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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02
    항로
    공돌
  2. 2006/08/02
    [펌글]프랑스 청년들 이겼음, 아니 지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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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8/02
    디카와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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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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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02
    내가 생각하는 "관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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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2
    잉여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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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학생들을 볼모로 한다고 왜 안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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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02
    까놓고 니네들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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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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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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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경찰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무죄추정의 원칙. 이건 그들의 눈에는 이미 유령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권리에 있어서는 분명했다. 그러한 권리가 타인의 권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 사회는 좀 더 진보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그가 100%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피의자였을 때 '피의자 '라는 말을 방송에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연쇄살인범'. 이미 언론과 여론에 의해 이미 그는 판결을 받은 자가 되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간에,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야 비로소 그는 '진범'이 된다. 시민들의 판단은 시민에게 맡기고, 판사의 판단은 판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판사를 믿지 못할 일이 많아 그것이 문제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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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먼저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규명해본다. 쉬운 예로 미국을 보자. 1965년 틴커 판결 전후에 나왔던 논의로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특권이론, 부모대위이론, 계약이론,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 등으로 각자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지 모르지만 약 7-8년전만 해도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이 통설이다.

 

각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권이론은 전통적으로 재학관계를 학교가 학생에 대해 가지는 특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초헌법적 특권을 서당의 훈장에게 부여한다. 말이 안되는 이론이다. 다음으로 부모대위이론은 학생에 대해 부모의 지위를 대위하여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이번 사건에 비추어보거나 개정 사학법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은 이야기다.

 

학생과 학교는 계약관계라는 입장 또한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의무교육 외에 비상식적인 부분도 이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간 학교가 학생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일정한 행정작용과 비슷하게 보는 것이 설명하기에도 학생의 권리를 보호하는데도 쉽다. 왜냐하면 사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학교와 학생의 소송상의 대립. 이건 뭔가가 좀 어색하다.

 

이런 어색함은 '교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움에 있어 기본적인 전제는 선생과 학생간의 신뢰와 존경,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의 흐름은 이와같지 않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통제와 규율, 지배와 공포에 있다. 이건 학교도 산재되어 있는 권력기구에 불과하다는 미셀푸코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는 당연히 아이들의 신체일부까지도 간섭하고, 또한 폭력을 행사한다. 교사의 폭력은 사실상 국가폭력과 다르지 않는 미시적 권력의 폭력이라고 본다. 여하간 이러한 이론의 밑바탕으로 가지고 이번 교권침해 논쟁에서 빠져있는 것을 살펴보자. 생각해보니 위의 이론은 그냥 재미삼이 써 놓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히 든다. 지울까 말까.

 

1. 본질

 

교사가 무릎을 꿇다, 요게 굴욕적이고 교권침해라는 이야기인데, 부모들이 굴욕적으로 한 것이 무엇일까. 전후좌우를 살펴봐도 나는 부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10분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에 밥을 먹어야 하고, 어느 놈은 마늘쫑을 제대로 씹지못해 마늘쫑을 그대로 토하기까지 하니 부모의 마음에 마늘쫑이 아니라 마늘이 다발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다.

 

급식 3교대. 요게 문제다. 급식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부모들은 먼저 선생과 교장에서 일단 이성적으로 급식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은 이렇게 가지 않았다. 부모들은 선생의 집으로 가서 항의를 했고,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다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있었고,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다 외면하고 있었다.

 

근데 급식지연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밥을 빨리먹으라는 종용이 반성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 간과하고 있다. 밥을 늦게 먹은 것이 죄인가. 아이들이 밥을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채근하는 것이 교육인가. 행정상 다음 교육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책임이니, 책임을 벗고자 밥을 빨리 먹게 하고, 늦게 먹은 아이들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해서 다음부터는 화이팅해서 더 빨리 먹으라는 것인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게, 반성문의 내용이 과연 어떠했을까가 문제다. 틀리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적어도 밥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이 시간을 벌어주어 밥먹는 시간을 확보해주었어야 했고, 선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련 학교회의나 교사의 신분으로 교감, 교장에게 이런 문제를 건의했어야 했다. 그래서 일단 교사가 옳지 못했다.

 

 

2. 학교측과 교원단체의 반응, 심지어 전교조까지.

 

절망이다. 실망이 여러 개 모여도 절망까지 잘 안간다. 그냥 실망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절망은 단 한개만 다가와도 숨쉴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학교측은 대책이 없었다. 교원단체는 화났고, 전교조도 뿔다구났다. 근데 문제는 교육적 대책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 말이 없고, 그냥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학교에서 선생을 몰아세우고 결국 선생이 무릎을 꿇은 사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이게 자칫 자기 family챙기기로 가면 결국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철밥통이야기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전교조의 대응도 문제이다. 이게 절망으로 간 결정타이다. "무릎꿇린 것은 심각한 교권침해"...신문의 제호들은 그랬다. 전교조의 논평을 담아낸 언론의 문제는 제껴둔다고 하더라도, 이건 씨팔 믿었던 도끼에 대가리를 찍힌 기분이다. 진상조사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작 밥 늦게 먹는 아이들이 사실 수업을 받기 싫어 태업을 하는 건지, 준법투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자질 없는 선생들에게 받은 굴욕과 상처가 일순간 떠오르면서, 정수리에 철밥통으로 한 대 맞는 기분이다. 극복해야 하는데...떠오르는 걸 어쩌겠나?

 

3. 언론의 태도

 

요건 간단하게 해 논평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방송사들은 과연 기사를 보도하는 건지, 영화를 만드는 건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심이 무릎 꿇는 극단적 모습만을 여러 차례 방영하면서 선생에 대한 애처로움을 극대화시켰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학생들이 선생에게 맞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말이다.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 두가지 상반된 기사를 해석하고 내놓는 대책이 일관성을 가져야 언론의 시각에 대해 시청자와 독자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말 무식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자기들은 아이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오바이트 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4. 부모들

 

부모들의 문제는 다음과 압축할 수 있다. 먼저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선생을 위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생 옆에는 최고 책임자인 교장이 있었다. 교장은 말이 없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들이 적절한 대책을 제안하고 그에 대해 일정한 요구를 제안하는 하는 수준이 아닌 선생의 사직을 종용했다. 좋은 선생들이 많다. 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복직한 선생들 생각하면 선생들이 외압에 의해 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일말의 양심과 도덕적 태도에 실망을 하게 될 때가 문제이다. 폭행, 성추행 등 아이들에 대한 반교육적이고, 반인륜적인 작태에 대해서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 교권의 정화를 위해 학교당국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모들의 이러한 문제는 문제일 뿐,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선생들이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5. 무릎을 꿇다

 

결국 선생은 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중에 비티 인터뷰에서 사건의 진정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무릎, 함부러 꿇는 것이 아니다. 선생의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대책을 내놓고 부모들에게 사과를 했었더라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선생과 부모들은 한바탕 싸웠고, 이에 분이 안풀린 아지매들은 결국 학교로 달렸갔다. 당연히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태도에 대항할 정당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무릎을 꿇는가. 교육자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진정이나 봉합을 위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건 다분히 쑈라고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뱀발: 일단 생각만 갈무리. 비정규직 교사를 이야기하면 더더욱 골때리다. 비정규직 교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공격받을 대상은 학교, 부모, 정규직 교사. 그들은 자신들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치열해야 한다. 더욱더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글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0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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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이빨이 몽창 빠지는 꿈을 꾸었다.

정신을 똑바로 안사니깐 이 따위 꿈이나 꾼다.

어쩌든가 빠지 이를 끼운다고 용을 쓰는 내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뭔가 안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았다.

 

뱀발: 오늘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날이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사는 날임을 새삼스럽게 확인케 하는 날이다.

 

2006.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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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뭘까.

한 몇 일 동안 계속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명상도 잠시 했다. 내면에 있는 것들은 살펴보는 시간.

 

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까?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깨달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과 노장철학의 공통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극단적인 약점은 그 철학의 "무기능성"에 있다.

 

부처의 "깨달음",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라는 말이나 노자의 "무위"나 사실 별 현실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적당히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wellbeing(넉넉살이)의 한 방편에 다름아니다. 물론 절박한 심정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서!

 

결과적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나 말씀을 들으면 그 때는 좋은 것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물론 지속적으로 자기가 그러한 질문을 통해 절차탁마하고 삼매에 빠져들면 또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경지는 결국 도가 "튼" 놈과 아닌 놈 사이에 차별의 간극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왠간한 사이비 종교하나는 너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어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이든, 부처가 될려고 하는 이든, 마호메트나 노자, 장자, 문선명, 여호와의 증인 등등 그들을 믿는 말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꼴깝을 떨고 사는 건 매한가지다.

 

물론 깨달음의 경지는 나와 타인의 구분, 즉 경계가 사라지는 어딘가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은데 어떠한 자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소위 대통령이든 노동부장관이든 성철 스님이든 간에 진정코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인가)받게된 공인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부처는 거리낌과 걸림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근데 그것이 어떠한 자유를 주는지는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가 "대자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러한 깨달음이 진정한 이 사회의 자유를 줄 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물론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자유, 자기세상의 구축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점은 인생살아가면서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의 통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얻을 때 그게 자유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백날 가져봐야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기통제라는 등식도 한참 생각 후에 던져 버렸다. "사회"라는 문제가 개입되는 한 그러한 등식은 웃끼고 자빠진 소리에 불과하다.

 

아직도 깨달음에 대해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계속 생각은 이렇게 흘러간다. 탄압과 불의에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열반으로 보는 것이 맞는지, 수십년간 수행 끝에 납자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박정희의 서슬파란 칼 앞에서는 별 말이 없었던 성철 스님의 열반을 진정한 해탈로 보는 것이 맞는지.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고도의 경지는 전태일과 성철이 유사하나 문제는 그 모양새가 좌탈입망이냐 아니냐가 아닌, 누구를 위해 열반의 길을 갔는가가 핵심이다. 아직도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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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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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의 땀은 참으로 가치있다.

흘린 땀이 바로 과정이고 결실을 보장한다. 피부를 뚫고 나와

송글하게 맺힌 땀들이 뭉쳐서 흘러내릴 때 먼 미래를 약속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앉아 있으므로

땀을 흘릴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같은 땀이라도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지적을 받거나 준비를 소홀히 해서 흘리는 땀.

 

그것은 운동선수의 땀 만큼이나 소중하다. 그러한 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안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부하면서 늘 땀을 흘리자. 그 땀은 현재 나를 위한 것이지만

진짜 내가 흘릴 땀은 따로 있다. 그곳을 향해 때로는 부끄러움과

성실함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여야 한다.

 

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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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의 연속

1. 나라는 인간 자체의 한계.

   그건 크게 세가지. 의지, 기억력, 성격.

 

2. 세가지는 중층적으로 엮여있음.

   기억력은 의지로 커버되고, 성격은 기억을 더듬어 교정하면 됨.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핵심은 의지의 문제임.

 

3. 세상에 대한 인식도, 삶에 대한 인식도 한계를 느끼는 것도

  세가지 문제의 미흡. 답답함. 너무나, 그러나 이것을 깨지 않으면

  평범한 상태,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상황이 도래

 

끔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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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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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부끄러워서 있는 가슴을 모두 찢어버리고 싶다.

왜, 살아있을 때 그렇게

열렬히, 깊숙히, 모든 것을 다바쳐

사랑하지 못하는가.

 

애썼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은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또 묵묵히

지지않는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그녀을

옆에서 지키고 보듬어 주었다.

 

참사랑은 훌륭한 교육이자 수행이고,

또한 봉사이며 나눔이다. 매 순간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내는 찰라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갈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2006.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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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일단의 마음은 모두 철회하기로 한다.

그리고 본래 목적에 항로를 바꿈이 없이 그대로 간다.

 

2006. 5. 2

 

ps. 노동절 집회에서 김태영을 만나다. 무척 반가웠음. 공교롭게 김태형씨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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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프랑스 청년들 이겼음, 아니 지켰음

 

프랑스를 ‘거대한 시위장’으로 만들었던 최초고용계약(CPE)이 10일 결국 철폐됨에 따라 프랑스 정국은 일단 안정을 되찾을 전망이다. 학생·노동계로서는 안정적 고용제도 유지에 성공했지만 실업률 23%에 달하는 청년실업 문제는 숙제로 남게 됐다.

CPE를 주도했던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와 레임덕에 빠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번 사태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게 됐다. 반면 학생·노동계와 물밑협상을 벌여온 집권 대중운동연합(UMP) 니콜라 사르코지 총재는 더욱 부상하게 됐다.

◆백기 든 정부=프랑스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이유로 내세운 CPE가 거센 반발을 사는데도 한동안 강행 방침을 고수했다. ‘검은 화요일’로 불리는 총파업으로 공공기능까지 마비되고, 지난해 10월 이민자 소요와 같은 폭력 사태가 재연되자 시라크 대통령은 뒤늦게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학생과 노동계가 CPE가 완전히 철폐될 때까지 시위와 파업을 계속하겠다며 강경하게 맞서자 정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CPE 철폐는 있을 수 없다고 버티던 빌팽 총리도 “노동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점을 사과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CPE 철폐 발표 직후 프랑스 전국학생연합(UNEF)과 노동총동맹(CGT) 대표들은 회동을 갖고 ‘시민의 승리’라며 환영의 뜻을 표하고 오는 17일로 예고했던 총파업은 취소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표들은 새 고용법이 나올 때까지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11일 파리에서 시위를 하는 등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사르코지 독주체제 열리나=이번 사태로 가장 상처를 입은 것은 빌팽 총리다. 지난해 6월 총리가 된 빌팽은 엘리트 이미지로 인기를 끌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CPE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지지도가 사상 최저인 25%까지 곤두박질쳤다.

시라크 대통령 역시 결정타를 맞았다. CPE를 고집하는 빌팽 총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 무능력하다는 질타를 받은 데다가 대통령 직권으로 CPE를 철폐하라는 여론조차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 노동법은=UMP는 일단 청년 근로자 고용 업체에 대한 정부 지원 증가, 레스토랑 등 일자리가 많은 분야의 인턴제 증가 조치 등을 담은 대안을 이날 의회에 제출했다. 르몽드 등 프랑스 언론은 새 고용법이 만성적 실업사태에 직면한 젊은이, 특히 자격증이나 기술이 없이 졸업한 18∼25세의 구직자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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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와 사진관

2년전인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 신림동에 있는 사진관에 갔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얼굴에 있는 점을 빼고, 잡티제거 하고. 그런 후에 즉석에서 프린터기로 사진을 뽑은 다음 사진을 절단하는 칼로 여러조각의 사진을 자른 후 종이봉투에 담아가기까지 약 15분정도. 금방 끝난다. 현상시간이 그만큼 단축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아직도 증명사진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동네 사진관으로 간다. 사진관은 늙수구레한 아저씨께서 운영하신다. 요즘은 거의 일흔을 넘기시는 분이 많으니 아저씨라고 하는게 나을 듯하다. 사진찍고 현상하는데만도 반나절은 걸린다. 대충 몸만가면 돌려입는 양복입고, 빗질하고, 넥타이 고무를 확 조으면 사진촬영 준비끝.


내부의 시스템도 복잡하다. 조명빨을 잘받게 은색 우산같은게 걸려있고, 사진기는 측량기처럼 세워놓고 커다란 렌즈구멍에 눈을 갖다대놓고 찍으신다. 고개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약간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이렇게 모델은 작가의 지시에 따라 최고의 포즈를 만든다.


물론 사진관 내부의 냄새도 정겹다. 아저씨는 금방 식사를 하시다가 사진을 찍으시기 때문이다. 그윽한 된장 냄새가 사진관을 진동한다. 약 10분간 이리저리 하다보면 사진촬영이 끝나고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고 사진관을 떠난다. 이 사진관이 그나마 첨단화된 것은 사진현상이 끝나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때려준다는데 있다.

 

그런데 사진의 호감도는 그렇다. 우리가 머리정돈하러 가는 미용실이 아무리 비싸도 잘하면 싼 곳보다 그곳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인격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 곳을 찾기 때문이다. 사진은 더욱더 그렇다. 내 사진에 누가 칼이라도 꽂아봐라. 그만큼 사진은 인간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디지털 카메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찍지 못하는 슬픔이 있지만 일단 증명사진에 관해서는 우리동네 사진관 아저씨를 능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사진관은 어렵기 그지없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듯이 일자리는 점점 소멸된다. 기계, 기술의 변화를 동반한 의식의 변화가 이렇게 생계를 유지했던 밥통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결과를 목도한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싸게, 독점적인 기술을 가져야 한다.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현재에는 집에서도 사진을 프린터로 현상할 수 있으니, 이제 사진관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옛날 큰 행사나 결혼식이 있을 때 터트리던 마그네슘 사진기는 더 이상 남한 사회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다. 또한 현재에는 의미도 없는 추억거리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결혼식은 캠코더로 아예 영상을 남기니 사진사 아저씨가 찍는 사진은 필요한 만큼만 찍는다. 나머지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디카로 찍어준다. 그리고 메일로 날려주거나 홈페이지에 올려준다. 퍼가면 된다.


 

사람들은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현상하는 것이 돈 아깝다고 한다. 얼마전 포털사이트에 증명사진을 '60원'에 현상하는 법이라는 '뜨는 이야기'가 게시되었다. 읽어보니 사진관 아저씨들 머리에 빨간띠를 맬 수 밖에 없겠더라. 아줌마는 이 때까지 증명사진 몇 장을 뽑으면 거의 만원인데, 집에서 디카로 찍어 포토샵으로 얼굴을 여러게 나열해서 뽑으면 굉장히 경제적이라고 소개했다. 더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사진관에서 현상하는 것은 "돈아깝다"고 했다.


 

 

언뜻 보니 그러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댓글이 종래와는 달리 '강추', '붐업'이런 게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방불케 하는 장문의 글. 사진관을 하는 사람, 그를 옹호하는 사람, 사진관의 딸....여하간 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인격의 표상인 얼굴을 찍는데, 싼 맛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디카로 찍은 사진과 사진사의 사진은 일단 차이가 있다. 동네 사진관이 가지는 의미.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가끔씩 신문지상에 영정사진을 공짜로 찍어주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밥통만한 사진기로 어르신들을 찍는 모습은 아름답다. 사실 디카로 찍어도 무방하지만, 그건 좀 그렇지 않다.

 

갈 길을 천천히 준비하고 싶은데 디카로 찍어서 프린터로 뽑아주면 그건 좀 그렇다. 디카는 보통 인스턴트의 상황에서 인스턴트식으로 찍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의 부모님께는 그렇게 하겠다고 화끈하게 그런다면 말리고 싶지는 않다. 안봐도 비디오다. 괜히 그 일로 싸우지는 말았으면 한다.


 

아까 결혼식 이야기를 했는데, 결혼식 당일에 남기는 사진은 몇 장에 불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결혼식 입구에 들어설 때 보이는 것 중에 신분상승에 환장한 사람처럼 유럽식 복고 복장을 한 청년과 숙녀가 함께 찍은 '왕어색' 사진들이다. 비싸기도 완전 비싸다고 들었다. 물론 혹자는 집단 사기의 연속극이라고 했다. 거의 예술적으로 오해의 단계를 뛰어넘어 신원확인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까지. 그건 사진관에 맡긴다. 일단 복장이 안되고, 그렇게 찍을 형편도 안되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런 사진이 사치인지, 아니면 인생에 한 번(혹은 두번?)밖에 없는 혼인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자기들끼리의 "쇼"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굳이 필요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집집마다 하나씩 걸어두는데 우리집에 하나 걸어두는 것도 좋고, 또한 부부싸움이나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 그런 사진은 심리적으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관이 계속 명멸하는 가운데, 사양산업이 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돌파구는 이런 사진을 찍거나 젊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낮은 가격과 빠른 인하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포토샵 기술도 하나의 조건이다. 고급사진을 찍는 방법도 그 중 방법이라면 방법이다.그렇다면 이것만이 살 길인가.


 

 

말이 이리저리 튀었다. 무엇보다 사진관이 살아남는 건 추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어릴 적 엄마손 잡고 증명사진 찍고 자장면 얻어먹고 집으로 오던 그 추억. 그렇다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으면 자장면을 공짜로 주는 티켓을 줄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결국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이 남은 일자리를 보존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사진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꿔버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갑자기 여행스케치의 노래 중에 "꿈을 찍던 사진관 김씨 할아버지"라는 곡이 있다.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런 꿈을 찍어주마 우~~
못생긴 마음 삐뚤어진 마음도
할아버지 앞에선 환한 웃음으로 바뀌네
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

 

그렇다고 사진사에게 심리치료사나 영적 지도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진사는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관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다. 먼저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디카로 찍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디카로 더욱 잘 찍을 수 있는 사진촬영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 이것도 그리 돈 안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비스 차원에서도 고려할 만 하다.


 

또한 최근에 아기 사진관, 무슨 사진관 하면서 특화된 사진관도 많다. 놀이방을 같이 운영하면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비용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놀이방에 전속적으로 채용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일단 일자리 1개는 늘어난다. 물론 사진가격을 사진사가 독점으로 매길 수 없다는 공정거래의 기본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진은 굉장히 잘 찍으면 된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과장되게 잘 나오면 더욱더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렇다면 또 한번 사진관에서 나오라. 그리고 우리집에서 일상적인 사진을 굉장히 멋지게 연출해보라. 가령 새집을 짓는다거나 입주한다거나 이럴 때 한 장의 사진을 찍어보자. 멋있는 집을 배경으로 가족이 집단적으로 찍는 것. 이거 의미있다. 사진은 기록이자 예술이고, 화합이자 찬라의 평화를 가져온다.


 

또한 사진관이 수동적으로 기다려서 될 일인가? 명절을 놓쳐서는 안된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다. 이렇게 떼거지로 모이기는 쉽지 않다. 가끔씩 새로운 주인공도 나타난다. 조카, 사촌동생, 육촌동생들이 태어난다. 고향에서, 혹은 친정, 시댁에서 찍어둔 사진. 이것도 의미있다. 그냥 찾아가라. 발품을 팔아줘야 한다. 아니면 전단이래도 뿌려야 한다. 자본주의적 공세에서 사양산업의 쇠퇴일로를 점진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건 의식운동이다.


 

 

모두가 시즌이 되면 찍는 사진말고, 동호회나 산악회 이런 건 무조건 가야한다. 사진사의 건강과 보람,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이익도 추구할 수 있다. 잘 찍은 사진. 멋진 액자에 담아서 줘봐라. 이건 감동된다. 남편이 이걸 가지고 집에 걸어두기 위해 못질하는 모습은 거의 거룩하기까지 할 것이다.


 

딱딱한 집단일수록 사진을 많이 찍으면 좋다. 가령 노동조합의 예를 들어보자. 집회때 왕창 모여있는 사진보다는 집회의 진정성이 담긴 인물사진을 찍는 것도 가치있다. 또한 단합대회때 공차는 모습만 찍지말고 재미있는 게임을 통해 좋은 사진을 연출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데 작은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기록의 가치와 동시에 집단의 모습을 순화할 수 있는 기능도 사진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글에서는 단지 사진관에 관련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렇지만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단순히 추억에 의존해서만, 동정심에 기대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라지는 모든 직업에 대해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추억도 지켜질 수 있는 법이니깐.


200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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