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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참신나는 소식을 열면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오기 전입니다. 조영래 변호사(1947-1990)께서 이 평전을 한 걸음에 한 글자, 한 획 한 획을 이어붙여 한 문장을 완성하고서도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를 쓰지 못했습니다. 1983년, 이 평전은『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찰을 달고 지겹도록 모진 독재의 검열을 피해 사람을 건너 사람으로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몽골에서 이 평전이, 아니 전태일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전태일이 아닌 세계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다시 쓰여지고 다시 기억되는 ‘전태일’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 잔인하고 무참한 5월, 38년 전 그 때와 다름없이 노동자와 시민들은 곤봉에 방패에 다시 찍히고 매맞아가며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2009년 우리에게 저항은 쉽게 허락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88만원 세대에게 고하는 전도서에서 우석훈 박사가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메시지를 일갈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짱돌을 들더라도 토플책은 가방에 넣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왜일까요? 집회가 끝나고 시위가 정리되면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 공부를 해야 해서 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에 상응하는 대가는 너무 큰 나머지 행여나 경찰서에 붙들려가도 토플책이라도 내놓아야 ‘훈방’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폭압의 현실 때문입니다.

작년, 뜨거웠던 우리는 늦봄에 촛불을 들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 정권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쪼잖은 컨테이너 박스를 몇 개를 쌓아두었고, 우두머리인 대통령은 거리로 나오기는 커녕 청와대 뒷산에 올라 우리들을 관람했었지요. 그 결과 거짓말은 도를 넘어서고 시민들의 뒤통수는 얼얼하다 못해 전경의 높은 구두굽에 밟혀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의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를 호명하며 획일화된 모든 것과 획일화되도록 강요하는 모든 것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낮은 음성으로, 엷은 공명으로는 더 이상 후퇴하고 있는 이 세상을 진동시킬 수 없습니다. 전태일이 ‘어느 청년 노동자’라는 비특정 인칭대명사로 가려져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되기 위해서는 광우병의 위험을 알렸다는 이유로, 용산에서 철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곤봉으로 난도질 당하는 이 시대를 고발해야 합니다. 녹색성장 부르짖으며, 선진화를 이유로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이들은 고작해야 나무 깎아 곤봉을 만들고, 동네 약수까지 팔아먹을 파렴치한과 다름없습니다.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작은 소원이 하나 있다면 촛불을 들었다는 이유로 ‘난동꾼’에서 ‘데모꾼’으로 다음 세대에 기억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머지 않아 전태일이 산화한 이후 4천 8백만개의 분신사리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으로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작년 늦봄, 올해 늦봄, 그리고 내년 늦봄 아니 매년 매달, 촛불이 치솟고 우리 마음이 불바다가 될 때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며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리라, 저는 그렇게 믿고 오늘을 버티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올 5월, 새삼스럽게 제 이름을 불러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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