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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아닌 10년 세월...

오늘 학교 오다가 초등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셋이서

걸어가면서 이러는 거다.

 

- 야, 10년 세월 빨랑 가는 거야.

 10년 지나면 우린 대학생이 되는 거구...

- 그래 맞아... ㅋㅋㅋ...

 

뭐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듣고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ㅎㅎㅎ...

도대체 저 아이들은 10년 세월이 빠르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고, 배웠을까?!

 

자꾸 웃음이 나온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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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렁 궁시렁...

아래의 글은 제자가 얼마 전에 취직했다는 한국NGO신문이라는 데에 쓴 글이다.

근데 그 사장이란 양반 되게 웃긴 양반이다.

시민단체에 의해 운영되어 돈이 없어서 필자들에게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는단다.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월급도 제때 잘 안 나오는 모양인 것 같다.

오히려 제자한테 미안한 감정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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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의 삶은 왜 이다지도 고달픈가! #


오늘 아침 하늘은 너무 파랬다. 우리의 삶도 파랬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잔뜩 비구름으로 덮여 있다. 아니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호우성 소나기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통령을 이명박으로 잘못 뽑아서 그렇다는 거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그가 발표한 정책들 때문이었는데, 특히 교육 정책과 관련해 여고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시위 때문이었다. 이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관련해 범국민적인 것으로 확산되었으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는 이명박 정권이 국민을 위한 정권이 아님을,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의 삶이 매우 고단할 것임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왜 국민들 대다수가 싫어하는 짓만을 골라서 하는 것일까? 이명박 개인의 인간성이 아주 나빠서 그런 것일까? 물론 이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속된 말로 계속 똘아이 같은 짓만 하는 이유는 바로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마름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란 무한 적대적 경쟁 원리에 따라 기업(자본)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다. 기업(자본)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 받기 위해서는 시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상품 가격을 최대한으로 낮춤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상품 가격 경쟁력의 강화는 곧바로 한 상품 속에 들어가 있는 인간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다. 인간 노동력의 가치 저하는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상대적으로 낮추는 것이며,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정규직의 축소와 비정규직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 신자유주의는 구조조정과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나타나며 결국에는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극단적인 삶의 질 저하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이명박은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첫째 전국적인 촛불시위의 직접적 원인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으로 나타났다. 왜 요리조리 말을 바꿔 가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서둘러 강행하려 했을까? 이는 값이 한우보다 아주 싼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어 한국 자본의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이밖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가능한 한 빨리 체결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공공부문을 자꾸 민영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경영 효율화를 통해 공공부문을 개혁하겠다는 것이며, 경영 효율화는 민영화를 통해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경영 효율화를 왜 하는가? 이명박 정권은 이에 대한 답으로 공공부문의 적자를 들고 있다. 이러한 적자가 국민의 세금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적자는 당연한 것이다. 공공부문은 민간 기업처럼 이익을 내려는 기업 또는 집단이 아니다. 본래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물자들을 누구 하나 소외됨 없이 공급 받고 누릴 수 있게끔 싸게 공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 공공부문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국민들 스스로가 낸 세금을 통해 충당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공공부문을 민영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공공부문을 시장에 편입시켜 기업(자본)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다 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도를 민영화한다면 국민 대다수가 수돗물을 쓸 수가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에 한 사람이 평균 사용하는 물의 양은 285ℓ. 마시고, 씻고, 빨래를 하는 등 매일 매일 써야만 하는 물의 양이다. 현재 이 물을 모두 수돗물로 사용한다면 170원 정도다. 하지만 기업들에서 생산해 파는 물을 이용한다면 1ℓ에 500원으로 어림잡아도 총액은 약 14만 2천 원에 이른다. 800배가 넘는 가격차이다.

또한 교육과 관련해서는, 교육을 상품화시켜 시장에 내 놓겠다는 것이 이명박 정권이 하고자 하는 일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질 높은 교육을 받고, 돈 없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질 높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교육기관, 예를 들어 요즘 거론되고 있는 국제 중학교라던가 자립형 사립고, 민사고 등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런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부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은 엄청난 입시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경쟁 구도를 통해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무한 적대 경쟁 구도를 내면화시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체제 순응형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야 이 학생들을 장차 자본의 최대 이익 창출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이명박 정권의 실체이며, 우리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때 사람을 잘 뽑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시장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우리들 자신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은 바로 자본주의의 시장화를 막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 망을 우리 스스로 구축하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인간관계 망의 모습은 이미 우리 자신이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어느 자리에서건 말할 수 있으며, 누구나 촛불시위에 필요한 것들(양초, 물, 김밥, 스티커, 순두부 등)을 누구나 요구할 수 있고 그 요구를 우리 스스로의 성금에 의해 충족시킬 수 있는 모습들 속에서 우리의 힘을 발견하고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살기 좋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대통령, 국회의원 등 이른바 우리의 대리자들인 정치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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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의 차별성-여간첩 사건

이명박 정권과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의 차별성은 바로 여간첩 사건이다.

신자유주의 행보도 졸라 그렇고, 조직 사건 엮어서 구속하는 것 모두 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들도 다 한 짓이다.

그런데 유독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루 여간첩 사건이다.

역쉬 쥐박이답다!

자기가 김대중이나 노무현과 결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여간첩 사건을 통해...ㅋㅋㅋ...

 

아~~~, 확실한 차별화...

참으로 감탄스러울 뿐이다...

 

쥐박이의 정권 철학은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주의, 문화상대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아닐까?!

 

근데 쥐박이는 이런 주의들을 알기나 할까?

 

이 주의들은 쥐박이의 군바리 스타일을 가장 혐오하는데!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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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롯데-한화 경기...

어제부터 다시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 첫 경기 중 하나가 롯데-한화 전이었다.

어제 롯데는 펄펄 날았다.

3,4,5번의 클린업 트리오가 각각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3번 조성환, 4번 이대호, 5번 가르시아!

결국 경기는 11-4로 이겼다.

 

어제 선발은 손민한이었다.

손민한, 어제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았다.

올림픽 기간에 푸욱 쉬었을 텐데...

실투라고 할 수 있는 공들이 좀 됐다.

제구력이 좀 안 좋아 보였다.

경기 끝나고 나오는 손민한의 얼굴 표정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

다른 동료 선수들에게 미안하기도 한 표정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하면서 까칠한 표정이었다.

컨디션 안 좋을 때 거의 내 표정이랑 비슷했다.

이걸 어찌 아냐고? 느낌으로 안다! ^^

 

그래도 타자들이 잘 해 주었다.

특히 가르시아가 펄펄 날더라.

역시 올림픽 휴식이 보약이었던 것 같았다.

스윙이 일반적으로 힘이 있고 날렵했다.

이 보약 기운이 페넌트 레이스 끝날 때까지 가야 할 텐데...

치킨을 어제처럼 오늘, 내일 잘 튀겨야 할 텐데...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던 멕시코 투수 코르테스를 영입했단다.

그런데 이 투수 멕시코 자국 리그에서 소방수로 활약했던 모양인데,

방어율이 0.6정도밖에 되지 않았단다.

확실한 마무리를 할 수 있겠다 싶은 희망이 생긴다.

제일호 감독께서 오죽 잘 뽑으셨을까마는...^^

 

좀 있음 향남옹(향운장)도 부상에서 복귀한단다.

그럼 불펜, 마무리 마운드는 확실해지지 않을까?

향운장을 중간으로 카르테스를 마무리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제일호 감독께서 그리 하시겠지^^.

 

하여간 가을엔 야구할 수 있겠다^^.

갈매기여,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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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처럼[동요]

[바위처럼]
(글/유인혁 가락/유인혁)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이 노래 <바위처럼>이 동요라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노래가 동요로 분류돼 있는 동요 사이트가 있더라^^.
이 노래가 동요란 게 좀 낯설긴 한데,
이 노래가 동요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http://www.1004sori.com/manhwa/manhwa.htm 
요기 사이트에 가서 동요 감상실의 'ㅂ' 분류 항목으로 가면
<바위처럼>이라는 동요를 들으실 수 있다^^.
동요를 듣고 싶고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사람,
옛날 만화 주제가를 듣고 싶은 사람 들은
조기 사이트에 가셔서 들으시면 되겠다.
덧니> 개인적으로는 <가을맞이>라는 동요를 같이 듣고 싶었는데,
복사해서 같이 듣기가 나로서는 도저히 안 되더라^^.
저 사이트에 가셔서 꼭 들어보시라, <가을맞이>라는 동요를^^.
가을을 좀더 잘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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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개학이 다다음주로구나...

이렇게 방학이 빨리 지나갈 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ㅠ...

방학이 딱 한 달만 더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을 좀 다잡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 같은 귀차니스트의 말로가 이러한 것인가...

 

여이연의 [유물론적 페미니즘]도 아직 정리하지 못했는데...

5번 강좌(참석한 것은 2강부터 5강까지 4번) 중에서 겨우 2강 한 강좌만

어찌어찌 정리했는데... 이것도 잘 정리하고 싶고...

 

교육과 관련한 논문도 기획해서 목차도 잡고 살살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목차도 못 잡고 있고...

교육 관련 논문 등 자료도 꼼꼼히 살펴야 하고...

 

지금은 라라인의 책(이 저자의 책은 <맑스주의와 이데올로기>로 이미 국내에 번역돼 있다) 중에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근대성과 제3세계의 현재>라는 책을 공동 번역 중인데,

이번 주까지 선배에게 초고 넘겨 줘야 한다...

이 책 번역 작업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하게 됐다^^.

내가 디지털이 돼지 못해서리,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는 처지라서

안 하려고 했던 것인데...

 

번역 작업 중에 혼자 궁시렁궁시렁대다가 불질하고 있다.

 

나의 살던 방학은 꽃피던 방학...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우 모냐, 이거...

더위 한풀 꺾였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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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4,5

 

4.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

▶(나의 생각) 여기에서 <외부>라고 하는 말은 ‘가사노동=사적인 노동 영역’이라는 범주 외부를 가리키고 있는데, <사회적>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쓰이는 것 같다.

▶(나의 생각) 여기서 주요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생산양식의 의미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단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인 개념이며, 한 역사적 시대의 지배적인 생산 체제 전체를 생산양식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있을 뿐이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생산양식 외의 다른 어떤 생산양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한 역사적 시대에 지배적인 생산양식인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에 다른 어떤 생산양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식의 뉘앙스를 지닌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물론 다른 생산양식이 나타날 가능성을 지닌 싹을 지배적 생산양식이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생산양식이 양립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봉건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생산양식인데, 그 속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싹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봉건제 생산양식이라고 하지, 봉건제 생산양식+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생산양식 체제가 2가지의 질적으로 서로 다른 운동 과정, 즉 자본의 자기 생산 운동 과정과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운동 과정으로 이루어져서 이런 혼동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각기 다른 운동 과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결코 그 운동 과정을 자신의 운동 과정의 결과로 삼지 않는다. 즉 애초에 자본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자신의 운동 과정의 최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고(목적으로 삼게 되면 자본은 더 이상 자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해체된다), 노동자는 자본의 최대 이익 생산을 위하여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는 이렇게 2개의 이질적인 운동 과정의 통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2개의 운동 과정 중에서 <가사노동>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운동 과정은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과정’이다. 가사노동이 없이는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불가능하다.   


① 존 해리슨, “가사노동의 정치경제학(1973)”

- 사회주의 경제학회에서 발표. 사회주의 경제학회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 분석의 잠재적인 교차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보다는 마르크스 분석에 보다 주요한 관심이 있었다.

- 가사노동을 “경제 사회체계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지배적 양식에 의해 창조되거나 혹은 선택된 종속양식”.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양식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생산양식을 구성한다고 주장.

▶(나의 생각) 가사노동과 관련하여 이 2개의 설명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자의 설명에서 가사노동이 지배적 양식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창조된 ‘종속적 양식’이라고 한 것이라고 해 놓고서는 후자의 설명에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생산양식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속양식=명확히 구별되는 생산양식>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의 맹아 형태를 띠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 해리슨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② 폴 스미스.

- 가사노동 논쟁과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관련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생산양식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엄격성이 부족하다는 것.

▶(나의 생각)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내 생각엔 생산양식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엄격성이 부족한 것은 포 스미스 자신이 아닐까 한다.

- 필요노동과 생산 노동의 혼동.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 조건을 확립해 주는 활동들은 비록 그것들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하여 기능을 갖는다 할지라도 외적인 것.

-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위한 외부적 필요성으로 개인화된 가사노동”

- 가사노동 논쟁에서 생산/비생산 논쟁 모두 가사노동이 사적인 노동으로 된 것, 즉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배제된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오류는 두 입장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이 배제된 부분을 포함시키고자 한다는 것.

- 가사노동을 소외시킨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것.


가사노동을 여성억압을 구체적 역사 속에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열쇠로 파악된다. 즉 가사란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특수한 종속을 규정하는 중심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할 거리)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논의가 여성의 지위/억압/불평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여성주의 정치경제학과 가사노동

- “보이지 않는 가슴”

- “싸이버타리아트”

--> 강사 선생님께서 위 주제와 관련해서 보아야 할 책 목록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가슴”이 영화라고 말씀하셨는지, 책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딴 짓을 하고 있었나 보다.^^ 


(참고문헌) 

- 아네트 쿤, 앤 마리 울프, 『여성과 생산양식』, 강선미 역, 도서출판 겨레, 1986.

- 조세핀 도너번, 『페미니즘 이론』, 김익두, 이월영 역, 문예, 1993.

- 레오뽈디나 포트 뚜나띠, 『재생산의 비밀』, 윤수종 역, 박종철출판사, 1997.

- 로즈마리 통, 『페미니즘 사상』, 이소영 역, 한신문화사, 1995.

- 어휼러 휴즈, 『싸이버타리아트』, 신기섭, 갈무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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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3

 

3.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

▶(나의 생각) 앞에서 말했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은 상품화된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1) 소외되지 않는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 


① 리스 보겔(Lises Vogel, “지상가족 The Earthly Family”(1973))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는다고 주장.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용한 노동이기 때문에 모은 노동이 일차적으로 유용한 것이 되는 미래사회를 제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정주부는 “소외되지 않는 생산 활동의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다.”


②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노예사회에서의 흑인 여성의 역할에 관한 성찰 Reflection on the black Women`s Role in the Community of Slaves”, 1973)

흑인 여성의 비판적 의식과 노예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흑인 여성의 이중적 인식이었으며, 그 이중적 인식은 소외된 생산노동의 공적인 세계와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개인적 세계 양쪽에 다 관여한다는 사실.

▶(나의 생각) ①의 리스 보겔 견해보다는 ②의 안젤라 데이비스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가사노동은 단순히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소비될 (남성)사용가치인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이라는 사용가치는 전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③ 엘리 자렛츠키(Eli Zaretsky, “자본주의, 가족과 개인의 삶 Capitalism, the Family and Personal life”, 1976)

소외되지 않은 개인적 영역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논의. “어떤 개인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친 세계”로부터의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피난처”가 되고, “가족 내에 있는 여성에게 노동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되었다.”

▶(나의 생각) 이 의견은 여성의 성분업적인 역할을 신성하고 위대한 것으로 미화시켜 여성을 끊임없이 가사노동에 얽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 소외된 노동

질라 아이젠스타인은 어떤 특정한 집단에 미리 할당되는 임무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므로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 “사회 안에서의 노동의 성적인 분할은 특히 여성에게는 비창조적이고 고립적인 일을 떠맡게 된다.” 

▶(나의 생각) 위에서 ‘소외되지 않는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의 사용가치만을 생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외’는 ‘상품화’, 즉 ‘상품 가치의 생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외’는 ‘자신의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1)과 2)에서 쓰이는 소외의 의미는 스펙트럼이 다르다(물론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둘셋 정도의 매개를 거쳐야 한다). 동일한 소외의 의미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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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피했더니 여우의 굴에...

곰탱이님의 [벌레들과 동거 중... ] 에 관련된 글.

작년에 살던 곳에서 벌레와 더위 때문에 무쟈게 고생을 했다.

그러다 늦가을에 난방비가 20만 원 정도 예상이 돼서 아예 이사를 해 버렸다.

1층 월세에서 반지하 전세로! 

 

겨울엔 개미들 때문에 초반에 고생을 했지만,

개미를 없애는 약을 치고 나서는 개미가 없어졌다.

(혹시 개미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은 제게 말하시라.

어떤 약을 써야 하는지 단박에 가르쳐 드리겠슴다.

일주일만에 완죠니 사라지더만요^^.)

 

그런데 올해 5월 중순이 시작되면서 날아다니는 벌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날파리들과 지네, 쥐며느리, 모기(여기까지는 지난 번 집 하고 비슷하다),

7월 중순부터는 때 아닌 귀뚜라미가 방에서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거다,

그것도 사알 잠 드려고 할 때!!!

작년에 어느 정도 단련이 돼 있어서 그러려니 한다.

(바퀴벌레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ㄲㄲㄲ...)

그리고 벌레 잡으면 웬만해서는 한 50%는 살려 준다.

귀뚜라미는 백프로 살려 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격적으로 늦봄이 시작되고 보일러를 틀지 않을 때부터

비가 오고 나서 벽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해서 방바닥의 두 쪽 하단의 벽에 곰팡이가 피기 지작했다.

그래서 보일러를 틀고 팡이제로를 뿌리고 난리를 쳐 봤지만,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고 곰팡이 냄새 때문에 어떤 때는 숨을 쉬기 함들 정도이다.

밤에 집에 들어서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래서 하루 종일 선풍기를 틀어 놓고 산다.

반지하는 기본적으로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법으로 반지하에서 못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옥탑 방이 더 낫지 싶다.)

현관문은 결코 열어 놓을 수가 없다.

오만 벌레들과 귀뚜라미들이 무단으로 동거하려고 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 선선한 가을이 와야, 그리고 보일러를 때야 곰팡이도 없어지고, 벌레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 C~~~!

호랑이를 피하려고 했더니만 그게 여우 굴일 줄이야...ㅠ...

하여간 담에 이사할 때는 일단 환기 잘 되는 집으로 이사해야겠다...

근데 환기 잘 되는 집은 돈이 비싸다!!

글고 난 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할 텐데,

내 머리로는 답이 안 나온다...

 

누가 해결 방법 좀 아시는 분 계시면 지혜를 쬠만 나눠 주삼!!!

 

사례하게씀!!!

(맛좋은 생맥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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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08여름강좌] 2-2

 

2. 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나의 생각) 제목과 관련해서, 위의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밑에 나올 내용들과 또한 위에서의 큰 틀과 연관해서 볼 때, <비생산적 노동/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으로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강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강의안 만드시느라 살짝 빼먹으신 것 같다^^. 

* 가사노동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그 자체가 소비되는 일련의 서비스(비물질 생산)와 즉각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보는 것(비생산적 노동).

-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노동력이라는 명백한 생산물을 만드는 활동으로 보는 것(생산적 노동).

▶(나의 생각) 이 두 시각이 내가 볼 때에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고, 자본주의 구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임금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양손에 자본주의라는 칼과 가부장제라는 칼을 들고 있는 페미니즘이 어떤 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오지 않나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사 선생님께서 요즘은 가부장제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임옥희 선생 같은 분은 가부장제 대신에 ‘가부장 시스템(구조)’으로 쓰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못 들었는지, 아니 이해를 잘 못 했던 것 같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와 가부장제도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역사적인 시간에 제약을 받는 역사적 산물이다. 가부장제도 역시도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라는 것은 시대적인 지배 권력 형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사적인 자본주의와 역사적인 가부장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페미니즘 내에서 사실상 철학에서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인 물질-정신과의 문제만큼이나 근본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 제도라고 하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이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 권력 체제보다 하위의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증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은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나는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구조 틀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바티유와 알튀세의 구조주의로부터 차용한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1) 가사노동의 사회화 -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

* 벤스톤(Margaret Benston,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21, no.4(September, 1969)

- ① 여성은 본래 생산자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 “가정과 가족과 관련된 그런 행위들 속에서 단순한 사용가치품의 생산을 책임 맡고 있는” 하나의 계급을 구성.

- ② 가사의 사회화. 그것이 반드시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 ③ 가사노동 임금화 반대. 다른 일을 할 기회 박탈, 상품화 경향에 일조, 노동의 성적 분업의 유지.  

▶(나의 생각) ① - ㉠ 여기서 벤스톤은 생산과 소비를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에 한계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본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켜 놓고 (자본의) 생산을 주도적인 것으로 보고, 소비를 하찮은 것으로 보는 자본의 시각이 ‘여성은 본래 생산적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이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여전히 자본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서의 노동자 생산을 늘 (생산의 영역과 동떨어진) 소비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것으로 볼 위험성이 크게 된다. 생산을 이제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소비와 생산의 분리를 전제로 삼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생산은 곧 사용가치의 소비를, 즉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가사노동을 ‘단순한’ 사용가치의 생산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도대체 ‘단순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만일 ‘단순한’을 그야말로 말 그대로 ‘단순한’, 즉 예를 들어 시장에 가서 비누 등과 같은 상품들(사용가치)을 구매해서 그 사용가치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집에서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비누를 만들고 그 비누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본처럼 가사노동을 정말로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사용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다른 한편, 복잡한 사용가치란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 것인지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단순’과 ‘복잡’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도 설명되었더라면 좋겠다.

㉢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고 했는데, 이 계급은 자본과 적대적으로 대립해 있는 노동자 계급과는 별개의 노동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제3계급처럼 보인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본-노동의 두 계급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또 하나의 계급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있는 이 ‘하나의 계급’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계급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모호하다.

②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하나의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따라서 그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일 터인데,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인 물질적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라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③ 다른 한편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화를 사람들이 상품화, 자본화와 등치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적 영역’에 있는 가사노동을 사회화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화를 ‘공적 영역’인 ‘상품화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관념적인 수준에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가사노동 임금화

* 달라코스타/제임스(Mariarosa Dalla Costa, Selma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Community”, Falling Wall Press, 1972)

- ①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붕괴”(1972) : 가사노동도 노동력 상품의 교환가치에 관여하고 따라서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가사노동이 생산적임을 주장.

- ② “the double day” -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

- ③ 개별적인 남성들이 아니라 정부와 고용주가 가정주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

- ④ 자본주의는 남성들과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창조하려면 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그러한 반란은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닌다.

- ⑤ 가사노동이 ‘간접적’으로 생산적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하여, 여성이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둘러싸고 보편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주장.

- ⑥ 여성이 의식화된 상태에서는 그들의 종속 원인이 물적 기반을 소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에 대한 비판

-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주장을 약화.

- 여성들이 맑스주의적 ‘계급’을 구성한다는 주장의 오류.

- 자본이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

▶(나의 생각) ①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임노동으로 편입시킬 때,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하고 맑혀 낼 수 있지만, 동일한 임노동이라는 차원에서 보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 부분은 은폐될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생산적’ 측면을 ‘자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 즉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②, ③, ⑥ “the double day”는 여성이 밖에서 하는 임금노동과 임금노동으로 편입되지 못한 가사노동의 이중적 노동의 담당자라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아래에서 여성이 자신의 물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이러한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을 단일한 임금노동으로 환원함으로써 임금이라는 (남성)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물적 토대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④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남성과 어린이들의 노동력 창조’라는 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력 창조의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환원시켜 볼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맑스주의에서 생산력-생산관계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을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에서 찾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여성이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⑤ 위의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의 계급’이란 자본-노동계급 이외의 제3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다른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임노동자로서 여성이 제3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 생각한다. 먼저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노동자계급의 임노동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어쨌거나 지금의 이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며 언제나 노동자계급을 분리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두 번째로 임노동자의 계급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본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로 분리된 이 두 계급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무한 경쟁을 하게 되는 위험성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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