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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관악 90학번의 윤소영 비판

YD 자게에서 퍼왔습니다.

 

94년에 쓰여진 글로, 꽤 오래된 글이지만 나름 재밌네요.

 

윤소영 비판과 알튀세리안 일반 비판이 섞여 있는 듯.

 

이론적으로 알튀세리안을 넘어서는 좌파노선은 아직 무망한가요 -.,-;;

 

 






  1. 그것은 과연 재출발인가?

나는 윤소영 선생을 잘 알지 못하며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으며--그의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보지 못했으며,
ꡔ현실과 과학ꡕ에 실린 글도 오래전에 한번 읽었을 뿐이다--발리바르의
최근 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한 내가 「재출발」을
읽은 것은 도대체 윤선생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었고 결국 정말 갈데까지 갔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것은 단지 그의
인신공격적 문투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은 그의 ‘이론가적 전위의식’에
경탄스러웠고, 다음으로는 논의의 빈곤한 결론에 저으기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마침내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변화할
것이다”라는 알튀세르의 말을 즐겨 인용한 것도 그였던가? 우리는 정말 윤선생에게
자신의 이론적 기여(혹은 해악?)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변화할 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사실 「재출발」의 내용은 ꡔ이론ꡕ 6호에 실렸던 발리바르의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대부분 기대어 있고, 그 글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다. 환언하자면 「재출발」은
발리바르의 한국판 재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목을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재출발」이라고 붙인 것은 다분히 상업적이라는 느낌부터 들게 한다.
한국사회성격논쟁이 진행되었던 배경은 무엇이었고, 그것이 다시 무슨 이유로 어떻게
속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이 무조건 재출발하자니, 그게 무슨 말인가.
윤선생의 입장에서는 해오던 이야기를 계속 하는 셈인데, 그것이 결국
사회성격논쟁이라는 말인가? 사회성격논쟁을 속개하려면 사회성격논쟁의 성격에 관한
논쟁부터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마도 자신은 신식국독자론을 주장했었고 그것은 정세적 진리효과를
가졌으니 새삼 그런 논의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리고 그 때의 논의도 이미
알튀세르-발리바르의 논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논의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신식국독자론의 붕괴론적 결론과 알튀세르의 기능주의적 결론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 아니냐는 피상적 의문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당시의 알튀세르
전유와 지금의 전유가 방식과 수위에서 동일하느냐는 의문도 지울 수 없다. 그가
“한마디로 말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페레스트로이카 비판은 알튀세르
발리바르의 입장에서 일관적으로 추구되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여기서 내가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재출발을 위하여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의
관점을 채택하는 것도 전혀 논리적인 것이다”(p.12)라고 주장하는 것이 강변이
아니라면, 이는 오히려 사구체논쟁 당시부터도 알튀세르-발리바르의 논의는
해악적이었다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알튀세르 전유는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초중기 저작(Reading Capital이나 ꡔ역사유물론
5연구ꡕ 등)에서 빌어온 역사유물론의 몇가지 기본범주를 기술적으로 적용한
정도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남북합작 형식으로 출발하는 민족통일 과정’의 문제 등 몇가지
떠오르는 계기들을 열거하면서 ‘몇가지 가설들을 결론짓지 않은 채로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단순한 가설수준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적 개입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모든 이론은 ‘규준없는
편향’이라는 지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책임있는 ‘대가’의 태도는 아니다. 툭
던진 가설이 두 다리만 건너면 교과서가 되고 실천의 지침이 되는 부박한 남한의
이론풍토에서, 돌맹이를 잘못맞은 개구리는 영영 불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전에
“우리나라 맑스주의 진영에는 아직도 패러다임을 운운할만한 ‘과학자집단’이
생성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병천이 글 하나 써서 스타가 되고
수입이론 하나로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한 것이 다 부박한 이론토대의 반영이
아닐런지.

그는 이런 식의 추궁이 노동자주의적인 부당한 강박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뜻밖에도, 반지식인주의와 도덕주의가 한국판 스탈린주의였고 이것이 쓸데없는 논쟁의
윤리를 강제하면서 ‘논쟁의 빈곤’을 낳았다는 항변을 하고 있다(p.14). 그가
이야기하는 ‘스탈린주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신식국독자론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독강종심→개량의 물적토대 결여→파시즘 or
PDR), 일국사회주의, 반독점동맹 등의 관점은 스탈린주의에 특징적인 것이 아닌가.
아연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이 땅이 ‘논쟁의 빈곤’이 문제였는지도 참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모랄이
논쟁을 질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비판의 논지가
그렇게 뚜렷하다면 인신공격은 반으로 줄여도 될 것이다. 윤소영의 독자는
무지몽매하여 선동당하는 대중이 아니라 명민한 식자들이 아닌가!


2. 맑스주의의 전화론과 포스트맑스주의

윤소영의 논의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맑스주의의 토픽적 이해를 통하여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맑스주의 전화의 관점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것은 정치적으로
반(反)근대의 문제설정에 근거한 대중정치를, 특히 남한에서는 종속과 분단의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논의의 구체적 전거들을 모두 이해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의
논의의--테마가 아니라--엄밀하지 못한 전개 방식은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근대정치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었던’ 차이 갈등들”(p.15) 또는
근대성에 포함되지 않는 ‘반근대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맑스주의의 전화가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의 최종심적이고 근대적인 표상의 전화이며, 그것을 위해서
맑스주의자는 ‘이론의 단일성과 투쟁의 다차원성’이라는 관점을 채택할 수 있을
것”(p.20)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내용상으로는 포스트모던(탈근대)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 같은데 글의 어디에도 이와 관계된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적 모순의
복합성, 다차원성, 비동시성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근대가 시작된 이래 항상 그래왔던
것인지 아니면 탈근대적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를 밝혀야할 것이다.
맑스주의의 위기가 새삼 폭발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지만 그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은채--또는 근대/탈근대가 시대구분인지,
아지면 정치담론의 차이인지도 밝히지 않은채--‘반근대’의 문제설정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포스트-’어쩌구로 불리워지는 것은 원치 않는 듯 하다.
ꡔ이론ꡕ 6호의 발리바르의 글에서 서관모는 ‘탈근대’(포스트모던)로
번역해 놓고 있는데, 윤소영이 이를 굳이 ‘반근대’(안티-모던)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혹 얄팍한 의도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다른 개념들은 모두 발리바르의 것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왜 유독 이것만 발리바르와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불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체적인 논의가 포스트맑스주의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적 모순들의 비동시대적 복합성, 해방을 위한
정치적 차별적 시간성을 갖는 복수의 쟁점들을 계급적대와 다양한 차이들의 접합,
통약불가능한 갈등들에 의한 계급투쟁의 과잉결정으로 사고함으로써 계급투쟁의 근대적
표상을 전화하고 동시에 노동과정 속에서의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으로서의 맑스주의
이론의 유효성의 조건들을 승인하는 길”(p.22)로 맑스주의를 ‘사수’하려하는 그의
태도는 그러한 차이와 갈등들 간의 어떠한 위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리안들이 ‘최종심에서의 결정’에서 ‘모든 것의 비결정’(=접합)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과정은 이미 우드가 ꡔ계급으로부터의 후퇴ꡕ에서 리얼하게
묘사한 바 있다. 우리의 최종심은 오지않는 ‘고독한 시간’을 기다릴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모순들은 어느 것도 특권화될 수 없고 노동자계급이 특권화된 지위를
가질 수도 없게 된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모두 ‘시민’이라는 주체로 용해되며 경제적
토대로부터 도출되는 정치적 차별성이나 적대성은 모두 사상될 것이다.
물론 윤소영은 그러한 것들이 단지 ‘간주체적’, ‘담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치형태와 이데올로기 형태에 의해 이중적으로 표상된다는--하지만 단지 표상될
뿐이다--의미라고 주장하면서 포스트맑스주의와 발리바르는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히 노동과 교통영역에의) 주체화양식의
다차원성을 포괄할 수 있는 단일한 이론이란, 결국 자본주의 착취관계의 심장부를
회피하며 모든 곳에 억압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단일한 이론이란 곧
포스트맑스주의가 아닌가? 더우기 이것이 정치프로젝트로 구체화되면 그 차이는 거의
사라지고 만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유로코뮤니즘의 ‘선진민주주의’전략과 아무런
차별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전화는 앞서 언급한 반근대적
정치이데올로기라는 더욱 포괄적인 맥락에서의 ‘민주주의의 임계(臨界)’를 확장하는
인권의 정치, 즉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을 작동시키는 노동의 정치에서 시민의 정치로의
정치의 개조를 전제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p.25)
이병천이 포스트맑스주의의 경계를 임의적으로 넓혀 놓은데 반해, 윤소영은 그
울타리를 임의로 좁게 설정해 놓고는 자신은 그 바깥에 있다고 만족해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명석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다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제
투쟁의 주체들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윤소영은 ‘투쟁의 주체 또한 전화되고 접합되어야 하는 것인데 무슨
소리인가’라는 준비된 답변을 할 것이다. 윤소영에게 노동자계급이 왜 더이상 변혁의
‘특권화된’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는 고르(A. Gorz)가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에서 취한 경로를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볼 수 있었던 실천이란 프랑스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실천이 전부였고
그것이 무너지면서 ‘맑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듯이, 윤소영에게 남한 노동자계급의
실천들이나 서구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는 너무 미약하거나 유치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조직-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시키면서,
“ꡔ공산당선언ꡕ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 중의 하나는 오히려 독자적인
당을 조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펴면서 당조직은 계투의
정세적 전략적 조직형태 이상으로 승격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과 유비될 수 있는 당과 이론의 변증법’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레닌이 “우리에게 노동자들의 조직을 달라, 그러면 러시아 짜르체제를
뒤엎어버리겠다”고 했던 의식성의 집합체가 ‘대중의 사상’으로서의 이론과
상호전화되며 시기적으로 접합될 뿐인 ‘새로운 전위적인 조직형태’로 상대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당노선’ 일반을 폐기하는 것이며 대안은 새롭지도
않은 인민전선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M.아르네케르, 「맑스주의의
위기와 전위조직의 문제」(ꡔ당내에 더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ꡕ,새길 의 부록)에 나타나 있는 당/전위의 구분과도 또 다른 것이다.
맑스주의 전통에서 당의 위상에 관한 논의의 발전에 대하여 잘 정리해 놓은 글로는 존
몰리뉴, ꡔ마르크스주의와 당ꡕ, 책갈피 등이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남한에서 진보정당을 건설 하려는데 ‘국가외부의
당’ 따위의 테제 때문에 정당은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일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맑스주의의 위기가 이론의 문제--즉 스탈린에 의해 당을 매개로 하나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격상되어 버린 맑스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알튀세르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캘리니코스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이론이나
철학으로부터 역사를 설명하려는 이념주의(ideologism)적 편향일 뿐더러 은밀하게
스탈린주의에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이다.
윤소영은 또한 전통적인 당형태를 상대화시키면서 노동의 정치의 전화의 구체화로서
집산적 계획경제의 전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나,
게획과 시장이라는 범주쌍의 대립을 극복하는 생산의 조직화라는 것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하기 짝이없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주장이 소비에트나 노동자자주관리
이상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황태연의 견해나 Burawoy의 ‘생산의
정치’와는 어떻게 다른지 윤소영은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결국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화의 실체는 새로운 포스트맑스주의--우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NNTS(new new true socialism)--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병천이 단순하고
조야하게 이야기한 내용을 윤소영은 거창하고 복잡하게, 그리고 솔직하지 못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 민족문제

민족이 왜 다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발리바르가
맑스주의 일반의 전화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는 민족문제가 윤소영에게 와서는 남한의
종속성과 분단성이라는 배경 외의 별다른 설명없이 한국사회성격논쟁의 재출발의
중요한 테마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문제는 이것이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김동춘의 지적은 정확하다.

“최근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민족문제, 인권과 억압과 정치의 탈소외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절실한 형태로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을 짓눌러왔고 그 짓누름의
정도는 프랑스 같은 선진자본주의 사회와는 비할 바가 아닌데,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절실하고 엄청난 사회적 과제조차 발리바르 등의 문제제기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 마치 새로운 것인 양 ‘이론적으로’ 제기되는 희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김동춘, 「80년대 이후 한국 맑스주의 이론의
성격변화」, ꡔ창작과 비평ꡕ 93년 겨울, p.319.


더구나 맑스주의 전화론과 민족, 분단, 종속문제 등이 필연적 매개없이 ‘접합’되는
것은 포스트맑스주의의 전형적 특징--포스트모던한 세계를 미리 상정해 놓고 몇가지
현상을 근거로 목적론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족문제가 한국사회성격논쟁의 주요 주제가 된다면--그리고 통일정국을
앞두고 그럴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몇가지 흥미로운 예측을 해볼 수 있다. 우선은
사구체논쟁의 ‘배후테마’였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전혀 다른
형태로 재연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윤소영은 사구체논쟁 때와는 반대진영, 즉
계급모순의 우위를 부정하는 진영에 속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실제의
통일국면(대략 95년에서 세기말 사이)이 되면 윤소영이 어떠한 정치전략을 제안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어쩌면 윤소영은 이행과는 무관한--결국 그에
역행하는--‘민족 공영’이나 ‘평화통일’ 등 일국적 발전이데올로기에 투항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식의 논쟁은 대단히 가치있을 수도 또 소모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문제가 이런 식으로 이슈화되는 것은--그 중요성과는 별개로--남한
이론진영의 양철냄비 논쟁풍토를 보여줄 뿐이다. 종심독강으로, 이데올로기로,
맑스주의 전화로, 이젠 또 민족으로 사생결단의 문제가 숨가쁘게 옮겨가는 것은 논쟁의
주체에게나 대중에게나 모두 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새로운
논점이 생길때마다 그것에 목매다는 풍토는 더한층 중요하고도 시급히 구체화되어야할
많은 연구주제와 논점들을 모두 낡고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그것이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4. Postscript

ꡔ이론ꡕ은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결코
판매부수나 편집양식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향한 역사의 새로운
순환을 준비”하는 것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지나 않은지 하는 염려가 그것이다.
ꡔ이론ꡕ의 이론적 실천은 좌파 상업주의나 이론만의 실천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매장자’ 스스로가
ꡔ이론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윤소영은 글의 첫머리에 “때로는 멀찍이 물러나 결정적인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요한 것이다”라는 알튀세르의 말을 인용하며 그러한 현상이 당연한
것인양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윤소영에게 있어서 정말 그것이
‘때로는’인가? 그리고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그것은 얼마나 ‘멀찍이’였던가?
자본주의의 매장자들은 이미 ‘맑스주의의 전화론’ 따위로부터 자생적으로 이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소영은 그들의 ‘푸대접’을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주의의 위기’ 이전의 ‘ꡔ이론ꡕ의 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전유해야할 알튀세르마저 죽이게 만들고 있다.


                                       94. 1. 27.
                맑스주의의 거창한 전화론을 믿지않는 서울대 90학번



* 원래 이 글은 소규모 토론에 제출하기 위하여 윤소영 선생의 강연(24일) 이전에
쓰여졌던 것이다. 강연을 듣고 부족한 이해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를 대폭 바로잡을
생각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몇군데 첨삭을 가했을 뿐이다. 윤선생의 우왕좌왕하는
논법과 무책임한 변명들은 원래 글을 그다지 수정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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