.....혼자서 하는 산행의 진수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저로서는....너무 존경스런 산행이네요...멋찌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