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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1. 영산강 하구를 막기 전 우리 동네 앞 냇가에는 제법 큰 배가 묶여 있었다. 배가 오르내리는 것을 본 적은 없었으나,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그것이 강동네 어귀(아마도 배 드나든다고 해서 배날리)까지 생선배가 들어온 흔적이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시내는 보통때는 민물이 흐르지만 바닷물이 들면(사리때) 무섭게 물이 올라와서 제법 크고 무서운 강으로 돌변했었다. 그 강에서,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털많은 게들이 숱하게 둑길로 기어나와서 논으로 이동하다가 어린 우리에게 붙들리거나, 경운기나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어 길바닥 여기저기에 숱한 흔적을 남기었었다. 바닷물이 빠지는 밤이면 어른들이 불켜고 그 놈들을 몇 동이씩 잡아오기도 했다. 그걸로 게장을 만들어들 드셨을까? 그냥은 별 맛이 없는 놈들이라 했다.

 

2. 영산강의 지천인 우리 동네 앞 내에서 한 1-2킬로쯤 걸어나가면 제대로 된 뻘밭이 나왔다. 조곡 실어보관하던 해창이 있어서였는지 그 이름도 해창만이다. 지금은 간척되어 다 논이 된 그 곳 뻘밭에 물이 빠지면 온통 조개들 밭이었으니, 거기서 잡아와서 먹은 조개류 껍데기를 다 모았다면 우리 동네 어귀에 거대한 패총이 여럿 섰을 것이다. 작업하기 좋은 때가 오면 그 근방 온 동네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와 몇 바구리씩 잡아가고 또 잡아가도 없어서 못 잡은 적은 없었다. 지금 내 살과 뼈 10분의 1쯤은 해창만 조개로 구성되어있지 않을까.

 

3. 동네 냇가를 순식간에 커다란 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졸졸 흐르는 민물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그 냇가 옆에 있는 우리 논은 매년 홍수때 바닷물 섞인 강물이 범람하면 소금기를 먹고 빨갛게 타버렸다. 아버지는 수십년래 제대로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하시었다. 전두환 때 영산강 하구둑을 막아 올라올 바닷물도 막아버리니 그제서야 농사다운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동안 공짜로 잡아먹던 피조개 키조개나, 그 많던 털게들은 사라졌다.

 

4. 바닷물을 막은 덕에 농사짓기 좋아지고, 게다가 경지정리를 하고 민물이 된 영산강 물을 마음껏 퍼다가 인공수로를 통해 농업용수를 대니 세상이 좋아지긴 좋아졌다. 농지개량조합이 봉이 김선달처럼 그 물값을 왕창 받아 싸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영산강에서 퍼올려 쓰고 논으로 밭으로 돌고 돈 물은 우리 동네 앞 개울(이제는 정말 개울)로 다시 모여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소 돼지 키우고 난 축산폐수도 어울리고, 농약물 비료 찌꺼기도 어우러져 영산강으로 들어갔다. 그 물 흐르는 개울에서 민물고기를 잡아먹는 사람도 없다.  

 

5. 그렇게 모인 물이 흘러들어 영산호를 이루고 목포 사람들이 먹는 물이 되니 기절하고 환장할 노릇. 전국에서 제일 더러운 물을 먹으면서 제일 수도요금은 비싸게 낸다고들 했다. 불안한 사람들은 차를 몰고 영암까지 와서 식수를 퍼갔다. 영산호 그 물은 차마 못 먹겠다고 장흥 탐진강에 따로 먹을 댐을 지었다든가? 탐진강 근처 수몰 지역 사람들은 그래서 하루 아침에 또 억울하게 고향을 잃는다. 

 

6. 농약 묻고 비료 쓰고 농사짓고 힘들게 다시 강으로 돌아온 물과, 무등산에서 내려왔다가 새까맣게 오염된 광주천 물이 뒤섞이는데다, 그나마 윗 맑은 물을 담양댐으로 막아버리니, 나주쯤 가면 영산강은 도저히 강 꼬락서니가 아니게 된다. 영산포가 내륙에 있으면서도 홍어배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일뿐(지금도 영산포 홍어집들은 유명하다). 

 

7.그러니까 지금 영산강은 위 아래 물길을 막아버린 강이 보여주는 최후의 모습이다. 강은 홀로 썩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 일당이 영산강이 썩었다고 자꾸 말하고, 정말 강이 저절로 썩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못된 짓이냐. 80년 이래 영산강을 이리저리 막고 실컷 이용만 해먹었던 내력을 반성해보면 그 강을 또 막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하는 말을 차마 꺼낼수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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