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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6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5.
    곰탱이
  2. 2007/10/10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4.
    곰탱이
  3. 2007/10/10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3.
    곰탱이
  4. 2007/10/05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2,
    곰탱이
  5. 2007/10/0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1.
    곰탱이
  6. 2007/02/2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 1.
    곰탱이
  7. 2006/10/26
    <귀향>(Volver)
    곰탱이

천하장사 마돈나...

오늘 아침 먹으면서 유선 방송 영화 채널에서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았다.

한 세 번 정도 보았는데...

그때마다 뭘 써야지 하면서도 게으른 탓에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늘은 짤막하게라도 써야지 하면서...ㅋㅋ

아마도 아주 짦을 것 같다. ㅋ~~~

 

천하장사와 마돈나...

그 결합이 참 부조화다.

아주 속되게 이만기와 마돈나를 합치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처럼...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죽 한 그릇에 자신을 파는 에셔>처럼 자신을 자본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처럼

마돈나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천하장사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모습...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 팔기 위해서 처절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처럼,

마돈나 역시 천하장사가 되기 위해 엄청난 고난(멸시와 폭력)을 겪는다.

이는 영화에서 천하장사 마돈나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결국 일하게 해 달라고 사장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끝내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를 통해 마돈나가 된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서 노동자 계급이 될 수 있을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통해 그 아버지는 진짜 노동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여운을 영화는 남기는 것 같다.

진짜 노동자, 노동자 계급이 되기 위한 계급투쟁은 마돈나-되기(여성-되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감독이 의도했던, 안 했던 그냥 나의 생각일 뿐이다)

 

덧니 : 류덕환이라는 배우, 아직 어리지만 싹이 있는 배우인 것 같다.

지켜볼 만한 배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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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3.

 

(88쪽) 

** (나치 독일군의 반 게릴라전에서 얻은 게릴라의 특성)

“두 가지 사례, 즉 카민스키의 민병대와 차이코비치 분대 그 어느 것도 게릴라 운동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사례들은 상당히 중요한 하나의 사실, 즉 게릴라들은 식량보급과 활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지역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으며, 이 사실은 주로 서방의 침략군대에 의해 악용되었다. 즉 침략지의 비애국적인 주민들을 매수하여 괴뢰적인 지역민병대를 조직하거나 그에 유사한 방식으로 반(反)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92쪽) 

** (효과적인 반게릴라 작전)

“효과적인 반게릴라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침략군대 지휘관들이 적군의 물리적 측면에 정통해야만 하며 또 그 고장 주민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그 지휘관들은 주민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게릴라들의 민중적 기초를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 구사대


@ 제 4장 모택동의 혁명 전략 @


(97쪽) 

** (모택동이 전쟁을 보는 관점)

“그는 하나의 시각, 즉 전쟁은 혁명의 산파이고 혁명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과정을 따른다는 관념을 빌어온 것이다.”

--> 그는 맑스, 엥겔스, 레닌, 클라우제비츠, 손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중국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의 영향을 종합한(물론 일관되게 맑스주의 틀을 유지하면서) 전술론(또는 3단계 법칙)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이 3단계는 한편으로 맑스주의의 과학적 방법론인 구체-추상-구체의 방법을, 다른 한편으로 클라우제비츠의 방어 전쟁(적의 공격을 아군 진영 종심으로 깊숙이 끌어들임-적의 예봉을 꺾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 적의 전투력을 급속하게 약화시킴-최후의 공세를 펼침) 단계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앞으로 나올 모택동의 전투의 삼 단계와 비교해 보자.

(99쪽) 

** (모택동의 전쟁에 관한 첫 번째 원칙)

“모택동이 초기 시절 1927년 중국 남부에서 농민조직가 및 선동가로 싸우면서 전쟁을 할 때 세운 첫 번째 원칙은 단순한 생존 그 자체였다. 모택동은 시간에 대한 정치․혁명적인 감각을 군사작전 계획의 초석으로 여겼다. 서양의 군사가들이 거의 일생을 두고 제때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문제에 골몰하였던 반면, 모는 어떻게 시간을 벌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일생을 보냈다.”

-->이것은 모의 군사적 시간 개념이 서양 제국주의(자본주의)의 군사적 시간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모는 생존을 위해 시간을 질질 끄는 방식을 취했다면, 자본주의에서 시간을 질질 끈다는 것은 낭비이며, 비효율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반면에, 자본주의는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려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모의 시간론을 노동운동 진영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임금을 낮추더라도 시간적으로 자본의 생산성을 낮추면서, 낮추어진 자본의 생산성만큼 공간적으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사용가치의 공동구매와 공동소비, 이를 통한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 그리하여 하나의 공동 생활권을 만들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진지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99쪽) 

** (서양 자본주의의 시간 개념)

“서양에서 시간 개념은 시간이나 날, 달, 년 수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용어 중에서, 특별히 비축되지 않은 시간은 낭비된 시간으로 간주된다. 특히 미국의 군사적 관점에서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교범에 제시된 원칙, 즉 병력의 절약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미국식의 군사계획에 있어서 병력을 증강시키는 경우, 군사적으로 최소로 필요한 만큼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것은 남북전쟁 이후 현재까지 지녀온 작전상의 원칙이었다. 소모전-다시 말해서 시간이 아니라 병력을 절약해야 하는 원칙이 우선시되는 전쟁-은 이제까지 전쟁의 한 보조형태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100쪽) 

** (모의 시간 개념)

“모는 시간이 기술을 격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무한정의 시간은 무엇보다도 무제한의 공간에 달려 있다. 서양의 저자와 달리 모는 하나의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는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의 문제는 전쟁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그는 거듭 이 주제로 되돌아온다 : “우리의 저항 전쟁은 단시일 내에 결판날 수 없다. 단지 지구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장거리 여행을 통해서 말(馬)의 능역을 시험해 볼 수 있고, 장기간의 업무를 통해서 사람의 성격을 증명할 수 있듯이, 게릴라전은 장기간의 험난한 전쟁을 통해서 그 무한한 힘을 심증할 것이다.””

“모의 중요한 군사 저작들이 씌어졌던 1930년대에 서양의 군사적 관심은 산업문제, 즉 산업의 동원 및 그 전환 또는 산업의 파괴 등에 관한 문제였다. 서양의 모든 연구가들은 산업화가 전략에 미치는 충격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두에(Douhet)와 미첼(Mitchell) 같은 몇몇 연구가들은 산업의 심장부를 폭격함으로써 산업을 파괴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사람들, 드골(De Gaulle)이나 풀러(Fuller), 그리고 구더리안(Guderian)과 같은 전차병들은 도로나 철도, 또는 산업국가의 동맥을 차단함으로써 동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군의 경우 많은 전쟁의 문제는 수로를 봉쇄함으로써 천연자원이 산업적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시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심지어 해군까지도, 제한된 공간의 관점에서 생각하였다. 반면 모택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100~101쪽) 

** (군사적인 용어로서 <공간> 개념)

“군사적인 용어로서 <공간>은 사용 가능한 통신망을 제외한 사방면적에 장애물들을 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방 10마일의 산악 정글지역은 사방 수백 마일의 기복진 평야에 해당되며, 이것은 또 도로와 철도로 누벼진 사방 수천 마일의 면적과 동일한 것이다. 중국에서의 바로 그러한 공간이 시간, 혁명조직, 정치적인 응집력, 그리고 승리를 낳게 할 수 있었고 이 점은 모가 지닌 낙관론의 근거였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러면 어떻게 모는 공간이 시간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101쪽) 

** (모의 전쟁철학 : 물질보다는 인간 우선론)

“모는 힘의 비율을 재평가해 본 것을 근거로 처음으로 전쟁철학을 창출하였다. 투쟁의 초기에 총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모는 어쩔 수 없이 ‘혁명에서 무기만이 효과적인 도구는 아니다’라는 명제를 설정하였다. 그는 “무기는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물질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인 수단이 없던 모는 “<힘의 비율>(the ratio of strength)이라는 것이 군사적․경제적인 힘의 비교뿐만 아니라 인력이나 인간의 정신을 비교하는 것”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2쪽) 

** (모의 <대체이론>)

“모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대체이론>이다. 총은 선전으로 대체하고, 공군력은 파괴로, 기계는 인간으로 대체하며, 기계화는 공간으로, 산업의 동원은 정치적인 동원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매일 매일의 실행 속에서 직관적으로 형성되며, 나아가 반성을 통해 전쟁이론으로 성숙된다.”

(102~103쪽) 

** (모의 이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동원의 중요성)

“모는 초기의 발표를 통해서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정치교육의 필요성이고, 둘째는 <민주적인> 군대의 필요성이다. (……) 모가 믿기에 정치적인 동원은 전쟁을 이기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 “인민은 물과 같고 군대는 물고기와 같다. 평범한 인민을 전국적으로 동원해서 우리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다를 만들 수 있고 적을 그 속에 익사시킬 수 있다.” 모는 진정한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의 정치적 전환의 동반물로서 군사적인 구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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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2.

 

(48~49쪽) 

** (빨치산, 게릴라의 역할)

“1년도 못돼서 독일군 전선의 후방에서 싸우는 (소비에트) 빨치산 전투대는 수송을 저지하고 통신을 차단했으며, 또 비축 보급물자를 파괴하고 상당수의 독일군을 사상했다. 이러한 <비정규군>의 활동은 극히 효과적이었으므로, 10만이 넘는 독일 군대도 전선으로 통하는 동맥과도 같은 보급로는 지킬 수는 없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동맥은 노동자 계급의 임노동이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과의 직접적 투쟁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게릴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즉 자본의 형성 보급로를 차단,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게릴라로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에게 포획되지 않으면서도 정규군으로서의 전면전을 실시해야 한다. 이 전면전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게릴라전은 자본에게 전멸 당하거나 포획되어 자본의 진지를 강화시키고 그 속으로 잠적한다. 이 전면전은 토대(비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의 자기 생산)-상부구조의 전 차원에서 보급이 끊긴 자본을 포위 공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전면전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모든 반자본 투쟁 영역의 투쟁 주체가 되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 자본 : 공격, 노동 : 방어

자본을 노동 진영 깊숙이 어떻게 끌어들여서 보급로를 차단하도록 할 것인가, 그리하여 노동은 최종적으로 어떤 시점에서 방어에서 최후 공격으로 나아갈 것인가?(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따라서)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현 상황에서는 답이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 진영이 자본을 깊숙하게 끌어들일 만한 진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릴라로서 노동자 계급을 안전하게 보위할 만한 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진지 속으로 숨어들어가서 자본에 대한 다음 공격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 진영으로 숨어들어가 거꾸로 자본을 위한 게릴라가 되어 버린다. 노조의 어용화는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58쪽~59쪽) 

** (게릴라 형성의 두 가지 조건) 

“러시아인들은 성공적인 게릴라 부대가 들어설 수 있는 필수적인 두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다. 즉 엄격한 규율을 받을 수 있는 용감하고 강인한 인민과, 빨치산 활동에 이상적인 엄폐물을 제공해 주는, 도로가 거의 날 수 없는 늪지대와 숲과 언덕지대가 그것이다.”

** <전국토의 전장화 전술(burnt soil tactics)>

“히틀러는 <전국토의 전장화 전술>에서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술이 신중하게 고안된 전투방식이었다는 사실은, 총통 자신에게는 아닐지라도 곧 독일국방군에게는 분명히 인식되었다. 스탈린이 하달한 명령은 러시아 군대가 퇴각한 지역들에서 빨치산 대원들이 활동하기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규정해 주는 기초가 되었다. 그 명령은 적에게 유용한 모든 재산의 파괴, 첩보 활동망과 선전망의 확보, 새로운 빨치산 단체의 조직, 지속적인 게릴라 활동에 필요한 은폐된 거점의 구축 그리고 낙오병들과 수용소에서 탈주한 전쟁포로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장소의 지정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 노동자 계급 자신이 용감하고 강인한 인민으로 어떻게 생산될 것인가? 그리고 자본의 도로가 날 수 없는, 다시 말해 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뽑아내는 데 있어서 별로 투자하고자 하진 않는 늪지대와 숲과 언덕지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곳들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 실마리가 풀려야만 <전국토의 전장화 전술>이 가능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이 투자하고자 않는 부분은 바로 노동자 계급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과 새로운 창조적 노동력의 생산,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며 동맥을 차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60쪽) 

** (게릴라의 조직 체계)

“빨치산운동의 (중앙조직인) 중앙참모부(central staff)는 (……) 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것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붉은 군대의 최고사령부와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중앙참모부 아래에는 최전선에 배치된 주요한 붉은 군대의 사령부에서 작전수행을 하는 지역참모(regional staffs)들이 있었다. 이 사령부들도 최전선 너머에 있는 빨치산 부대의 전략적 활동을 통솔했으며, 게릴라 활동과 붉은 군대의 대등한 협력관계에 대해 책임을 졌다. 그 다음으로 낮은 빨치산 조직 체제는 작전 집단(Operational Group)으로서 전투선 건너편에 위치하면서 각 지역에 일반전술을 하달했다. 상위 사령부와의 통신은 무선기나 연락비행기 또는 적군의 전선을 꿰뚫고 다니는 정보원들을 이용하였다.”

--> 게릴라로서 노동자 계급과 그 계급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영역과 부문의 조직은 노동조합 또는 당 그리고 여타의 조직들과 대등하면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과 새로운 생산 부문과 직결되는 여성해방 조직은 이른바 노동해방을 위한 조직의 하위 조직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며 차이를 인정하는 동등한 조직체로서 위치되어야만 한다.


(64쪽) 

** (빨치산 부대의 방어 기본 이론)

“빨치산 부대들은 방어 시 가능한 한 공격목표 대상이 되지 않거나 그 대상권을 벗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의 안전도와 공격력을 보유하기 위해 전개(展開)(군사용어로서 종으로 집중된 부대가 공격을 행하기 위해 종횡으로 공격대형을 전개함)되었다. 수은방울처럼 게릴라 부대들은 단일한 임무를 위해 신속하게 대부대로 결집될 수 있었으며 또 독일군이 반격을 취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십여 개의 분대들로 분해되어 흩어질 수도 있었다. 방어의 기본 이론이란 통상적인 전력 비교에 따라 적과의 접전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빨치산 대원들의 가장 강력한 전술적 특성이 되었다.”

--> 노동자 계급은 수은방울처럼 자신의 관계 형성을 끊임없이 바꿔 나가면서 자본의 공격을 무화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특히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킨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을 테니 때리시오’와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가타리가 말했던 것처럼 ‘되기(becoming)’, 즉 소수자 되기의 전술을 통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수자 되기의 토대는 바로 ‘여성-되기’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은 ‘소수자 되기’의 기동성과 유연성이라는 핵심전술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해방은 없을 것이다. 


(75쪽) 

** (반 빨치산 작전)

“모든 반 빨치산 작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전술은 독일어로는 선명한 사냥용어인 몰이사냥(Kesseltreiben)으로 알려져 있다. Kessel은 주전자나 원(圓)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냥의 제일 목표는 먹이를 에워싸는(encircle) 것이라는 말이다. Treiben은 쳐부수는 것(to beat)을 뜻하는 것으로, 사냥감을 위협해서 함정으로 몰아넣고 그 다음에는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자본이 노동자 계급을 공격할 때 쓰는 기본적 전략이다. 노동자 계급을 개별화, 원자화를 통해 고립시켜 포위 공격한다. 이는 제3자 개입 금지법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75쪽~76쪽) 

** (나치 독일군에 대항하는 데 사용된 러시아 빨치산 전술의 개요)

“뚜렷한 정치적 목적이 없으면, 게릴라는 비록 능수능란하게 전투에 임한다고 할지라도 일시적인 성공만을 거둘 수 있을 따름이다. 영구적인 성과란, 오로지 게릴라의 공적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군사력과 정치역량이 강력할 경우에만 기대될 수 있는 법이다.”(『게릴라들-추격대에 대한 지침』(Guerrillas-Hints for Hunting Units) 중에서)

--> 여기서 뚜렷한 정치적 목적이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통한 ‘~되기’가 현실화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되기’가 현실화되는 것이 바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며 노동자 계급이 게릴라로서 모든 반자본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영구적 성과>란 바로 끊임없는 이러한 <~되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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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1

 

# 현대 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 #


(38쪽~40쪽) 

** (텍스트 내용의 핵심요지) 비정규군(게릴라)의 탈 중앙집권제의 위험성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적.

--> 이에 관해서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품의 군사조직이 스탈린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는 장면을 참고하면 되겠다. 이는 프랑코와 그를 원조해 주는 제국주의 정규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정규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일면적으로 타당하다. 각각의 게릴라 소부대가 서로간의 의사소통 관계(유기적 관계) 없이 각 소부대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정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커다란 특성인 원자화, 개별화와 관련이 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 개인이나 소집단은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고 이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이나 소집단들을 자본이 관계 맺게 하며, 만일 노동조합처럼 자본에 대항하는 경우 각개격파하여 궤멸시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 전의 위험에 대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규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과도하게 중앙집권적 정규군에 집중할 경우, 즉 게릴라를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경우 싸움은 백전백패를 당할 게 뻔하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동일한 형식(중앙집권제)으로는 양적인 것만이 승패의 요인이 되고 양적으로 불리한 정규군화된 게릴라들은 이미 지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정규군에 대한 게릴라들의 싸움의 승패는 중앙집권화를 넘어서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틀이 좌우한다고 보겠다.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도 아니고, 중앙집권적인 정규군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 중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트남전>의 보기를 들어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는 측의 싸움 형태는 게릴라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게릴라 전이 눈부신 전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바로 이순신의 경우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 장수라는 것이다. 이순신의 싸움은 게릴라전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순신은 서남 해안의 물길 지형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전술을 위한 무기도 개발했다. 이순신은 절대로 정규군들이 하는 식으로 일대일로 붙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하에게 도망가는 적을 절대로 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 해전 때 도망가는 적을 쫓아 관음포구로 향해 갔다. 왜 이순신은 그랬을까? 이순신은 더 이상 게릴라전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육지를 탈환해서 앞으로의 싸움을 진지전으로 끌어가고자 하였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로서의 육지의 탈환! 이것이 이순신이 무리하게 도망가는 왜군을 뒤쫓던 이유였다. 진지 없는 게릴라전은 결국 패배하게 돼 있다. 해방 후 남쪽의 빨치산의 최후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힘을 어디서 어떻게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 (45쪽) “전시에 나온 한 전말서는 보고하기를, “그 이전 투쟁에 있어서의 게릴라 운동과는 달리…… 게릴라 부대들도 작전하기에 안전한 기지를 확보하고 있다”고 하였다.”


(46쪽) 

** (게릴라전의 특성- 비 중앙집권적, 탈 중앙집권화)

“중국의 유격전 개념은(공산당의 관점에서 볼 때) 확고하게 정립된 것이었음에 비해,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빨치산운동은 탈 중앙집권화의 경향을 띠었다. 중국의 비정규군들은 모택동과 주덕이 권력 장악을 위해 만든 그들 기구의 핵을 이루는 세력이었다. 모스크바 당국의 경우에 빨치산 운동은 지원군을 조직하고자 하는 시도였던 만큼. 인민과 병사들 간의 괴리를 제지하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했다. 반 중앙집권제적 비정규군 세력은 시민전쟁 기간 동안에는 모스크바 공산당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모택동이 유격전의 개념을 실행에 옮겼을 때, 중국공산당원들은 결코 중앙집권제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물론 비정규군들에 대해서도 편견이 깃든 반대도 하지 않았다. 전쟁 등으로 급박한 시기에도 소비에트 인민들이 정규군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군들의 전투는 처절한 것이었다.

(46쪽) “게릴라는 전술에 능하며 창조적이고 대담하며 독립적인 만큼, 실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질들은 공산당 최고 수뇌부 아래의 여러 수준에 맞는 훌륭한 공산당원들을 양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비정규군에게 호의의 자세를 기꺼이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정규군에서 이상형을 목도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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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5.

 

(6)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순수한 학문적 학파라기보다는 종교적 학파에 가까웠다. 이 학파는 수적 조화(황금 비율, 하나(一)와 여럿(多), 음수와 양수, 홀수와 짝수 등)와 윤회설을 믿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 수적 조화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하였다. 이 학파 초기에는 귀족들만이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평민은 될 수 없었다(귀족들이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었고 그리하여 토지는 거의 대부분이 귀족들의 소유였다. 그리고 토지의 정확한 분을 통한 토지 소유는 귀족들의 관심사였고, 이것이 기하학을 엄청나게 발달시킨 주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사회 혼란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던 시기에 사회적 혼란을 종교적으로 극복해 보고자 노력한 학파가 또한 피타고라스학파였다. 

이 학파 역시 <다(多)의 공존>을 꾀하였는데, <수적 조화>를 사회의 상황에 적용시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의 일반 평민에게도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평민의 고통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하였고, 따라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고통은 디오니소스적 고통과 오르페우스적 고통으로 표현된다.

디오니소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 아버지는 제우스신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의 본처인 헤라 몰래 지상에 내려왔다가 지상의 이름모를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한다. 그래서 그 여인과 하룻밤을 같이 지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디오니소스였다. 헤라가 매우 질투심이 강한 여신이라서 제우스도 함부로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때문에 제우스는 헤라 몰래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허벅지 속에 감춘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핀 것을 눈치 채고는 디오니소스의 생모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러나 다행히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게 되고 자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허벅지 속에서 크게 된다. 더 이상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클 수 없었던 디오니소스를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생모의 여동생 부부에게 맡겨져 크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디오니소스를 직접 죽이는 대신에 디오니소스의 양부모(디오니소스 생모의 여동생 부부)를 디오니소스가 보는 데에서 생모처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이를 본 디오니소스는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디오니소스는 집을 떠나지만,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디오니소스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를 붙잡고서 그를 도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생모가 헤라에게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러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이 헤라와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더해서 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디오니소스는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 제우스는 이런 디오니소스를 불쌍히 여겨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신이 바로 이른바 축제의 신, 술의 신인 바쿠스(박카스)이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와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둘의 금실이 너무 좋아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독사에 물려 죽게 되고 하데스가 지배하고 있는 지하 세계(저승 세계)로 끌려가게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너무 슬픈 나머지 지하세계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돌려달라고 하데스에게 간청하였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간청을 듣고 에우리디케를 돌 주겠다고 오르페우스에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지상 세계로 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상 세계의 문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 에우리디케는 지하 세계로 다시 끌려 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너무나 상심하였다. 그 이후에 오르페우스는 오로지 에우리디케만 생각하고서 하프 연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하프 연주가 너무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트라키아 처녀들의 혼을 온통 빼 놓았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그래서 청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오르페우스에겐 오직 에우리디케만 있었을 뿐 트리키아 처녀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이에 분노하여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오르페우스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저마다 오르페우스의 신체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남아 있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에 대한 영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만 남게 되었다. 트리키아 처녀들은 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바다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바다를 동동 떠다니다가 <레스보스>라는 섬에 떠밀려 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무우사들(음악의 여신들)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다시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하프 연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소리는 바드를 건너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처녀들이 이 소리를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게 되었다. 이 섬은 금남의 왕국인 여인들의 왕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레스비언(여인들의 왕국인 레스보스 섬에 사는 사람들, 여성 동성애자)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의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의 고통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분담하여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했던 피타고라스학파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하나의 종교적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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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4.

 

(5) 원자론자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 지배하던 귀족 정치 체제 아래에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인간의 자유는 억압당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 데모크리토스를 위시한 원자론자들이었다(사실 원자론자도 상인이 주도적이었던 상민(常民) 계급을 대변하였던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원자론자들은 위에서 말한 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만드로스도 민주주의자였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그리하여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 간의 운동>이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원자론자에게 있어 물질적 요소는 원자이다. 원자는 무수히 많은데,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4가지 요소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초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기, 모양만으로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후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 이외에 무게가 첨가되었다. 이러한 원자의 개념은 근대 이후의 자연과학에서의 <원자>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의 운동을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운동을 위해서는 빈공간이 필요했는데 이 당시에는 빈공간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좌우의 운동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공간은 근대에 와서야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수직 자유 낙하 운동만으로는 만물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만물의 발생은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한 것인데,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는 원자들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자들은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을 수직과 거의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을 그리며 빗겨 내리는 자유 낙하 운동으로 수정하였다. 이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은 이후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이 자유의지의 현실태, 즉 현실적인 실천 활동으로서 노동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는 곳에서 어떻게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이 아닌 운동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원자론자들의 답변은 물에서의 물고기의 유영(헤엄)에 비유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궁색한 답변이다. 물에서의 물고기에 비유한 답변은 하나의 메타포어(비유)일 뿐이지 논리적인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론자들의 이론은 처음부터 결함이 많았다. 이는 지배 계급인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의 지배 사상인 파르메니데스 이론에 대해 대항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자면 여전히 지배 계급의 사상이 새로운 사상을 압도할 만큼 주도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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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3.

 

(3) 헤라클레이토스


이런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를 제거하고, 이 물질적 요소를 추상화하여 이 요소들 모두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적 요소(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신적 것을 이야기한다)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물질적 요소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 물질적 요소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질적 요소와 다를 바 없는 물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정신적 요소를 <>로 비유한다. 그리고 이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은 물질적인 대립 쌍들의 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결국 <사공이 많아 결국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라 많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줄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多)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국가 기구가 바로 <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은 헤라클레이토스 말년에 가면 <Logos(영혼, 이성, 정신)>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중에서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는 사라지게 되고, <운동>만이 남게 된다. 그 <운동>은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라짐>으로 표현된다.


(4)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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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부터 계승했던 <운동> 요소까지도 제거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운동>의 요소까지도 부정하는 이유는, 파르메니데스가 대(大) 토지를 소유한 귀족 출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모순율을 바탕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 요소를 비판한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일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이지 <있는 것>이 아닌데(이것이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도록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변화>를 뜻하고, 그 <변화>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을 말하게 되면, 이러한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위의 도식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는 사람, 물, 나무, 소, 말, 개 들이 서로 구별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추상화하면, 이것들 모두는 <있는 것>(유식한 말로는 “존재”라고 말한다)이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세계인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있는 것>들은 서로 구별되고 있는데, 그 구별되는 경계선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먼저,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있는 것>들 사이의 구별은 없어지게 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는 그 어떤 구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말이나 개나 소나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세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경계선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헨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있는 것>-<있는 것(경계선)>-<있는 것>-<있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에 어떻게 <운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파르메니데스는 반문한다.

다른 한편,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주장과 같은 모순에 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주는 그 경계선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있는 것>-<없는 것(경계선)>-<있는 것>-<없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루어져야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그 역시도 똑같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있는 것>들의 연쇄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틴 세계>는 또한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운동>이란 없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머릿속에서 사고(생각)로 반영하는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에서 <운동>이란 요소가 아예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 중에는 <운동>이라는 관념(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도 <운동>이란 요소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있다고 해도, 이해(利害) 관계를 바탕으로 한 여러 계층, 집단들이 서로 그 중앙국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투쟁(다툼) 때문에 사회는 혼란해질 것이고, 따라서 <다(多)의 공존>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투쟁은 곧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운동)의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투쟁(운동)이 없어야만 <다(多)의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모두가 부정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세계는 온통 <있는 것> 하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에도 “돈이 다다”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돈, 즉 부(副)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정치 체제(귀족정)’말고는 어떤 정치 체제도 용납될 수도, 또한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것>(귀족정)에는 어떤 <운동>의 요소(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도 없기 때문이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와서야 물질(존재)-정신(사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확연히 드러나고, 또한 정신이 물질보다 우위에 있고 고귀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물질)를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정신)에다 꿰어 맞추는 일이 처음으로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 비유해 보면, 돈(자본)에 우리의 모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꿰어 맞추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운동>과 그 운동의 토대인 <물질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나아가서 인간 역사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 역시도 <물질 세계>의 <운동>의 생산물임을 파악할 수 없었고, <있는 것>을 단지 모든 것의 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는 것>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없는 것>도 역사적으로 <있는 것>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가도 부르기도 하고, 부르다가도 고프기도 한다. 고프다는 것은 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부르다는 것은 위에 어떤 것이 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모든 것의 삶의 기본 과정이라는 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A는 not A(~A)]이고, [not A(~A)는 A]이며, 결국 [A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A)]라는 변증법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연관해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그 발전되고 복잡한 삶의 양식을 담아낼 수 있게끔 정치 체제도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계급 이익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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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2,

 

**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 **


위의 신화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비추어 보면,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의 근본 물음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는 <다(多)의 공존>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관심사이고, 이런 관심사가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1) 탈레스


탈레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최초의 철학 학파인 이오니아(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선구자이다. 그런데 탈레스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탈레스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의 직업이 항법사였기 때문이다. 항법사란 직업은 배의 물길을 살피는 직업이고, 여러 다른 지역과 나라를 돌아다니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늘 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2) 아낙시만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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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철학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출신이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고 옹호했던 반면에, 상인 계급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가 <다(多)의 공존>을 위한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위의 도식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에 근거해서 최초로 <무한정자(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것. 산화와 비교해 보면 Chaos(혼돈)과 같은 것이다), to 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 <무한정자>로부터 최초의 자연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4가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다(多)>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만을 관장할 뿐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가 있게 될 경우, 신들의 <다(多)의 공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多)의 공존>을 위해서 <복수의 여신>인 <Nemesis>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진다. 신화에서 <복수>란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온․냉․건․습>의 <온․냉>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과 <건․습>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 그리고 이 두 대립 쌍 자체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만물은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옛말도 있듯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 작용이 없으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수 없듯이, 서로간에 어떤 상호 작용이 없으면 아무 것도 생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태어나려면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서로간의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만물은 그 자체 불의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신화에 따라 복수를 당하여, 만물은 최초의 자연 질서인 <온․냉․건․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이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은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간의 운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세계관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건․습>으로부터 만물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온․냉>, <건․습>과 같은 대립 쌍은 무수히 많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 <무겁고 가벼움> 등등…….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 <건․습>의 대립 쌍으로부터 이 이외의 다른 모든 대립 쌍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립 쌍>이라는 동일한 존재 지위에 있는 모든 대립 쌍들 중에서 오로지 <온․냉>, <건․습>만이 필연적으로 <최초의 자연 질서>로 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온․냉․건․습>만을 <최초의 자연질서>로 삼은 것은 <탈레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물은 대체로 따뜻함, 차가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습기가 많다고 하거나 건조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직업들과, 이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하기 이전의 단순한 사회 상태에서 나타난 대표자들(이 대표자들이 곧 <온․냉․건․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표자들이 불의를 저지르게 되면 만물로 표현되는 사람들 중에서 새로운 대표자를 뽑게 된다. 이것이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의 계층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이 생겨난 작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서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하거나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급기야는 <사공이 많아져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의 사회 혼란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多)의 공존>은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몇 가지 다양한 물질 요소와 그 물질 요소들 간의 운동>을 전제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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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1.

** 이것은 학생들과 철학사를 공부하기 만들었던 강의안 교재입니다.

왜 이걸 여기에 올리느냐고요?

다 아시면서^^...(이걸 배트께서 날로 먹는 포스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날로 먹을까 해서요^^...)

하루에 하나씩 올리면 일 주일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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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 #


#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 #


 

 

 

Chaos(혼돈)

 

 

 

 

 

 

 

 

 

 

 

 

 

 

 

 

 

 

 

Gaia(땅)

 

Eros(사랑, 조화)

 

Nyx

(밤, 공기)

 

 

 

 

 

 

 

 

Uranos(하늘)

 

 

 

 

 

 



Gaia(땅)

 

 

Uranos(하늘)

 

 

 

 

 

 

 

 

 

 

 

 

 

 

 

 

 

 

 

 

 

 

Kyklopos(외눈박이 신)

 

 

Titan(거인신족)




 

Rhea

(거인신족 계열신)

 

 

Chronos

(거인신족 막내신)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Zeus(하늘)

 

 

Themis(법의 여신)

 

 

 

 

 

 

 

 

 

 

 

 

 

 

 

 

 

 

 

 

 

 

 

 

 

 

 

 

 

 

 

 

 

 

 

 

 

 

 

 

 

Horai(계절의 여신)

 

 

 

Moira(운명의 여신)

 

 

 

 

 

 

 

 

 

 

 

 

 

 

 

 

 

 

 

 

 

 

 

 

 

 

 

 

 

 

 

 

 

 

 

 

eumonia

(질서)

 

dike

(정의)

 

eirehe

(규율,평화)

 

cleito

(분리,계획)

 

cachesis

(분배)

 

atropos

(분배감시)


위에 그려진 도식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의 발생을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이 신화를 살펴보는 까닭은 서양 고대 사상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그리하여 서양 고대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고대 사상이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어떤 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이 도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서는 한정되어 있고, 규정되어 있어 서로가 구별될 수 있는 이 세계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구별될 수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Chaos(혼돈)의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이 Chaos(혼돈)의 상태에서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Gaia(땅, 대지), Eros(사랑, 조화), Nyx(Erebos)(밤, 공기)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Gaia(땅, 대지)로부터 Uranos(하늘)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대체로 거의 아무런 의심 없이 남성이 하늘, 여성이 땅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신화를 보게 되면, 하늘(남성)은 땅(여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가 결합하여 최초의 신(神, God)이라고 할 수 있는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Kyklopos(외눈박이 신)가 워낙 못생겨서(Kyklopos의 모습이 그 자체 세상에 위협을 줄 정도의 무기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단다*^^*...) 태어나자마자 Gaia(땅, 대지)가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다시 자기 자신의 뱃속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Titan(거인 신족 ; 영어로는 ‘타이탄’이라고 한다) 계열의 신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을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서양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보면, 신이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최초의 자연 질서인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의 결합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서양인들의 생각을 빌리자면, 신은 자연인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 즉 신이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Titan(거인 신족) 계열의 신 중에서 여신인 Rhea와 남신 들 중에서 가장 막내신인 Chronos가 결혼하여 우리의 귀에 낯익은 신들인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등등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 Chronos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Uranos(하늘)의 성기를 거세시키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게 된다. 그리하여 이 Chronos에게서 비로소 ‘신에 의한 세계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세게 지배권을 찬탈한 Chronos에게는 또 다른 고약한 면이 있었다. 즉 자식을 낳자마자 곧바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Hades(지하세계)나 Poseidon(바다) 모두 역시 아버지인 Chronos에게 잡혀 먹혔다. 이것을 본 Rhea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마지막 자식인 Zeus를 Chronos 몰래 Gaia에게 맡기고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를 보자기에 싸서 Chronos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Chronos에게 보자기에 싼 것을 건네주며, 이것이 방금 낳은 자식이라고 말한다. Chronos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보자기에 싼 것을 그대로 집어삼킨다. 집채만한 바위를 삼킨 Chronos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Zeus가 청년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인 Chronos의 배를 가르고 자신의 형, 누나들을 꺼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과 거인 신족 계열의 신들의 1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전쟁에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던 것은 자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Chronos는 본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chron 또는 chrom은 시간(time)이라는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이 Chronos의 지배를 받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자기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Chronos는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뱃속에 넣어서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Zeus(하늘)는 자기 아버지 Chronos의 배를 갈라서 형, 누나들을 꺼내고 나서 아버지인 Chronos를 깊은 동굴 속에 영원히 유폐시킨다. 이렇게 해서 Zeus(하늘)를 비롯하여 Chronos의 뱃속에서 나온 신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게 된다.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들은 자기 아버지의 1인 독재를 끝장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한 신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세계의 여러 부문을 맡아서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신은 Styx(신의 세계에 있는 10개의 강 중에서 9번째의 강으로, 형벌의 강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의 강은 Lethe인데, 망각의 강으로 불려진다. 말하자면 인간의 세계(이승)와 신의 세계(저승)을 가르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맹세하게 된다. 즉 [Zeus는 하늘, Hades는 지하세계, Poseidon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들은 자기 고유의 지배 영역이 있는데, 다른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다른 신의 지배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게 되면 Nemesis라는 복수의 여신에 의해 복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복수>의 의미는 복수 당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기 이전의 원래의 상태, 다시 말해서 Styx 강에서 맹세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헤시오도스의 신화에서 말하고자 핵심은 <다(多) 의 공존>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화에서 나타나는 역사관은 <운명사관>이다. 그런데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즉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 아니다.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다. 신화에서 각각의 신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그 영역을 모든 신이 다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며, 또한 침해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되면 Chronos 때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계속 하게 되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땅과 영역이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소질과 능력,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존해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서양의 고대 신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고,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多)의 공존>이 고대 서양 사상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주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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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 1.

아래의 내용은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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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1장 1절-4절 #


1. 기계(machine, 제작, 생산) 

- 유기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적 통일의 반대 개념이다.

- 비유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불어로는 ça이고, 독일어로는 Es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들은 프로이트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 기계는 언제나 분리되고 새로이 구성될 수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의 기계적(비유기적) 구성체이다.

-이런 면에서 기계는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들(더 나아가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to apeiron(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 무한정자))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이 기계는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이기도 하다.


2. 욕망

- 이러한 기계를 생산하고, 연결되고 연접되는 기계들의 기계를 생산하게 하는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 여기서 생산은 근대의 의식적 주체로서의 Ich(나)가 아니라 욕망이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결핍, 결여, 필요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욕망은 들뢰즈에게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chaos(카오스) 내에서의 흐름일 따름이다.

- 그러므로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을 맑스의 거시적 혁명인 정치경제적 혁명(결여를 메꾸는 반결여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으로 본다. 이 68혁명은 결여-반결여를 넘어서는 혁명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곧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 <기관 없는 신체들>은 루소의 자연인(원초적 자연인)처럼 어떠한 것도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기계, 신체 없는 기관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이 생산 과정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 그렇지만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들뢰즈의 욕망 체계는 신화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긍정과 한계

- 긍정 : 무의식의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한계 : 이 무의식의 측면을 개인적, 성적인 측면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무의식의 개인적, 성적인 측면을 사회 전체 측면으로 확대시켰다.

- 들뢰즈는 이전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을 사회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사회의 통합은 결국 정신병자를 건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들뢰즈의 관계 방식

- 들뢰즈의 관계 방식은 <종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의 방식은 변증법적 관계 방식과 다른 비유기적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연결적(접속적) 종합 --> 이접적 종합 --> 연접적 종합

- 연결적(접속적) 종합은 und(또, ~그리고)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를 들뢰즈는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 이접적 종합은 entweder ~ or(~이거나 ~이거나)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종합은 욕망이라는 흐름의 매끄러운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등록, 기입되는 종합이다. 등록, 기입은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등록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누멘(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연접적 종합은 so~ daß~(그래서 ~이다)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인데, 이 종합에서 비로소 주체(그래서 나는 ~이다)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접적 종합에서 파여진 홈을 메꾸면서 이루어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일시적, 분열적,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의 생산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볼룸타스(자발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이 주체는 소비의 선택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의식)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주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종합 형식의 순서는 『자본』에서의 가치형태의 전개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 연결적 종합은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와 닮아 있으며, 이접적 종합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닮아 있고, 연접적 종합은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와 닮아 있다.

- 여기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처음의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관계 방식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사용가치)에 따라 흘러간다. 바로 이러한 것에 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맑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용가치 자체에는 어떤 관계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상품소유자로서의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관계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 그 자체는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자본의 표면을 원한다. 그런데 자본의 모순에 따라 자본의 저항 주체가 자본의 운동 과정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본에 의해 호명되고 또 다시 자본에 의해 자본 속으로 포획, 포섭된다. 자본은 소비를 통한 자본의 물신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홈을 메운다. 이는 또한 그람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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