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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이주노동자센터 활동을 중심으로 본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활동을 중심으로 본

                                     이주노동자선교의 과제와 전망

- 장창원 목사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 운영위원장/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APWSL)한국위원회 코디네이터 )



    (들어가는 말)

고용허가제가 실시된 한국의 이주노동자 전체 약 40만명중 과반수를 차지하는 무비자 불법체류노동자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그 중 필리핀은 세계에 8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송출하는 국가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볼때 자체적인 후원조직과 필리핀 정부, 노동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현재의 변화되는 상황에 긴밀한 대처를 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이주노동자를 위하여 일하는 이주노동자후원회, 지원 단체, 대책위원회, 평등노조 이주지부, 인권선교단체들의 입장차이로 또 다른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이주노동정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이주노동자선교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업장별 조직과 모임을 만들어서 노동생활과 정세를 공유하고 조합형태의 노동자조직으로 다른 나라 이주노동자들에게 모범적 대처를 잘하고 있다. 우리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정확한 노동자의 의식과 연대와 투쟁을 통한 노동자권리와 기본권향상과 노동권확보를 위한 이주노동자운동전선에 앞장서는 국제이주노동운동과 선교의 선봉장 역할을 감당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은 일제시대부터 고국을 떠나 중국과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1970-80년대 한국의 노동력이 독일과 중동 사우디 등에 진출하여 국가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노동자들의 기본권리 쟁취되었고 노동자들의 임금향상과 작업환경개선,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열악한 근로조건의 영세사업장과 3D산업에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으며 저임금과 근로조건의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세사업장이나 3D산업의 대체인력으로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게 되었으며 IMF경제위기는 산업구조의 결정적인 변화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일본이나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현실과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필리핀의 노동자들의 한국이주노동현상은 미국을 중심으로한 초국적 자본중심의 세계경제 흐름속에서 바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대국의 신자유주의 금융시대의 희생으로 이주노동을 시작하였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노동허가제, 산업재해 보상법, 건강보험등의 기본권 제도가 마련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열악한 근로조건과 위험한 노동현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몸 말 )

90년대 초반 한국교회를 중심으로한 종교, 인권 양심적인 노동단체들이 이주노동자의 생활과 문화, 선교적 차원에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외국인노동자센터를 만들었다. 그 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고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여러 갈래의 단체들이 있다. 

이주노동선교실무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요구하는 현실의 구호와 어려운 삶의 현장 이야기와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활동을 소개한다.


- 현대판 노예제인 연수제도 즉각 철폐하라!

- 폭압적인 합동단속과 강제추방 정책을 당장 철회하라!

-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 사면 합법화하라!

- 외국인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권을 보장하라!

-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작업장 이동권을 보장하라!

- 정부는 즉각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유엔 협약'을 비준하라!


1.  부당노동행위 심각한 현장사례

2003년 11월15일 한국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 추방이 시작된 이후 낮은 임금, 노동강도 강화, 퇴직금 떼먹기가 만연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못 받고 해고 되거나 이전 보다 훨씬 낮은 임금, 높은 노동 강도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야 할 노동부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2004년 8월 법이 시행된 이후부터는 비인간적인 이주노동자 체포와 구금, 추방이 합법화 된것이다.


1) 노동비자 없는 노동자들이 특별단속의 상황을 피하려는 심각한 인권실태

2004년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처음 특별단속을 한다는 소식 이후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이 평소와 달리 거리에 많이 보이지 않아서 집안에서 숨어 지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오산지역 이주노동자 자녀를 위한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데리러 이주노동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을 돌아보았다. 놀란 것은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안에 모여서 단속을 피하며 소리없이 생활하는 처참한 사례를 보았다.


2) 영세공장까지 단속반이 들어가서 노동자 4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작업환경과 보수가 좋은 경기도 화성의 작은 기업체에서 상담전화가 왔다. 단속반이 공장안까지 막무가네로 들이 닥쳐 4명의 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라며 잡아 갔다고 한다. 당장 일손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데 회사를 운영할 방법이 없느냐는 사장의 허탈한 상담을 받았다. 


3) 퇴직금을 50% 못 받고 추방된 필리핀 노동자의 사례

7년간 현장에서 일하고 귀국하기 위하여 퇴직금을 요구하였다. 퇴직금을 못 받은 필리핀 노동자 알렉스가 수원지방 노동부 사무소에 퇴직금 진정서(법적보장)를 제출하여 해결을 의뢰했는데 이 후 공장으로 돌아오니 당일 오후 현장으로 급파된 단속반들에게 알렉스는 구속되어 화성보호소에서 감금되었고 그 후 퇴직금의 일부(300/600만)을 받고 귀국한 사례가 있다.


2. 이주노동자들의 근본 문제를 대처하는 여러 의견과 단체들


우리는 1998년 IMF 경제위기를 격으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자본의 금융시장을 통한 세계시장 침탈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앞세운 노동력 수탈을 지켜보았다. 결국 현정세의 흐름은 미국이 전쟁을 불사하면서 에너지자원을 강탈하고 있다. 전쟁과 신자유주의 경제수탈정책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세계 도처의 민중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


단체에 따라 한국의 고용허가제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제도 등 한국의 이주노동 상황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과 입장 차이를 보인다. 큰 흐름의 이주노동자 대책은 동일하지만 실천 활동의 내용에 따라서 이주노동단체들의 성격과 내용을 달리하여 단체의 폭은 넓어지고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중복과 선택의 폭이 혼란을 주고 현장의 흐름과는 관계없는 불필요한 논쟁이 늘어나기도 한다.


이를 큰 틀에서 분류하여 보면

1) 1990년대 초기 종교적 선교와 인권적 차원에서 이주노동자보호를 위한 지원과 후원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단체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이주노동자협의회에 속한 단체들


2) 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들이 선교적 차원에서 문화와 물량주의적 접근을 하는 복지적인 NGO 기관들이 있다.


3) 노동자의 가치관과 입장에 따른 노동조합 중심의 사고를 위한 이주노동단체들


4) 민중, 노동자 운동적인 시각의 해결 방안을 갖고 이주노동자의 주체적인 활동을 후원하는 단체들이 있다.


98년 한국의 IMF 경제위기상황 이후 실업자를 양산하는 노동정책으로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정책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 근로자 파견법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노동정책은 전 지구적 자본의 투자와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노동자를 탄압하는 초국적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노동자의 생산성에 근거하기보다는 금융투기자본의 소통과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자본의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자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이다. 노동권을 회복하여 아름답고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주노동운동은 민중운동과 인권운동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다.



3.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활동사례


경기도 남부지역(수원, 평택, 화성, 용인)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태국, 스리랑카, 중국, 카자흐스탄, 네팔 등의 이주노동자가 약 30.000명 있다고 한다. 경기남부지역의 교통적 요충지인 오산지역에는 실제 3-4000명의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주말의 유동 이주노동자는 훨씬 많아 시장과 거리는 이주노동자들로 거리를 가득메운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모체가 되는 오산다솜교회는 산업선교적인 정체성을 갖고 지역의 민중교회로서 노동자, 민중선교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사명으로 1991년에 설립되었다. 그 동안 지역의 오산환경시민모임을 주도하여 오산화성환경운동연합을 설립하는 모체가 되었으며 주민도서실 중심의 독서모임, 공부방,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며 현재 지역협동조합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으며 지역활동가들과 함께 하는 지역선교의 토대를 마련하고있다. 


1998년부터 여성목회자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가난한 저소득층과 해체가정의 자녀돌보기에 선교의 초점을 맞추면서 노동운동, 현안시국문제 대책활동을 계속하였으며 2001년에는 협동목사인 장창원 목사를 아프리카 르완다의 협력선교사로 파송하여 국제민중교회의 연대와 평화선교사역의 틀을 갖추는 제3세계 에쿠메니칼 노동선교의 실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솜교회는 2002년 지역의 노동조합과 시민대표들의 오산지역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과 요구를 수렴하여 이주노동자선교센터의 설립 준비를 하였다. 2003년 예장총회 이주노동자선교후원회의 결의에 따라서 오산노동문화센터가 설립되었으며 첫 번째 실천과제인 오산이주노동자센터를 개소하여 상담과 교육, 조직, 대책, 연대, 건강, 의료, 문화사업을 감당하고 있다. 


센터의 조직은 소장 책임을 장창원목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부터 함께 하여온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와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연결을 통하여 아시아지역노동운동과 이주노동운동의 결합을 모색하였으며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한 노동자의 소통과 연대를 추진하는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와 함께 아시아태평양지역노동자들의 연대와 소통을 감당할 아시아레이버넷을 추진 중에 있다.


이미 필리핀 민주노동조합(KMU)이 파견한 카사마코 노동자들과 네팔의 지폰(JEFONT)에서 연결한 네팔노동자들이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운동의 실무책임자인 예장총회 존갈랑선교 동역자와 함께 카사마코노동자모임의 활동에 함께 하고 있으며 수원 화성 카사마코 이주노동자 대표인 마니씨는, 네팔의 이주노동운동 조직 활동가인 버즈러씨와 함께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는 한국교회가 풀뿌리 민중들의 노동현장과 연대하려는 예수정신과 노동네트워크인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APWSL) 활동이 만들어준 유산이다. 앞으로 필리핀, 네팔, 한국의 이주노동운동관계가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자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시대적인 요청을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는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연대와 소통의 통로 역할을 감당할것이며 노동권 쟁취투쟁을 만들고 지원하는 노동운동선교적 대처를 통한 새로운 세상, 대안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일하고 있다.

 

5. 거시적인 이주노동자선교와 역사의 실체 접근과 노동자 국제연대의 주역으로 이주노동자선교의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 우리는 역사속의 노예노동과 노동선교의 발전과정을 둘러보며 한국의 노동사와 이주노동의 실체를 거시적 선교안목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부터 시작된 재일 이주노동자들과 지금까지도 일본, 중국, 소련, 하와이 등에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 재외국민 차별의식을 가진 일본과 유교적인 관념 속에 형성된 한국의 유색인종 차별의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종차별국가로 낙인찍혀 있다. 조국근대화의 기수가 되어 세계로 진출한 한국이주노동자들은 연예인으로 진출한 여성노동자들이 실상을 대변하고 있다.


- 독일로 진출한 우리의 광부 간호사 등이 독일에서 겪으며 터득한 이주노동사례를 유심히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사우디, 중동에서의 한국이주건설노동자들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한국경제가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주노동사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노동자들이 IMF경제위기 때는 먼저 퇴출되었다. 


- 이주노동선교운동은 연대와 협력선교의 소통과 나눔으로 아름다운 하나님나라 건설과 예수정신의 구현을 위한 아름다운 투쟁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돈에 팔리는 노예가 아닌 참된 노동자의 철학과 사상을 갖는 이주노동자 정체성을 바탕으로 노동자 민중을 연결하는 선교적인 연대 주역은 이주노동자들이다. 노동자선교와 이주노동운동을 발전시키려는 선교적인 사명과 결단은 이주노동자들을 돈과 노예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소중한 오늘의 십자가이다.



   (나오는 말)

1. 고용허가제는 관리와 통제, 억압과 착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외국인 근로자를 체계적으로 도입, 관리함으로서 원활한 인력수급 및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지난해 7월 31일 국회를 통과하고 올해 8월 17일부터 시행된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고용허가제, Employment Permit System, EPS)에 들어 있는 법률의 목적에 대한 규정이다. 이 법률의 목적은 결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이주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 통제함으로서 한국 자본주의를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동안 산업연수제 속에서 이주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가장 하층의 저임금 노동으로 활용하고, 이를 참지 못하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노동자의 불법체류를 구조적으로 조장하여 또 다른 저임금 노동자 군을 형성시켰던 정책기조의 연장선에서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사업주는 1개월간 내국인 구인노력을 한 후고용신청을 하게 되고, 산업인력관리공단은 정부가 인력송출양해각서를 맺은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 몽골, 베트남 등의 국가로부터 노동자를 도입하여 해당 사업장에 배치하게 된다. 사업주들은 최저임금 수준이나 이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초과수당, 퇴직금, 4대 보험 등의 비용을 합치면 100만원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관계법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인권이 신장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을 관리·통제하고 억압·착취하는 제도이다.


첫째,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게 된다. 사업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즉, 사업주의 도장을 받아야 다른 사업체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사업체가 휴·폐업하거나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을 해지하는 경우에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나은 사업장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둘째, 노동3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노동법이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하지만,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게 되어 있어서 사업주가 모든 노동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계약을 거부하면 계약해지가 되고 이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철폐되어야 할 산업연수제도가 병행 유지됨으로 인해 구조적 폐해는 계속된다. 갖은 인권침해와 비리의 온상인 산업연수제도는 저임금 노동착취, 미등록 불법체류를 구조적으로 양산한다.


넷째, 기존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면 사면 없이 강제적인 단속추방만 강행하고 있다. 노예와도 같은 삶을 강요한 책임은 정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합법화하지 않고 인간사냥하듯이 단속추방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단속추방에도 불구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6월말 16만 6천명에서 7월말 17만 2천명으로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고용허가제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살아온 이주노동자들을 내쫓고 정부와 자본의 통제아래 '3년 단위'로 이주노동자들을 가져다 쓰고 다시 내쫓는 것을 반복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이주노동자 노동권 쟁취는 노동선교의 중요한 과제


이주노동자의 발생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자유와 자유롭게 노동할 권리는 노동자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국민국가의 경계는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노동자 계급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 저개발 국가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는 것은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이며, 당연한 생존권적 권리이다. 또한 초국적자본에 의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동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아시아에서의 이주노동의 확산은 이 지역 민중들의 황폐화된 삶의 조건 속에서 급격히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국내 노동자의 일자리를 침범하는 이해관계의 대립 구도로 사고하는 한, 이주노동자 문제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골치 아픈 문제일 뿐이며, 노동자 국제 연대의 당위성과 국내 노동자 계급의 보호라는 양자에서 남한 노동자 운동은 갈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계 경제 호황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시기에는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호황기에 자본은 단순히 국내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는 이주노동자의 역할에 만족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을 유입하였고 국내의 노동자와 대립 구도가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윤율의 급격한 저하로 구조적 위기에 봉착한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을 분할하고 노동조건을 저하시킨다. 저임금 이주노동자의 유입을 통해 내국인 노동자의 노동조건 저하를 의도하여, 국내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이해 관계의 충돌을 기획한다.


국내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주권국가의 이해와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충돌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주노동자로 인해 국내 일자리가 잠식당하고 노동조건이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종, 성, 계층의 분할선을 이용하여 내국인과 외국인,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갈라놓으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단결해야 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와 한국노동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와 노동권 쟁취는 남한 민주노조운동의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운동을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힘으로 성장시키고, 국제 노동자연대를 위한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노동자 민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방향으로 투쟁과 연대를 형성해나가야 한다.


3. 이주노동자선교 주체를 형성하여 연대하자!


남한 자본주의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윤율의 급격한 저하에 따른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불안정 노동의 확산과 노동유연화 정책은 극히 불안한 대안인 것이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의 분할과 위계화를 획책하여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저가 다단계 하청구조를 통해 파견노동과 사내 하청이라는 비정상적인 고용형태를 노동 대중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위계적 불안정 노동의 최하층에 이주노동자들의 오늘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당장의 자신의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 비정규직을 용인하고 연대하지 못하고,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에 무관심한 채 외면한다면, 자신의 노동마저 불안정노동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는 바로 전체 노동조건의 동반 하락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민주노조운동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단속추방 분쇄,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산업연수생 제도 철폐를 위해 이주노동자들은 힘겹게 투쟁해 왔다. 명동성당에서는 320일 가까이 농성을 해오고 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정당한 채 온갖 인권 유린과 노동착취 속에서 자연스럽게 저항을 표출하였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노동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해 온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정권이 내놓은 제도개선의 결과물이 바로 고용허가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의 개선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운동을 무력화시키고 이주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만든 법안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와 사업장 이동의 자유도 없이 오로지 사용자의 의사에 의해서만 자신의 노동이 허용되는 제도에서 어떻게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권리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고용허가제 시행에 맞추어 벌어지고 있는 정부의 살인적인 강제단속과 추방과 이미 20여 만명에 가까운 불법체류자 양산은 고용허가제가 이미 실패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이름만 바뀐 산업연수생 제도의 연장판이며, 현재의 이주노동자들을 내쫓고 이후에도 계속적인 단기 순환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장기 체류를 막아, 이주노동자운동이 자주적 계급적 노동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반노동자적 정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주노동의 자유롭고 합법적인 권리를 위한 노동허가제로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시민단체와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에서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관련 규정 및 부칙 2조의 경과 규정을 개정하는 것으로 운동의 방향을 잡으려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하나를 얻기 위해 구조적 문제를 용인하는 것이며 이주노동자들이 운동의 주체로서의 성장하는 것을 지체시키는 단기적 대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고용허가제를 일부 개정하는 선에서 고용허가제를 인정하는 순간, 이후 고용허가제를 넘어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쟁취 투쟁으로 나아가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이주노동자운동의 주체가 이주노동자 내부에서 형성되고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법개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투쟁을 통해 운동의 역량을 높이는 방향 속에서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한국의 활동가들이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며 그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해 왔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노동자운동의 국제 연대의 훌륭한 모범이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단계를 넘어 이주노동자들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로서 확고히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운동의 성격과 목표에 대하여 인식을 분명히 하고 이주노동자운동의 주체임을 선언하였다. 이주노동자운동이 성장 발전하여 노동운동의 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국노동운동은 연대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pcknm@pck.or.kr 필리핀 이주노동자 선교포럼 현장실무자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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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WSL 한국위원회는 네팔위원회/지폰(General Federation of Nepalese Trade Unions (GEFONT)) 초청으로 연대, 교류, 협력 방문을 아래와 같은 일정으로 갖고 돌아왔습니다.

 

APWSL 한국위원회는 네팔위원회/지폰(General Federation of Nepalese Trade Unions (GEFONT)) 초청으로 연대, 교류, 협력 방문을 아래와 같은 일정으로 갖고 돌아왔습니다.


- 한국방문단의 전체 방문일정

2004 4/27 21:00 TG657 인천공항출발. 출국장 안에서 굽타, 캐비 등 강제출국 이주노동자들과 만남, 같은 비행기로 이동,  방콕공항에서 1박

     4/28 14:30 TG319 카투만두 공항도착, 버즈러등 환영인사 후, 숙소로 이동하여 지폰 사무국장 등 지도부와 인사후 전체일정확인 네팔대중가수 노래관람

     4/29 카투만두 전망이보이는 소앰부 성지와 네팔의 세계문화유산 답사 후, 시내에서  민주화 시위현장 방문, 저녁 이주노동자 가정을 방문하여 인사와 만찬

     4/30 네팔왕조 박물관 견학, 오후 한국인 운영하는 쇼핑센터, 인터넷 카페방문,  지폰 총본부 건물에서 지도부와 초청자 인사, 일정안내, 현 네팔시국현황을 담은 영상물 시청, 지폰위원장 초청 환영 만찬 참석.

     5/1 제114 세계노동자의날 기념, 지폰 4차 총회 개막식 참석하여 연대사, 오후 역사탐방과 전통마을의 정치인가정 방문하여 전통식저녁식사 대접받음

     5/2 에베레스트가 보이는 산악지대 방문 오후 지폰총회 참석하여 기념선물받고  인사 저녁 네팔 노동아카데미 연구소 초정만찬, 민주노총, 한국참가자들의 밤

     5/3 지폰총회 새로운 지도부 기자 회견장 배석 축하, 한국인들이 지원, 이주노동자회 대표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방문, 달릿마을방문, 등 정당지도자부 만찬 참석

     5/4 서부 포카로지역으로 이동(7시간)하여 관광노조 부위원장 영접받음, 호수가 연대의  숙소, 트래킹노조방문, 호수가 둘러보고, 시내에서 인터넷, 한국전화, 아래로 깊어지는 강다리 견학, 포카라의 지역노동자의 상황을 들음. 

     5/5 일찍뜨는해와 안나푸르나, 포카라가 보이는 산 트래킹, 지폰 지역본부와 운송노동 조합방문 하여 인사와 교류, 한국의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라쥬, 우다야 가정방문.

     5/6 한국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집 방문, 카투만두로 이동하여 버즈러집으로 짐을 이동한후 APWSL 한-네팔 만남( 이주노동운동을 통한 교류연대 확인)

     5/7 버즈러 집에서 민박한후 예식(결혼, 장례, 화장, 납골)장 방문후 태국출발 저녁때           도착하여 스리파이의 만남과 청년여성노동센터 숙소로 이동 

     5/8 스리파이와 대화, 아시아문화개발협의회 문제 등 상황점검과 휴식

     5/9 APWSL 한국, 태국위원회 공식적인 만남, 통역(파라트), 은행구좌개설,

        청년녿오자센터 후원회 노동자 정기회의 참석하여인사와 한국위소개후 대화 

     5/10 아롬노동문제 리써치 연구소, 태국 노동자박문관 방문. 11시 20분 방콕출발

     5/11 인천 도착


- 방문단 : 장창원목사, 여성노조 울산지부 준비 김명숙(서기), 현대중공업 오종세(진행사진, 5/5일 귀국), 이주지부 지원대책위 이현금(회계. 5/9일 귀국), 민노당 여수지구당위원장 이준상(4/27일 귀가)

- 결과 : 풀뿌리 민주노동자의 현장, 지역간 구체적인 교류, 연대, 협력의 방안을 논의함.

1. 제4차 총회와 새로운 집행부 축하하며 네팔의 현안문제 등 공동인식을 넓힘

2. 한국의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연대하는 일을 중심으로 하여 협력센터 건립계획 추진. 

3. 한국에서 피해입은 노동자와 가족들 문제, 현황을 알고 대책을 마련한다. 

4. 아시아 민중대회, 노동자국제대회 등, 등 교환방문프로그램 지속 

5. 2005년 총회시 참가 회원국가의 현황레포트를 받고 재정, 횡령사건의 진상을 발표한다.

6. 돈이 없어도 풀뿌리 민주적인 노동자 국제연대의 모델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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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선교지 선정이유와 단기사역계획서

 

르완다 선교지 선정이유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17) 말씀에 따라 산업사회 속에 정의와 평화를 일구어 내려는 산업선교회는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형편, 고통을 살피고 위로하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선교사역으로 권세자들의 탄압과 침탈속에도 굴하지 않고 40년간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산업선교회는 민중교회와 노동사회를 연결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반독제, 민주화 투쟁을 하였으며,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하려고 주경야독을 하며 학습하였고,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눅 4 :18 -19) 민족의 구원을 위한 죽음과 십자가의 길이라도 따라나서며 예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민중목회자라는 영광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비인간적이며 형편없는 작업환경과 분단과 분열의 악한구조와 역사, 불평등의 현장인 공단, 빈민, 농촌지역에서 소리 없이 겸손하게 업드려 민중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은 본인은 92년부터 민중교회, 노동선교사역에 참여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10여년간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발달하는 정보화, 세계화, 냉전구조의 해체, 지식산업 발달의 시대적 변화속에서도 변함없이 민중들의 삶은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빠르게 괴물로 변한 세계자본은 불평등한 분배구조로 노동자들은 거리에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많은 인구가 절대빈곤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노동자, 민중의 가난과 빈곤의 심화로부터 그리고 노동현장의 비정규직화의 로인한 생존권 불안으로부터 올바르게 대처하는 선교사업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87년이후 공장과 거리를 수없이 해매이며 시위하는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사항을 둘러보고,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세워 교회에 모여서 교육하고 기도하며 얻은 것은 독득한 한국의 노동운동과 산업선교 문화가 생겼습니다. 이제 산업화가 되거난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 신음하는 신식민지적 제3세계는 한국에서의 활동과 투쟁이 모범적인 방법으로 쓰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노동운동을 세계노동사회가 주목하고 있으며 배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세계사회의 지지와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세계선교방향과 목표를 해야할 일을 설정할 때입니다. 그 동안 세계교회가 한국의 산업선교를 위하여 물심 양면으로 얼마나 후원하고 지원하였으며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주연합교회에서는 선교협력을 위한 실무자를 파송하여 국제연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있습니다. 세계교회의 관심으로 성장한 한국산업선교회가 이제 국내에는 전국적으로 노동교회, 상담소를 중심으로 민중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민중교회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온 그 동안의 경험과 활동이 IMF경제대란으로 수백만의 실업자가 발생하였을 때 대처하고 세계자본에 횡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선구적인 실업운동과 구호, 대책사업으로 피난처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며 어려운 지역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작은 교회들이 물량주의, 대형교회의 방향타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가르침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더욱 가까운 이웃이 된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수 백년의 식민지와 종족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한 책임은 인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며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산업선교(URM)현장의 확장을 통한 에큐메니칼 선교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세계 노동자, 민중들이 의식화하고 자각하며 단결하고 연대하여 자기의 권리를 세계곳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노동자의 무한한 창조적 힘이 민주적 역량으로 발전되고, 아름다운 노동의 인간화와 가치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현장의 힘이 성령의 힘으로 승화되고 폭팔 하여 살인적인 물질문명의 피해를 제거하고 하나님나라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며 풀뿌리민주주의와 지역 자치적인 평등세상으로 발현되어 이웃과 세계를 살리는 성숙한 민중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자주성이고 주체적인 노동자, 민중으로 연대함이 필요와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중들을 향해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제 막 태어나는 세계나라의 산업선교들에 연대와지지가 더욱 확산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제 43년의 장년이 된 한국의 산업선교회는 전국의 민중교회로 모여 이미 이러한 일들을 결의하여 시작하고 진행하여 왔습니다. 그 동안 양심적인 세계로부터 받은 지지와 연대, 후원과 기도에 감사하며, 97년부터 식민지와 종족갈등을 비롯한 여러 원인으로 고통 당하는 아시아의 이웃나라에 대한 기도와 산업선교훈련, 지원과 연대을 하기로 결의하여 캄보디아에는 산업선교훈련을 받고 예민선의 회원인 서경기목사를 파송하여 3년간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시아교회협의회와 아시아 태평양 노동자연대기구의 협력으로 인도네시아, 미얀마, 스리랑카 등등의 아시아지역 산업선교실무지도력과 노동운동가를 매년 1회 1개월간 초청하여 현장방문과 지도력 훈련을 실시하고있습니다. 이러한 산업선교와 민중교회의 프로그램 계획과 진행의 담당목사로 함께 참여 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역속에 노동선교사라는 약칭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노동목사가 된 것은 산업선교와 예장민중교회선교연합의 오랜 목회자훈련과정의 전통과 공동체적 목회정신으로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소리 없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목회동지들이 함께 함입니다. 민중목회자로 손잡고 함께 하는 우리 안에서의 역사가 앞으로도 가장 큰 힘입니다.


  90년 초반까지 한국교회와 산업선교에 대한 세계교회의 물질적 지원이 OECD가입 등으로 끊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분단과 미국의 경제지원과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경제발전을 하였으며 그러한 현상 속에 교회가 상징적으로 부흥하였습니다. 여러 사회적 조건이 교회가 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헌금의 목적과 정신인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맞게 쓰여지지 않고 부의 축척과 교인들만을 위한 일들에 쓰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이자가 붙 기도하고 주식투자를 하기도하며 목회자가 교회를 확장하려 미국의 카지노를 들락거린다고 합니다. 이상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본에 우선하는 교회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선교회는 교회의 지원이 없어서 유지하기가 힘들 상황이지만 처음처럼 정의롭고 진리의 말씀에 중심을 잡고 계속하여야 할 한국교회의 상징적일이고 확장되고 부흥되어야 할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의 신성한 헌금이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를 지원했던 세계교회와 양심세력들이 아프리카로 연대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가고있습니다. 파괴되지 않은 원시림을 보호하는 것이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이라 말하듯이 그 동안의 수탈에 힘겹게 버팅겨온 아프리카에 민중들에게 함께 서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애를 나누고자합니다. 그러한 현실이 95년 예장총회가 한국교회의 헌금으로 종족분쟁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리카 르완다를 지원하였고 물질보다 소중한 우리에 경험을 나누기위해서 산업선교의 실무자를 파송하게 된것입니다. 99년 총회장과 사회부 총무가 세계개혁교회협의회의 안내로 종족분쟁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리카 르완다 지역의 선교현장을 방문 한 후, 한국교회 예장총회가 르완다교회 총회를 통하여 약속한 실천을위하여  한국교회가 경험한 여러 형태의 선교 현장의 경험과 고난 속에서 산업선교가 설립되어 사회적 활동을 하였던 역사를 바탕으로 르완다교회의 산업선교와 민족화해를 위한 평화선교사역을 감당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민중교회의 선교경험자를 선발하려 1년 단기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떠나게 됨을 무한영광으로 앞으로의 40년 연대를 바라보고 디딤돌 하나 만들려 합니다.

   노동선교사된 나는 최근 정, 경유착의 IMF 경제대란으로 노동사회의 구조조정과 퇴출로 인한 비정규직, 임시직, 실업자 등의 노동사회와 노동인권 문제의 심각한 세계적 문제앞에 가장 밑바닥 이라하는 가에서 대처를 위해서 여러 시민, 사회, 종교 단체들과 연대하여 세계자본의 정보와 네드웍에 대응하는 제2회 서울국제노동미디어대회 운영위원장 역할을 감당하면서 활동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노동사회가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국제적인 노동선교사역의 연대와 확장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92년부터 시작한 민중선교현장목회자훈련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의 10년간 사역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고통받는 르완다교회와 가난한 민중들에게 적합한 선교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연대하고 협력하려 아프리카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산업선교와 민중교회 전초기지를 마련하려는 기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합니다. 


 단기사역계획서

  산업사회의 발달초기 교회가 돌보았던 가난한 이들의 선교가 오늘날 주일학교의 효시가 되었드시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한국기독교산업선교의 발전적인 미래상을 연구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노동자와 민중선교를 위한 세계산업선교의 활성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제시하려는 르완다선교계획은 총회사회부와 세계선교부의 협의를 거치며 장기적인 목표와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은 민중교회선교연합이 함께 하여 세워 질 것이다.

우선 단기선교사로서의 큰 틀과 원칙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아프리카와 르완다의 현지선교상황과 언어, 교육, 정치, 역사, 전통, 문화, 환경을 존중하고 이에 대한 충분한 학습, 연구, 이해가 필요하므로 자료를 준비한다. (자주, 독립, 준비성)

2) 그 동안 세계교회가 연대하여온 소중한 자료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협력하여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선교계획을 세우고 선교사들이 현지적응과 언어훈련을 통하여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선교하도록 발판을 마련한다. (단결, 연대, 평화성)

3) 르완다와 세계노동자를 위하여 공동으로 기도하고 협력하여 민중교회의 공동체성을 선교사업의 산업선교, 민중교회, 노동단체로 구성한다 (겸손, 통일, 공동체성)

4) 세계교회가 지원하여 이룩한 한국의 40여 년간의 산업선교활동과 자주적인 민중교회의 역사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르완다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살아간다. (현장,민주, 민족성)

5) 노동자,농민의 권리쟁취역사와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나누며 전하고 민중속에서 솔선하여 실천하며 살아가는 민중교회선교방식을 실천한다.(투쟁, 노동, 민중성)

6) 세계 각국의 산업선교기관이 아프리카를 위하여 집중하여 기도하고 조직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후원, 지원, 봉사의 구조를 만들도록 조직한다.(연대, 에큐메니칼,봉사성)

7) 국제노동, 민중선교의 국제연대를 추진하여 산업화가 시작되는 어려움에 처한 각국의 노동자가 연결되는 미디어의 발전전략으로 세계 민중네드웍의  체계를 점검하고 건설하여 민중교회선교의 발전적인 토대를 마련한다. 

8) 르완다의 선교가 종족갈등을 없애고 평화와 자유를 풍성히 하며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청소년평화의 쎈타를 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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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의 역사흐름(1)

 

<별첨1> 르완다공화국(Republic Rwanda)의 역사의 흐름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소국으로 우간다, 탄자니야, 부룬디, 자이르 등의 국경지역으로 면적 2만6338km*.인구 773만(1997). 수도 키갈리로 대부분이 구릉과 호수로 이루어진 해발고도 2000이상의 산맥지형으로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운다. 

 

-원주민은 피그미계 트와족이며 현재 약 9.000명이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 농경민 후투족(인구의 90%)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부른디지역에 살고있었음. 약 600년전 호전적인 유목민 투치족(인구의 9%)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후투족은 대항하지 못하고 지배자로 인정하여 음와미왕을 받드는 왕국을 형성하였다.

 

-1897년 독일의 지배가 시작되고 독일령이 되었다. 1923년 1차대전이후 국제연맹위임통치령, 1946년 2차대전후 국제연합신탁통치령으로 UN에 의해 벨기에 간접통치령 정책속에 투치족의 전통적 왕국은 계속되며 권세와 교육을 독점하였다.

 

-1957년 후투족의 전제종결과 식민지제 타파를 선언하였다. 1959 르완다왕의 죽음으로 정치적불안이 시작 후투족반군과 투치족간 15만명의 사상자를낸 내전후 1960년 선거로 후투족G. 카이반다가 정권 장악하고 초대대통령으로 1961년 벨기에의 신탁통치를 벗어나 독립하여 1962년 7월 1일 르완다공화국이 세워졌다.

 

-1963-64년 투치족게릴라사건으로 수천명희생. 70년대 부룬디와의 긴장으로 반투치 감정이되살아나고 정치정세가 불안하였으며

 

-1973년 투치족의 아비야리나마가 쿠테타를 일으켜 국가개발혁명당을 결성하고 78년 단일정당으로 일당독제를 편성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여 지방주의와 부족대립을 해소하고 국가통일과 국제연대의 정책을 펼쳤으나 종족분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내전에 휩쓸려 대혼란과 살상으로 95년 현재 UN군의 감시하에 있다. 

- 미국이지원하는 투치 군부정권이 독재를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려하지만

산악지역을 중심으로한 반군들의 저항이 2001까지 계속되었으며 나라의 국기를 바꾸며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



<별첨2> 경제상황과 문화


-국민 90%이상이 농업이며 콩, 고구마, 감자, 바나나, 옥수수, 땅콩이 자급농작물이나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인 흉작으로 자급자족이 어렵다.

-수출 주상품 커피와 차가 총수출액의 54%를 차지하며 광산물 주석, 텅스텐 등이 수출되고, 천연가스도 분출한다.

-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경공업은 키갈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비누, 도료, 방충제, 고무신,맥주 등을 생산하고 목축이 번성하지만, 르완다의 국민총생산은 약 19억 만달러, 국민1인당소득은 230달러로 아프리카중에도 최극빈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 소수 투치 목축민의 중앙집권적 조직왕국과 약40개의 지방조직으로 농산물과 수세를 관리하는 추장제도로 후치족과의 계층관계의 오랜 전통문화가 신성시되었다.

-소를 둘러싼 봉건적 주종관계가 종족갈등의 원인이되고 생명력을 둘러싼 복잡한 종교관념은 전통종교로 연구되고있으며 바구니, 돗자리, 우유병, 목제용기, 의식용 도끼 등의 기하학적 세공품과 현악기 반주의 전통음악의 독특한 소리등 전통문화가 발달 하였다. 

-국민의 50%가 카토릭이며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교육도 잘 보급되고 110만이상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92년 국립대학이 개설되어 3,454명이 다니고 있다. 언어는 킨야르완다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가, 영어가 공용어이다.

- 1991년 주산업인 차가 UR협상이후 값의 폭락하였고 1992년 IMF경제위기의 수렁에 빠졌으며 전쟁의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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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올것 같은 화해와 평화는

2001년 일년간 르완다에서 살면서 접한 확인된 새로운세상

먼 이국 현장에서의 바램과 삶은 곧 올것 같은 화해와 평화였다.

다시만남의 약속시간은 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며 가끔들리는 소식

전쟁과 아픔이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 동네의 거울이되는  그동네  

전쟁터 가운데 어서도 참 평화와 화해는 존재하는가?

되물어보며  

지난 1년간의 르완다 생활기록을 다시 정리하지않으면 

진한 연대와 나눔의 추억에 몸부림이 사무쳐서 

세계의 평화와 사랑의 혁명을 꿈구어본다.

 

1. 파송경과


  -1994년 인류최대의 비극인 르완다 내전 당시 약 80만명의 대학살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pck)는 1995년 목회차원의(5만불) 구호금을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을 통하여 지원하였다.

 

-1999년 1월 18일-25일까지 르완다 장로교회 총회가 구호금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본 교단 대표를 WARC를 통하여 초청하였다. 당시 총회장 유의웅 목사와 사회부 총무 류태선 목사가 르완다를 방문하였다.  방문시, 르완다 장로교회와 본 교단과의 지속적인 협력의 일환으로 단기 선교사 파송 건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총회 99년 르완다 방문보고서 참고)

 

-단기 선교사 희망자를 찾던 중, 영등포산업선교회 간사로 일하던 장창원 목사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추천하였으며(3월 말), 총회 사회부 제5차 실행위원회(4월 10일)에서 장 창원목사를 세계선교부에 르완다단기선교사 추천하기로 하고, 영등포노회 등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 2000년 7월 28일 르완다 장로교회로부터 예장총회본부에 장 창원 목사를 초청하는 초청장을 보내왔고 장 창원 목사는 세계선교부에 단기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8월 5일 제출하였다. 세계선교부는 84-2차 인선위원회 8월 24일 파송을 결정하였다. 

 

2001년 1월 파송 예정하며 파송협력선교기관,교회는 예장총회사회부, 영등포노회 세계선교부, 영등포산업선교회, 도림교회, 목민교회, 대전제일교회, 대전대덕교회, 광명교회 등 이 나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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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반대 카사마코 연대사 기사

"'피플 파워'가 '친미' 아로요 굴복시켰다" 
필리핀 언론, "아로요, 국민영웅·배반자 사이 선택해야" 압박 
(프러시안) 김한규/기자 

그동안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며 미국의 최대 우방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핀의 '친미'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무장저항세력의 '즉시 철군'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대이라크 전선을 무력화시켜 미국을 격노케 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아로요 대통령은 왜 이런 결단을 한
것인가. 

14일 밤 광화문에서 열린 파병철회 철야농성에 참가한 카사마코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리마'씨는 이같은 의문과 관련, "필리핀
민중의 광범위한 철군 여론이 '친미' 아로요 대통령을 굴복시켰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도 추가파병을 막는 방법은 오로지 대중적인 파병반대여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정권도 필리핀처럼 강력한 국민 여론 앞에서는 더 이상 한미동맹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격노에도 아로요 "철군하라" 

델리아 알버트 필리핀 외교장관은 14일 성명을 통해 “필리핀군은 이미
이라크에서 철수중”이라며 “외교부는 국방부와 필리핀 인도지원군의 철수와
관련해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버트 장관은 또 “51명의 파병군 가운데
이미 43명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필리핀은‘자국민 인질 석방’을 위해 납치무장세력의 “7월 20일까지의
조기철군”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울러 알버트 장관의 이날 발표는 13일
라파엘 세기스 필리핀 외무차관의 "필리핀은 이라크에 주둔중인 자국병력을
신속하게, 가능한 한 빨리 철군시키겠다"는 발표 이후 가해진 미국 정부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이어서,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세기스 차관의 12일 철군 발표 이후 미국은 노골적으로 아로요 대통령을
압박했었다. 13일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필리핀 발표에 실망했으며
납치단체에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로요대통령이 철군 지시를 내려 필리핀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그는 14일 '필리핀 정부의 결정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지켜봐야 한다"면서 고 김선일씨 피살에도
불구하고 추가파병을 결정한 한국 등을 예로 들며 '앞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뉴양스의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아로요, 부시가 환대한 3인의 지도자중 하나 

아로요의 이번 결단은 그동안 그가 보여온 저자세 대미외교 자세를 보면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로요 대통령이 이끄는 필리핀 정부는 미국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하며 이라크 파병 결정도 초기에 내린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그 덕분에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을 방문할 당시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그동안 단 3명에게만 베풀었다는 정도의 융숭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필리핀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하자 이를 계기로 자국내 이슬람
반군세력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KF) 등 반정부이슬람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미국에 적극 협조하는 등 '맹목적인 친미정책'을 펼쳐왔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필리핀의 최대 수출시장이 미국과 일본이며, 최근에 악화된
경제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아로요 대통령의 이번 결단은 분명 이례적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필리핀 주요언론, 아로요 노골적으로 압박 

이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다름아닌 필리핀의 정권을 두차례나 교체시킨 전력이
있는 필리핀 민중의 '피플 파워'이다. 

필리핀 노동자 델 라 크루즈가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됐다는 사실이 보도된 이후
필리핀 국민은 정부에 조속한 석방 교섭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크루즈 가족은 물론 필리핀 여론은 '자국민 보호우선'이라는 원칙에 따라 "아로요
대통령은 그를 살려야 한다"며 "아로요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전을 지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서는 안된다"며 아로요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또한 석방 교섭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다수 국민들이 마닐라 시내에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집회를 가지면서 경찰과 충돌 사태를 빚는 등 아로요
정부는 이번 사태로 반정부 여론 증폭이라는 큰 위기감에 쌓여 있었다. 

이 과정에 특히 큰 역할은 한 것은 다름아닌 언론이었다. 필리핀의 대다수
언론들은 국내 메이저언론들과는 달리, 이라크전을 비난하고 미국의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진정한 국가이익이 무엇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었다. 

일간 <데일리 트리뷴(Daily Tribune)>은 필리핀 정부가 철군을 결정한 뒤 미국의
압력이 대단하던 13일자 사설에서 "아로요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충실한
동맹역할은 필리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델 라 크루즈가
참수당한다면 강력한 대중의 역풍에 직면할 것"이라고 아로요를 압박했다. 신문은
또 "앞으로 며칠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대통령이 필리핀 국민의
영웅이 될지 아니면 배반자가 될지 결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간 <말라야(malaya)>도 이날 사설을 통해 "델라 크루즈 가족들은 납치세력에
계속해서 선처를 호소해야 하며 정부에 대해서는 이라크 주둔 필리핀군을
철수하라는 요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어 "가족들은 필리핀
국민은 필리핀 정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며 "국민들은 이라크
국민들과 아무런 악한 관련이 없으며 우리를 부시의 전쟁에 참여시킨 것은
글로리아 아로요일뿐"이라고 아로요의 참전결정을 강하게 비난했다. 신문은
"정부는 국가이익과 워싱턴에의 맹목적 순종 사이의 구별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로요, '피플 파워' 누구보다도 잘 알아 

이같은 다수 국민과 언론의 압박은 아로요에게 더없는 압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5월10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에 성공, 지난달 공식 취임한 아로요
대통령은 '국민의 힘'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 자신이 정치인으로 입문하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제2의 피플
파워' 등 시민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1947년생인 아로요 대통령은 필리핀 9대 대통령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2년동안 유학생활을 보냈으며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이 공부해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대학 교수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다 ‘제1의 피플파워’로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정부하인 1986년에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마르코스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조직들이 연합, 창당한 필리핀민주투쟁당(LDP)의
공천을 받아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95년 재선당시에는 1천5백70만표를 얻어 필리핀 선거 사상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가장 촉망받고 인기있는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98년에는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이 이끄는 라카스당 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돼 사회복지부장관을
겸직했다. 

2000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건이 일어나자 장관직을 사임한 뒤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시위 대열에 합류, 2001년 1월 에스트라다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아키노에 이어 피플 파워로 대통령에 오르게 됐다. 

아로요, 국민적 지지기반 취약 

이처럼 국민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지만 대통령에 재선한
이후 가장 큰 고민은 국민적 지지기반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자신과
대통령선거에서 맞붙었던 영화배우 출신인 페르디난도 포 2세는 빈곤층 출신이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엘리트 출신
기득권층이었다. 

이에 아로요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후 부패혐의로 쫒겨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대중들이 대통령궁 앞에 몰려와 에스트라다를 연호하며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일들에 종종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한편엔 필리핀 군부의 압력이 상존하고 있다. 필리핀 군부는 지나
1989년 이후 모두 8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국불안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난해에도 3백명 이상의 소장파 장교들이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며
마닐라 호텔을 접수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됐지만, 이 과정에 아로요가 임명한 국방부장관과 군정보부
수장은 물러나야 했다. 

더욱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면서, 국내 무슬림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빈부격차, 빈곤층 나날이 악화 

이와 함께 열악한 경제상황도 아로요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필리핀 인구
8천4백만명 가운데 4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극빈층이며,
어린이 3명 가운데 1명은 영양실조 상태다. 4월말 현재 실업률은 공식
발표만으로도 13.7%에 이르렀다. 국가채무는 1천억달러에 달하고 지난해
외국인직접투자는 전년도에 비해 82%나 줄었다. 빈부격차는 더욱 심각해, 상류층
5%가 국토의 80%를 차지하고 있어 다수 국민은 절대적,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여
있다. 

더욱이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아로요 대통령이지만 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후 IMF요구에 따라 시행한 어설픈 구조개혁은 실업률 증가와 전기세,
수도세 인상 등 서민 물가불안을 야기, 일반 대중의 고통만 가중시켰다. 이에
필리핀인들 사이에는 "아로요가 미국 말만 들어 가진자만 더 잘살게 하고, 다수
국민은 빈곤의 늪에 빠트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팽배해있다. 

이처럼 안팎으로 권력기반이 취약한 아로요였던만큼 자국민 석방을 요구하는
국내의 거센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철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해외노동자가 필리핀의 생명줄 

하지만 이같은 철군 여론의 이면에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감사와 존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현재 필리핀 경제의 최대 주력은 필리핀의 해외노동자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하는
60억~80억달러의 외화다. 

필리핀 주요 일간지 <필리핀 스타(Philippine Star)>는 13일자 사설을 통해
"매일같이 약 2천5백명의 필리핀인들이 고국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이번 사건도 "이러한 비극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우리는 종종 중동에서만 1백40만명, 해외에서 약 7백40만명의 필리핀인들이
거주하고 일하면서 매년 고국에 60억에서 80억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보내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표하고 있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 아니라 탄식해야할 일"이라고
탄식했다. 

실제로 납치된 트럭 운전사 크루즈도 9년동안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에서 일해
왔다. 신문은 이와 관련 "8명의 자녀를 둔 그는 가족과 함께 지내려 했으나
실직한 기간 동안의 빚덩어리 때문에 해외로 내몰리게 된 것"이며 "지난해 2년
계약으로 다시 사우디로 떠나 일자리를 구했으며 그러다가 이번에 무장저항세력에
납치된 것"이라고 전했다. 

요컨대 해외에서 각종 궂은 일은 하면서 필리핀을 버팅켜주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감사와 존경이 이번 인질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민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국익은 없다"는 광범위한 여론을 만들어냈고,
아로요는 이같은 국민의 뜻에 승복한 셈이다. 

필리핀 인질을 구한 것은 다름아닌 필리핀의 '피플 파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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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보화과제

한 가지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목적과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노동자의 의사소통, 민주화된 국가권력,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투쟁하여라.

 

여러가지 책임을 맏고도 책임 감당을 다하지 못한 사람

한가지의 일도 성취할수없는 이 마음은 부끄럽고 애처롭다.

 

이름 뿐인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번민한다.

한순간 한순간 하나 하나의 사건들을 분석하여 제자리로 돌려 놓고

역사와 사상의 정리를 할 수 있는 고향의 집, 어릴때 몸을 녹이던 나의 자리가 그립다.

 

블로그의 시대,

변화에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지난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를 향한 삶의 투쟁을 텅하여 승리의 자리를 펼친다.

 

내가 태어나기전 아버지의 역사와 조상들의 고난,

그리고 앞으로 백년 후 사랑하는 민중들의 해방세상을 위하여 자리를 펼친다.

 

너, 불로그

내가 희망하는 아시아노동넷의 촉메가 되거라

민중들의 의사송통과 하나됨이

통일로,해방으로 , 자주로 평등으로

너 불로그가 이루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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