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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짧은 생각

38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0
    해고
    공돌
  2. 2007/02/14
    파블로카잘스
    공돌
  3. 2007/02/13
    악수
    공돌
  4. 2007/02/03
    내부책임론
    공돌
  5. 2007/01/30
    외로움
    공돌
  6. 2007/01/30
    오늘의 운세
    공돌
  7. 2007/01/25
    공돌
  8. 2007/01/22
    고종석..그리고 덧글
    공돌
  9. 2007/01/22
    선택과 집중
    공돌
  10. 2007/01/22
    나는 아직 멀었다
    공돌

공짜 지식

돈으로 환산하기가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지식'이라는 재화이다. 공짜는 누구든 마다할 사람이 없다. 근데 지식을 공짜로 나눠준다. 요건 좀 애매하다. 가져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근데 좋은 지식, 필요한 지식을 공짜로 나눠준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것도 대학에서 그러한 지식을 공짜로 나눠주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도강(盜講)이 아닌 합법적으로 공유된 지식을 얻어갈 뿐이다. 그것도 신분, 성별, 경제적 자력과 무관하게 말이다. 그 순간 그것은 공공재다.

 

이런 공공재는 마트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상품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왜? 마트에서 나눠주는 사은품은 어떤 물건을 사게하기 위해서나 다시 그 마트를 이용해 달라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므로 공공재의 성격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물론 사은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트에서 제공받는 물품을 공공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

 

지식은 원래 그 자체가 공공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를 특정한 누군가가 전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가령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의 공공재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래서 서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책은 완전한 공공재는 아니다.

 

공공놀이터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책의 소유도 책 자체는 구입한 사람의 소유가 될 지언정 그 내용, 특히 문장, 그림 등은 책을 구입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지적재산권을 언급할 필요가 없이 종이와 인쇄비용을 구입하는 사람이 부담하여 그 사람의 생각을 거의 노력없이 얻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지식이 공공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종이와 인쇄비용을 구입하기 어려운 이에게 그러한 지식의 공유를 위해 금전적 댓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다면 그것은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참세상에서도 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자신의 지식을 무료로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의 기사를 읽으면 그러한 공공재라는 설명에는 의심이 간다. 그러나 공공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료가 되어야 하는데 무료라는 기본 요건을 충족하니깐 공공재에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위에서 언급한 '마트'처럼 무료제공의 지식이 미끼라고 판명나면 공공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단 무료라는 점, 다른 조건을 걸지 않았다는 점,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공공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의심은 잘 사그러지지 않지만.....좋은 일이기는 하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91218.html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대학이 같은 돈벌이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구사하는 테크닉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대학은 학문적 열등감, 간판결핍증을 이용하여 오히려 '고위과정', ;지도자과정'이니 하면 돈벌이에 더욱 혈안이 되다는 점, 그게 큰 차이다.

 

내용도 없는데다가 뭔가 '수료'나 나이롱뽕으로 '학위'를 받기 위해 용쓰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오늘의 우리의 대학이 문제다. 건물벽을 대리석으로 칠갑을 한다고 대학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맨발의 기봉이도 알진데, 거의 3-4백만원 되는, 그것보다 더 비싼 등록금을, 고위과정 이수비를 요구하는 한국의 대학이 너무 밉다.

 

구청에서는 요가, 풍물, 서예, 컴퓨터, 자격증 등의 공공재 지식을  제공하면 그것보다 나은 지적 공공재도 제공되어야 한다. 그것을 대학말고 누가 할 것인가. 저의가 뭐래도 시도는 해봐야 할 듯하다. 대학들이여, 공짜로 좀 제공해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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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579.html

 

과연 해고사유가 될까, 안될까.

 

"파인즈는 멋진 연인으로 나는 잘못하다 해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1144.html

 

그러나 그 이전의 기사를 읽어보면 더욱 가당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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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카잘스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Casals y Defillo).

 

오래도 살면서 숱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80세에 20대의 젊은 처자를 만난 사건이나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에 항의하며 첼로 활을 10여년이나 꺾은 일 등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계와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은 항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첼로의 성자로 군림하면서 빛나는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실력도아니고 음악가로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사회의식, 저항의식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열정이다.

 

95세인 카잘스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6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카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희열을 느끼는 일은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가 가동하고 소모하며 다시 재생산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칠 때마다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친구는 바로 자신이다. 그 자신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위로할 때 가장 큰 힘을 얻는다.

 

오늘은 카잘스, 이 양반 덕에 자극을 받는다.

ps. 카잘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일화에 대해서는 바람구두의 문화망명지를 참조.

http://windshoes.new21.org/classic-casal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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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

지미 핸드릭스의 말이 생각난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

Let's shake left hands because they're nearer to my heart.

 

교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타인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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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책임론

"그 문제는 사실 너나 그 사람이나 모두에게 문제가 있어. 무엇보다 니가 처음부터 그런 문제에 대해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으면, 아예 그런 행동을 안했다면, 그런 말을 안했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

 

 

"니가 잘했다면" "내가 잘했더라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내부책임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부터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어떤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예를 들어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치자.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를 지켜보던 친구가 니가 예전부터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다면, 니가 미리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나고, 잘 챙겨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은 사실 절반의 반도 맞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 계기와 이유가 문제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녀로부터 발생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정확인 이유를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친 사람을 추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미리 그렇게 했더라면 등의 방법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에게 원인을 찾으며, 모든 문제를 자기가 잘하게 되면 자연스레 일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관계 속에서 생긴 문제는 자기 하나 잘 한다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자기 책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태도는 진정한 원인을 찾지도, 그 문제로 인해 감정상한 사람에게 어떠한 치료책도 되지 못한다.

 

위에서 가정한 예, 숱하게 봤고 나도 그런 일을 당해봤다. 물론 시간이 약이다. 시간만큼 제대로 된 치료책도 없다. 어떤 치료제도 시간이라는 치료제에 버금가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어도 낫는 병을 가지고 이거 저거 오만가지 약을 쓰고 나서 마치 그런 약들이 효과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만 범할 뿐이다.

 

어떤 문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 문제에서 자신을 끄집어 내어 자신을 관찰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면 상처받은 감정을 치료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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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외로움이라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한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잊으려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기 위해 시간을 떼운 적이 많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적당한 고립감과 외로움은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게끔하는 좋은 수단이다.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살겠다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하루 24시간, 적어도 일터에 나와 있던 10여시간을 제외하고는 같이 있겠다는 것도 싫증나

 

하는 사람에게는 외로움은 더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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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

http://www.12monkeys.co.kr/

 

요런 걸 누가 만들었을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영원한 관심거리이자, 장사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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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말로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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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그리고 덧글

강유원씨의 armarius에서 강유원씨가 어느 누리꾼의 글에 답글을 달은 것은데 고종석에 대한 비판이라 유용할 듯하여 갈무해보았다.

 

경원님 말씀은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는 시민들 개개인끼리의 연합이 없는 사회'지만 현재의 사회는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가 아니니 시민들 개개인끼리 연합을 해도 된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에 이르렀을때 그렇게 연합했던 시민들 개개인은 그들의 연합을 해체하고 각각의 개인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또는 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니겠지요. 여전히 시민들 개개인끼리의 연합이 남아 있을테니 그 사회는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그 연합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판별하는 척도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연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이루는데 동원되는 방법은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가 원칙상 포용할 수 없는 '계급결집'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종석 씨는 현실 문제의 분석에 있어서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충돌하는 방법론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의 인용문이 담고 있는 고종석 님의 현실인식과 충돌하는 고종석 님의 발언이 적지 않"은 것은 그가 생각을 깊이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가 신조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의 원천적인 결함때문입니다. 고종석 씨의 주장이 옳고 새겨둘만한 것인지(저는 이것을 '그의 발언의 사회적인 쓸모'라는 근거에서 약간은 인정하고 있습니다)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은 파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자신이 한 쪽에서 주장한 것과 다른 쪽에서 주장한 것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두가지에 기인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극심한 자기분열을 겪고 있거나 입니다. 개인 블로그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누가 시비걸고 말지만 공공의 지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논객'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논리적 태도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대한 호감과는 무관하게 지적해 두어야 할 사항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의들을 고종석 씨가 스승으로 존경하는 복거일 씨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전개했으므로 궁금하시다면 삼인출판사에서 출간된 <<보수주의자들>>에 실린 제 글을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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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가 한 사람을 딱 찍어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방식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구 소련 스탈린 시대의 뤼센코(Trofim D. Lysenko)를 들 수 있다.

뤼센코는 부르주아 생물학과 프롤레타리아 생물학을 구분하면서 스탈린 체제와 결탁해 당시 떠오르던 유전학을 부정하면서 관련 학자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따지고 보면 황우석 사태도 이런 식의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2&article_id=0000026342§ion_id=001&menu_id=001

 

그런데 왜 박노해가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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