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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EPA]31일(현지시간) 과테말라 시에서 1980년 1월 스페인 대사관 대학살 희생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형 관들 사이를 한 소년이 지나고 있다. 과테말라의 도나르도 알바레즈 전 내무부장관은 당시 원주민들이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농성하자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39명이 사망하고 스페인과 단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은 사회전반의 빈부 격차와 이데올로기 갈등때문이다. 정부의 군부 우익세력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및 산악지역의 원주민과 농민들을 대표하는 좌익게릴라 세력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1944년 오랜 군사독재로부터 벗어나 민주정부가 수립된 과테말라는, 그러나 국민의 2%가 국토의 72%를 소유할 정도로 사회적 모순이 극심한 나라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대지주는 정작 미국 기업인 유나이티드 푸르츠 컴퍼니(UFCO)로 대서양 연안에 22만 헥타르의 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85%를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그 회사는 과테말라의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1951년 65%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야코로 아르벤스 구스만은 민주주의의 강화, 불공정한 경제체제 및 토지분배의 개혁을 추진했다. 1952년 6월 27일 발표한 훈령 900호는 모든 이용하지 않는 땅을 유상 수용, 재분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자신의 땅을 포함하여 총 60만 헥타르가 국유화되었고, 그 수용 비용으로 830만달러가 소요되었다. 62만 8천불의 국채를 받고 8만5천 헥타르의 땅을 몰수당한 UFCO는 본국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는 1,590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했다.
아르벤스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아이젠하워 정부는 과테말라를 소련의 동맹국으로 낙인찍기 시작한다. 53년 8월 미 정부는 아르벤스 정부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 비용으로 270만 달러를 푼다. 결국 주변국과 자국 대지주들도 아르벤스 정부에 등을 돌린다.
민주정부 수립 후 온두라스로 망명을 간 군부 지도자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망명군을 창설해 조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르벤스 정부는 국방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과테말라의 무기 수입을 봉쇄한다. 결국 아르벤스 정부는 체코와 협력했으며, 이는 아르벤스 정부를 친공 정부로 낙인찍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54년 6월 18일 아르마스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미 CIA는 라디오 방송국과 일부 정부 기관을 접수하여 쿠데타를 돕는다. 군대도 정부에 협력하지 않자, 6월 27일 아르벤스는 망명의 길을 떠난다.
아르마스는 무자비한 우익 독재를 펼치면서, 아르벤스의 사회개혁 조치들을 무효화했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농민 및 좌익 반란군이 35년간 미국과 정부군에 맞서 끈질긴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다.

1994년 6월 23일 오슬로에서 설립된 역사규명위원회가 18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1999년 발표한 보고서 "과테말라 : 침묵의 기억"은 과테말라 정부가 마야 부족의 말살 및 여타 시민들에 대한 학살과 인권침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위원회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약 20만명이 사망 및 실종되었고, 확인된 대량학살 현장만도 630건에 달했다.
그 학살 중 1980년 1월 31일 스페인 대사관 점거 시위에 참가했다가 불타 죽은 마야 부족 우스판탄 부락의 족장 비센티노 멘추의 딸인 리고베르타 멘추는 당시 정부군의 잔학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세계 여론을 움직이고 과테말라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공로로 그는 1993년 노벨상을 타게 된다.
1991년 세라노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3월에 과테말라 민족화해위원회(CNR)와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사이에 평화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군부의 반발로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 1994년 1월 10일 정부와 URNG간의 평화협상이 재개되어, 3월 인권관련 합의 및 6월 난민송환 합의, 1995년 3월 원주민의 정체성과 권리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냈다. 1996년 1월 평화협정을 우선 정책으로 둔 아르수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에 힘입어 3월에는 교전 중단을 합의하였고 그 해 12월29일 마침내 영구평화 정착에 합의함으로써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97년 5월, UN 군사참관단의 입회하에 URNG의 무장해제가 완료됨에 따라 과테말라 정부도 총 군전력의 33%를 감축하였다. 따라서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총 10만명의 사망자와 5만명의 실종자, 2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내전이 끝나게 되었다(UN위원회는 20만명 이상이 내전기간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1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은 11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정당을 설립하고 등록하였다.
그러나 1998년 4월에 교회 차원에서 정부의 만행을 심층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했던 후앙 호세 게라르디 주교가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2001년 이 사건에 관련된 3명의 군인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이 재판에 관련된 판사와 검사, 증인들이 협박을 받고 국외로 도피한 것은 과테말라 민주화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보수 정당의 정권이 유지되고, 중남미에서도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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