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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보수혁명 원희룡

[뉴리더]‘보수혁명’ 꿈꾸는 뚝심의 승부사

뉴스메이커 651호

당내 ‘왕따’ 자처하는 ‘1등 인생’… ‘정치의 서브스리’ 목표 역동적 정치행보



한나라당에서 가장 한나라당답지 않은 정치인을 들라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원희룡 의원일 것이다. 한나라당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소신으로 당내 갈등을 빚는다든가 ‘톡톡 튀는’ 행동으로 대중적 관심을 사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그는 당내에서 ‘왕따’를 자초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간첩’ ‘박사모의 공적 1호’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듣고 있으며 심지어 “탈당하라”는 압박까지도 받는다. 실제로 그는 열린우리당에 가면 편하게(?)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더 많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의 정치적 목표가 한나라당에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발 원희룡표라는 정책상품을 만드는 공장장이 되겠다”는 게 그의 말이다.

바로 이 점이 그가 한나라당 보수파의 ‘집단 린치’에 못 이겨 탈당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와는 다른 면모다. 유약한 듯한 외모나 이력과 달리 그의 내면에는 강한 뚝심과 투지가 엿보인다. 그는 이제까지 1등 인생을 살았다. 학력고사 전국수석, 서울대 전체수석, 사법시험 수석합격이라는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검사, 변호사, 그리고 국회의원 재선을 거쳐 당내 ‘서열 3위’라고 할 수 있는 최연소 최고위원에 오른 정치이력도 비교적 순탄하다.

가슴에 박힌 ‘아크로폴리스의 장미’

이처럼 ‘귀한 집 도련님’ 이미지도 한 꺼풀 더 벗겨보면 그 내면에는 질풍노도의 과정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 역시 ‘정치인 원희룡’을 ‘정치 뉴리더 원희룡’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바탕이자 향후 ‘원희룡표 정치’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동력이 될 듯하다.

원 의원은 서울대 82학번이다. 그의 표현대로 ‘기구한 운명의 학번’이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 정권 하에서 속으로 칼을 갈며 대학생활을 보내다가 1984년 이른바 ‘유화국면’을 맞아 대중운동을 폭발시킨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많은 투옥자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무렵 전개된 학생들의 집단적인 공장 위장취업에 대거 동참한 것도 바로 이들 세대다.

‘제주도가 낳은 수재’ 원 의원도 이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순진한 공부벌레였던 그가 제 발로 운동권에 가담한 것은 입학한 지 석달도 되지 않았을 때다. 1982년 5월 2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년 전 ‘전두환 물러가라’고 절규하며 중앙도서관 6층에서 투신한 김태훈(당시 경제학과 4) 추도식이었다. 원 의원의 운명을 뒤바꾼 ‘아크로폴리스의 장미’는 이날 시위의 가장 인상 깊은 후일담으로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의 변화는 ‘시간과의 싸움’

“아크로폴리스에 장미가 심어져 있었어요. 친구들이 시위하다가 흩어져 도망가던 중 장미 가시에 찔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어요. 그게 박혀서 평생을 가는 겁니다. 아크로폴리스에 심어진 장미 넝쿨, 거기에 찔려서….”

원 의원은 이 시위를 계기로 운동권 학생으로 변모한다. 당시 가장 투철한 투사로 알려진 1년 선배 이정우씨(현 변호사)를 찾아가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사복회)의 일원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학과 공부는 아예 접고 야학·후진양성·위장취업 등 운동의 일선에 있었다.

여기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원희룡’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989년 사회주의 몰락사태는 그에게 2년 가까운 방황을 안겨주었다. 믿었던 신념과 가치관이 무너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전국을 무전여행했다.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다양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뒤 그는 생각을 바꿨다. 공개선언을 통해 ‘전향’을 한다는 것이 이미 후배 운동권에 ‘전설’이 돼 버린 ‘혁명투사 원희룡’으로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에서 온건사회주의까지’ 이념의 폭을 설정하고 자신을 어디에 세워야 할지 고민한 그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숙제를 푸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옛 소련과 북한식 사회주의는 실패작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학생 시절의 좌파적 노선은 청산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장미’는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을 택한 그의 정치적 좌표도 ‘보수혁명’이다. 그 말 속에는 기존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국가운영전략을 세우고 그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좌파적 방법론이 아닌 우파적 방법론을 제시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하겠다.

원 의원이 보는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는 크게 4가지다. 영남당(지역)·부자당(계층)·반공당(이념)·노인당(세대)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부정적인 장막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안주하려 한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이것이 그가 ‘독불장군’ ‘제2의 박찬종’이라는 말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다.

한나라당을 변모시키는 것, 원 의원은 이를 ‘시간과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간이 가면 자연히 해소될 부분도 있고, 국민이 채워줄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3명만 있으면 시간과의 싸움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 아니, 혼자서라도 가능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일관성과 내용”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기도 한 원 의원은 마라톤 풀코스에 7번 도전했다. 그 가운데 6번을 완주했다. 아직 4시간 벽도 깨지 못했지만 그는 서브스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꿈꾼다. 어릴 때 사고로 오른쪽 발가락이 기형인 그는 이 때문에 병역을 면제받았다. 마라토너에게는 치명적인 이 장애를 딛고 서브스리에 도전하듯 그는 ‘정치의 서브스리’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 의원은 백두대간 등정에도 도전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50구간으로 나눠 2009년까지 완전 등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카트라이더 등의 게임을 즐기며 프로게이머 임요환씨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자녀를 이해하고 젊은 세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멋진 세계라는 게 그의 게임 예찬론이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튈 수밖에 없는 이런 그의 역동적 정치행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당내에서도 “잘 다듬으면 한나라당의 부정적인 벽을 뛰어넘을 차세대 주자로 키울 수 있다” “내용 없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다”는 상반된 평가가 함께 한다.

원 의원은 사회주의권 몰락 후 이념적 정리를 한 뒤 1년 반 만에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했다. 주변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으로 사법시험은 통과했지만 ‘정치의 서브스리’는 벼락치기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말한다.

“아직 한참 젊은데 1년이면 어떻고, 10년이면 어떻습니까. 아직 노력할 여지가 많고 어차피 모자라는 점은 국민이 채워주는 힘을 받아서 해야 되는 건데….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가져갈 일관성과 내용 아니겠습니까.”


인터뷰/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지지율 의미 없다”

-‘보수혁명’이란 말까지 하면서 한나라당의 체질개선을 주장하는데, 최근 당 지지율이 40%대로 상승하는 것은 뭘 의미한다고 보는가.

“한나라당에 대한 지금의 지지율을 무의미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에 대한 거부율이다.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에 따르면 50% 정도의 거부율이 있다. 그렇게 된 요인은 크게 네 가지라고 본다. 영남당-지역, 부자당-계층, 반공당-이념, 노인당-세대다. 한나라당은 이런 거부율을 돌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의미 없는 지지율에 안주했다. 그래서 대세판단을 그르치고 되레 거부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그렇게 따지면 열린우리당도 거부율이 만만찮을 것 같은데…

“물론 열린우리당도 거부율이 높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의 집권 여당은 거부율이 높아지면 당을 새로 만들어서 돌파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음번 대선은 절대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안 치를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표의 호남 구애는 긍정적으로 보는가.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호남의 거부는 원죄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신화나 종교에서 얘기하는 희생을 통한 번제와 속죄가 따라야 한다. 호남에 가서 악수하고 온다고 해서 표가 오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집권했을 때 5·18특별법을 만들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구속하지 않았는가.

“그 후로 ‘도로 민정당’ 소리가 나오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이 노력했다면 표는 안 나와도 지금처럼 적대적이고 아예 외면하는, 극단적인 거부라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원 의원이 말하는 ‘보수혁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 가족에게 가는 삶의 질 개선이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가지고서 그 방법론으로서 중도우파적인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우파라면 재벌이 공정한 게임을 안 하고 정경유착하고 특혜를 받는 점에 대해 누구보다 단호하게 매를 쳐야 한다. 북한 문제도 그렇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이 우파가 갖는 민족주의적 가치와 부합한다. 친일파 청산, 이것도 우파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복지 문제를 보더라도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고, 국민연금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도입하지 않았는가.”

-‘보수혁명’이 인적 청산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아닌가.

“인적 청산이라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리더십과 국가를 이끌 수 있는 있는 실력과 준비태세를 갖춘 인재를 다발로 기라성 같이 만들어서 국민한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특히 잘못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 정부가 아젠다로 내놓은 게 약 30가지가 된다. 성장과 분배를 같이 가도록 하겠다, 동북아 허브를 하겠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 지역 균형발전 이루겠다 등등 좋은 얘기는 다 했다. 그런데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알 수 없다. 기자회견할 때마다 국정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 같다. 또 경제성장률 1% 올려봐야 그게 무슨 업적으로 남겠느냐, 내가 경제를 살릴 줄 알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건 아니지 않으냐, 지역감정 타파에 대통령직을 걸겠다, 이렇게 얘기한다. 이런 모습에 아연실색이다. 경제성장률 1%면 돈으로 치면 50조원이고, 일자리로 치면 60만개다. 정권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고, 국정의 최우선 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돼야 한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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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동지 이해찬 vs 김근태

[화제]‘대권 2룡’의 아주 특별한 만남

뉴스메이커 633호

‘친정’에서 만난 이해찬 총리·김근태 장관… 미묘한 관계 의식 않고 태연한 표정



아무도 귀빈들의 결례를 탓하지 않았다. 언론사와 정부 산하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초청받아 축사를 하기로 한 국무총리와 장관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은 결례를 넘어 무례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최측이나 참석자나 여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지난 7월 5일 오후 6시 30분께 두 고위인사는 노타이 차림으로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 들어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다른 사람의 역작을 축하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자리였다.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우리 강물이 되어’(전2권, 경향신문사)의 저자인 소설가 유시춘·김남일씨, 이우재 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부의장, 자유기고가 유시주씨,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등이었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2003년 4월부터 최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70·80년대 실록 민주화운동’을 묶은 것이다. 즉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유시춘씨 등 필자들이다. 하지만 이 총리와 김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는 두 사람 외에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박선숙 환경부 차관, 문학진·유기홍·유시민·유승희 의원, 이길재 전 의원 등 정·관계 인사가 다수 참석했다. 주최측인 민주화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과 문국주 상임이사 등을 비롯해 이해동 목사,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 등 옛 재야인사와 현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또 다른 주최측인 경향신문 강신철 전무, 김지영 상무, 송영승 논설실장, 이영만 편집국장 등을 위시해 원로언론인 임재경씨, 서명숙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서영석 서프라이즈 전 대표 등 언론인도 자리를 함께 했다.

운동권 ‘짠빱’은 김 장관이 선배

꼬스트홀을 메운 약 100명의 참석자 역시 대부분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책 속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명동성당 문화관은 이들에게 감회서린 곳이기도 했다. 이상문 경향신문 상무는 발간사에서 “여기가 과거 명동성당 문화관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며 “그 현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유시춘씨도 답례사를 통해 “6월항쟁 때 이곳에서 5박 6일 농성을 했다”며 “그때는 내 생전에 이런 자리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 총리도 “옛날에는 여기서 모이면 반드시 중부서에 들렀다가 가야 했다”며 이곳이 민주화운동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회상했다.

따라서 이 총리와 김 장관으로서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오랜만에 옛 동지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넥타이를 매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예의에 어긋날 법도 했다.

불편한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차림으로 참석한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하며 굳건한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정치적 위치는 이날 연출한 우애 넘치는 분위기와 달리 편안하게만은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세간에서 지목하는 ‘대권 7룡’의 일원이다. 언젠가 서로 경쟁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두 사람은 열린우리당 내 재야, 그 중에서도 이른바 ‘비지그룹’(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친동교동계 재야세력)으로서 오랜 기간 혈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어느날 갑자기 뒤바뀐 ‘서열’도 두 사람의 과거를 잘 아는 참석자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참석자들에게는 김 장관이 이 총리보다 몇 단계 높은 대선배다. 김 장관은 서울상대 65학번이고, 이 총리는 서울문리대 72학번이다. 이 총리가 서울공대에 입학했다가 1년 후 다시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6년 차이가 난다.
김 장관의 본격적인 학생운동 경력은 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되면서였다. 장기 도피생활을 하던 중인 1975년 5월에는 서울대 5·22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재차 수배된다. 1970년대를 꼬박 수배생활로 보낸 김 장관이 첫 별을 단 것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폭로해 유명한 민청련 사건 때다. 이때 구속돼 1988년 6월까지 옥살이를 한다. 반면 이 총리는 학생 신분으로 두 번 투옥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였다.

두 사람이 재야에서 한솥밥을 먹은 것은 민청련 시절이다. 이때 김 장관은 의장을, 이 총리는 상임위 부위원장을 했다. 민통련 시절에는 김 장관은 투옥중이었지만 ‘재야 40대 4인방’ 중에 한 사람으로 불렸고, 이 총리는 총무국장을 지냈다.

민청련 시절 ‘한솥밥’ 동지

표면상으로 두 사람이 정치적 노선을 달리한 것은 1987년 대선 이후이다. 이 총리는 평민련 몫으로 평민당에 입당해 13대 총선에서 당선, 17대까지 내리 5선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한다.

반면 김 장관은 재야에 남아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재야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기성정당을 디딤돌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 총리와 같은 처지였지만 개별 입당이 아닌 집단 입당으로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 때문에 이 총리보다 7년 지각해 민주당에 입당, 15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3선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장관은 정당정치에서 비록 국회 선수(選數)는 이 총리보다 아래지만 당 서열은 여전히 위였다. 민주당 시절 김 장관은 부총재, 이 총리는 당무기획실장을 지냈다. 국민회의에서도 김 장관이 부총재, 이 총리는 정책위 의장을 역임했다. 새천년민주당 시절에는 둘 다 최고위원직에 오른 바 있고, 열린우리당에서는 김 장관이 원내대표를 지냈다.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나이나 선후배, 사회에서의 서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척박한 토양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함께 싸운 세계에서의 동지적 위계질서는 정서적으로 쉽게 뒤바뀌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출판기념회에 동석한 두 운동권 출신의 ‘용’은 이런 미묘한 관계에도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주최측이 마련한 순서에 따라 먼저 축사를 한 이 총리는 사회자인 정재돈 전국농민연대 상임대표에게 한마디했다. 이 총리는 “민주화세력이 상당히 관료화된 것 같다”며 “내빈 소개를 하면서 총리·장관·의원 순으로 하고 민주화운동 열심히 한 분들은 나중에 하는 걸 보니 조만간 공무원이 되려는 모양이다”고 조크를 던진 것이다.

김 장관은 그동안 본격적으로 정리된 적 없는 민주화운동사 발간에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축사에 임했다. 김 장관은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올바르게 응전하려면 지난날 살아온 내력을 잊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며 “이 자리가 사회 양극화 극복과 한반도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데 책임을 느끼는 자리가 되게 하자”고 말했다.

이 총리와 김 장관은 축사를 마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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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 해결사 정동영

[유인경이만난사람]“통일한국 그 날을 위해 기꺼이 도와야죠”

뉴스메이커 648호

‘퍼주기’ 논란에도 당당한 ‘통일문제 해결사’… ‘소통’ 중요시하는 그의 다음 무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노래했지만 ‘통일’은 판타지소설보다 더 추상적이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철저한 반공교육 탓에 북한 사람들은 피부는 빨갛고 머리에 뿔달린 사람들, 혹은 이승복 어린이를 죽인 무장공비나 양복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간첩으로만 알았다. 북한은 지금도 비자가 필요한 외국이고 북한 동포는 외국인보다 더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들이었다. 우린 북한에 대해 너무 몰랐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통일은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이들이나 학자들의 관심사로만 여겼다.

그러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떼를 몰고 가는 드라마를 연출했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후, 통일문제는 현실이 됐다. '그리운 금강산'도 열렸고 아시안게임 응원단으로 온 북한 여성들의 무공해 미모에 넋을 잃어 통일되기 전에는 장가가지 않겠다는 총각들은 팬카페까지 만들었다. 청소년들은 북한의 핵보유도 ‘통일되면 결국 우리 것’이란 쿨(?)한 태도를 보였다. 수령님의 은혜로 잘 산다더니 탈북자들의 증언, 용천역 사건으로 해외뉴스에 소개된 북한 동포들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6자회담, 경수로 등 경협문제 등이 긴박하게 펼쳐지며 온통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렸다. 지난 9월엔 전문가들조차 회의적 반응을 보였던 북핵 6자공동성명이 타결됐다. 늘 미국측으로부터 귀동냥으로 정보를 얻고 회담장 밖에서 얼쩡이던 정부 당국자와 기자들은 우리가 미국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당당히 밝히고도 회담 타결을 이끌어낸 것에 감격해했다. 감격도 잠시, 삐그덕거리는 북한관광, 장기수, 북한 동포들의 인권, 탈북자 문제 등이 연일 터져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찾았다.

그동안 통일부 장관은 ‘갈 수 없는 나라’북한을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게 주요업무인줄 알았더니 국방, 외교, 산업자원, 재정경제, 심지어 교육문제까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 중에는 항상 1등인 대권후보이고 그 전부터 스타였던 정 장관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뉴스거리 아닌가.

열린우리당의 10·26재선거 참패 후 언제 다시 당으로 복귀할지도 모르고, 11월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고뇌와 걱정이 많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정부종합청사 통일부 장관실에서 만났다.

볼륨 조절이 가능한 TV형 정치인

“평소 지면을 통해 글을 자주 읽고 있습니다.”

정 장관은 이렇게 인사를 시작해 점수를 땄다. 방송에 가끔 나오는 이유로 기자면서도 항상 ‘방송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란 인사를 들었던 억울함(?)이 풀렸다. 하지만 곧 이성을 회복해 공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지난 6자회담 타결은 국내외에서 놀라운 성과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 장관은 너무 북한측의 입장만 옹호해 ‘김정일 대변인’ ‘북한 통일부 장관’이란 비난도 받으셨죠. 무엇보다 저는 7월의 중대제안 때 우리나라가 6조 원에서 13조 원에 이르는 핵폐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스럽더군요. 미군이 감축되거나 완전철수할 경우 자주국방비용까지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갈 텐데….”

“그 문제는 너무 비용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본질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 OECD국가이고, 이들 국가들은 못사는 빈곤국에 문명국으로서 해외무상원조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0개 가입국 중 가장 인색한 국가가 우리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타인종, 타민족에게도 인도적인 무상지원을 하는데 같은 핏줄이고 한민족인 북한에 원조를 해주는 것이 어떻게 ‘퍼주기’입니까.

지금도 국민 1인당 매년 1만2000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그 보상과 전력 등 에너지를 제공하는 절차에 들어가는 비용이 13년간 그정도 규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언젠가 통일한국의 국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그날에 대비해서도 북한 동포들을 도와야죠. ‘비용’으로 본질을 희석해 정치적 공세를 퍼붓는 이들에게 과연 그들이 제시할 내일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미래전략이고 국가를 이끄는 정치인이라면 발등의 문제보다 더 멀리, 더 넓게 보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에,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선 적절하게 볼륨을 키우고 다시 부드럽게 줄여 말하는 정 장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13년간 들어간다는 비용을 국민 1인당, 얼마씩 내야 하는가를 계산해보니 매달 2000원 정도였다. 커피 한 잔값으로 언제 터질지도 모를 핵의 공포에서도 벗어나고, 북한 동포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구나 우리만이 내는 게 아니라 미국, 일본도 다 함께 내니 말이다. 정 장관 주장대로 통일되어 함께 살려면 북한 동포들도 잘 먹어 건강해야 하고, 도로·통신·전기 등 북한의 기반시설도 튼튼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겨우 5분 만에 세뇌당했다. 나의 감수성이나 지능지수 탓도 있지만 인터뷰를 위해 정동영 장관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북한 출신도 아니고 정치학자도 아닌데 한결같이 통일이나 북한 관련 정책에 관해 의견을 밝혔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최고위원에 진출했을 때, 대선 직후의 인터뷰에서 항상 대북정책과 북핵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처럼 말을 바꾸지 않고 일관된 견해를 보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국측이 주한미군 감축시기를 2005년까지로 못박고자 했을 때도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만나 '지난 1년간 한국이 용산기지 이전, 미군 재배치와 감축, 이라크파병 등 무려 네 가지를 미국에 공헌했으니 이번엔 미국이 감축시기를 조정해달라'고 주장했다. 설득당한 럼즈펠드가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10월 6일 한국측 요구가 반영된 주한미군 감축계획이 발표됐다. 리처드 롤리스 부차관보는 “정 장관이 매우 큰 일을 했다”고 칭송했단다. 미국에는 항상 읍소나 애걸복걸만 하는 비굴한 모습에 익숙했던지라 그런 모습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정동영 장관은 이런 늦가을에 ‘낙엽’ 같은 시를 읊는 게 어울릴 듯한 로맨티스트처럼 보인다. 그와 절친해 객관성을 잃은 이들은 “해맑게 웃는 모습은 귀공자 출신인 케네디 대통령 같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기뻐도, 슬퍼도 자주 눈물을 보인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도 당당하고 북핵문제에도 겁을 내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일이관지’란 말을 즐겨 썼어요. 일관한다는 것의 덕목을 스스로 삶의 원칙으로 여깁니다. 학창시절이나 기자시절, 그리고 지금 정치인을 거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처음 세운 뜻을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그런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범생이 아니라고 했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삶의 중심을 잃은 듯해 수업 빼먹고 영화관에 드나들고 하숙방에서 막걸리만 마셨단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대학시험에도 실패했다. 아들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는 오막살이 같은 집 단칸방에 재봉틀을 들여놓고 옷을 만들어 청계천시장에 내다팔았다. 올 5월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도 군부대 총기사건의 유가족을 위로하러 가느라 참석하지 못했다.

다시 개통된 청계천을 걸으며 그는 종종걸음으로 청계천에 옷감 사러 가고 또 제값을 안 주는 상인들과 드잡이를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정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어머니를 추모하며 ‘고애자(孤哀子)’란 말을 썼다.



‘피투성이’ 경선에서 얻은 것들

정동영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공신이다.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 때, 그는 꼴찌를 하면서도 완주했으며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전국을 돌며 목이 터져라 표를 호소했고 부산 자갈치시장 등을 누비며 돼지저금통을 나눠줬다.

정몽준 후보의 선거 전날 파기 역시 종로연설 당시에 정 장관이 단상에 올랐고, 노 대통령이 차기후보로 강조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도 ‘천신정’의 도움이 컸다.

“한국 정치 사상 초유인 여당의 국민경선은 항상 주장했던 쇄신운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남이 만든 트랙에 경주자로 참여했으면 당연히 포기했겠죠. 하지만 내가 트랙을 제안했고 설치하고 중심에 섰다는 책임감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권투선수가 링위에 올라 게임마다 KO패를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또 다음 게임에 서야 하는 심정을…. 하지만 틀을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끝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부 기자들조차 ‘페어플레이 상이 있다면 정동영의 몫’이라고 말할 만큼 국민경선에서 그의 의연한 모습은 비록 속으론 피투성이였을지 모르지만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처음의 믿음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한 발 더 내딛는 힘"이 자신을 지켜주고 오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연애도, 기자생활도, 정치도, 마음먹은 것은 다 이뤘다고 했다. 실연했다가 납치 끝에 한 결혼도 그렇고, 최고의 앵커로 인정받았고, 정치 입문 10년 만에 ‘통일문제 해결사’로 통하며 차기 대권후보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그는 운도 좋은 편이다.

하지만 ‘컨텐츠가 뛰어난 지도자’ ‘모양새가 좋은 정치인’등의 찬사만 받는 것도 아니다. 비호감층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과잉 의식하는, 2% 부족한 정치인'이라거나 ‘지나치게 이미지에 의존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혼신을 다하는 남북화해 역시 김대중 정권 시절 불렀던 노래이며 6자회담의 솔로 주역도 아니라고도 한다.

전문가집단의 여론조사에선 항상 수위를 달리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지지도가 낮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 장관은 카메라만 돌아가면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나는 카메라만 보면 딱딱하게 굳어진다"고 했다. 잘 생긴 외모에 현란한 웅변솜씨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정 장관에게는 득이 아니라 ‘연출’로 보여 실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카메라만 보면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는 평소에 말할 때도 표정이 매우 풍부하다. 입벌려 크게 웃고, 고뇌하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눈물을 감추는 듯 입술을 지그시 누르기도 하고, 연설할 땐 격앙된 모습으로 포효하고…. 가면을 쓴 듯 굳은 표정을 짓는 한국 남자들이 보기엔 풍부한 표정이 다소 역겨워 보일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건 결국 그가 속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 타인에게 진심을 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앵커생활, 정치인으로 대중연설을 통해 느낀 것은 ‘소통의 중요함’입니다. 정치건 방송이건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죠. 국민들의 눈높이로 세상과 사물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남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진솔하게 했을 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잘 전달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통의 능력을 가진 그가 곧 열릴 6자회담에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파란만장한 열린우리당과는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아직까지는 사랑부터 장관직까지 원하는 것은 다 이뤄졌지만 그 마법은 또 어디까지 효력이 있는지도….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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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수요모임 리더 박형준

[뉴리더]‘자유와 연대’ 깃발 든 학구적 정치인

뉴스메이커 653호

좌파 이론가에서 ‘우파적’ 실천가로… ‘수요모임’ 이끌며 패러다임 전환 모색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은 정계의 많은 학자·논객 가운데서도 특히 학구적 이미지가 강한 정치인이다. 한나라당 원내 소장파 토론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이하 수요모임)을 이끌고 한 달에 10차례 이상 세미나·강연에 나가는 등의 왕성한 ‘학구적 정치활동’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은 웅변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세력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과거의 방식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다원화한 사회의 복잡한 흐름을 읽어내고 그 토대 위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창의적인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고 실행하는 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런 정치는 확고한 소신과 큰 목소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시대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를 설득력 있게 정리해 널리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박형준 의원은 이 점에서 뉴리더십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만하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학자적 관점에서 사회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고, 그런 ‘고급스러운 지적 고민’을 정치권이 공유하도록 하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동아대 교수 출신이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학계에 있을 때 사회 패러다임 변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경력이 있다. 박사학위 논문이 우리 사회의 지식근로자층을 포착하고 처음으로 이론화한 점에서 눈길을 끈 ‘자동화에 의한 노동과정의 변화’다. 지금도 진보학계와 정치권의 중요한 논제가 되고 있는 ‘87년체제 논쟁’에 일찍이 불을 붙인 학자가 바로 박 의원이다.

좌파 소장학자였던 박 의원이 ‘우파적’ 정치인이 된 것은 치열한 학술적 고민과 논쟁의 결과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1959년 12월 21일생이다(호적에는 1960년 1월 19일로 돼 있다). 고려대 사회학과 78학번으로, 긴급조치 9호 세대 막내그룹에 속한다.

시대상황은 문학청년이던 그를 사회학도로, 다시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원래 문학을 하려고 사회학과에 갔다가 그 길을 끝까지 가게 됐다고 할까. 대학 3학년 때인 1980년 교지 ‘고대문화’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의 봄’ 때는 당시 복학생협의회장인 박계동 의원이 이끄는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섰다가 최루탄 유탄에 맞아 오른쪽 각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시대상황에 흘러간 학창시절

뒷날 민청련과 연결되는 소그룹 ‘호민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졸업 후 노동운동이 아니라 대학원을 택했다. 현장 활동보다는 이론적 지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잠시 중앙일보에 몸담기도 했으나 1986년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부터는 재야 학술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진보학계에서 불붙은 여러 사회과학 논쟁에 참여해 소장논객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민중당 강령을 기초하는 데도 참여했다. 박 의원은 “그때의 민중당 강령이 지금의 민주노동당 강령보다 더 우파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박 의원이 본격적으로 ‘신사고’를 제창한 것은 1989년부터였다. 사회주의 몰락 후 우리 시민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닌 다원적 참여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아서였다. 운동권 전체의 사고의 전환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운동권으로부터는 ‘개량주의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패러다임 전환은 박 의원의 학술적 과제이자 정치적 꿈이 됐다. 동아대 교수 시절 매달린 연구 주제가 ‘국가의 미래 비전과 시민사회의 역할’이었다. 중도에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간의 여러 논쟁에서 운동권이 정보화·세계화라는 새로운 경향에 눈뜰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던 터였다. 당시 김 대통령이 발표한 ‘세계화 구상과 전략’의 최종 집필자가 바로 박 의원이다.

2004년 총선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뛰어든 명분도 패러다임과 관련이 있다. 박 의원은 “앞으로 5년간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닥칠 수 있다”면서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선진화의 문턱에서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권에 들어가 새로운 국가발전 세력을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민중당 강령 기초 닦은 논객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에 입당한 박 의원은 ‘뉴한나라당’ 비전과 강령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수요모임에 참여해서는 ‘뉴라이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나라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정쟁세력’이 아닌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박 의원이 볼 때 지금의 정치권은 신화와 전통을 먹고사는 ‘과거세력’에 머물러 있다. 한나라당은 산업화의 신화와 반공·자유주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역시 민주화의 신화와 그 테두리에 맴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세력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의 신화,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은 지역주의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양상이다.

어떻게 하면 한국 정치가 과거세력에서 ‘미래세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바로 한국 정치 전체의 고민이자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게 박 의원의 생각이다. 그가 설정한 국가 아젠다는 선진화, 통일, 양극화 해소다. 정치세력은 이런 중요한 국가 아젠다에 대한 의지나 규범 수준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주는 집단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즉 이 3가지 축을 누가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제대로 풀어갈 수 있느냐의 경쟁으로 가는 것이 우리 정치권의 미래세력화이자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얘기다.

박 의원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자유’로 삼고 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자유의 가치를 신봉하는 세력은 연대(박 의원은 ‘평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이유는 자칫 획일적 평등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의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이 연대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자유의 가치를 이해하는 연대주의 세력으로 분화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구도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와 연대라는 두 가지 가치 속에서 새로운 성장·복지·통일모델에 대한 생산적인 대안을 내놓고 서로 경쟁하는 구도로 정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정치권은 모두 ‘과거세력’

지난 7월 박 의원은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당내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수요모임의 2기 대표를 맡았다. 최근 10·26재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3명이 가입, 수요모임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숫자(20명)로 세력화했다. 이들은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한나라당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과거의 잣대로는 이들이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할 수준의 세력으로 보기 어렵지만 박 의원이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우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박 의원은 운동권·기자·교수, 시민단체(경실련)·국정(정책기획위원회) 참여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정치인이다. 정치의 근거지인 부산에서는 방송토론 진행 등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이런 경험으로 쌓은 사고력과 정책기획력. 그리고 대중 전파력과 설득력 등이 그의 정치적 꿈인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 구축’에 힘이 될 것이다.

그는 믿고 있다. 우리 정치가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때 만날 새로운 리더십은 어떤 모습일까.


[인터뷰]박형준 한나라당 의원

“대세론과 줄서기가 당을 망친다”

- 새정치수요모임의 지향점과 당내 역할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생각은 한국 정치가 바뀌려면 먼저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나라당이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뉴라이트’가 필요하다고 내부에서 얘기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이 깨지기도 했지만 지난번처럼 혁신안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과거에도 당내 개혁파 모임이 있었지만 정작 선거와 같은 중대한 국면에서는 각자 정치적 이해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수요모임은 뭐가 다르다고 보는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대세론과 줄서기이다. 그렇게 되면 당이 굉장히 경직돼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박(反朴) 세력으로 비치는 이유도 4·30재보선 후 ‘박근혜 대세론’이 확산되려고 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서다. 마찬가지로 ‘MB(이명박) 대세론’이 나와도 똑같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구성원이 대선국면에서 줄서기를 하게 되면 수요모임도 형해화된다. 그걸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현실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우리는 대선주자들이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갖고 자기 콘텐츠로 승부를 하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순간에는 각자 선택이 불가피하겠지만 2007년 경선 이전,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줄서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같이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연대 등 과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 줄서기를 경선 전에 하든 후에 하든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내년 전당대회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방선거 후 대권·당권 분리 상태에서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모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고 모든 선출직에 출마할 생각이다. 그 과정에 당내 세력과 외부 영입인사들과 연대해 당의 컬러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1차적 목표다. 그때까지는 대권경쟁 구도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지 않는다는 게 수요모임 의원들의 합의사항이다.”

- 그래도 결국은 다 줄서기를 하던데….

“본격적인 대권경쟁이 시작되면 개별 의원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한나라당이 크게 변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우리가 자꾸 강요하는 것이다.”

- 김영삼 정부 정책 참여 경험으로 볼 때 노무현 정부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국가 아젠다의 우선순위 설정이 우선 잘못됐다. 예를 들면 지난해 ‘4대악법’ 개정에 매진한 것이 그렇다. 그건 각자 조용하게 풀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거기에 매몰되다 보니까 그것도 실패하고 다른 중요한 것까지 놓친 것이다. 선진화와 관련된 중요한 아젠다 몇 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개혁 과제의 추진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었다.”

- 평소 개혁 과정의 관리(Process Management)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해왔는데…

“국가경영에는 고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개혁의 비전이나 목표도 중요하지만 개혁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나 참여정부가 그 점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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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중도통합 깃발든 반미자주화 1세대

[뉴리더]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뉴스메이커 652호

‘중도통합’ 깃발 든 반미·자주화 1세대
학생운동 넘어선 386 정치인… 민족경제공동체 향해 ‘미래를 조직’한다


임종석 의원 약력

1966년 4월 24일 전남 장흥 출생. 4형제 중 3남.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1985년 용문고 졸업.
1986년 한양대 입학(1995년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87년 노래패 ‘소리새벽’에 가입, 6월항쟁 참여.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
1989년 서총련 의장, 전대협 3기 의장.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평양축전 파견. 수배 중 10여 차례 기자회견, 12월 18일 검거됨. 3년 6개월 복역(1993년 5월 출소).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창립. 부소장. 2~4기 소장.
1999년 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창립. 회원으로 참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민화협 청년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 국회 여성위원회 위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2003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국민참여운동본부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대변인.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열린우리당 연수원 부원장.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환상의 전술’로 시작해서 ‘신비의 탈출’로 끝난 6·30 한양대 투쟁으로 노태우 반통일 정권에 대하여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대협은 역사상 꺼지지 않는 불멸의 위훈을 세웠으며 전설적 신화를 창조하였다.”(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지음 ‘전대협’ 돌베개, 1991년)

‘임수경 대표 평양축전 참가투쟁’에 대한 전대협의 자체 평가다. 1989년 ‘임수경 방북 파문’은 ‘국내 세 번째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까지 불린 전대협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통일운동에 불을 지르는 한편 극심한 이념논쟁을 야기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사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랄 수 있는 이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표현대로 ‘불멸의 위훈’을 세운 전대협 3기 의장이 임종석 의원이다.

집권 열린우리당 재선그룹의 일원인 임 의원의 정치적 자산은 ‘8할이 전대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에 보기 드문 강력한 학생조직’이라는 전대협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구가한 전력 때문이다. ‘의장님’의 막강한 대중동원력과 ‘임길동’으로 불리기까지 한 신출귀몰한 행각은 전대협 세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이미지와 상징성이 임 의원에게 정치적 발판이 된 게 틀림없지만 정치적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금 세게 소신을 펴면 ‘학생운동가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정치적 타협을 하면 ‘변절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전대협 전성기 이끈 ‘의장님’

임 의원은 1966년생이다. ‘아직 486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386세대다. 386세대, 전대협, 운동권 출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가장 귀가 따가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너무 빨리 컸다’든가 ‘지름길로 왔다’는 등의 지적도 부담스럽다.
전대협 세대는 다른 학생운동 세대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반미·자주화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첫 세대로서 대중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6월항쟁을 통해 ‘승리의 체험’을 맛보았고, 노무현 캠프에 집단적으로 참여한 2002년 대선을 통해 두 번째 정치적 승리까지 ‘쟁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반미에서 주사(주체사상)까지 운동권 선배세대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강한 이념과 노선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들의 힘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이런 점 때문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안하게 보일 법도 한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에는 당연히 새로운 세대의 꿈과 비전이 담겨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이 그 다음이다. 물론 꿈이나 비전을 세우는 것보다 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임 의원은 ‘정치 뉴리더’에 부합하는 호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꿈과 비전은 젊은 세대의 그것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당내 재선의원 그룹의 막내 축에 들지만 내년 초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 입성을 ‘권유’받는 입장이다. 다음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그는 입각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재미삼아 쓴 것 같다”며 “지금은 파격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전대와 관련해서는 당 쇄신을 위해 “재선그룹의 집단 출마도 한 방법”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가 학생운동가로서 워낙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몸을 낮추면서 국민과 기성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놓치지 않으려는 덕목이 균형감각과 책임감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전대협이나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왜곡·과장된 측면도 있다. 생각보다 튀지도 않고 생긴 것도 가까이서 보면 ‘순하기’ 이를 데 없다. 가장 투쟁적인 모습을 보인 때가 이라크 파병 결정 때 단식에 들어간 것 정도다. 그는 “원래 나는 단식 반대주의자”라며 “앞으로 단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 의원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중도개혁’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파는 물론 좌파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파는 과거지향적인 점에서, 좌파는 전세계적으로 주된 흐름을 역행하는 점에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은 중도세력에 훨씬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이를 규합해 ‘미래를 조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임 의원의 원래 꿈은 과학자였다. 운동권에 입문한 것도 대학 2학년 때 6월항쟁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순진한 공학도였고,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었다. 고교 때는 학내 활동 경력도 없다. “깡촌 출신인 데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 1년 반 동안 신장염을 심하게 앓아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내성적인 공학도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를 지휘하는 학생운동 지도자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소설처럼 극적이기까지 하다. 재수해서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에 들어간 때가 1986년이었다.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등을 겪으며 심한 심적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과학자의 꿈을 접지는 않았다. 자신도 뭔가 ‘참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소리개벽’이라는 풍물패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걸쳤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공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정치 참여로 ‘통일’의 꿈 대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학가는 집회·시위가 일상이 돼버렸다. 자연히 풍물패의 역할이 커지고 학생들에게 노출 빈도가 많아졌다. 이 와중에 그는 학생들의 눈에 띄었고, 1988년 여름 86학번 활동가 총회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총학생회장 출마는 곧 구속을 의미했다. 그는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의장, 전대협 의장에 연거푸 올라 1989년 12월 검거되기까지 약 1년 동안 현란한 활동을 펼쳤다. 5년형을 받고 3년 6개월 복역한 뒤 1993년 5월 출소한 그는 청년정보문화센터·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등을 결성, 전대협 세대 중심의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정치에 참여한 것도 전대협 세대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서였다. 그를 비롯한 전대협 1~3기 지도부 5명은 2000년 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 가운데 유일한 당선자가 됐다. 17대 국회에는 18명이 도전해 12명의 당선자를 냈다.

임 의원이 대변해야 할 이들의 꿈은 ‘통일’이다. 전대협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민주화 이후의 통일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앞날에 대한 그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그는 “우리 사회는 고도로 민주화한 사회라고 본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지역갈등이라든가 과도한 권력투쟁이 사회 주요 기관들까지 정치화하게 만드는 점 등 몇 가지 이분법적 갈등이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면이 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임 의원의 꿈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이루고 싶은 것은 민족경제공동체다. 남북문제를 풀어야 우리가 선진국이 된다고 본다. 반북·반공 논리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이미 우리의 관심은 북을 어떻게 경영할 것이냐는 데까지 와 있다. 되도록 큰 부담 없이 북쪽을 자립할 수 있게 하고 개혁·개방할 수 있게 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대륙으로 북방경제시대를 열고… 관심이 그렇게 와 있는데 계속 우리한테 과거의 것을 물어본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인터뷰]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국민 신뢰얻는 노력부터 해야”

과거 전력 때문에 늘 두 가지 상충되는 주문을 받는 것 같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라’ ‘과거의 소신을 지켜라’ 가운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

“시민단체나 재야운동을 하는 분들의 몫이 있고 정치인의 책임이 따로 있다. 정치에 와 있는 이상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치나 철학 등에서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있는 분들에게는 늘 모자라고 때로는 변절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과격하다고 욕먹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너 변했다’, 이런 쪽이었던 같다.”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 자살사건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공산당을 잡은 사람들은 구속시켰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나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 때 당이나 정부가 조금 더 높은 목소리로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가 하는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하려고 의견조율을 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그때 기자들이 물어서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 나간 사람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이냐지…. 전체적으로는 얘기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당이나 정부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분명하지 못했던 것이 케케묵은 논란을 초래한 빌미가 됐다. 지금 와서 반공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성적이거나 지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에 공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도 두 분 국정원장 구속에 대해 정치권에 들어와서 제일 독한 소리를 했다. 검찰에 대해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이중적인 싸구려 정치다’라고 했다. 특히나 두산그룹 일가에 대한 불구속 방침 직후에 이 건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정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중도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열린우리당의 목표가 혁신정당이라든가 선명한 개혁정당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시 국민의 신임을 받아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중도세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민주당과 합하자,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안 풀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북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돼가는 사회에 대한 따뜻한 철학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라 하면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 해소인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나라당 주도세력은 과거지향적이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진보운동, 소위 좌파운동하는 분들도 전 세계적인 주도흐름에 대해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지 현실에 닥쳐 있는 국가적인 문제, 국민들의 필요, 이런 것을 책임지고 국정운영을 해갈 수 있는 준비는 안 돼 있다. 그래서 중도세력의 대통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열린우리당이 하자는 것이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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