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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초고용계약 철회가 남긴 것

 

프랑스 민중들의 거센 저항으로 최초고용계약(CPE)조항이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총파업 투쟁과 동맹휴학 앞에서 결국 철회되었다. 특히,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용유연화를 수용해야한다며 우파정부가 내놓은 신자유주의적 대안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프랑스 전역의 150개 도시에서 300만 명 이상의 시위가 벌어진 것도 근래 보기 드문 양상이었다. 게다가 CPE가 이미 의회를 통과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 3분의 2이상의 반대물결 앞에서 시라크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빌팽 총리의 작품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관련법안의 국회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가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프랑스의 반CPE 투쟁은 여러모로 관심대상이다.

 



 


프랑스 반CPE투쟁


CPE를 둘러싼 극적 대립은 2005년 6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입각 직후 ‘고용을 위한 긴급계획’을 발표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아야 한다. 이후 빌팽 내각은 고용문제의 심각성을 이유로 국무회의에서 6개의 입법적 행정명령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 ‘신규채용을 위한 근로계약’제도의 도입계획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신규고용계약(CNE)’으로서 사실상 최초고용계약(CPE)의 모태이다. CNE는 20인 이하 사업장에 한해 수습기간 2년 동안 고용주가 특별한 사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으로서 지난해 말 발효되었다. 20인 이하라는 전제가 달려있기는 했지만, CNE는 근로계약기간 중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도록 되어있던 기존 고용계약과 달리, 2년 기간 동안은 정당한 사유를 입증하지 않고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서 프랑스 사회에 있어서 기존 노동법 체계의 근간을 뒤집고 획기적으로 고용유연화를 도입한 일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계가 반발하기는 했지만 CNE는 별다른 저항 없이 통과되었다.


CPE는 기회균등법의 한 조항으로서 20인 초과 사업장에서 26세 미만 노동자를 채용할 때 적용된다는 점에서 다를 뿐, 사실상 CNE와 같은 제도이다. 그런데 폭발적인 반발과 시위는 지난 1월 CPE를 도입하겠다고 하면서부터였다. 빌팽 총리는 기회균등법에 CPE를 추가하여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인종차별과 청년실업 문제가 중첩되어 발생한 방리유 지역의 이민자 2세 소요사태가 발생한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가운데 총리의 CPE 도입발언은 기름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학생층에게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해고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고용자가 갖는 채용부담을 줄이고 고용창출을 장려한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었지만(빌팽은 이를 일컬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고 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CPE는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고용불안을 제도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학생들은 “학생들을 ‘크리넥스’ 취급한 것”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사실 프랑스의 CPE는 덴마크모델을 본뜬 것이다. ‘기업이 해고도 고용도 자유롭게 하는 대신 해고당한 이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고용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노력한다’는 것으로 최근 유럽 사회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모델이다. 구직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취직한 사람처럼 경제적 보상을 주고 구직자들을 직업훈련장으로 유도함으로써 소득보장과 함께 재취업을 원활히 한다. 덴마크는 90년대 초반 실업률이 10%까지 치솟았으나 현재 유럽 내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덴마크는 세금부담이 높고 인구가 적은 환경에서 예외적으로 성공한 경우라고 보는 것이 옳다. GDP의 4.4%를 실직자 재교육에 쓰고 직전임금의 90%를 실업수당으로 지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1월 31일의 시위를 시작으로 두 달 이상 프랑스는 시위의 물결로 뒤덮였다. 2월 7일 CPE 반대 제1차 행동의 날에 40만 명이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시위대의 숫자는 점차 100만, 150만으로 불어나기 시작했고 3월 28일 1차 총파업에는 300만 명이, 4월 4일 2차 총파업에는 이보다 더 많은 시위대가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결과는 누구나 알고 있듯 법안폐기로 이어졌다.


프랑스 반CPE투쟁의 전망과 신자유주의


이번 반CPE투쟁을 이끌었던 운동주체들은 이제 CPE의 사실상의 모체인 CNE(신고용계약)의 철회까지 나선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 자체에 대한 반대전선으로 확대될 것인지의 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으로만 본다면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의 물꼬였던 CNE의 철회를 위해서는 300만이 아니라 600만의 힘이 필요한 셈이어서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 철폐의 씨는 뿌려졌다.


영국과 미국의 언론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고용과 복지를 중시하는 ‘프랑스 모델’을 고비용·저효율이라며 헐뜯었고 프랑스의 높은 청년실업률을 들어·‘프랑스모델’이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아마도 그들에게 이번 CPE법안의 철회는 노동유연화를 향한 아까운 기회를 놓친 것으로 읽혀질 것이다.

프랑스의 청년실업률이 대략 22%에 달하고 영국(10.9%), 미국(12%), 독일(13%)보다도 두 배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상교육시스템 덕에 프랑스의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져있는 현실이 고려되지 않은 통계라는 지적이 있다(경향신문, 2006. 3. 24일자, 11면). 프랑스의 청년층 총인구는 784만 명인데 노동시장의 청년층은 268만 명에 불과하여 청년층의 60%가 학생인 실정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근거로 할 경우 실업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청년층 총인구수를 기준으로 실업자 비율을 산출할 경우 7.8%로서 영국(7.4%)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청년실업률 하나만을 가지고 프랑스모델이 성공이나 실패냐를 운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우파정부가 최근 10여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이 실업과 저성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헤어났는지를 되묻고 싶다. 만일 헤어났더라도 경제회복의 수혜를 누가 가져가고 있는지 소득불균형 상태는 더 악화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지 20년을 훌쩍 넘겼다. 남미에서처럼 그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 대안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의식이 커가고 있는 마당에 ‘프랑스병’이니, 영미식 모델이 좋으니 덴마크모델이 대안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의 시사점


노동자들을 2년마다 갈아치울 수 있게 하는 한국의 비정규직법안은 26세 미만 신규채용자에 한해 2년 이내에 사용주가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CPE에 비하면 더더욱 악법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프랑스에서의 CPE 철회가 비정규직법안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처럼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대를 이어서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칭송하고 영미모델이 절대선인양 고용유연화에 앞장서왔고 비정규직법안의 관철을 기필코 하고야 말겠다는 태도다. 한미FTA 협상을 무리해서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프랑스 CPE 폐기사례를 보건대 노무현 정부가 깨끗이 비정규직법안을 포기하고 한미FTA 협상을 중단할런 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민중들의 투쟁과 여론에 달려있다.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양산, 일상적인 해고에 따른 소득저하와 임금하락이 빈곤층의 확대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 그에 정비례하여 자본이윤과 주주이익이 급증하고 신자유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특권귀족의 지위가 나날이 타워팰리스 높이만큼이나 오르는 현실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평등주의적 가치, 보편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 본다(민대 83호 초고).


<투쟁경과>; 베끼고 덧붙임

2005년 

○ 6월 드빌팽 총리 취임

○ 8월 CNE(Contrat Nouveau Embauche, 신고용계약) 도입. 20인 이하 고용기업의 경우 새로운 직원을 2년간 수습을 거쳐 정식채용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CPE와 같은 제도임)

○ 11월 방리유 지역 이민자 2세 소요사태


2006년

○ 1월 16일 드빌팽 총리 내각 CPE 발의


○ 1월 16일… 빌팽 총리는 일명 '고용 전쟁'의 2단계로 26세 이하의 젊은이들에게 2년의 수습기간을 강제하고 이 기간에 특별한 사유 없는 해고를 허용하는 최초고용계약(CPE) 계획을 발표. 노조와 좌파 정당은 즉시 빈곤 강화 법안이라며 반발

○ 1월 31일… CPE 계획이 포함된 기회균등법안 긴급 검토, CPE 철회를 요구하는 첫 시위 발생

○ 2월 1일… 시라크 대통령,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CPE 옹호 발언

○ 2월 7일 CPE 반대 1차 행동의 날 시위 (40만명)


○ 2월 9일 … 좌파 정당의 반대 속에 빌팽 총리, 헌법 49조 3항에 의거 기회균등법을 하원에서 통과시킬 것 호소

○ 2월 16일 … 방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반 CPE 시위 전개됨

○ 2월 21일 … 하원, 사회당(PS)이 제출한 불신임안을 거부

○ 2월 23일 … 고등학생, 대학생, 노조가 주축이 된 반 CPE 시위 이어짐

○ 3월 1일 … 프랑스전국학생연맹(UNEF), 전국 13개 대학이 수업거부를 결의했다고 밝힘

○ 3월 6일 … 총 90시간의 논쟁 끝에 상원에서 기회균등법 통과

○ 3월 7일 CPE 반대 2차 행동의날. 프랑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노동계와 대학생 등 100만 명(경찰추산 40만) 대규모 시위. 30여개 대학 학생들 수업거부 선언. 드빌팽 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정책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발언.


○ 3월 8일 CPE 하원 통과. 소르본 점거농성. 일간지 <르 파리지앙>, 55%의 프랑스인이 CPE 철회에 찬성한다고 발표

○ 3월 9일 … CPE 상원 통과(178:127) - 4월 말부터 시행예정, UMP 의원 에르베 드 샤레트 CPE 중단 요구

○ 3월 10일 … 소르본에서 학생과 경찰 무력 충돌. 전국대학생연합(UNEF), 총 84개 대학 중 45개 대학이 수업 거부 중이라 발표. 질 드 로비앙 교육장관, 8개 대학이 폐쇄됐으며 26개 대학이 혼란 상태라 발표

○ 3월 11일 … CPE 철회를 요구하며 소르본 대학을 점거한 학생 200여 명 특수경찰에 의해 해산됨. 1968년 이후 최초. 푸아티에에 모인 전국 학생 대표는 총회를 열고 항의 시위 계속할 것을 결의


○ 3월 12일 … 프랑스 민영방송 <테에프1(TF1)>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빌팽 총리 대국민 연설. CPE 개선 의사는 있으나 철회 의지 없음을 시사

○ 3월 13일 … 반 CPE 시위대 꼴레주 드 프랑스 점거, 몇 시간 후 공권력에 의해 해산됨. 전국대학생연합(UNEF), 전국 52개 대학이 부분 또는 전체 동맹휴업 참가하고 있다고 발표. 브뤼노 쥘리아르 대표, “물 한 컵으로 숲의 불을 끌 수 없다”. 11개 대학이 폐쇄조치되고 26개 대학에서 경찰과 대치.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적극 가담

○ 3월 14일 … 사회당은 CPE를 헌법위원회에 제소했다고 밝힘(헌법의 ‘평등정신’ 위배 이유), 시라크 대통령, 베를린 방문 중 CPE에 관한 빌팽 총리의 의지에 '전폭적인 지지' 선언


○ 3월 15일 시라크 대통령, 새 노동법에 관한 대화 촉구


○ 3월 16일 … 전국에서 반 CPE 시위. 전국 200여개 도시 최소 50만 명이상, 64개 대학과 100여개 고등학교 참가. 화염병, 투석, 최루탄, 물대포 등 치열. 분쟁 2개월째인 이날 시라크 대통령은 '가능한 빨리' 대화를 할 것을 주장, <프랑스2> 텔레비전은 국민 대다수인 68%의 프랑스인이 반 CPE 시위에 찬성하는 설문결과 발표


○ 3월 18일 CPE 반대 3차 행동의 날. 150만명 시위. 파리에만 35만명. 대학생(UNEF), 고등학생(랴이), 학부모, 노동계(CGT, CFDT, FO), 야당 등 최대규모. 시위조직들은 공동성명에서 48시간의 여유를 주며 오는 20일 저녁까지 CPE철회할 것과 철회하지 않을 시 전국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는 최후통첩 선언. SUD-PIT 소속 노조원 한명 의식불명 상태.


○ 3월 20일 노동계, 28일 총파업 결정. (애초 학생들은 23일 파업을 호소했음. 학생들은 21일 시위 예정. 23일에 역시 대규모 노동자-학생 연합시위 계획)


○ 3월 23일 대규모 시위. 420명 체포. 드빌팽 총리는 최초고용계약 내용일부 수정가능 시사.


○ 3월 28일 1차 총파업 및 동맹휴교. 전국 300만 시위참가.


○ 3월 31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CPE 등이 담긴 새노동법 조건부 서명(CPE 완화하는 새 법통과 때까지 시행유보한다는 단서).


○ 4월 4일 2차 총파업 및 동맹휴교. 전국 300만 이상 시위참가.


○ 4월 10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CPE 폐기 발표(CPE를 대체하는 조항 마련하여 입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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