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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1.박정희

모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러하겠지만, 한국에서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를 보는 시각들이 다투게 되면 분위기가 금방 격앙되어 목소리는 커지고 상호 전투적 자세로 돌변하고 종국에는 빨갱이 대 독재자의 추종자 정도의 이분법으로 대열을 갖추게 된다. 사실 이런 대립 구도의 속에는 먹물 좀 먹은 자 대 배운 것 한 톨도 없는 자의 그림도 숨어 있으리라. 또 잘난척 하지만 별로 성실하지 못한 자 대 아는 것 없어도 그저 착하고 알뜰한 자의 구도도 있지 않을까? 성실하지 못한 자들이란 대체로 반대편 입장에서 경멸하는 의미로 쓰지만,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난 수십년 한국 현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대치 전선에는 복잡한 시각들이 개입되어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이란 것은 그 대립 구도를 조장하거나 이용하여 유지된 권력이다.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권력이고. 

 

2. 박정희 헌법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헌법은 박정희의 3공화국 헌법이다. 87년 헌법은 63년 헌법 내용도 담아내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헌법이 실효성이 있었는지 물을텐데, 문민시대의 87년 헌법도 실효성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효성을 정치행위와 법적 제도화로 구체화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적어도 제정 당시 인민의 열망과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배세력의 태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헌법 자체는 중요하다. 일종의 매니페스토(manifesto)라고 할까? 

 

 박정희 시대 군사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상징화했다. 민주당의 주력은 지주 세력이거나 거기에서 출발한 초기 산업 세력이었다. 친일파였는지를 말하자면 두 분파 모두 떳떳한 점이 없었다. 집권 군부 세력은 만주에서 활동한 농민 출신 계급의 '적극적 무장' 친일파였고, 장면 윤보선 같은 이들은 중산 지주 계급 계열의 국내 잔류 친일파였다고나 보면 옳을 것이다.  무장 해외 항일파나 국내잔류 소극적 항일파는 해방정국과 전쟁, 이승만 집권 10여년 동안 대부분 사라진 후였다. 

 

4.4.19 혁명, 반동 구데타

 4.19 혁명은 전쟁 이후 쌓인 사회모순이 정치 무대로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결과는 기대보다 초라했다. 권력은 자유당 분파가 이름을 바꾼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억눌렸던 농민, 노동자, 교사를 비롯한 하층 지식인들의 투쟁을 제도화하기에는 너무나 철학이 없었고 무력했다.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면, 칠팔십퍼센가 넘는 농민 문제를 해결하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전쟁시기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집단이면서 전후 가장 소외된 집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4.19 혁명 시기와 그 이후 투쟁 시기에도 농민들의 문제는 중요한 사회 의제로 부각되지 않는다. 정치는 먼 서울의 일이었고, 세상은 '왜정'때나 '인공'때나 '자유당'때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바로 그때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을 내세우는 자가 나타나 정치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4.19가 열어준 정치 공간에서 활동하며 비상한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농민 노동 지식인 계급의 욕구를 담아낼 '진보적' 헌법을 내세우며 권력을 굳히게 된다. 물론 그 헌법이라는 집권용 상징 장치조차도 몇년을 살아남지 못했지만.

 

5. 4.19 항쟁

4.19 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일이 올바를까? '혁명' 결과 권력이 누구에게 넘어갔나? 미완의 혁명이라면 4.19가 지향하는 권력 전복의 방향이 보여야 할 텐데 그도 말하기 힘들다. 4.19를 각성한 지식인 계층의

'항쟁'으로 이름붙이는 게 옳지 않을까싶다. 4.19혁명이라는 말을 붙이면 마치 그 이전 이후의 정치세력이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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