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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모욕하지 말라: <당통> 감상문

 

혁명을 모욕하지 말라: <당통> 감상문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여타의 역사적 사건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혁명사가 테다 스코치폴이 “그 이전과 그 이후를 절대 동일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칭했던 것, ‘혁명’이라는 단어가 전세계의 지배자들을 전율하게 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피지배계급의 희망일 수 있게 했던 것, 에릭 홉스봄이 19세기 초반을 ‘혁명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게 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프랑스 혁명을 구성한다. 근대를 활짝 열어제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 해방의 횃불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프랑스 혁명을 그 소재로 택했다는 영화 <당통>은 그런 명성과 가치에 얼마나 부응했는가? 자코뱅 우파, 외국인 대은행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국민공회 의원, 혁명을 ‘이제 멈추자’고 소리 높여 주장했던 관용파의 수장, 이 ‘당통’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가 과연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온전히 계승하고 있는가?

  매우 애석하게도 이 영화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오마주(Homage)라거나 그 계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에 대한 모욕이며 악의에 찬 희화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프랑스에서 개봉되었을 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임하는 수많은 프랑스의 좌파 지성들이 감독에게 엄청난 분노를 표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의 구도는 간단히 말해서, ‘인간적이고 유쾌한 자유의 수호자 당통 vs. 냉혹하고 지루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이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혁명의 본래 정신인 자유를 오히려 압살하는 독재정권으로 전락했다고 외치고, 공안위원회가 그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이 감독식의 비극은 완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어디서 굉장히 많이 본 구도가 아닌가? 특히 1792년 8월 10일 봉기와 함께 막이 오른 프랑스 혁명의 제 2단계, 즉 민중혁명의 단계에 대한 우파들의 경멸과 공포심이 로베스피에르로 향하는 것과 이렇게까지 동일할 수는 없다! 프랑스에서의 민중혁명을 ‘혼란과 공포, 참혹한 학살이 횡행하는 무정부 상태’로 묘사하는 이런 우파들 특유의 감성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치체의 불치병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독재이다. 그리고 독재는 민중을 무정부주의로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폭동과 약탈이라는 관념을 민중과 빈곤이라는 관념과 결부시키는 이 변함없는 성향을 보라.”

  만약 누군가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혹은 ‘학살자’라고 비난할 수 있다면, 그는 민중의 지배를 독재로, 반혁명과의 전투를 학살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민중의 지배가 고깝고 반혁명과의 전투가 패배하기만을 바라는 사람 이외에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언제나 혁명기에 일어나는 일정한 혼란에서 ‘인간’을 보호해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파조의 호소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자유와 평등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신사들의 간곡한 의지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육성으로 직접 뇌성을 내지른다.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그 수를 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것은 너무 많은 수일 것입니다.(강조는 인용자) … 거의 언제나 자유의 적들만을 위해 탄식하는 동정심은 내가 보기엔 미심쩍은 것입니다.(강조는 인용자) 나의 눈앞에서 전제군주의 피로 물든 옷을 펄럭이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여러분이 다시 로마를 노예로 만들고자 한다고 믿을 것입니다.”

  영화 <당통>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영화는 자코뱅 우파로 이름 높았던 당통을 내세움으로써, 혁명은 혁명가들 자신조차 후회할 정도로 무익하며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짓밟을 뿐이라고 웅변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가 노리는 효과는 인민이 혁명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기에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을 귀족 수백명의 목숨을 어여삐 여긴 민중이 혁명을 혐오하게 되었을 때, 그 후 수백년 지속되었을 전제군주정이 앗아갔을 수십만의 인민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영화는 그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가 영웅으로 제시한 조르주 당통 그 자신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통이 로베스피에르에 반대해 언론과 인신의 자유, 공포정치의 중단을 요구하다가 단두대에 섰다는 것까지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 것은 당통이 그러한 요구를 했던 배경이다. 그리고 여전히 영화는 그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당통은 혁명 초기부터 그리 열성적인 애국파는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국민공회 초기 지롱드파가 열정적으로 그와 마라,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할 때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에 대한 발언만을 했을 뿐,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라와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여러 차례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게다가 그가 지지기반을 삼았던(동시에 돈줄이기도 했던) 계층은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금융 자본가 계층이었다. 활발한 대외교역과 그에서의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원한 산업 자본가(이들이 지롱드를 지지했고, 지롱드파는 제 1차 대불전쟁을 일으켰다)들과는 달리, 이들은 사회 불안이 그저 불만일 뿐이었다. 당통은 이들의 좋은 대변자가 되었다. 당통파의 카미유 데물랭이 펴냈던 신문 <비외 코르들리에>는 반혁명 세력이 가장 반기는 신문 중의 하나였다. 이런 당통이 과연 순수한 자유의 수호자였으며, 독재의 반대자였다고 할 수 있는가? 당통의 목적은 결국 혁명을 자신과 자신의 지지자들이 이익을 보는 지점에서 멈추는 것, 민중을 혁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의 머리(-로베스피에르!)를 쳐서 혁명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아니었겠는가! 영화에서 그 가능성을 시사했던 당통 일파의 쿠데타가 만약 실제로 일어났었다면, 그것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100일 정도 더 앞당겨진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동의 결과는 결국 혁명의 패배, 혁명의 종결이었다! 그 이후 결성된 총재정부는 대부르주아지를 위한 정부였으며, 그 결론은 보나파르트 전제일 뿐이었다!

  영화 <당통>은 이러한 진실을 과할 정도로 왜곡한다. 영화는 당통이 민중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팩트(fact)에서조차 사실이 아니다. 당통이 그 특유의 연설 실력과 코르들리에 클럽에서의 경력을 통해 대중적인 명성을 쌓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쟁투가 이루어진 당시 민중은 로베스피에르를 신뢰했다.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민중은 오히려 공포정치의 강화와 혁명적 사회경제 조치들을 원했을 뿐, 당통이 열변했던 사회 안정과 인신의 자유에는 별 이해가 없었다. 만약 민심이 로베스피에르를 떠났다면, 테르미도르 반동이 그를 잡아넣었을 때 코뮌과 파리 인민들이 그를 구출하기 위한 봉기를 계획이나 했겠는가?

  폴란드 출신의 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배경을 이해할 때, 이런 영화가 탄생한 이유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폴란드에서 공산당에 반대하는 연대노조 운동이 나타났을 때 활동한 감독으로서, 그의 영화세계는 반(反)사회주의의 레토릭으로 가득 차 있다. 혹자들은 구 동구권에서 일었던 반(反)공산당 운동을 역사의 진보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공산당의 공과나 그 운동가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 운동은 결국 자본주의로 후퇴하는 우파적 반동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인간’을 희생시키는 혁명과 사회주의 체제에 불만을 표함으로써 ‘인간’을 진공 속의 지고지순한 신적(神的) 관념으로 전도시키고, 어떠한 인간의 상호 투쟁이나 그를 통한 역사의 전진도 부정하는 관념적 태도만을 낳았다. 이러한 이들의 노선은 결국 당통이 대표했고 선택했던 그 노선, 바로 그것인 것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이 감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적합한 인물을 소재로 고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프랑스 혁명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모든 혁명을 체계적으로 모욕하고 비난하고 격하시키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재미까지 없었다는 것은 이 영화를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든다! 물론 이러한 왜곡과 난처할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이 땅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기를, 민중권력 따위 개나 줘 버리기를 원하는 누군가들이 남아 있는 한 견뎌내야 할 것일 게다. 그리고 그 날까지 해방의 횃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분주한 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장 조레스의 이 한 마디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자코뱅 클럽에서 그의 옆에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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