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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08
    <현대 게릴라전 연구> 9.
    곰탱이
  2. 2008/04/05
    <현대 게릴리전 연구> 8.
    곰탱이
  3. 2008/03/31
    <현대 게릴라전 연구> 7. (2)
    곰탱이
  4. 2008/03/18
    <현대 게릴라전 연구> 6. (2)
    곰탱이
  5. 2008/03/14
    <현대 게릴라전 연구> 5.
    곰탱이
  6. 2008/02/29
    <현대 게릴라전 연구> 4. (3)
    곰탱이
  7. 2008/02/26
    천하장사 마돈나...
    곰탱이
  8. 2008/02/25
    <현대 게릴라전 연구> 3. (4)
    곰탱이
  9. 2008/01/31
    <현대 게릴라전 연구>2.
    곰탱이
  10. 2008/01/30
    <현대 게릴라전 연구>1
    곰탱이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이 책은 미이클 레보위츠가 쓴 책(메이데이, 2008)이다.

이 저자의 책은 이미 한 권 소개 된 바 있다, <자본을 넘어 : 맑스의 노동자계급 정치경제학>으로.

이 책의 번역은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4장의 내용은 위에서 이미 소개된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소개된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은 크게 2개의 운동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과정이며, 둘째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맑스의 <자본론>이 미완의 저작으로 첫째 운동과정인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 과정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 두 번째 운 동 과정의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 서술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이 둘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 둘째 과정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이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자기 생산이야말로 새로운 여성과 새로운 남성, 즉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는 체 게바라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의 생산의 현실화와 관련하여서 저자는 유고의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 자주관리는 7가지의 어려운 문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그 7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기업 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분열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2. 판매가 하락할 때 노동자관리 기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상이한 기업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노동자관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4. 자주관리기업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들과 배제된 계층에 대해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5.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에서 누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책임지는가?

6. 노동자관리기업들의 파산을 허용해야 하는가?

7. 어떻게 노동자관리기업들과 사회 전체 사이의 연대가 직접적으로 기업에 통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이 기업의 이윤을 그 기업에 속한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이며, 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을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게 될 경우, 첫째, 각각의 기업들 사이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며, 둘째,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속화됨으로써, 셋째, 이 분열을 중재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국가권력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적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곧바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과 개별 노동자의 이익 사이의 적대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며, 이는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되어, 결국 이 자주 기업은 옛날 스탈린주의 식의 국유화로 넘어가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차베스가 주도하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의 혁명적 볼리바르 정책  49개 자체 내에도 깔려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볼리바르 정책이 완전한 반자본주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네수엘라 자국의 산업과 농업을 지반을 다지기 위하여, 즉 베네수엘라 일국적 자본가 계급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면서도(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다)을 볼리바르 정책의 목적과 방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정책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은 기존의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어떤 시인들의 아름다운 관념과는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국가는 이제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초를 창출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국영기업의 형태로, 두 번째의 것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국영기업은 스탈린 식의 국영기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국영기업도 아니다.

또한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는 스탈린 식의 협동조합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 아무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별적인 소집단도 아니다.

이 두 형태는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모습을 가지는데, 이 생산기업은 각각의 공동체들이 자신의 필요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전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에 진정으로 기초한 생산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인간 능력의 완전한 발현이라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현재 베네수엘라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이것이 저자의 말하고 있는 마지막 요지이다. 

 

*** 

일단 저자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좀더 밀어부쳐서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새로운 인간주체의 형성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7가지 문제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에서도 새로운 인간주체가 형성되지 못해 7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저자에게는 곧바로 새로운 인간주체 생산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새로운 생산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기 위한 변혁적 실천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노조를 통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대 자본 투쟁으로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이다. 오히려 자본의 내성을 강화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렇게도 열심히 투쟁하는데도 맨날 패배이며, 위축되어 가는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곧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 새로운 생산과 맞물려 있다. 이 생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자본-노동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관계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 생산은 여성의 가사노동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착취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자기 생산 방식, 즉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자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생산관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스스로 성별 분업 체계를 해체하고 ‘여성 되기’를 통한 여성 해방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이 기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기초이자 전제(책 203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칫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있다. 두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1)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경향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자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 돈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경제주의 현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의 여덟 아홉은 좋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 획득이 하나의 수단이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이 궁극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권력 획득이 궁극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권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로 환원될 위험이 아주 많아지게 된다.

(2) 도대체 어떻게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 주체 형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새로운 생산관계를 통해 새로운 인간 주체를 어디서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이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의 전제는 새로운 생산관계 창출 과정이며, 이 과정을 배제한 모든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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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아래의 글은 논문 중의 일부(첫머리)입니다.

혹시 관심 있어서 읽어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쓴 논문은 아니지만 열심히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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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 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오늘날 맑스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특히나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처럼 보인다. 이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계급운동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모든 반자본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맑스주의 사적 유물론의 존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살펴보자.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운동)은 정말 보편적인가? 자본-임노동과의 관계에 있는 임노동자는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이다. 임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에서 자본과 상품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관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서 있는 임노동자는 개별적 존재이지 보편적 존재가 아니다.(주1-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맑스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의 생산수단 유무의 구조에 의해 사회공학적으로 단순하게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의 보편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는 이러한 보편성을 지닌 주체를 ‘호명된 주체’로 불렀다. 이 보편성은 대단히 불완전하며 일면적이고, 알튀세에 따르면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알튀세에게 보편적 존재로서의 계급은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분석적) 수준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가능할 수 있지만(그것도 불완전한 추상으로서 말이다), 현실적 수준에서 이 추상적 수중에 상응하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먹혀들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에 관해서 마이클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 -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맑스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주2-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주3- 맑스가 말하는 생산력은 인간 자신이다. K. Marx, Grundrisse, MEW 42, S. 599)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의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되기의 출발점으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사노동을 새롭게 재조직하여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 자신이 개별화, 원자화된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형성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노동관계, 생산관계를 만듦으로써 성별 분업 체계를 깨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바로 생산력 발전의 토대이고, 이 생산력 발전이 ‘여성 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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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철학적 고찰 2.

2. 새로운 저항 주체의 가능성


클라우제비츠는 애국심이 가지는 비합리적 요소의 이율배반 때문에 민족국가 내에서의 내전을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전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국가 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형태가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한 형태이다.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 싶었고 배제하고 싶었던 이 내전에 주목한 것은 맑스와 엥겔스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내전을 통해 새로운 저항의 주체의 싹을 보았다. 이 내전은 바로 다름 아닌 계급투쟁이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를 전복시키는 반(反)정치의 도구이다. 클라우제비츠에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초역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주체로서의 민족국가를 최고로 완성된 초역사적 국가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한 분석을 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이러한 모순을 보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민족국가를 역사적 산물로 보고서 민족국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저항 주체를 통해 새로운 사회 형태인 코뮌을 보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에 대항하는 반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인 국가를 파괴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내전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을 반성적으로 활용한다. 첫째,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둘째,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뒤엎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이제 주체는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즉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그렇지만 맑스는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문제를 치환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 서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어떠한가? 맑스는 ‘군대’로서의 계급으로 나아가길 주저했지만, 내전으로서의 계급투쟁에는 이미 군대로서의 계급,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으로서의 계급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아를 맑스도 만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더 나아가 임금노동자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생각과 결합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이 현재 몸담고 살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를 위협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이지 부르주아 사회 자체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부르주아 사회 자체를 방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것을 전략적, 준(準)전략적으로 고려해 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사회조직으로부터 이끌어 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방어적 투쟁은 최후에는 공격적 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공격적 투쟁으로 바뀐다는 것은 절멸, 궤멸을 동반하는 것인데, 이러한 궤멸, 절멸은 곧 부르주아의 절멸, 궤멸이다. 부르주아의 절멸, 궤멸은 곧 부르주아를 대신할 무엇을, 즉 부르주아 사회 또는 자본이 자신을 대변할 대리자로서 또 다른 인격체 또는 화신을 호명하게 된다. 이 또 다른 인격체 또는 화신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 된다. 이러한 것은 [노동자 계급 대중(상대적 가치형태) = 자본가(등가형태) = 자본(등가형태)]이라는 도식으로부터 [노동자 계급(상대적 가치형태) = 당(등가형태) = 자본(등가형태)]의 도식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새로운 저항 주체로 나타나지 못한다. 내전을 전쟁으로 인정하고, 이 내전을 절대전쟁으로까지 밀고 나갈 경우 클라우제비츠가 근대적 주체인 국가의 해체의 위험이라는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되는 것처럼 맑스의 경우에도 역시 새로운 저항 주체인 노동자 계급의 대상화라는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한편 내전을 극단적인 절대전쟁으로서 계급투쟁으로 유비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난점을 지니게 만들었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뮌)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절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기간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 주지 않았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만들었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를 기만해 왔다. 이러한 것은 다시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요청을 자신의 ‘유격대의 지구전’에서 받아들인다. ‘유격대의 지구전’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핵심적인 생각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공격 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이 시간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서방의 부르주아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의 시간으로서 전쟁을 지속시키려는 시간이다. 무한정의 시간은 무제한의 공간에 달려 있다). 그들은 이 시간 개념을 통해서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주의자로서 마오쩌둥에게도 난점이 두 가지 측면에서 남게 된다. 첫째,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의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인 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둘째, 마오쩌둥이 세운 전쟁의 첫 번째 원칙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궤멸 또는 절멸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전쟁의 최종 목표는 적의 완전한 궤멸 또는 절멸이며, 이는 전쟁이 절대전쟁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농민은 군대가 아니다. 군대가 된다는 것은 부르주아의 무장 수단으로 무장을 하며, 부르주아 조직의 편재로 군대를 구성하며, 부르주아 전쟁 전략을 배움으로써 절대전쟁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때 군대,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치조직과 유사한 형태로서 농민을 비롯한 인민의 대의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과 인민의 분리가 일어나며, 삶과 의식의 분리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계급과 계급의식 사이의 괴리와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로서 계급의식은 인민의 삶을 직접 반영하는 의식,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민의 삶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계몽의식이 되며, 인민은 계몽 대상이 된다. 

물론 마오쩌둥에게서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을 물로 삼아 지구전을 펼치는 전략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이 물로 될 수 있는 까닭은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오직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계급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무너져서는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농민 대중들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이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은 항상 계급의식을 지니지 못한 노동자, 농민 대중들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부르주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계몽적으로 조직할 수밖에 없다. ‘당’은 근대적 주체인 부르주아 국가처럼 ‘이성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혁명정당이 ‘권력 장악’을 삼가거나,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 목적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의 범주 자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인민들에게 그냥 참고 견디라는 이데올로기에 부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말로 비쳐진다.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 안에서 그 생산양식과는 전혀 질적으로 새로운 [외부 영역]으로서의 사회체, 즉 코뮌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코뮌은 맑스가 말하는 ‘자유로운 각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이며, 이러한 사회는 가타리가 말하는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소수자 되기나 여성 되기는 소수자 되기란 끊임없이 상대적 가치형태라는 개별로서의 좌변 항과 등가형태라는 보편으로서의 우변 항의 위치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는 들뢰즈가 반변증법론자이자 반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레겔주의자로서의 맑스와 유사한 점은 바로 상품의 가치라는 동일성이 바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상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맑스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려면 차이의 생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내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처럼 완전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듯이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맑스 역시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서론 : 반복과 차이> 참조). 이것은 보편이 개별이 되며 개별이 보편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또한 다시 보편으로 돌아갔을 때 이 보편은 이전의 보편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보편이며, 개별 역시도 이전의 개별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별이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과정이며, 생산력이 질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이 새로운 환경은 곧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인민은 '부르주아 사회의 방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체인 코뮌에 대한 방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코뮌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으며, 방어전으로서의 지구전을 펼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코뮌과 자본주의 사회는 더 이상 동일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클라우제비츠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다. 이제 전쟁(부르주아 사회)은 정치(코뮌)의 자율성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본성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절대전쟁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한전쟁으로 축소되면서 결국 전쟁 자신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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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철학적 고찰 1.

1. 근대적 주체의 해체에 대한 고찰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단적인 폭력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이런 극단적 폭력 형태는 인종청소, 경제의 파멸로 인한 기근과 절대빈곤, 대재앙(외견상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과 같은 유행병, 가뭄, 홍수, 지진 등) 등 잔혹한 폭력의 지대를 낳고 있으며,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원한의 경계선)을 만들어 내는 형태를 띤다. 더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개입하는 형태를 띤다. 이렇게 전쟁이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는 것은 근대적 주체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해체됨을 의미하며, 민족국가 내에서 국가와 인민(그람시에 따르자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동의’ 체계가 무너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 민족국가 자본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값싼 노동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 확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가 있을 때에는 그들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통제하고 제도화하지 못했을 경우 국가의 정치권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상당히 우려하였다. 즉 그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통하여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로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의 해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론 체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자신의 『전쟁론』을 출판하기를 꺼려하였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체계는 크게 4가의 명제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1) 전쟁의 정의로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2)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이다. 3)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의 구분이다. 4)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이러한 4개의 명제는 서로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데, 이 체계를 통해 클라우제비츠가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는 난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1) 전쟁의 정의로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이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때 정치의 수단은 비폭력적인데, 어떤 상황에서는 이러한 비폭력적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때 다른 수단인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 이렇게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하면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가 있으며, 비폭력적 성격의 정치 특성과 논리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에 빠진다는 함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곧 전쟁의 수단 사용이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변증법적 진술로 제시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정치(비폭력)(즉자)--> 전쟁(폭력)(대자) --> 정치(폭력)(즉자대자)라는 진술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쟁의 정치에 대한 ‘자율성’ 또는 ‘독립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며,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의미하게 된다. 이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4)의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이라는 명제와 모순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는 동의의 관계에 있는 화폐관계에서 자기 증식이라는 목적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자본관계로 변화한다는 맑스의 생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즉 한편으로 정치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전쟁의 폭력적 수단이, 전쟁의 논리가 정치의 본성을 벗어나서 독립적인 논리가 되지 않을 때에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정치가 비폭력적, 폭력적 수단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정치의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자기 자신 안에 ‘폭력’을 내재함으로써 언제든지 변증법적인 위기와 갈등을 맞을 수 있으며, 이는 곧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주체의 해체라는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또한 전쟁의 정치에 대한 ‘자율성’ 또는 ‘독립성’을 함의한다고 할 수 있다.


2)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


클라우제비츠에게서 방어의 우월성은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의 우월성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방어의 우위라는 개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관련할 뿐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정치적 합리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때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을 정확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략의 자율성은 또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와 연결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대단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다. 클라우제비츠에게서 공격 전쟁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정치에 대해 자율적이지 못하다. 이때 전쟁은 극단적 상승으로 인하여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게 된다. 반면에 방어 전쟁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자율적이다. 이때 전쟁은 극단의 폭력 형태를 띠지 않는다. 공격 전쟁의 경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에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으며 전쟁은 정치에 종속된다는 자신의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논리의 모순을 통해 방어 전쟁의 우월성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쟁도 단순히 방어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방어 전쟁은 그 성격상 마지막에 가서 ‘공격’적인 전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쟁이 형식적으로라도 끝나려면 적을 격퇴시켜야만 하고, 이때 적의 격퇴는 적의 섬멸 또는 궤멸이라는 형태를 띠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베트남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방어 전쟁은 방어를 넘어서서 공격으로 전환되고, 전쟁과 정치 사이의 자율적 관계는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공격 전쟁에 대한 방어 전쟁의 도덕적 우월성도 사라지게 된다.


3)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의 구분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을 구분한다. 그런데 절대전쟁이 아닌 것을 ‘제한’전쟁과 ‘현실’전쟁으로 구분했다. 그에게서 제한전쟁과 절대전쟁은 논리적으로 상반되는 두 극점이며 현실전쟁은 이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전쟁들 사이의 관계성은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제한전쟁(즉자) --> 현실전쟁(대자) --> 절대전쟁(즉자대자).

 제한전쟁은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전쟁은  군사 카스트의 지휘 아래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이 전쟁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이 제한전쟁은 전쟁이 정치에 종속된 형태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나타난 전쟁은 새로운 전쟁으로서의 절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극단의 상승을 불러 일으켰으며, 전 인민(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유럽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 이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의 실존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정치가 전쟁에 종속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제한전쟁에서 절대전쟁으로의 전개가 역사적으로 비가역적이며 ‘전쟁의 절대화’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클라우제비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절대전쟁으로 향하는 경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째, 절대전쟁은 이른바 전 인민(민족)의 무장으로 인해 이른바 ‘절멸’의 전쟁으로 나아감으로써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정치권력)의 존립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 인민(민족)의 무장화는 ‘절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에 대해 불만을 품고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곧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어 정치의 최우선권이 파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의 형성과 전쟁의 역사적 흐름을 통한 전쟁의 현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했던 간에 헤겔의 변증법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의 존립과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칸트에게로 돌아가는 듯이 보인다(클라우제비츠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다). 즉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조국인 프러시아가 현상적으로 최고로 완성된 형태의 입헌군주제 국가이고 이 국가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 이성의 오류이며, 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정언 명령으로서 도덕적 요인에 최우선성을 두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4)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들보다 ‘도덕적 요인’에 궁극적인 최우선성을 놓는다. 이 ‘도덕적 요인’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의 결과물이다. 이에 따라 ‘도덕적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전쟁의 비합리적 측면에서의 요인이다. 이 요인은 ‘동의’에 기반한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동의’에 기반하지 않는 이 요인은 전장에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개개 병사의 ‘용맹’,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 등으로 나타난다. 둘째, 정치의 합리적인 측면에서의 요인이다. 이 요인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합리성은 비합리성의 영역에 있는 개인의 생존의 문제를 ‘동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 주체인 국가의 유지, 보존의 문제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각 병사 개인의 용맹은 ‘애국심’으로 나타나며, 이 애국심은 민족적 능력의 배경이 되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이다. 또한 총사령관의 자질은 전쟁을 ‘제한전쟁’으로 만드는 능력, 즉 수단과 목적 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 전쟁의 비합리적인 측면에서의 도덕적 요인은 두 번째의 정치의 합리적 측면에서의 도덕적 요인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게 되면 전쟁은 전 인민의 무장을 통해 절대전쟁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리하여 근대적 주체인 국가는 무장한 전 인민에 의해 해체될 위험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또한 방어 전쟁의 도덕적 우위뿐만 아니라 정치의 합리적인 도덕적 요인이 전쟁의 비합리적인 도덕적 요인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도덕적 요인 자체가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첫 번째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두 번째 도덕적 요인으로의 승화는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렇게 승화된다고 하더라도 애국심은 방어 전략의 자율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조정은 할 수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비합리적 정서이다. 왜냐하면 이 애국심은 전쟁의 비합리적인 도덕적 요인인 용맹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용맹의 불씨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애국주의는 국가(지배계급)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요소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당면한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결국 맑스주의에서 계급의식의 문제, 그리고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연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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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9.

 

(187쪽) 

** (정글전에서의 게릴라 공격의 원칙)

“만약 진지에 포위된 적을 굶주림이나 갈증 또는 직접적인 공격으로 패퇴시키지 못할 경우 침략군에 대한 파괴적 충격을 가한 후에는 포위 공격을 풀어야 한다. 게릴라 군이 너무 약한 반면 침략군이 지나치게 강할 경우에는 적의 선발부대에 공격을 집중시켜야 한다. 결롸 여하를 불문하고 이러한 작전을 특히 선호하며 반복해서 동일한 전진기지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적군의 선발부대는 거의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전진기지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내분이 야기된다. 적의 다른 부대에 대해서도 공격해야 하지만, 선발부대에 대해서는 항상 반복해서 공격해야 한다.”(주 : 이것은 분명히 게바라 자신이 고안한 전술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차 언급되고 있으며, 비교적 예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심리 전술이다.)

--> 게바라의 이러한 전술은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보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소련 정규군과 게릴라 군들은 독일군(이 독일군은 대규모 선발부대였다)을 포위하고서 끊임없는 파상 공격을 펼쳤다. 아마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보여진 전술을 게바라가 적절하게 응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191~192쪽) 

** (게릴라군 단위 부대의 적정 인원 수)

“게릴라군 단위부대의 이상적인 병력의 규모는 100명 정도일 수 있다. 이 정도면 하나의 단위부대를 구성하며, 쿠바의 군사조직과 마찬가지로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상사와 병사 계급은 독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들 계급은 철폐하는 것이 좋다(주-몇몇 독자들은 바티스타가 권력을 잡기 전에 쿠바군의 특무상사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소령이 100 내지 150명 정도의 병력을 통솔하고 그 밑에 30에서 4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소대장들을 둔다. 소령은 자기부대가 항상 하나의 단위로서 전투할 수 있도록 부대를 지휘하고 조직하며, 그는 보급품의 분배와 부대의 일반조직을 책임진다. 게릴라전에서는 분대가 기능단위이다. 각 분대는 8명 내지 12명 정도의 규모로 부대장과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항상 상관의 지휘를 받는 소위가 통솔한다. 8 내지 10명 정도면 그러한 조건 하에서 함께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다.”

--> 상사와 병사의 계급이 왜 독재의 상징이라고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통 상사는 사병 출신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192쪽) 

** (의복 지급의 두 가지 기준)

“의복을 지급할 경우에는 개인 용품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문제를 달리 취급해야 한다. 두 가지 기준을 고려해야 한다. 그 첫째는 청구인들의 개인적 필요이다. 그 둘째는 서열과 계급 체제이다. 이를 정의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부대원의 신뢰를 받고 대장이 임명한 부대원이 특별한 서열 표에 이를 기재해야 한다. 도착할 수 있는 모든 물품들 중에서 집단 용품이 아닌 경우에는 동일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

담배는 모든 대원들에 대한 동등한 대우라는 일반원칙에 따라서 지급되어야 한다.”

(196쪽) 

** (게릴라 전투의 몇 가지 공격 유형)

“…게릴라전의 초기 단계에서 적군은 반란군의 영토 깊숙이 침입해 들어올 것이다. 침입부대의 세력에 따라서 수가지 유형의 공격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첫째는 수개월 동안을 체계적으로 (공격을-정리자 삽입) 수행함으로써 적군이 공격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곧이어 두 번째 유형의 공격이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전위부대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다. 불리한 지역에서의 적의 진격은 행렬의 측면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지연된다. 이 경우 전위부대의 일부는 항상 전방에 침투하여 행렬의 나머지의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전위부대는 대개 소규모이며 보충 병력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적군의 나머지가 얼마나 강력하건 상관없이 전위부대를 언제나 격퇴해 버리게 된다. 이 작전 체계는 단순하며 약간의 협력만을 요할 뿐이다. 전위부대의 우두머리가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는 순간 게릴라 공격부대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목표물들을 응시하고 집중사격을 가한다. 그러면 몇몇 소부대가 무기, 탄약, 그리고 장비를 모을 수 있도록 수분 내에 나머지 부대를 저지한다. 게릴라 병사는 적이 무기 공급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장비를 노획할 것 같지 않은 전투는 삼가야 한다.”

--> 자본과 노동의 투쟁에서 게릴라전 공격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자본 쪽인 것처럼 보인다. 전위는 민노총, 당 등이라고 볼 수 있다.

(199~200쪽) 

** (게릴라 전투의 방어 유형)

“방어적인 유형의 전쟁, 즉 게릴라 군이 적의 특정 지역에로의 진격을 저지하려 할 경우 전투는 진지전이 된다. 적의 전위부대를 항상 정글 속에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주-적 잔여병력에 대한 공격을 위해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게릴라전의 현지 작전 원칙들 중의 하나이다) 전체적인 방어기제가 설정되어야 한다. 전투에서 선두의 적은 반드시 살해당한다는 사실과 연관된 불안 심리를 적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적군은 전위에 서기를 주저하게 된다. 전위요원이 없는 부대는 누군가가 앞장서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 많은 인원과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일정한 지역에의 모든 접근로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적의 장갑차에 대한 모든 추가적 공격수단과 함정들이 만들어져야 하며, 참호 망을 보호하기 위한 엄격한 보호조치도 취해져야 한다. 이 같은 전투의 경우 죽음으로써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되지만 모든 방어요원들은 최대한의 생존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202~203쪽) 

** (게릴라 전선의 보급)

“적절한 보급은 게릴라전의 기초이다. 토지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은 토지의 생산물에 의존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지역 주민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게릴라가 계속적으로 조직되어 가고 조직이 복잡화되어 감에 따라 외부 세계로부터의 물품 공급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될 것이다. 조직을 적절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급로가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어야 한다.”

(203쪽) 

** (게릴라 전선의 주민 조직)

“내부전선은 최소한 상대적으로 해방군이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게릴라전에 적합한 지역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존재하기 않을 경우, 즉 게릴라전이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서 전개될 경우 게릴라 조직은 확장될 수는 있지만 심화되지는 못한다. 새로운 지역까지 통로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내부조직을 보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지역에 적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부전선에서는 보다 훌륭한 행정기능을 특별히 담당하는 일련의 조직들을 보유할 수 있다.”

(206쪽) 

** (게릴라 전선에서의 여성의 역할)

(이 부분은 내용 전체를 다 싣는다. 왜냐하면 게바라가 어떤 여성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게바라 역시 기존의 성별 분업에 따라 여성의 역할을 설정하고 있다.)

“…혁명의 전체 전개과정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중요하다. 이 점은 특히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식민지적 정신 상태에 젖어 있는 모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성을 경시한 나머지 그들에 대한 실질적인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여성 전투요원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내부전선이 공고화되어서 필요한 모든 전투요원들이 차출되었을 때 여성들을 상당수의 특정한 직업에 종사시킬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것은 상이한 전투부대, 특히 적진에 있는 부대와의 통신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구두로 이루어지건 혹은 문서화된 것이건 단순한 전령으로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녀는 주의를 덜 끌 뿐만 아니라 어느 적군에게나 공포감을 덜 준다. 그런데 그들은 게릴라들이 그렇게 작전해 왔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적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잔학한 행동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서로 떨어진 부대들 간의 접촉, 총탄과 같은 물품 전달을 포함한 연락망, 외부나 지역 밖으로의 연락은 특별한 복장을 착용한 여성들이 담당한다. 잘 준비된 식사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은 게릴라 생활의 악조건에 접한 병사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다.

여성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기초적인 문자해독과 혁명이론에 대한 학습이다. 그들은 지역 농민들뿐만 아니라 혁명군 병사들도 학습시킬 수 있다. 민간 조직의 일부인 학교 행정은 기본적으로 여성에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보다 큰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의 문제에서도 여성들은 간호원 심지어는 의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장의 거친 병사들보다 무한히 큰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으며, 이 같은 부드러움은 전쟁의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 커다란 고통 속에서 아무런 위안도 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병사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것이기 때문이다.”

(207~208쪽) 

** (게릴라 전선에서의 사보타지)

“…사보타지는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민중의 필수적인 무기이다. 그 조직은 민간 혹은 지하조직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사보타지는 분명히 반란군의 관할 지역 바깥에서만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직 역시 공격 대상 산업과 통신망 혹은 기타의 공격 목표를 결정하는 사령부 참모진의 명령이나 직접적인 지령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한다.”

“사보타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특정한 주요 목적을 위한 전국적 수준의 사보타지이고, 다른 하나는 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국지적 사보타지이다. 전국적인 규모에서는 모든 통신망을 직접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서의 신속한 통신은 반란군에 대한 적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도, 하수도, 전기, 전화, 그리고 수도관과 같은 적의 무기들을 끊임없이 공략해야 한다. 결국에는 통상적인 현실생활의 모든 편의시설들을 파괴해야 한다.”

“사보타지에는 물품의 점유, 보급로의 차단, 농민들의 판매에 대한 위험, 장애물 설치차량에 대한 방화 등이 포함되고 있다. 각각의 경우 멀리 있건 근접해 있건 적과 어느 정도의 접촉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히트 앤 런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보타지가 있는 것에는 게릴라들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인상을 적에게 주지 않도록 대규모 시위를 할 필요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전열을 정비하고 조심스럽게 이동하거나 전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보론Ⅰ] 게릴라 전술 - 알제리의 경우(P. 브래스트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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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리전 연구> 8.

 

(172~173쪽) 

** (게릴라 전술에 대한 이해)

“…군사용어상 전술이라 함은 전체적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일컫는다.

기동성은 게릴라 군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수 분 내에 게릴라 군은 전투 현장에서 사라질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수 시간 내에 전투 지역을 벗어날 수 있다. 이로써 전선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으며, 어떠한 포위공격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게릴라 군은 포위공격을 피하고, 함정에 걸려들거나 불리한 전투에 말려드는 것을 전력을 다해 방지할 수 있으며, 반대로 반포위(counter-encirclement) 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소수의 게릴라 요원들이 적에게 포위될 수도 있지만, 그 사이에 적은 자신도 모르게 더 큰 함정에 걸려들게 된다. 난공불락의 상태에 처한 선발대는 적을 함정에 끌어들여 포위한 다음 일정하게 섬멸시키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동전의 특징은 같은 이름의 춤곡을 본뜬 이른바 “미뉴에트”(minuet)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게릴라들은 5명 내지는 6명 정도의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 (적에게 역으로 포위되지 않도록 포진하고) 여러 위치에서 적의 부대를 포위한다. 그리고 나서 이 위치들 중의 한 곳에서 공격이 개시되면, 적은 그 공격부대를 향해 진격한다. 게릴라는 적과 교전하면서 후퇴한다. 이때, 또 다른 집단이 공격을 개시한다. 적은 새로운 지점으로 이동하게 되며 게릴라는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한 연속적인 작전이 진행되면서 적군은 이변이 없다면 이동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적은 막대한 양의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대의 사기는 저하된다.”

(174쪽) 

** (게릴라의 방어 방식)

“우선 방어 지점에는 탄력적 위치, 적이 통과할 수 없는 특수한 위치 그리고 반격에 적합한 위치 등 세 가지가 있다. 적은 종종 서서히 그리 어렵지 않게 진격하다가 갑자기 강제로 차단당하게 되면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경우에 직면한다. 이 같은 상황은 그 지역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된 게릴라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그들이 도저히 점령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얼마나 많은 수의 적이 공격하느냐보다는,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일정한 위치를 방어할 수 있느냐를 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단 그 인원이 결정되면, 항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겨우 적의 공격에 대항하여 위치를 방어할 수 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위치를 끝까지 사수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다.”

** (게릴라의 공격 방식)

“게릴라의 공격 방식 역시 상이하다. 게릴라는 격렬하고 철저하게 기습을 가하고 갑자기 전면적으로 중단한다. 생존한 적군은 공격이 끝났다고 믿고 그들의 진지나 포위된 도시에서 조용히 통상활동을 재개한다. 그러나 갑자기 똑같은 공격이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게릴라는 일정 지역을 방어하는 초소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한 다음 장악한다. 그 기본적인 특징은 공격의 기습성과 신속성이다.”

(176쪽) 

** (게릴라 전술의 기초적인 원칙)

“게릴라 전술의 기초적인 원칙은 지역주민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적을 다루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 적을 공격할 때에는 철저히 무자비해야 하며, 배신과 암살을 일삼는 비열한 무리들은 철저히 봉쇄해야 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자신의 군사적 임무를 완수하거나, 혹은 완수하고 있다고 믿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최대한의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주요한 작전기지나 튼튼한 요새가 없는 한 포로를 데리고 있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 생존자들은 석방시켜야 하며, 부상병들에 대해서는 작전 기간 동안 가능한 모든 보호를 해 주어야 한다. 적에 대한 게릴라군의 도덕적 우위를 효과적으로 과시하려면 지역 주민들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과를 스스로 청산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범법자들을 사면해 주어서는 안 된다.”

(181쪽) 

** (게릴라전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지금까지 언급한 사항들로부터 두 가지의 논리를 얻을 수 있다. 그 첫째는 게릴라전의 조건이 해당 지역의 생산적 발전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생산을 위한 모든 유리한 조건들,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게릴라 군에게는 불리하다. 주민생활에 대한 편의시설이 많으면 많을수록 게릴라의 생활은 불확실하고 어렵다. 통신수단 도심지, 혹은 준도심지, 인구의 대규모적인 집중, 그리고 기계에 의한 작업이 용이한 토지 등등의 인간생활에 편리한 모든 것들은 게릴라에게 불리한 조건들이기 때문에 이 절의 제목을 “불리한 지역에서의 전쟁”이라 하였다.”

“두 번째 결론은 게릴라의 작전이 필연적으로 대중들의 중요한 역할을 요구할 경우, 이러한 역할은 단 한 번의 적의 공격으로도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불리한 지역에서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게릴라 군을 옹호하는 전선 내부의 완전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선전과, 노동자․농민 그리고 그 지역의 사회적 계급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민중들 속에서의 이러한 작업, 게릴라 군과 지역 주민 간의 관계에 관한 이 같은 지속적인 활동은 또한 완강한 적의 개별적인 저항을 고려해야 하며, 적의 그 같은 행동이 위협이 될 경우 가차없이 적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 게릴라는 철저해야 한다. 작전 지역 내의 위험한 장소에 어떠한 적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 여기에서 게릴라 군과 민중들은 분리되어 있다. 즉 민중이 게릴라 군이고, 게릴라 군이 민중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릴라 군은 선진적인 의식을 지닌 자들(레닌에 따르면 전위이다)이고 민중들은 자본주의 물에 찌든 자들(루카치에 따르면 사물화된 의식을 지닌 자들)이다. 이 속에서 민중들은 의식화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의식화의 방식은 <동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의는 자본주의에서의 동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동의는 생존(전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동의이기 때문이다. 게릴라 군에게 민중은 동의의 관계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적으로 보이는 존재이기도 한 믿을 수 없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민중은 게릴라 군에게 동의의 관계에서 벗어난, 적으로 보이는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 타도, 절멸의 대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게릴라 군은 민중에게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즉 감시, 통제의 주체가 된다. 이 때 동의는 감시, 통제의 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게릴라--> 정규군 --> 당의 순서로 발전하게 되겠지만, 민중은 여전히 의심과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당은 여전히 전시 때의 성격을 그대로 지닌 채 의심과 감시, 통제의 주체가 되며, 민중은 그 대상이 된다. 이제 여기서 동의는 의심과 감시, 통제의 틀 내에서의 동의가 될 뿐이다. 이것이 전쟁 중에서 동의가 감시, 통제로 상승(지양)하는 메커니즘이며, 당이 이성의 화신이며 근대적 주체로서의 부르주아 국가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187쪽) 

** (정글전에서의 게릴라 공격의 원칙)

“만약 진지에 포위된 적을 굶주림이나 갈증 또는 직접적인 공격으로 패퇴시키지 못할 경우 침략군에 대한 파괴적 충격을 가한 후에는 포위 공격을 풀어야 한다. 게릴라 군이 너무 약한 반면 침략군이 지나치게 강할 경우에는 적의 선발부대에 공격을 집중시켜야 한다. 결롸 여하를 불문하고 이러한 작전을 특히 선호하며 반복해서 동일한 전진기지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적군의 선발부대는 거의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전진기지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내분이 야기된다. 적의 다른 부대에 대해서도 공격해야 하지만, 선발부대에 대해서는 항상 반복해서 공격해야 한다.”(주 : 이것은 분명히 게바라 자신이 고안한 전술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차 언급되고 있으며, 비교적 예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심리 전술이다.)

--> 게바라의 이러한 전술은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보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소련 정규군과 게릴라 군들은 독일군(이 독일군은 대규모 선발부대였다)을 포위하고서 끊임없는 파상 공격을 펼쳤다. 아마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보여진 전술을 게바라가 적절하게 응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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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7.

 

제3부 쿠바 혁명 : 카스트로 전략과 게바라 전술


제8장. 카스트로는 어떻게 승리하였는가(딕키 채플레)            


(163쪽) 

** (카스트로 군대의 세 가지 공격적 행위)

“카스트로 군대는 세 종류의 공격적 행위를 취했다. 전장정찰, 습격, 그리고 포위였다.

정찰대는 단순히 적의 병력․전력 상황을 탐색하는 임무만이 아니라 적에 대한 공격의 전위로서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우리의 경우는 두 소대로 구성되어 주로 야간에 활동하였다. 무기로는 소총, 토미포, 한두 정의 LMG를 휴대했다. 한 정찰소대는 81mm 5연발 박격포를, 다른 소대는 파손된 쿠바 정부군 항공기를 고쳐 만든 20mm 대포를 끌고 다녔다. 대포의 탄약은 우리가 직접 제조한 것이었다.

혁명군들이 습격이라고 부른 전술은 일방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전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군 지휘 장교가 병력을 이끌고 야음을 이용하여 이용 가능한 은폐물 가까운 곳에 매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적의 출몰시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것이다. 따라서 습격대는 진격하거나 대형 폭탄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전술로 마야 요새에서 17일 동안 525명을 생포했다. 다른 곳에서도 우리는 14일 동안 버티다가 150명의 바티스타군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혁명군 공격전술 중 세 번째의 것은 포위 공격이었다. 이 전술은 바티스타 정부군들의 집결지나 요새를 5~6명의 게릴라로 편성된 소단위 부대들이 사방을 둘러싼 다음 각기 <치고 빠지는> 전술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바티스타 요새에 대한 이같은 포위공격은 결정적인 치명타를 적에게 가했다.”


제9장. 체 게바라의 게릴라 전술론(F.M.오상카)


(168쪽) 

** (쿠바 혁명이 남긴 세 가지 전제)

“쿠바 혁명은 남미의 혁명운동의 역할에 대하여 세 가지의 근본적인 전제를 제공했다.

1) 민중의 힘은 정규군과 맞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2) 혁명의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민중봉기 자체가 그것들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남미의 저개발국가에서 무장투쟁의 영역은 농촌지역이다.”

(169쪽) 

** (게릴라전의 원칙)

“게릴라전은 정규전을 위한 시작, 혹은 준비단계에 불과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릴라 세력의 성장과 정규전에로의 전투양상의 변화 가능성은 각개전투와 충돌을 통해 적을 패퇴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이 때문에 각개전투와 충돌에서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 (게바라와 모택동의 유사성)

“게바라는 게릴라전에는 통상적인 정규전과 같은 유형의 군사적 목표가 없다고 지적한다. 산악지대이건 도시이건 목표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게릴라가 공격하는 모든 세려을 섬멸하는 것만이 목표이다. 모택동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군사작전의 모든 실행원칙은 예외 없이 최대한 자체의 힘을 보존시키고 적의 힘을 해체시킨다는 한 가지의 기본원칙을 따른다.””

--> 정치에 대한 전쟁의 우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또한 공격전쟁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방어전쟁 역시도 제한전쟁의 성격에서 절대전쟁의 성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가지는 아포리아와 동일한 아포리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170쪽) 

** (게릴라전의 한계)

“게릴라전투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는 없는 전쟁의 일정한 국면이다. 그것은 해방전쟁의 주요 국면들 중의 하나이며, 게릴라 군이 정규군의 성격을 획득해 감에 따라 끊임없이 그 중요성을 더해 간다. 게릴라 군은 정규군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면서 적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 준비를 하게 되며 승리를 확보할 것이다. 비록 정규군의 뿌리는 게릴라 군이었지만, 그 승리는 언제나 정규군의 산물인 것이다.”

(170~171쪽) 

** (게릴라 전략에 대한 이해)

“…전략이란 전체적인 군사적 상황에 비추어 달성 가능한 복적과,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용한 행동노선을 분석함을 의미한다.

게릴라 군이 따라야 할 전략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는 적이 이용할 수 있는 행동방식을  깊이 분석해 보아야 한다. 게릴라는 적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 병력, 이동능력, 대중적 지원, 무장, 그리고 지도력을 분석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게릴라는 적의 군대를 패퇴시킨다는 최종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자체의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

(171쪽) 

** (게릴라의 전략 목표들)

“초기 단계에서 게릴라의 우선적 목표는 자신이 파괴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다. 게릴라 부대들은 적의 파괴부대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비교적 용이하게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일단 이 목표가 달성되면 게릴라는 거점을 확보하고 적은 이를 공격하기가 점점 어렵게 될 것이다. 게릴라 군이 점차로 증강되면 적은 약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약화과정은 우선 게릴라 군에 대한 활발한 전투가 진행되는 장소에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후 약화과정은 적의 영토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수 있고, 게릴라들은 총력을 기울여 적의 통신망과 작전기지들에 대하여 타격과 피해를 입힐 것이다.”

“끊임없는 공격이 행해져야 한다. 작전 지역에서 적군이 잠자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야전진지들은 체계적으로 공격하고 파괴시켜야 한다. 항상 적에게 그들이 완전히 포위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이는 정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역 상황에 대한 완벽한 파악뿐만 아니라 민중의 전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게릴라들이 항상 유의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들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덜 위험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왔었던 잘 조직화된 집단들은 이제 사보타지에 동원될 수 있다. 사보타지는 전군과 전지역의 생활을 위협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무기이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게 되면 전투부대를 포함한 적의 사기는 약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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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6.

 

(143쪽) 

** (모의 게릴라의 특성)

“게릴라가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집결과 산개, 그리고 끊임없는 위치이동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게릴라부대는 작전하기 위하여 흩어진다.”


(144쪽) 

** (모의 대규모 게릴라전의 5가지 기준)

“1. 적군이 넓게 확장하여 방어를 하고 그에 대항할 만한 충분한 병력이 집결될 수 없을 때, 게릴라는 산개하여 쉴새없이 적을 괴롭히면서 적의 사기를 저하시켜야 한다.

2.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게릴라는 후퇴하기 위하여 산개한다.

3. 지상의 조건이 활동을 제한할 때 산개하라.

4. 작전이 보급에 의해 제한받을 때 산개하라.

5. 넓은 지역에 걸쳐 이동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산개하라.”

(152쪽) 

** (모의 게릴라의 전술적․전략적 기동성)

“혁명은 직선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혁명은 어떤 때는 빗나가기도 하고 우세한 힘 앞에서는 후퇴하기도 하며, 전진의 여지가 있을 때에는 전진을 하면서 무한한 인내력을 요구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부대가 교전을 하게 되는 것이 불리할 때가 있다. 그러한 경우 부대는 즉각 이동해야 한다. 사태가 심각할 때, 게릴라는 물이 흐르듯이 바람이 불듯이 이동해야 한다. 그들의 전술은 적을 기만하고 유인하고, 혼란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적으로 하여금 그들이 동쪽과 북쪽에서 공격할 것처럼 믿도록 유도하면서, 실제로는 남쪽과 서쪽에서 적을 쳐야 한다. 그들은 기습을 한 후 신속히 분산해야 한다. 그들은 야간에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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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5.

 

(125쪽) 

** (중국의 상황과 지형에 적합한 모 자신의 개념과 그 대책의 특성)

“따라서 전쟁의 상황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전쟁의 주도적인 법칙에 있어서의 차이점(시간, 공간, 그리고 성격의 차이)을 결정한다.”

“역사적 단계, 특성, 장소 그리고 국가 등이 서로 상이한 여러 전쟁의 법칙들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 각각의 특성과 발전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전쟁의 문제점에 대한 단순한 기계적 접근은 지양해야만 한다.”

(둘 다 모택동의 『선집』 제1권에 실린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적 문제들」 중에 있음)


(125~126쪽) 

** (모의 게릴라전의 기본원칙들)

“게릴라전의 기본원칙들은 중국 공산군의 그 유명한 구호로 요약되어 있다고 모택동은 강조한다.

1. 적이 진격할 때, 우리는 퇴각한다.

2. 적이 주춤할 때 우리는 교란시킨다.

3. 적이 지칠 때, 우리는 공격한다.

4. 적이 후퇴할 때 우리는 추격한다.

모택동은 그의 『선집』 중 제2권에 수록된 「항일 게릴라전의 전략적 제문제」에서-시간과 장소 그리고 성격 등이 주는 영향을 포함하여- 이러한 구호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항일 전쟁에 연관된 노력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지 게릴라전의 일반적인 규칙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126쪽) 

** (모의 항일 게릴라전의 6가지 특수한 전략적 문제들)

“1.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을 경우에는 융통성을 가지고 계획에 따라, 방어전에서의 공격을 지구전에서는 빠른 결단에 의한 전투를, 내선(內線) 작전 내에서의 외선(外線) 작전을 수행할 것.

2. 정규전과 결합시킬 것.

3. 근거지를 확보할 것.

4. 전략적인 방어와 전략적인 공격을 기도할 것.

5. 기동성 있는 전쟁(운동전)으로 발전시킬 것.

6. 지휘계통을 명확히 할 것.”

“모는 이 논문에서 이러한 여섯 가지의 특수한 문제들을 서술․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반원칙을 밝히고 있다.

1. 게릴라전에 있어서의 보수적인 경향은 배타되어야 한다.

2.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한다는 원칙은 모든 군사원칙의 기본이다.

3. 게릴라전은 오직 정도와 표출의 형태에 있어서만 정규전과 다르다.

4. 게릴라전의 기본원칙은 공격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그것의 공격적인 특성은 정규전의 공격적인 특성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5. 공격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책일 뿐만 아니라 적을 전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반면 방어나 후퇴만 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단지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역할밖에는 할 수 없고, 적을 전멸시키는 데 있어서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127~128쪽) 

** (항일전의 성격)

“항일전은 중국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순전히 방어적인 전쟁이었으며, 공산측은 분명히 일본보다 약세였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런 조건 아래서 공격적인 접근을 채택했었더라면, 진지방어를 택하든가 아니면 일본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는 둘 중의 한 상황이 나타났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군사적 계획에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모는 게릴라전과 정규전의 협력 문제를 항일 전쟁에서의 시간과 지역에 관한 특수한 문제로 보았다. 초기 상황에서는 연합할 만한 정규전이 없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 게릴라전이 기동전(mobile warfare)과 정규전으로 변형되었을 때, 이레 연합할 게릴라전은 없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동시적 공존은 그러한 통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근거지 확립은 언뜻 보기에 게릴라전(보다 엄밀히 말해 유격전)이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는 근거지 없는 게릴라들은 떠돌아다니는 폭도와 같으며 토착주민의 정치적 열망과는 아무런 관련도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의 이론의 철저한 정치적인 성격은 이러한 개념적인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근거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한편, 분명히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이용된다. 모택동이 평야지대를 제외시킨 것은 아니지만, 근거지들은 뚜렷한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대개 산악에 위치해 있었다. 오파(吳波) 산악지역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주덕은 근거지의 군사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의 정규병들은 휴식과 보급품과 재훈련을 위해서 그러한 근거지로 돌아갈 수 있다. 게릴라 병력과 대중들도 그곳에서 훈련 받을 수 있다. 거기에는 작은 조병창과 학교, 병원, 그리고 조합 및 행정기구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일본군 주둔지, 요새 전략기점, 탄약보급소, 통신시설, 그리고 철도를 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목표물들을 파괴한 후에야 우리 부대는 모습을 감출 수 있고 또 다른 곳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게릴라들에게 전략적인 방어와 전략적인 공격을 실행하라는 충고를 함에 있어, 모택동만이 게릴라들이 어떤 때는 공격을 하고 어떤 때는 방어를 해야 하는 교대적인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동전으로 발전시키라는 충고는 모의 개념의 핵심이다. 그는 게릴라전을 정규전의 서곡으로 보았다. 게릴라들은 정규군사로 변화될 것이다. 가장 마르크르주의적인 관점에서 모는 수(數)가 증가하고 질이 개선됨으로써, 게릴라들은 “기동전을 펼 수 있는 정규군”으로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29~130쪽) 

** (모의 전쟁이론)

“모의 전쟁이론은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진리를 파악해야만 한다. ‘정치적 역량은 총열로부터 나온다’”는 진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 무력투쟁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나 공산당은, 그들이 설 자리를 쟁취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혁명과업도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비정규전에 대한 그의 개념은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모택동은 결코 게릴라전을 가장 바람직하다거나 영속적인 전쟁형태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빈번히 그리고 거리낌 없이 게릴라전을 낮게 평가했다. 1936년에 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게릴라의 이러한 성질은 적을 쳐부수기 위한 우리의 독특한 모습이며 강점이자 수단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질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언젠가 이러한 성질은 분명히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따라서 결국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매우 귀중하며 굳건히 간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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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전 연구> 4.

 

** (그런데 정치적 동원은 군사전술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정치적 동원은 오히려 군사전술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모는 두 가지 정치․군사적 위험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는 너무나 팽배해 있는, 그가 일컫는 바 무법천지의 영웅주의적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너무 일찍 포기하려는 (패배주의적) 의도이다.”

--> 이는 클라우제비츠의 경우처럼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모의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 전쟁은 적의 사악한 영향력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순성을 정화시켜 줄 수 있는 일종의 항독소이다.”(103쪽)

(104쪽) 

** (게릴라전의 일반적 특성)

“게릴라전은 군사전략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제공해 준다. 게릴라 작전은 군사 기계 장비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방심할 수 없는 작전 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값싼 전쟁 중의 하나이다.”

(104쪽) 

** (모의 게릴라전의 특징)

“모는 자신이 많은 저적들 속에서 한 가지의 중심된 문제를 여러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 문제는 분산과 집중을 결합시키는 일이었다. “창과 새총으로 무장한” 지방반란군은-이 점이 중국혁명의 <특이한 양상>이었다-정규 중국공산군과 결합되어야만 했었다. 지방군은 분산되어 있음으로 해서 적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정규군은 분산된 적을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 (……) 그렇게 함으로써 맑스가 역사의 유형을 구성했던 것처럼, 모도 전쟁의 과정을 정(正), 반(反), 그리고 승리를 얻는 합(合)의 과정으로 구성하였다.”            

(105~106쪽) 

** (모의 삼 단계 전략론)

“모에게 있어서 미래의 패턴은 과거의 패턴과 마찬가지로 가혹할 정도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지구전은 승리하기까지 세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세 단계 중에서 첫째는 적인 전략적인 공세를 취하는 단계인 바, 모는 그가 일컫는 <전략적 수세>에 처하게 된다고 본다. 두 번째 단계는 일정의 교착상태로서 공산주의자들은 그 속에서 주도권을 잡을 준비를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전략적인 공세로 전환하며, 적을 전략적인 수세로 몰아넣고 궁극에 가서는 전쟁을 종식시키게 된다.”

“첫 번째 단계와 관련해서 모는 몇 가지 가정을 내리고 있다. 첫째는 적에게 있어 생산수단의 상실이 곧 전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적인 속전을 전개할 것이며, 가능한 총력으로 공격하리라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모는 접전을 기대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로 후퇴를 예상하기도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상호의존적인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두 번째 단계로 전이된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적군 가운데서는 물론, 많은 사상자와 전쟁비용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악화일로에 있는 적의 후방에서도 전쟁이 쉽게 끝날 것도 같지는 않다는 생각과 헛수고라는 일종이 무력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징조를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사기는 높아지기 시작한다. 전쟁이 평형상태에 도달할 때, 제2단계 즉 전략적 교착상태가 이루어진다.”

“점증하는 정규 공산군의 기동성 있는 전투에 의해 지원을 받은 게릴라전의 확대는-패배주의나 악조건, 그리고 협력자들의 파괴활동에도 불구하고-제2단계를 거쳐 제3단계로 이전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단계가 절정에 달할 때 게릴라전은 보조수단이 되고, 정규전 형태의 전투가 다시금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 모의 삼 단계 전략론은 헤겔의 절대정신에 의해 닫혀 있는 변증법의 형태와 아주 비슷하다. 지방의 모든 게릴라들은 결국 최종적으로 공산당의 구현체의 공산당 정규군대로 지양된다. 다시 말하자면 공산당 정규군대의 통제와 지휘를 일방적으로 받으면서 정규군대의 보조적 수단으로 머물게 된다. 헤겔이 절대정신(보편으로서의 세계사 또는 세계민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내전(전쟁)이 필수적인 것, 즉 필요악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통제와 억압, 더 나아서 전쟁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리하여 모든 의사소통 내에서의 갈등과 진통은 결국 전쟁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는 전쟁에 종속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전략론은 『자본』의 가치형태의 전개 과정과 닮아 있다. 단순한 가치형태→전개된(전체적) 가치형태→화폐형태로 나아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① 단순한 가치형태 ≒ 모의 삼 단계 전략 중 첫 번째 단계

<적의 정규군대 = 공산당 정규군대>

처음 적의 정규군대를 맞았을 때 공산당의 정규군대는 전적으로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면서 되도록 직접적인 접전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때 적의 정규군대는 자신과 대적할 만한 등가형태로서의 상대로 공산당 정규군대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지방의 여러 무수한 게릴라들을 자신의 상대로 맞이하게 된다.

② 전개된(전체적) 가치형태 ≒ 모의 삼 단계 전략 중 두 번째 단계

적의 정규군대 =

이때 무수한 지방 게릴라들을 자신의 상대로 하는 적의 정규군대는 분산되면서, 그리고 자신의 공격력이 쇠약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적만을 상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때 공산당은 적의 정규군대의 공격력이 최대로 약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③ 화폐형태

적의 정규군대 = = 중국 공산당(정규군대)

적의 공격력이 거의 무력화될 즈음에 게릴라들을 대신하여 게릴라들의 대표체로서 공산당의 정규군대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공산당은 이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보편자, 동일자로서의 등가형태의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만일 어떤 게릴라들이 또는 다른 누군가가 이 등가형태의 자리를 원하게 되면 가차 없이 내전의 형식을 빌어 이들을 숙청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의 독재가 형성되며 노동자 계급을 동원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 물신(物神)으로서의 화폐와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가 된다. 보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화합, 조화, 대동단결이라는 수식어 쓰기를 좋아하며 남발한다. 이는 비단 중국 공산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에게도 해당된다(우리나라에서는 민노당의 주사파들이 여기에 딱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5장. 모택동의 전략․전술론에 대한 현대적 평가.


(111쪽) 

** (모의 전쟁관)

“모는 자신의 전쟁이 최후의 정당한 전쟁 다시 말하면 전쟁들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며, 그 전쟁 이후에는 어떠한 전쟁도 찾아 볼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가 온통 공산주의화되기 전까지는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빛의 새로운 시기”를 위한 이 전쟁이 끝날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너무나 헤겔적인!!

(112~113쪽) 

** (모의 전략이론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가정)

“모의 이론도 어느 이론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구성은 이론의 기초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모의 전제는 인내심을 모나 모처럼 생각하는 사람만이 독점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러한 독점성은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모의 교리 속에 설정된 융통성에 의해 편리하게 보호 받는다.”

“동남아시아에서 모의 이론이 복음처럼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이 인내심을 독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두 번째 전제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들은 빨리 승리를 거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장기전을 바라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 전쟁에서의 교착 상태가 미국 본토의 여론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의 장기전이 프랑스 국민에 미친 영향 등은, 1930년대 모가 특히 일본을 지칭하면서 글을 쓸 때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의도를 잘 예증해 준다.”

“전쟁의 첫 단계에서 겪는 전술적인 희생이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대가라고 모가 믿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이 과정을 지속시켜 주는 촉매제는 초반기의 후퇴 기간 주에도 주도권을 유지하는 일이다. 작전상 이 말은 부분적인 승리가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은 그러한 전쟁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이 기술적인 우위와 상관이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점은 세 번째의 가정과 연관된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인 견지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당의 엄격한 훈련 하에 작전을 펼치는 <인민의 전쟁>이 매우 적응성 있는 병기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주 잊혀지는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에게 적응성을 주는 것은 병기고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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