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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분노.
    공돌
  2. 2006/08/02
    내 인생의 구원투수
    공돌
  3. 2006/08/02
    상처입은 사람들
    공돌
  4. 2006/08/02
    인물평가
    공돌
  5. 2006/08/02
    구걸
    공돌
  6. 2006/08/02
    들통
    공돌
  7. 2006/08/02
    폭발
    공돌
  8. 2006/08/02
    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공돌
  9. 2006/08/02
    괴물
    공돌
  10. 2006/08/02
    병에 대해서
    공돌

여성주의

새파란, 청춘의

꽃다운 여인이 촌스런

치마를 입고서 낯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혹시나 모르는 늘어진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가리며.

 

저 높은, 하늘을

꽃다운 여인은 바라다

보면서 낯선 사람 중 한사람

호감을 가지며 술한잔 하자고 나에게

어디로 어디로 오라고 이야기 하면서.

 

다함께, 모여서

마시는 술잔을 누구가

마다하겠냐만은 늦은 시간

집에다 데려다 준다고 취한 술김 내부으며

꽃다운 여인을 집에다 데려다 주면서.

 

멋모른, 그녀는

고맙다 차한잔 하라고

새파란 청년은 그녀를 보면서

불거진 아랫도리 오만가지 상상에

제버릇 남못주고 사고를 치면서

 

너에게, 나라는

사람은 어떠한 존재이냐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기치면서

불거진 아래도리 죽어가면서

제버릇 다른여자 찾아가면서

 

여기서, 저기서

남자들 모인곳 나는 그년과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돌아다닐 때

그녀는 그 동네를 떠나 가면서

 

개새끼, 소새끼

남자는 다그래 나는 그놈이

사랑 한다고 조잘거릴 때

결국은 실수였고 그러지 않겠다며

다짐을 했건만 한순간 무너지면서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앞으로 어떻게 나는

살아야 되는가 생각해 보면서

아픈 가슴 쓸어보며 정리한 마당에

그 새끼 결혼식 한다고 하면서

 

오라고, 전화를

하면은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한때의 불장난 자나깨나 불조심

지나간 일 쓸데없이 생각해보면

나오늘 아무일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조용히

지내고 싶고나 영원히 사랑을

채워가면서 그 사랑 남에게 나눠주면서

촌스럽고 꽃다운 여인이고파.

 

2005.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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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세상사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런 분노는 쉬이 삭히게 마련이다. 주변에서도 만류한다. 정작 중요한 분노는 삶의 가치와 철학을 의미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화를 다스리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분노가 있다.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분노. 물로 나에 대한 분노는 늘 존재한 것이므로 내가 날을 세우고 항상 반성하게끔 하지만 내가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그렇게도, 그렇게도 아무 생각없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사람들이 버젓이 결혼해서 잘먹고 잘산다는 사실이다.  

 

내 대학원 동기인 형이 있다. 노조간부 10년하고 이제는 가정에 충실하리라 자신도 형수도 소원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형수는 자궁암이고, 아버지는 췌장암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가정에 충실하게 되었단다. 그 잘난 가정에 충실하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단다. 휴가도 내어 형수와 잠시 수술전에 여행도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해줄게 없어 하얀 봉투에 돈 10만원 넣었다. 그리고 겉봉에는 이렇게 썼다.

 

"형수요. 형님 신경쓰지 말고 맛난 것 드시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나도 용서할 수 없고, 나도 용서받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고 또한 구차하지 않겠다. 다만 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 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 누가 준 고통을 내가 함께 감내하기 힘들다. 특히 그를 알면 더더욱 나는 감내하기 힘들다. 왜냐면 나는 그들을 심판할 자격도, 혹은 그들의 가족을 해할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관계없는 고통을 내가 왜 져야 하는가. 누구도 나를 돕지 않으며 나의 앞길을 앞가림해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결국 자기의 길을 지체할 뿐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만 내가 타인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한 것만 나는 책임을 지고 싶다. 가증스럽게 떠들고 싶지도 않으며,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불편하게 위태롭게 비판하고 싶지도 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것은 고통받은 자들은 왜 그들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인가! 왜! 왜! 왜!

 

2005.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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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구원투수

수퍼스타 감사용. 이제 그는 패전처리 전문투수가 아닌, 구원투수로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7회말! 누구도 등판하고 싶지 않은 그 마지막 게임의 끝자락에서 그는 희망을 던졌다. 그 희망은 결국 오늘의 아름다운 호투(好投)로, 내일에 대한 당찬 전투에 임하는 굳센 신념을 둘레 7인치에 무게 145g의 작은 야구공에 알차게 담아 던졌다.

 

그렇게 알지고 속꽉찬 암팡진 그 구원투수를 생각할 때마다 내 인생에 그만한 구원투수가 있음에 나는 너무나 고맙고 새삼 감사하다. 우리가 그렇게 구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서로 깊이 있고 미쁘게, 곰비임비 살아온 것이 정말 고맙다.

 

나도 그대처럼 게임의 승패에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든 잡은 공을 열심히 던지되, 던진 공은 미련없이 놓아주었으면 한다. 언젠간 그대와 같이, 나처럼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 사람에게 구원투수가 되고 싶다. 절망이 담긴 공에 분노를 담아던지기 보다는 공이 가야할 곳을 찾아주는 직관과 냉철함, 그러면서도 단 한개의 공이 누구에게 가야할 지를 아는 계산없는 그 대범함.

 

우리가 가야할 곳. 그리고 치뤄야 할 게임은 많다. 그리고 두려움과 낯섬, 익숙함과 안정됨의 경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나비가 되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질문에 이미 대답을 가지고 있다.

 

"날으는 나비가 아니더라도 헤엄치는 나비가 되어주마."

 

20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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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에 평생을 아파하거나 인생의 한 단면, 얼굴의 한 단면, 정신의 한 단면이 짓이겨져 차마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간은 함부러 상처를 주어서도 안되며 받은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아야 한다.

 

문득 상처를 주고 받는 일들이 가십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에 짧게나마 메모를 남겨본다.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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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평가

인물을 함부러 평가해서는 안되나, 때로는 그 평가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사회에 유익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인물 평가를 필요악이자,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내 개인이 인물 평가를 하려는 이유는 그때그때 느낀 그 인물에 대한 솔직함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 뿐이다. 그 평가가 시시각각 변하게 되면 나 또한 문제가 있거나,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예방책을 미리 찾아보는 것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2005.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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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

구걸하는 사람들...노숙자..서울만 해도 이러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은 방치하는 국가가 더욱더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걸하는 사람도, 노숙자도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를 받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그들 중에 오히려 껌을 팔러 다니는 아줌마와 지체장애인들의 모습 속에 고단한 하루를 끊임없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이겨내는 그 모습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그 분들을 위해서 나도 한끼를 굶는다.

 

20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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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통

사람은 두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도 한가지 일관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여러가지 모습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것이 다중인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시다발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비교적 나는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목표가 분명해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질 때 타인의 여러 면모를 발견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새로운 모습은 점점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숨겨진 모습은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여자를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여러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여러 명의 여자를 상대하는 사람은 그 여자의 수에 따라 다른 면모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상대녀는 아니다. 오직 자신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100%를 다 안다면 110%를 알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100%를 아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별로 큰 문제는 안된다. 가장 친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러한 방법은 일일이 소개하기가 그렇다.

 

여하간 지나간 행적이 있을 것이고, 그 지나간 행적을 퍼즐을 맞추듯이 쭉 끼워 맞추다 보면 빠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빠진 퍼즐이 어디에, 무엇인지를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들통이 나기 마련인 인생을 살고 있다. 모든 것은 언제가 드러난다. 다만 증명방법이 문제이다.

 

200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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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당신들은 아는가?

 

내 폭발하듯한 마음을 아는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러면서나는 이렇게 무위하고 있는 걸...상처가 나면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을 아는가!

 

어느 누구가 나의 고통을 바라보고 웃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는 더 분노하고 더 질기게 잘근잘근히 나 심장을 꺼내어 들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분노는 에너지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춤추며 분노하고 싶다. 대가리 박터지게 인생의 한 방을 가르키는 사람들은 부당해고라는 악마와 싸우고 현실을 목도한다는 자들은 자신의 감시 속에서 감시수당을 받으며 하루를 버틴다. 누가 현실주의자인가? 누가! 누가!

 

먹고 살라고 하는 건 결국 동물도 하는 것이다. 날짐승도 하는 거란 말이다. 인간은 그럴려고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면서 동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아야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나의 고통이 아닌데 내가 눈물흘리는 것이 동물과 나의 다른 점이다. 무척 오늘 슬프다....너무나.

 

200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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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나는 아직 아홉살?

위기철의 소설이 원작이다. 난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는데,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 어릴 때 기억들이 다른 사람도 비슷하겠지만 - 뭔가 숨겨진 것이 들켜버리는 감정때문 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백여민, 장우림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오금복과 신기종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영화는 여민이와 우림이의 감정의 굴곡이 느슨하면서도 팽팽하게 연결된다. 여민이 뒤에는 여민의 깊은 뜻을 아는 든든한 기종이가 있고, 우림이와 여민이와의 미묘한 감정 속에 금복이는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여민이를 늘 생각한다.

 

어릴 때의 감정은 어른들이 말하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사랑보다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사랑은 물신에 찌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덕보려는 생각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지는 어른들의 사랑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치 기름지고 야무지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본주의에서도, 공산주에서도 사랑은 없다는 '사랑의 기술'이 전하는 핵심교지를 다시 되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사랑이 그 때의 사랑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다시 돌아가는 것도 부질없다. 오직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은 바로 모든 애욕과 물욕이다. 사물을, 세계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자격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행할 뿐일때,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나의 옆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우림이와 여민이는 결국 사랑에 있어 우리들의 스승이다. 그러나 결코 닮을 수 없는 스승이다.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회용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익숙한 일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새롭지만 항상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하며 계산이 앞서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숭고하지만 결국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학습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주는 자체에 감사해하고, 받는 마음 또한 감사해야 한다.

 

우림이가 마지막에 서울에 떠나면서 여민이에게 보낸 안경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것은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여민이의 어머니를 위해서 선물한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여민이의 두 번째"기 되어도 기분나쁘지 않다고 하는 우림이의 마음 씀씀이도 너무 고왔다.

 

뱀발: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 중 돈이 없어 사보지 못하겠다면 다음 주소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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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기본적으로 사서 보는 겁니다.

     

200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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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우리, 사람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이다.

 

오늘 거울을 보았는데, 아무리 웃어보아도 나는 어느 순간인가, 괴물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괴물이든, 인상더러운 괴물이든 간에. 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어떻게든 현실의 이 마법을 벗어나야 하는데, 점점 나는 괴물들과 만나면서 괴물이 되고 괴물과 인간의 차이를 못느끼겠다.

 

인간으로 살아남듯, 괴물으로 살아있든 간에 제일 중요한 차이는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운명으로 장렬하게 결정짓고 이 세계를 떠나지만, 괴물은 누군가의 손에 처절하게 쓰러져 죽어간다.

 

내공이 필요하다. 인간이 되기 위한 내공이 필요하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서른 밖에 안되는 정신연령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그 만큼의 인생과 세계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뛰어 넘어야 하고, 넘어서야 한다. 분발하자.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릴 때가 된 거 같다.

 

2005.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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