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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노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총색인

연대와실천 총색인 / 2002년 10월(100호)~2004년 12월(126호)


노동운동의 실천적 고민을 담아내고 발전적 전망을 밝히고자 한 월간《연대와실천》은 노동형제들과 함께 2004년을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다가오는 2005년 노동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현장에서, 생활 속에서 노동운동의 전망을 열어가고자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동지들과 함께《연대와실천》을 만들고 싶습니다.

창간호부터 99호까지의 색인은《연대와실천》2002년 10월(100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연대와실천 2002년 10월(100호)

소장 인사말 / 연대와 실천 100호를 발간하며 / 김석준 / 3
연대와 실천 100호 기념시 /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새로운 준비 / 노재열 / 5
연대와 실천 100호 기념글 / 작은 주체들의 존재 알림과 노동운동의 지형문제 / 김진균 / 10
연구소에 보내는 목소리 / 연대와 실천 발간 100호에 부쳐 / 백순환 / 16
연구소에 보내는 목소리 / 지치지 않는 기관차처럼! / 박성철 / 18
노동초점 / 다시 희망을 만들어 봅시다 / 윤인섭 / 21
연구노트 / 직업별 생활시간 배분과 노동자 생활상태-국민생활시간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 김희재 / 24
노동교육 <계급과 정치> / 4강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발전 / 임영일 / 46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63
연대와 실천 100호 기념 만평 / 이창우 / 72
연대와 실천 총목차 / 편집위원회 / 73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94
연구소 공지사항 / 96
연대와실천 2002년 11월(101호)

정치초점 / 농민운동의 대선 정치방침 / 장상환 / 3
노동초점 / 주5일제 근기법 개악안 저지투쟁은 끝났는가 / 김영희 / 11
참가기 / 전국공무원 노동자대회를 참가하고 나서 / 배기한 / 21
참가기 / 남북여성통일대회 참가기 / 강인순 / 27
현장통신 / 시련과 도전 속, 철도노조의 민주노총행 / 박철수 / 31
해외노동동향 / 미국서부항만노조(ILWU)의 최근 투쟁에 대한 이해 / 강신준 / 38
연구노트 / 직업별 생활시간 한일비교 / 김희재 / 45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65
만평 / 이창우 / 77
살아가는 이야기 / 분회가 살아야 전교조가 산다 / 천창수 / 78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81
연구소 공지사항 / 84


연대와실천 2002년 12월(102호)

정치초점 / 2002년 제16대 대선을 바라보는 몇 가지 단상 / 남종석 / 3
연구소에 보내는 목소리 / 2002년을 보내며 / 안하원 / 12
연수기 / 공공연맹 산별해외연수를 다녀와서 / 김영일 / 14
특별기고 / 기업연금제 도입에 따른 문제점과 대응 방안 / 김연홍 / 23
연구노트 / 동아시아의 노동이동과 한국의 대응 / 김희재 / 37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2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62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63
연구소 공지사항 / 66


연대와실천 2003년 1월(103호)

권두시 / 삶의 자세 / 노재열 / 3
현장통신 / 노동열사 고 배달호 동지를 기리며 / 편집위원회 / 6
기획연재 / 독일금속노조의 미래선언 / 김연홍 / 29
연구노트 / 전국금속노조 경남 1, 2지부의 조직과 운영 / 조효래 / 35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69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70
연구소 공지사항 / 72



연대와실천 2003년 2월(104호)

특집기획 / 매경신문은 ? 신문이 아닐까 / 박장현 / 3
기획연재② / 독일금속노조의 미래선언 -공세로 2010!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 김연홍 / 10
연구노트 /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복원: 스페인의 사례 / 조효래 / 22
미국에서 보내는 소식 / 미국단상, 자유주의의 의미를 쫓아서 / 강신준 / 47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66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74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75
연구소 공지사항 / 77


연대와실천 2003년 3월(105호)

특별기고 / 정부의 한반도 동북아 경제 중심기지 건설구상에 대하여 / 김연홍 / 3
특집기획 / 노조공화국 설(設) -매경신문은 ? 신문이 아닐까(2)- / 박장현 / 10
생각하는 노트 / 조직사상의 정립을 위하여 / 노재열 / 18
기획연재③ / 독일금속노조의 미래선언 -공세로 2010!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 김연홍 / 27
살아가는 이야기 / 독일에서 보내는 편지 / 이은진 / 3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44
사진으로 보는 배달호 열사 전국노동자장 / 45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48
연구소 공지사항 / 50



연대와실천 2003년 4월(106호)

소장 취임 인사말 /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새 주체 형성을 위하여 / 임영일 / 3
경제초점 / 최근 경제위기, 해법은 무엇인가? / 장상환 / 7
특집기획 / 노조전임자 무노동무임금 설(說) -매경신문은 ? 신문이 아닐까(3)- / 박장현 / 27
기획연재④ / 독일금속노조의 미래선언 -공세로 2010!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 김연홍 / 38
노동교육 <계급과 정치> / 5강 중간계급의 이해 / 임영일 / 48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78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79
연구소 공지사항 / 82


연대와실천 2003년 5월(107호)

두산중공업지회 투쟁에 대한 평가토론회 /
발제문: 배달호 열사 분신투쟁을 겪으며 / 여영국 / 3
현장통신1 / NEIS(네이스) 폐기투쟁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한다 / 천창수 / 8
현장통신2 / 화물연대 파업의 성과와 과제 / 박진현 / 12
현장통신3 / 철도노동자의 투쟁과 4.20 합의 / 박철수 / 16
기획연재⑤ / 독일금속노조의 미래선언 -공세로 2010!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 김연홍 / 25
살아가는 이야기 / 비정규직 노동자의 출근일기 / 이창희 / 40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46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53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54
연구소 공지사항 / 56


연대와실천 2003년 6월(108호)

정세초점 / NEIS의 본질과 투쟁방향 / 조용식 / 3
두산중공업지회 투쟁에 대한 평가토론회 / 발제문: 배달호 열사 분신투쟁 평가 / 김종환 / 9
특별기고 / 기업연금 도입논의의 현황 / 김연홍 / 17
연구노트1 /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사관계 현황과 전망- 2003년 화물연대 파업투쟁을 중심으로 / 백두주 / 28
연구노트2 / 자동차 산업의 현황과 유연화 전략 / 김희경 / 55
살아가는 이야기 /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 이영도 / 75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78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85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86
연구소 공지사항 / 88


연대와실천 2003년 7월(109호)

경제초점 / 노무현 경제정책, 어디로 가고 있나 / 허민영 / 3
노동초점 /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 양솔규 / 7
현장통신1 / 금속노조 중앙교섭, 무엇을 남겼나 / 김정호 / 12
해외노동동향 / 독일 금속노조의 역사적 패배 - 2003년 동독지역 “주35시간제”
단체협상 및 파업경과 / 박장현 / 22
현장통신2 / 부당폐업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한국시티즌 노동자 / 허현주 / 40
현장통신3 / 누가 학습권을 침해하는가 / 고용우 / 45
자료소개 / 독일의 단체협약법에 대한 이해 / 노재열 / 49
연구노트 /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이론적 연구 / 이성철 / 64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1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95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96
편집자의 글 / 편집위원회 / 99
연구소 공지사항 / 101


연대와실천 2003년 8월(110호)

언론 엿보기 / 수구 언론 카르텔의 노동자 때리기 / 허민영 / 3
노동초점 / 주5일근무제 개악안과 노동운동의 미래 / 양솔규 / 10
현장통신1 / 공공연맹 2003년 임단투 평가 - 새로운 시작 - / 유병홍 / 16
현장통신2 / 현자노조 2003년 임, 단투가 남긴 과제 / 박유기 / 21
해외노동동향 / 독일 금속노조의 파업실패와 위원장 선거 / 김연홍 / 35
연구노트1 /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사관계 현황과 전망(2) - 화물연대 5.15 노정합의 이후를 중심으로 / 백두주 / 41
연구노트2 /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위한 예비 작업 / 이성철&#8228;백운순 / 52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67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80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81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여름수련회 / 편집위원회 / 83
연구소 공지사항 / 85


연대와실천 2003년 9월(111호)

감옥에서 보낸 편지 / 편지 한 통에 채운 사색 / 여영국 / 3
현장통신1 / 투쟁은 진행형 - 노조파괴전략에 맞선 동우기계공업 현장위원회 / 문상환 / 7
현장통신2 /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 상황에 대한 개괄보고 / 이영도 / 12
노동교육 <계급과 정치> / 6강 계급과 계급의식: 계급정치의 중요성 / 임영일 / 20
연구노트 / 노동자계급과 문화실천: 이론적 서설 / 이성철 / 30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49
살아가는 이야기 / 송영수 동지를 다시 우리의 곁으로! / 김성란 / 63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68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69
광고 / 71
연구소 공지사항 / 72


연대와실천 2003년 10월(112호)

추모시 / 나는 죽지 않았다. - 고 김주익 노동해방열사를 기리며 / 노재열 / 3
노동초점1 /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 열사여, 편히 잠드소서 / 편집위원회 / 10
노동초점2 / 한진중공업의 총수 지배구조와 노동력 착취 / 허민영 / 22
현장통신/ 논문편수 조작사건-승진비리 척결을 위한 울산교사들의 48일간의 농성/ 천창수 / 29
자료소개 / 비정규직운동 어디까지 왔나 / 편집위원회 / 34
노동교육<계급과 정치> / 7강 민주주의와 노동운동: 계급정치의 유형(1) / 임영일 / 41
연구노트1 / 1990년대 브라질 신자유주의 공세와 노동의 전략 / 조돈문 / 48
연구노트2 / 투기 권하는 사회 / 남종석 / 71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1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98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99
연구소 공지사항 / 101


연대와실천 2003년 11월(113호)

정세초점 / 지금 이 시점에서의 노동운동: 비판과 반성의 시작을 위해 / 임영일 / 3
노동초점 /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8228;곽재규 노동해방열사를 떠나보내며 / 편집위원회 / 9
사진으로 보는 한진중공업 투쟁 / 편집위원회 / 20
현장통신 / 9&#8228;27 국제반전 공동행동 영남조직위원회 활동 및 과제 / 김성학 / 25
교육자료 /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 장석준 / 2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39
노동교육<계급과 정치> / 7, 8강 민주주의와 노동운동, 노동자 계급정치 / 임영일 / 40
연구노트1 / 브라질 까르도주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삶의 조건의 변화 / 조돈문 / 53
연구노트2 / 탈산업화와 도시경관의 변동: 부산의 사례/ 남종석 / 70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1
자료 /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97
광고 / 99
연구소 공지사항 / 101


연대와실천 2003년 12월(114호)

송년사 / 2003년 한 해를 보내며 / 임영일 / 3
노동초점
1 노무현 정권 1년을 되돌아보며 / 양솔규 / 8
2 미등록노동자 전면합법화, 이주노동자 문제 해결의 첫 단추 / 김민정 / 15
3 2003년과 함께 열사를 보내다 / 박진현 / 20
연구노트 / 미국 노사관계의 역사적 특징과 신자유주의적 개편의 의미 / 강신준 / 26
경제초점 / LG카드와 삼성 에버랜드 사태: 재벌이 왜 문제인가? / 허민영 / 45
자료소개 / 벽을 넘은 시선, 세 가지 보고서 / 양솔규 / 51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54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5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70
광고 / 71
연구소 공지사항 및 감사의글 / 72





연대와실천 2004년 1월(115호)

신년사 / 2004년 한 해를 시작하며 / 이성철 / 3
노동초점 / 우리 사회의 희망, 노동운동을 위하여 / 김영희 / 5
현장통신 / 철도 100년사의 최대 격동기를 헤쳐나가는 철도노동자 / 박철수 / 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17
교육자료 / 경제자유구역 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송영조 / 18
연구노트
1 독일노사관계의 역사, 쟁점, 그리고 전망: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1) / 이상호 / 30
2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고령화실태 / 허민영 / 55
영화읽기 / 소금: 그대는 철도 여성노도자/ 붐(Boom): 몰락, 그리고 공동체의 재구성 / 양솔규 / 75
노동사산책 / 89년, 1&#8228;8 테러 사건과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 천창수 / 81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7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안내 / 조사연구실 / 97
연구소 공지사항 / 98


연대와실천 2004년 2월(116호)

노동초점 / 어떤 노동교육의 경험담: 산별교섭, 산별협약 / 임영일 / 3
경제초점 / 정부&#8228;자본의 일자리 대책이 지닌 문제점 / 허민영 / 11
현장통신 / ‘빵과 장미’가 되고픈 ‘초짜 활동가’ / 감만동 / 18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25
신년좌담회
2003년 노동운동 평가와 2004년 전망을 위한 신년좌담회 - 2004년, 무엇을 할 것인가? 해법 모색 김영희, 박유기, 여영국, 임영일, 정홍형, 허민영 / 26
책읽기 / <현대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본 노동자가족의 문제, 노동자가족의 미래 / 박준형 / 55
노동사산책 / 대우조선 노동조합 조합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 / 최은석 / 64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76
연구소 공지사항 / 84


연대와실천 2004년 3월(117호)

추모사
1 故 김진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김석준 / 1
2 김진균 선생님 영전에 삼가 엎드려 통곡합니다 / 장상환 / 5
노동초점 / 박일수 열사투쟁 자료 모음 / 편집위원회 / 8
총선특집
1 4&#8228;15 총선과 민주노동당의 진로 / 이장규 / 17
2 거제에서 불어오는 진보의 바람 / 옥세진 / 22
3 진보 의정 원년을 열자 / 이창우 / 26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32
연구노트 / 독일노사관계의 역사, 쟁점, 그리고 전망: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2) / 이상호 / 33
책읽기 /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천수를 누릴 노동운동의 역사 / 양솔규 / 63
노동사산책 / 고려부산 노동조합에 대하여 / 故 이성도 / 69
노동문화 / <숭어의 꿈> 작가 김하경선생과의 만남 / 73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8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99
연구소 공지사항 / 100


연대와실천 2004년 4월(118호)

정치초점 / 민주노동당 성공의 의미, 그리고 이후의 정치 / 임영일 / 3
총선특집
1 동그라미 안으로 / 홍기표 / 7
2 4년을 예비하기 위하여 / 최재기 / 9
3 부도수표? / 김창환 / 15
4 산을 옮기는 첫 마음으로 / 정우윤 / 18
5 또 다른 시작의 길모퉁이에서 / 김윤규 / 23
6 4년 전 생각, 4년 후 걱정, 현재의 즐거움 / 양성민 / 27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31
연구노트 / 산별노조의 리더십: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융노조의 비교 / 조효래 / 32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7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64
연구소 공지사항 / 66


연대와실천 2004년 5월(119호)

노동초점 / 꿈과 환멸 사이에서 - 최근 정세에 대한 먹물의 소회 / 강신준 / 3
현장통신 / 화물연대에서 화물통준위로 - 길을 만드는 사람들 / 윤창호 / 9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14
연구노트 / 서울대 폐지론의 실제 -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구축 - / 정진상 / 15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 출소를 앞두고 / 김영재 / 38
노동사산책 / 1989년 한국중천노동조합 일지 / 40
책읽기 / 아수라백작에 마주선 노동자 / 양솔규 / 52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9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76
연구소 공지사항 / 77


연대와실천 2004년 6월(120호)

정치초점
1 민주노동당 3기 지도부 선거가 남긴 것 / 이장규 / 3
2 민주노동당 약진의 의의와 배경 / 장상환 / 7
현장통신 / 2004년 금속노조 투쟁, 어떻게 되고 있나 / 손송주 / 20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25
연구노트
1 항만 노사관계의 변화와 전망 / 백두주 / 26
2 독일 완성차업체의 기업재조직화와 노동조합의 대응: 90년대 중반이후 폭스바겐의 사례 / 이상호 / 57
3 국제적 조건과 한국의 자본축적: 1987 - 2003 / 마틴 하트-랜즈버그 / 71
노동사산책 / 1990년 마산창원 지역 이순용 안기부 프락치 사건 / 98
책읽기 / 아래의 도전, 연대의 제안-《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양솔규 / 106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110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123
연구소 공지사항 / 125



연대와실천 2004년 7월(121호)

노동초점 /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기구 논의, 적절한가? / 허민영 / 3
현장통신
1 금속노조 2004년 중앙교섭 합의까지의 과정과 의미, 전망 / 정일부 / 11
2 다시 일어서는 철도노동자 / 박철수 / 28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34
연구노트
1 산별노조들의 조직운영과 민주주의: 전국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융산업노조의 비교 / 조효래 / 35
2 노동조합의 조직자원과 전략실행능력 / 김재훈 / 61
책읽기 / 그래서 의지가 결정적일까? -《미국 패권의 몰락》/ 박준형 / 89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92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111
연구소 공지사항


연대와실천 2004년 8월(122호)

노동초점 / 2004년 전반기 민주노총을 돌아보며 / 김영희 / 3
정치초점 / 해석의 정치 속으로 - 누구의 기회인가 / 양솔규 / 9
경제초점 / 재벌이 대안? 과거로의 여행?- 대안연대의 재벌대안론을 비판한다 / 허민영 / 12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19
책읽기 / 잘 만든 교과서 하나, 열 조직 안 부럽다 / 양솔규 / 20
교육자료 /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불확실성의 증대 / 허민영 / 24
노동사산책 / 박창수열사 의문사진상규명 조사활동 경과보고 / 박성호 / 33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40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52
연구소 공지사항 / 53


연대와실천 2004년 9월(123호)

노동초점 / 네덜란드형 대타협, 그 기적과 환상 / 이상훈 / 3
정치초점 / 민주노동당, 당의 정체성을 다시 되새겨야 / 이장규 / 13
현장통신
1 풀무원을 고발한다 / 성기환 / 18
2 노조민주주의의 승리인가? 준비된 개량인가? - 전교조 41차 대의원대회 참가기 / 조용식 / 22
3 롯데자본을 괴롭히는 서면 롯데백화점 비정규노동자들 / 박진현 / 26
해외동향 / 미국 대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일선 / 29
연구노트 / 교섭정책 없는 노동조합운동-기로에 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고민과 전망 / 강신준 / 35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57
책읽기 / 기업지배와 민중저항의 승부처 -《초국적기업, 세계를 삼키다》 / 양솔규 / 58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62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75
연구소 공지사항 / 76




연대와실천 2004년 10월(124호)

정치초점 / 국가보안법 논란과 민주노동당의 선택 / 김정진 / 3
경제초점 / 경제자유구역, 기업도시, 신개발주의에 위협받는 노동자와 도시 / 양솔규 / 8
현장통신 / 진정한 심판은 통일중공업 노동자들이 한다 / 이호성 / 22
연구노트 / 민주노동당과 노동정치 / 임영일 / 28
살아가는이야기 / 젊은 노동자에게 투자하라?! 살며, 배우며, 투쟁하며 / 김영희 / 46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50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51
노동자료 / 차별을 넘어 인간해방으로 / 전국일반노조대표자회의 토론용 초안 및 결과 / 68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81
연구소 공지사항 / 83


연대와실천 2004년 11월(125호)

정치초점 / 민주노동당의 선택과 집중 / 양솔규 / 3
경제초점 / 산업공동화의 쟁점과 대응기조 / 허민영 / 7
노동초점 / 기업매각과 구조조정, 대안은? -대우종합기계 투쟁에 부쳐 / 김연홍 / 18
연구노트 / 진보정당의 원내진출과 노사관계의 전망 / 정영태 / 24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79
노동판례 연구 / 노동판례 단신 / 법제도연구분과 / 80
노동자료 / 파산의 지방의회 : 문제점과 대응방안 /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 96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109
연구소 공지사항 / 111


연대와실천 2004년 12월(126호)

경제초점 /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한 경영참가의 가능성과 한계  / 허민영 /
노동초점 / 변화와 대응,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현주소와 전망 / 강신준 /
연구노트 /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노동자상태와 노동운동 / 조효래 /
연재번역 / 서론: 중국과 사회주의, 제1장 중국 모델의 부상 / 마틴 하트-랜즈버그, 폴 버어킷 /
만화로 보는 세상 / 이창우 /
책읽기 / 《탈선》 / 양솔규 /
연대와실천 총색인 / (101호-126호) /
자료 새로 들어온 자료목록 /
연구소 공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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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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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 토론회 전문기자

[칼럼] 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오창엽     메일보내기
최근 각종 토론회들을 취재하고 있다. 확인해 본적은 없지만 다른 매체의 기자들에게 “국내 유일의 토론회 전문 기자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한다. 프로메테우스 기자들도 그러하지만 토론회를 좋아하는 기자는 드물다.

토론회 취재. 시간 많이 걸리고 골치 아프고 기사로 작성하기도 어렵다. 행사 개요만 소개하고 한두 명 발언을 소개하는 짧은 보도기사라면 모를까, 그 내용과 주제를 독자들에게 적절한 분량으로 그리고 쉽게 전달하려면 무척 많은 시간과 힘이 드는 작업이다. 게다가 독자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치 참석해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영상으로 녹화하여 보여주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토론회를 담은 몇 시간짜리 인터넷 영상을 몇 명이나 보겠는가.  

말 보다 중요한 건 뜻

나의 토론회 기사 취재 목표는 뚜렷하다.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연구하여 토론회 장소에서 치열하게 토론한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핵심 주제를 환기시키고, 각각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되 토론자들의 ‘진단’과 ‘분석’과 ‘대안’의 공통점과 차이점까지도 드러내 주려고 한다. 토론회 현장에서는 발제문으로 대신하고 넘어가는 대목도 많다. 그럴 때는 그 자리에서 발언하지 않았어도 자료집을 참고해서 그의 말과 글을 종합한다.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한 취지와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한 사회학 분야의 책들과 철학 관련 책들을 비교적 덜 지루해 하며 읽는 편이고 난해한 예술영화들도 인내심을 갖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자료집을 참고하면서 토론자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며 보내는 토론회 참관 시간이 그리 괴롭진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토론회가 진지하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재미없다. 진지하면서도 재밌는 토론은 MBC백분토론 밖에 없는 듯하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를 보아도 그날 사회자의 소개를 보아도 분명 행사의 이름은 ‘토론’회인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행사가 너무 많다.

토론(討論, discussion / debate)이란 기본적으로 대화다. 무엇에 대해 누구와 대화(discuss)하는 것이며 무엇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거나 의논하는 것이다. 즉 토론은 옆 사람이든 앞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각 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토론은 그 문제의 이해를 높이고 그 주제를 논의해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일련의 의사소통 행위다. 대안을 못 찾더라도 제대로 진단이라도 하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방백만이

그러나 최근 내가 다녀본 토론회에 ‘대화’는 없고 ‘방백’만이 존재했다. 독백은 연극에서 어떤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 또는 그런 대사’를 말하고 방백은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를 뜻한다.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이 대화를 안 하고 방백을 한다는 게 믿어지는가. 실제로 참석해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긴지 이해할 것이다.

토론회에 초대되어 참여한 토론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발언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서로 박수만 쳐 준다. 주장에 동의해서 박수를 치는 지 떠드느라 고생했다는 건지 속내는 알 수 없다. 출연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내용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차례로 방백을 한 게 아닌가. 요즘 토론회 자체가 요식행사요, 학예회 발표회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 전체가 일종의 ‘연극’이라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왜 맨 날 독백과 방백만 있냐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포함된 논쟁이 있는 그런 연극도 해보라는 말이다.

치열한 토론은 섭외부터 다르다

앞서 백분토론이 재밌다고 했다. 백분토론은 방송국의 토론전문 프로그램이므로 다른 토론회들과 비교하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백분토론에는 입장의 차이를 가진 이들이 한 토론회에 등장한다.

정치인이든 학자든 반대 되는 입장을 가진 대표자들을 모아 놓고 싸움을 붙인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발언을 자르거나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도 하지만 결국 대화를 기본으로 한다. 토론 내내 긴장감이 넘친다. 사회자도 그런 차이를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토론의 기획자가 진정 치열한 토론을 기획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업 가운데 하나이니 관성적으로 그런 행사를 억지로 수행한 것인가에 차이가 있다. 기획자가 토론자들을 섭외하고 적절히 선정할 때부터 토론회의 분위기는 거의 정해진다.

훌륭한 사회자가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끈다

그 다음 사회자의 몫이며 스타일이다. 성품 좋은 어른이 후배들 모아 놓고 순서대로 말하라고 해서 토론이 될 리가 없다. 대부분의 사회자들은 시간 배정과 약속도 지키지 못해 나중의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의 발언 시간을 줄인다. 그들 역시 발언 시간이 줄면 불편해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요점만 간략히’ 발표한다. 말 적게 하고 같은 돈 받으니 뒤에 배치되면 운이 좋은 것인가? 장소를 예약한 시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청중 질문과 토론을 반기지 않는다.

90년대 운동진영의 토론회에서는 논쟁하는 장면을 종종 보았다. 그 후로도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와 관련해서는 각 정당과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토론자들이 다른 세력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논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거 즉 표와 직결되지 않으면 입 아프게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상대를 압도한다고 해서 대중의 지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들

정치적 입장과 평소 사회를 보는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다. 평소에도 친하여 같이 술 먹고 밥 먹는 사람들이 모인다. 표정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허심탄회한 토론이 필요하겠는가. 늘 비슷한 주제의 토론에 초대받는 사람들끼리 무슨 날선 비판이 되겠는가. ‘빨리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라는 말을 안 할 뿐 이심전심이다.

토론회에서 망신당하여 학계를 떠났다거나 운동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비판을 받지 않기에 인식이 바뀌거나 그 조직의 노선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잡지의 지상논쟁이라도 활발한가.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이론가들 정책담당자들 학자들이 존재하는데 왜 잘못된 사회를 바꾸는 일은 그리 안 되는 것일까.

노동조합이나 무슨 연맹에서 하는 토론회는 조합비 걷어서 토론회 열고 자료집 찍고 발제자와 토론자들에게 수고비를 주지 않는가. 정당은 당비로 단체는 회비로 그런 행사를 치르지 않는가. 치열하게 진행할 토론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투쟁하는 조합원들 지원하거나 노조도 없는 곳들 지원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낫지 않을까.

한국의 토론문화가 수준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그럴수록 그러므로 이른바 ‘진보’를 공유하고 있고 ‘운동’과 관련된 단체와 학자들은 치열하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태도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동안 직접 취재하고 지켜보고 기사화 했던 각 토론회들을 되돌아보고 그 내용과 형식을 비교 평가해 보겠다.
2005/05/14 [19:37] ⓒ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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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조선 저녁문화

http://blog.jinbo.net/hi

 

편집 예술

신문을 인터넷 판으로 보는 것과 지면으로 보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기사의 배열에 따라 느끼는 감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왠만한 기사는 인터넷으로 훑어보더라도 종이신문을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같은 기사가 말투와 단어의 차이로 전혀 다른 기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 또한 똑같은 내용이라도 지면의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기사와는 별개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편집의 묘미에서 오는 이런 차이는 편집기술이 뛰어난 신문일수록 크게 느끼게 된다. 지면배치의 편집술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신문은 당연히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의 카피와 지면배치, 이건 다른 신문들이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흔히 조선일보의 일가친척으로 이야기되는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조차도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편집술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일보의 하수임에 분명하다.

 

조선일보편집술의 특징은 지면의 배치를 매우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기사의 순서를 정리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밝히는 한편, 그러한 의사표현이 극단적인 형태로 누구나 그 의도를 뻔히 꿰뚫어볼 수는 없도록 하는 것이 또 이 조선일보의 편집술이다. 그래서 이러한 편집술을 쫓아가려는 다른 신문사들의 노력이 때로는 매우 유치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비교되기도 한다.

 

짝퉁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페셔널을 모방하려던 신문지 한 장이 또 기가막힌 편집술을 보였다. 역시 "아침조선 저녁문화"라는 꼴통 양대산맥의 한 축 문화일보다. 이 문화일보, 5월 17일자 신문에서 편집의 예술을 보여준다. 신문 6면과 7면은 신문을 펼칠 때 하나의 면으로 나타난다. 문화일보 5월 17일자 6면과 7면을 보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보인다.

 

왼쪽, 즉 6면에는 "Future 2030"이라는 주제로 2030년까지 로봇이 혈관을 청소하고 연료전지차가 돌아다니는 등 엄청나게 발전된 형태의 기술문명이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한 면 전체를 통틀어 SF적 환타지를 묘사하는데, 기술발전에 대한 엄청난 기대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제목만 훑어보면, '미생물 농약 대대적 보급, 대체장기용 동물 개량', '가상현실 게임 실용화, 유리형태 디스플레이', '국산우주선 타고 여행, 국제공동 달기지 개발', '접이식 디스플레이 출현, 생분해성 플라스틱도', '급성바이러스퇴치, 생체시계 이용 노화방지'... 헉헉헉... 숨이차서 더 이상 자판 못두드리겠다. 어쨌든 환타스틱하지 않은가? 영생불멸의 시대가 오고 있다뉘...

 

그런데 7면을 들여다보자. 맨 윗면에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왼쪽 사진은 고개숙이고 있는 한국노총 간부들의 모습, 오른쪽에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기업임원들의 모습... 기획기사 제목 자체가 요염하다. "'고급차'타는 노조간부 '옆길'로"라는 대제목 아래 "경영진 못잖은 파워... 인사 등에 막강한 입김, 수십억대 주무르며 채용비리 등 '몸통'으로"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기사 안에는 그동안 소위 '귀족지도부'들이 저지른 온갖 파렴치한 행위가 일일이 열거되어 있다. 게다가 메인기사 옆에 박스기사로 '대기업 전 노조부위원장의 고백'까지 싣고 있다. 거의 "선데이서울" 고백시리즈같은 기사제목 붙여놓고 있는데, 그 밑에다가는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 노조비리 수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굵은 제목으로 "노조비리 수사확대"라고 써놓았다.

 

물론 문화일보가 명명한 바 일부 '귀족지도부'로 인해 노동운동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거 인정한다. 그리고 그동안 노동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도덕성을 훼손하는 치명적 오류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자정이 부족했다는 거 그거 인정한다. 그런데, 이 기사 읽어보면 마치 대한민국에서 노조활동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종비리에 직간접적으로 다 껴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교묘한 마타도어.

 

기사에 대한 소개는 이쯤 해두고, 이 기사들이 7면에 실려있었음에 다시 주목하자. 6면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상을 이루어버린 2030년의 상황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난리가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픈 욕망이 불끈 솟게 만든다. 그러다가 7면으로 눈을 옮겨보자. 2030년 도래할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들이 거기 있다. 이 '귀족지도부'들과 이들을 지도부로 모신 노조들. 얘네들이 뭔가 사고칠 것 같다. 아니 이미 사고를 치고 있다. 그리하여 6면의 2030년이 얘네들로 인해 왠지 불길해진다.

 

그리고 이 불길함의 근원지가 어딘지 결국 밝히고야 만다. 30면 하단 "오후여담" 코너는 "보지 못하는 '꽃'"이라는 제목으로 신비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어떤 교수가 이런 시를 읊었단다.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는 보지 못한 그 꽃". 그리곤 그 속내를 유감없이 드러내버린다. "경쟁은 개인은 물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모든 분야에서 정정당당한 경쟁이 필요하고 그 결과 역시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나간 평등주의에 눈이 가려져 경쟁을 꽃으로 보지 못하고 몹쓸 병균쯤으로 여기는 행태와 풍조가 정부정책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 기회균등이 아니라 결과의 균등을 요구하는 일부 시민운동단체 등도 그런 사례다. 아름다운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가 밝을 수 있겠는가."

 

이거다. 자본의 무한경쟁은 2030년의 꿈을 현실로 만든다. 그런데 그 비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노조, 시민운동단체 등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미물들이다. 요거 처단을 하고 정리를 해야 2030년의 꿈이 우리 앞에 도래한다. 그러니 돈 많은 분들 열심히 돈지랄 하시는 거 꼬운 눈으로 째려보지 마라... 장하다, 김종호 논설위원. 곡학아세, 아전인수도 이정도면 한 일가(一家)를 이룬 수준 되겠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유도하기에는 문화일보 편집의도가 너무 뻔하게 드러난다. 즉, 매끄럽지가 않다는 거다. 잔머리는 굴리는 놈만 알고 딴 놈은 몰라야 효과가 있는 건데, 다른 놈들이 그놈 잔머리 굴리는 거 다 알고 있으면 잔머리 백날 굴려봐야 뇌만 익는다. 문화일보 편집하시는 분들, 차라리 조선일보 가셔서 좀 더 배우기 바란다. 하긴 뭐 이젠 조선일보의 편집술도 백일하에 그 노하우가 드러난 형편이라 배워봐야 남는 것도 없겠지만.

 

"공갈꽃"이라는 꽃이 있다. 쬐끄만게 참 이쁘게 생겼다. 그런데 코를 들이 밀고 냄세를 맡으면 백이면 백 기절을 하고 만다. 홍어삭히는 냄세가 나기 때문이다. 칠팔월 땡볕에 서있는 이동식 화장실 들어갔을 때 느끼는 현기증, 그런 거 느끼게 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하면서 도태된 자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논리, 이게 바로 공갈꽃이다. 그 결과가 겉으로는 아름다워보일지 모르나 그 속은 썩고 썩어 사람들을 기절시키는 그런 꽃. 김종호 논설위원, 함부로 꽃 같다 붙이면서 곡학아세 하지 말지어다. 머리 나쁜 티를 꼭 그렇게 내야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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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보도의 어려움

진실 보도의 어려움


송건호

길가에서 택시 운전수들이 다투고 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말이 서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조그만 광경이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몇 건의 교통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지금 예에서 본 바와 같이 하찮아 보이는 교통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질 때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도가 이처럼 어렵다면 진실 보도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일수록 진실 보도가 더욱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또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또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 가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독자들에게 진실 보도를 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

'진실' 이란 어느 사건 또는 어느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을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면만 보고서는 그 사실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사의 말을 이쪽 저쪽 다 듣지 않고서는 공정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를 전체적으로 또는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시켜 과장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이를 은폐하여 알리지 않거나 보도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우선 일방적이며 편파적인 보도임을 말한다.

논평에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거기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못 쓴다'거나 또는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하며 그 밖의 각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曲筆 論評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곡필을 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의 사고를 하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가치는 역할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도 내일에는 부정되고 오늘 부정된 가치라도 내일에는 평가를 받는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 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입장이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 가치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차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다는 점을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는데 차체가 어느 만큼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면이 그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은 면이 그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문제 또는 사건의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이미지가 전혀 달라진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 가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달라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월남의 최후를 보도하는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라도 역점을 두는 측면이 나라에 따라 다르다.

가장 주관적인 보도가 진실 보도이다.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기사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좀 주의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를 보도일수록 객관적이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 가장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구체적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시라까와 대장 등을 폭사시킨 테러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거울같이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살인적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윤 의사의 장거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되어야 할 역사적 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 판단뿐 아니라 윤 의사의 장거 당시 국내의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테러' 행위와 관련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 위에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위와 같이 수많은 다른 사실들과 횡적 종적(역사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데 만약 이와 같이 풍부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높은 차원에서 주관적 보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 활동에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 이 밖에 문학적 철학적 소양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라는 좀 극단적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가장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진실을 전달하려면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동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 관계가 진실을 좌우한다

신문이 진실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전적으로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보도에 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곡필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또는 좀 좋게 말해서 취재 기술의 미숙에서 진실 보도를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편이나 다 같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 쪽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피상적 견해임을 면치 못한다.

물론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책임이 기자 쪽에 있다는 말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 보도가 안 되는 이유를 전적으로 기자들의 윤리 문제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은 신문 제작의 현실을 모르는 불충분한 견해라는 것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며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까닭은, 문제를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 새로운 것 대신 낡은 역사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고, 근거를 조건을 근거로, 즉 중요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뒤바꾸어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에서 배우는 것처럼, 기사 작성의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특정 문제를 보도하는 데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이해 관계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진실 보도다 아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A를 B라고 보도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말할 것도 없다. 현대 신문이 이렇게 졸렬한 거짓말 보도를 하는 예는 지극히 드물다. 사실에 입각해 보도하면서도 어느 특정 면을 특히 확대시킨다든지, 발전적이 아니고 낡고 소수를 위한 전시대적 가치의 편에서 보도한다든지, 중요한 점이 아닌 면을 중요한 것처럼 확대시킨다는지 하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이해 관계가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중요한 문제로 보고 또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기대되는 보도일수록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압력을 가하려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시정할 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이 진실한 언론임을 의미한다면 진실한 언론은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다분히 현실 부정적, 현실 지양적 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만약 곡필이 부조리한 현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표면상 온건하고 긍정적이며 따라서 건설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진실의 언론'이라기보다 '곡필의 언론'이며, 그것은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진실 보도를 하려는 언론은 항상 현실 비판적이며 때로 현실 부정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진실의 언론일수로 '파괴적 언론'으로 당시의 권력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의 걷기 마련이다.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위해 살기는 어렵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신문 또는 언론인이 때론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건호/서울대 법대 졸업, 주요 일간 신문에서 논설 위원과 편집 국장을 지냈다. 한때 언론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한겨레 신문)대표 이사 .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저서로는 (분단과 민족),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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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quot;참세상은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quot;

[창간사] '참세상'을 열며
"참세상은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
참세상 
바뀐 미래의 이름, 참세상

2005년 오월 초하루 메이데이 우리는 참세상을 연다. '참세상'은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의 이름이자 이 세상을 앞당기려 만든 매체의 이름이다. 어떤 세상이 참세상인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착취, 자연의 인간에 의한 파괴가 사라진 세상, 우리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생산하고 활동할 수 있는 세상, 호혜와 연대를 기반으로 각자 마음껏 자신의 에너지를 펼치는 세상, 지배와 함께 허위도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참세상을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세상!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향해 쏘아 올리는 희망의 화살이다. 바뀐 우리 미래의 이름, 참세상! 이 작명으로 우리는 태어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염원을 담는다. 물론 이름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으리. 그래도 우리가 바뀐 미래를 원한다면 그 이름을 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참세상! 이 이름으로 우리는 저만치 머뭇거리고 있는 참세상을 부른다.

참세상은 민중언론

참세상은 어떤 언론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지배의 위선을 배격하고 해방의 진실을 펼쳐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언로는 막혀 있다. 부당한 지배의 억지 논리와 거짓 증언들이 난무한다.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어렵고 복잡해졌다. 그래도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진실 하나뿐, 참세상은 세상의 진실을 찾아 그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진실은 핍박받는 민중의 진실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민중은 착취와 차별과 억압의 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참세상은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참 언론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언론을 자임한다. 그동안 민중언론은 너무 수가 적었거나 미약하였다. 한국의 언로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보수언론이다. 이들은 민중을 착취하는 세력을 지지해야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만큼 당연히 민중 편이 아니다. 민중의 진실을 외면하기는 1980년대 말 이후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출범한 이른바 개혁적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난 십 수년에 걸쳐 민중 수탈을 강화해온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거짓 발언을 조장했거나 방관해왔다.

최근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 등장한 인터넷 언론 또한 민중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지는 못했다. 해방의 진실을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그동안 커진 발언권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언론 지형에 개입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변혁의 대의를 따르는 민중적 노선을 분명히 할 것이다. 참세상은 민중언론이다!

참세상은 민중해방의 지지자로서 민중운동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민중의 진보운동은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극복해야 할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 곳곳에서 애써 거둔 진보적 성취들이 흩어져버리면서 민중운동은 여전히 보수세력의 지배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모습이다. 민중의 힘은 분산되었고 민중운동 내부에는 상호 불신의 모습까지 눈에 띈다. 우리는 민중이 일사불란한 진형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서로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운동들이 서로간에 감시와 비판을 게을리 하지는 아니하되 포근한 연대의 마음을 품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참세상은 어려운 처지에서 벌이는 민중의 노력들과 힘겹게 거운 성과들이 공명을 이루며 진보의 효과를 내도록, 연대의 성과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참세상은 민중의 편이 아닌 쪽과는 분명한 차이의 선을 그을 것이다. 우리는 민중을 착취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억압하는 모든 세력들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 부르주아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다. 우리는 계급과 성과 인종·민족과 세대 등 사회적 분할 전선을 지배하는 세력들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이들 전선의 모든 진보적 투쟁과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어떤 반민중적 침략과 압박과도 싸울 것이다.

민중을 믿으며 민중과 함께

민중언론의 기반은 민중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민중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민중의 다양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민중에게는 말할 권리, 불평할 권리, 따질 권리, 요구할 권리, 싸울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런 권리를 요구하며 쟁취하려 나선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 권리, 기쁨을 누릴 권리, 행복해질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민중언론이다!

나아가 우리는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하려 한다. 우리 민중은 서로 가족이고 친구이고 동지이고 연인이다. 우리는 함께 가난하고 불쌍하고 억울하며 비천하다. 우리 민중의 일상은 슬픔과 회한과 분노, 정열과 기쁨과 흥취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감흥을 공유하며 민중의 관점과 판단으로 세상을 보고, 민중의 염원을 담아 세상을 바꾸고 싶다. 참세상은 따라서 수많은 민중적 감각과 예지, 능력들이 합쳐지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참세상을 꾸리기 위해 민중과 더불어 더 깊게 느끼고, 더 예리하게 보고, 더 정열적으로 말하고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민중에게는 엄청난 역량이 있다. 참세상은 민중 아닌 누가 던져줄 선물이 아니다. 오직 우리 민중의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다. 민중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고, 모든 좋은 것들을 생산할 삶의 에너지가 있으며, 호혜와 연대의 울타리가 있고, 기쁨을 함께 할 감성과 정열, 판단력과 예지가 있고, 이 모든 것들을 발휘할 문화적 힘이 있다. 우리는 또한 비판적 시각으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희구,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새 세상에 대한 염원과 그것을 기획할 상상력이 있다. 민중은 능력 그 자체이다.

참세상은 이런 능력으로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 우리의 진실은 민중의 감성과 지성과 기질과 도의에서 그 힘이 나온다. 우리는 민중적 진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입증할 것이다. 우리가 쓸 기사와 칼럼과 논설, 참세상을 탈 문자와 이미지와 소리는 따라서 모두 진실을 진실로 말할 것이다. 우리는 외면당해온 민중의 진실, 지하수가 되어 흐르는 이 진실의 생명수를 길러내 위선과 거짓으로 달뜬 지배자의 얼굴에 뿌릴 것이다.

다양한 민중을 다양하게 표현

진실의 힘, 그 원천은 순수함이다. 우리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것이 어린아이였음을 기억한다. 순수함이 아이로 하여금 검열과 침묵, 그리고 지배의 족쇄를 풀어 던지게 했다. 우리 민중도 진실의 차꼬를 풀어내는 천진난만한 아이이다. 그리고 민중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아이처럼 다양한 능력이 있다. 진실을 말하는 방식도 창의적이며 다양하다. 참세상은 민중의 이런 능력으로 다양한 진실의 언어를 발굴할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준열하겠지만,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비통하게, 때로는 희화적으로 세상과 만나고 민중과 만나며, 지배자들을 바라볼 것이다. 참세상은 민중이 말하고 쓰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는 교육장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넘쳐난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청소년, 노인이다. 우리는 학생이고, 주부이고, 비정규직이고 페미니스트이고, 동성애자이다. 우리는 일자리와 땅, 집을 잃은 억울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삶을 개선하고 싶은 소박한 시민이다가도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혁명가이다. 우리는 착취당하고 주변으로 내몰리고 억압받지만 동시에 저항하며 인간다운 삶을 꾸리고자 "이제 그만!"이라며 일어서는 모든 소수자들이다.

참세상의 우리도 이런 인간이다. 우리도 노동하고 생산하고 활동하며, 우리도 고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민중의 꿈과 에너지가 우리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활활 타고 넘쳐나는 민중의 에너지로 우리는 오늘 참세상을 연다. 진실의 큰문을 열고 지배의 허위들을 벗겨내자. 민중의 생명력을 앗아가려는 모든 것들과 투쟁하자. 가서 우리가 잃은 것들을 되찾고 우리의 활력을 보여주자. 우리는 넘쳐난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이며 민중언론이다! 자랑스런 우리, 가자 나아가자, 참세상을 향하여!
보편과 상식의 좌파적 가치 실현, 민중언론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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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 언론운동론 비판

 

4. 기존 언론운동론 비판 - 레닌주의, 히틀러, 김일성 등


  헤게모니에 대한 이론들이 혁명을 이뤄내지 못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했다면 혁명에 성공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구체적인 언론운동론이 발달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언론운동론들이 혁명 후 결과한 모습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아니 심지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부르주아 언론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는 적잖이 의심스럽다.


ㄱ. 레닌주의

  남한의 언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언론운동론이라면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빼놓을 수 없다. 레닌이 아니라 레닌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은, 레닌이 러시아라는 구체적 상황 아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언론을 활용한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저작들이 경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교조이기 때문이다. 흔히 NPN으로 약칭하는 레닌의 전국적 정치신문론은 수많은 운동 세력들이 반복해서 따라했던 바 있고, 선전/선동의 이분법 또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일반이 아니라 현실적 적용에서다.

  여기서는 레닌의 언론운동론을 당대의 상황과 연결지어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선전”과 “선동”이라는 용어의 차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먼저 분류한 것은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플레하노프인데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선전 - 많은 내용을 소수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선동 - 적은 내용을 다수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그럼 이제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의 변천사로 넘어가자.


서클선전 - 러시아에서 노동운동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자(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서클로 조직하고 선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대에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거의 결합하지 못했다.


경제선동 - 마르토프 등이 발표한 “선동론”에 힘입어 활발한 경제선동이 일어났다. 경제선동의 성과로 1896년 직물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이 일어나게 되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주의에 빠져든다.


전국적 정치신문 -  레닌은 1901- 1902년 사이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조직)의 건설을 위한 구상을 했으며, 노동계급 신문의 공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스크라” 제4호(1901년 3월 13일)의 기고문에서 당과 신문의 연결에 관해서 논했는데, 신문은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주체의 네트웍을 통해서 당의 조직을 형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조직의 센터로서 신문을 논한 것이다. 당은 지역에서의 강한 정치적 조직을 필요로 했으며,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신문은 지역에서의 직업혁명군 양성에 일조했다. 레닌은 조직자로서의 신문을, 당 조직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며, 작업을 배분하고, 조직화된 노동을 공동의 결과물로 승화시키는 중심기구로 봤다. 지금까지 언론의 집단적 선전자, 선동자 등으로서의 기능에 조직자를 첨가시킨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 민주주의 형성을 3단계로 잡고, 그 가능성을 “종합적 정치의 노출에 관여하는 조직(자)”으로서의 언론에서 찾은 것이다.


신문조직이 당의 하부로 - 신문을 통한 당조직 건설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레닌은 신문조직을 당조직의 하부에 둔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기본적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는 데 “당의 신문에 대한 우위”와 “조직자로서 신문”이라는 두 가지 입장은 교조적으로 소련에 적용되면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우리가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소련의 레닌주의 언론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의 레닌주의 언론관은 소련 민주주의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언론이 당의 노선에 따라 인민을 조직하는 기능으로 제한되면서 언론의 자유는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 레닌주의 언론운동론 적용의 현실성

  레닌이 운동을 펼쳐나갔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짜리즘 전제정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로 프롤레타리아가 전인구의 2%에 불과했으며 높은 문맹률과 광대한 영토, 운동의 고립분산성에 의해 고통받던 시기였다. 반면 오늘날의 한국은 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반도체, 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 이미 노동자 계급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는 약 2500만명(노동자는 1300만)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과 “한류 열풍”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로 수출할 정도로 발전된 문화산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실제로도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한국 운동에서 실제 전술로서 구사된 것은 90년대 초반까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을 고수하고 있는 운동세력이 군소하게나마 존재하고 또한 80년대 레닌주의의 세례를 받은 운동가들의 관념 속에 레닌주의 언론운동론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ㄴ. 나치의 선전론

  히틀러에 대해서 “언론운동”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그의 선전 이론은 가히 전설적이며, 언론운동가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상을 던져주고 있다. 일단 히틀러,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mus:Nazi), 제3제국의 선전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나치의 선전론에는 선전/선동을 구분하지 않고 선전으로 통칭한다. 일반적으로 나치의 선전에 대한 대중 최면에 주목하는 오해가 나타나곤 하는데, 실제로 나치가 생각한 선전이란 “현재의 경향과 신념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감정뿐만 아니라 이성에도 호소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정부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대단히 무능했으며 나치는 그러한 상황을 가장 잘 이용했다. 실제로 나치에 표를 던진 많은 이들은 나치가 자신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나치는 어떻든 물질적인 성과들을 대중들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물론 나치의 선전론에 있어서 대중최면도 무시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 불렀는데 주로 정치행사를 거대한 의식(儀式)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히틀러는 오후6시를 택해 거대한 스타디움을 꽉 매운 군중 앞에 선다. 대중의 시선은 히틀러에게 모이도록 무대가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은 마치 후광처럼 히틀러의 머리 위에 드리운다. 군중심리와 함께 이런 연출효과는 청중들로 하여금 히틀러를 광적으로 지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치의 선전에서 중심을 이뤘던 것은 “민족공동체”와 “지도자”였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박정희를 경험한 한국에서는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치가 발흥했던 독일은 민주주의 헌법의 모범적인 사례로 불리우는 바이마르 헌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여전히 한국에서 적용가능성이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97년 대선 때 몰아친 박정희 광풍은 나치 선전의 한국적 재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ㄷ. 김일성주의 선전선동론

  레닌주의 선전선동론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나치 선전선동론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에 반해 김일성주의 선전선동론은 앞의 둘에 비하면 어느모로 봐도 격이 떨어지나 레닌주의 선전선동론과 나치 선전선동론의 결합이라 볼 수 있다는 점과 한국 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주의 선전선동을 아리스토텔레스 수사법을 적용하여 논거발견술, 논거배열술, 표현술로 나누어 알아보자.


  논거발견술 -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김일성주의에서 사회주의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지배담론으로서 사회주의이다. 북한의 모든 사회적 결정들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목적아래 종속된다. 또한 북한의 사회주의는 일종의 전체주의로서 사회주의인데 이는 수령을 “뇌수”로 하는 사회유기체설에서 극대화된다. 이는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논거배열술 - 동어반복과 신화적 언어

  김일성주의의 논거배열방법은 동어반복적이며 신화적이다. 조금 희화화해서 말하자면 김일성주의의 내용의 절반은 김일성주의가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주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주체”라는 어휘는 “수령”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언어의 마법적 사용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표현술 - 반복성, 대중성, 민족성

간단히 말하면 한자어보다는 고유어를(민족성),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을(대중성), 같은 말을 계속 반복(반복성)하는 것이 김일성주의 표현술의 특징이다. 특히 반복성에 대해 말하자면 같은 말을 나열하는 것 뿐만아니라 정형화된 어구를 반복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는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서술한 구술문화의 특성과 유사한데 이러한 표현법은 한 마디로 외우기 쉽다는데 특징이 있다.

김일성주의 수사학의 특성은 나치보다 더 강화된 세뇌적 언어이며 언론구조에서는 레닌주의의 집중화된 언론을 보다 더 강력하게 집중화시키고 있다. 김일성주의 선전선동은 언론운동이라 볼 수 없고 독재적 국가권력을 전체주의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이라 보아야할 것이다.



5. 서유럽의 언론이론

  부르주아 언론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진행된 곳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도 못한 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혁명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는데 반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노동자 계급이 계급으로 자신을 형성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당대의 보편적 인식에 반하는 이러한 현실은 유럽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토대에서 상부구조로 경제에서 정치, 언론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고 그 이론적 실천의 성과물들로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 공론장 등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 이론들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기만 하자. 여기있는 내용들은 그람시에서 일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제2대학 학술/학회 커리큘럼 자료집 제1판”에서 수정/발췌했다.

 

  ㄱ. 그람시

  “그람시”라고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헤게모니”가 떠오를 정도로 이와 관련된 풍부한 고찰을 남겼지만 실제로 그람시는 단순히 이론가만은 아니었다. 그람시에 대한 해석의 방향에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어중간함”에서 기인한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국가이면서도 모순적이고 불균등한 자본주의적 발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후진성”에 주목하면 그람시는 “불균등 발전”에 대한 이론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선진성”을 중심으로 파악하면 그람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의 혁명”에 대한 이론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그의 후기 저작 전체가 “옥중 수고” 즉 감옥에서 작성한 노트로 그것도 검열을 의식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어법으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람시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그람시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헤게모니 개념부터 살펴보자. 그람시는 부르주아 지배는 단순히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세계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르주아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헤게모니는 힘과 동의, 지배와 도덕적 지배의 배합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람시가 강제력이 동의의 본질적 구성요소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동의과 강제력이 유동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는 단순한 억압기구라고 볼 수 없다. 국가는 강제력을 행사하는 기구라고만 볼 수는 없다. 국가는  대중을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국가가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바로 시민사회의 존재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단순히 경제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상부구조이다. 이 상부구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것뿐만 도덕적이고 지적인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는 정치사회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다음의 그림을 참조하라.


 

 

외곽호

 

 

 

헤게 

모니 

 

참호

동의

 

힘, 권력

정치권력

강제력

 

시민사회

 

 

 

정치사회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이러한 시민사회의 존재 때문에 혁명의 전략 또한 달라져야 한다. 그람시는 혁명전략을 러시아혁명과 같은 국가권력장악전략인 기동전과 헤게모니에 기반한 혁명인 진지전으로 나눈다. 물론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했지만, 시민사회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서구에서는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식의 진지전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

  진지전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대중의 지지기반 위에서 최후의 정치적 공격을 가하기 이전 시기에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합의의 차원에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시도하는 단계에 상응한다. 따라서 진지전은 지배그룹과 직접 대결을 회피하면서 헤게모니의 지형 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단계에 까지 미치지 않는 시민사회와의 전쟁을 의미한다. 즉 외곽호 내부에 있는 참호를 먼저 분쇄하자는 논리이다. 요컨대 단순히 정권과 물리적 권력의 탈취만으로 진정한 혁명이 성취될 수 없고, 먼저 시민사회를 장악함으로써 ― 즉, 헤게모니의 기반을 획득함으로써 ― 만이 사회주의혁명은 성공적 완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다음의 말이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사회 그룹은 정부의 권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고, 사실상 이미 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실로 그러한 권력의 획득을 위한 기본조건들의 하나이다.”


  ㄴ. 알튀세

알튀세는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를 정초하기 위하여 토대환원론, 경제주의, 목적론 등에서 벗어난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반헤겔주의, 반경제주의, 반주의주의, 반인간주의를 표방한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헤겔적 모순론의 극복이다. 알튀세는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의 변증법은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변증법은 ‘모순의 단순성과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알튀세는 모순의 복합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모순을 하나의 기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단순한 기원적 통일성에 기반하는 헤겔주의적 표현적 총체성 개념은 모순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의 중심과 본질을 남김없이 포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는 맑스의 변증법에서 모순은 헤겔주의적 단순성을 넘어, 모순의 불균등 발전과 그들간의 응축과 전치로서 설명된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중층결정)이다. 또한 사회 역시 여러 심급들이 서로 얽혀있는 복합체이며,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의 본질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알튀세가 위와 같은 설명이 갖는 상대주의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단서를 집어넣는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는 스스로가 언제나 지배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요소가 지배적이 될지를 궁극적으로 결정해 준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알튀세는 “최종결정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최종심급이 궁극적인 원인, 실체, 본질은 아니며, 논리적으로 최종결정을 해야하는 그러한 시기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알튀세는 초기저작에서 이데올로기적 문제틀과 과학적 문제틀을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취한다(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하지만 후기(1967년 이후)에 들어서는 “주체를 생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갖는 적극적인 의미를 해명한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존재이며 주체를 질서에 편입시키는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한 물리적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ㄷ. 라클라우/무페

포스트맑스주의라는 개념을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맑스주의 이후의 맑스주의를 일반적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일반적으로 포스트맑스주의라고 할 때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견해를 뜻한다. 이러한 이들의 견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담화’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따르면 기호와 실제대상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책을 책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적 적대와 연결시켜 보면, 사회적 적대라는 것 역시도 ‘실제적인 측면’보다는 ‘담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실제로 계급현실이 어떠한지와 실제 그것을 언어적 틀로 담아내는 ‘담화’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소쉬르는 기호는 기호사이의 차이값으로 인해 성립한다고 했다. 예컨대, 책이 책인 것은 공책이 아니기 때문에 책이라는 것이다. 이를 응용하면, 사회적 적대는 특정계급들 사이의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들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라클라우/무페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된 생산관계변혁을 위한 투쟁보다는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하기 위한 사회관계의 변형을 위한 담화적 조건의 창출’이 당면과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차피 담화적 투쟁이기 때문에 굳이 노동자계급이 수행해야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ㄹ. 하버마스

  하버마스의 이론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조금은 힘겨운 일이다. 그 이유는 하버마스가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하는 사상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의 책의 뒤에 있는 참고문헌에는 서구사상의 웬만한 저작은 모두 모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버마스의 이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행위가 왜 사회이론의 출발이어야 하는지만 이해한다면 나머지를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목표를 천박하게나마 정리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언어가 매우 중요하며, 시민들이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맑스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맑스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생산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맑스의 생산패러다임을 의사소통행위에 기반한 상호작용패러다임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다양하다. 장은주나 장춘익의 글은 하버마스의 패러다임이 맑스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그 보완일 수는 있다는 입장이다. 즉 맑스가 주체를 억압하는 물질적 조건(경제적 토대)를 변혁하려고 했다면, 하버마스는 주체의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문화적 조건(의사소통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생각이지만, 하버마스의 이러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니체나 푸코식의 이론이 시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하는 실천적인 물음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반면 하버마스는 좀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꼭 푸코식의 비판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버마스식으로 경제적 토대의 변혁에 대해 무관심한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이다. 물질적 생산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적 구조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로 두가지 목표(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혁과 의사소통구조의 확보)를 설정해야 한다는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를 ‘민주주의’의의 문제, 주체들의 자율성이 억압되었다는 문제에서 찾는다면 말이다.


6. 마치며

  자평하기에 서론에서 밝힌 목표 즉 대학언론운동의 이론적 과제를 밝히겠다는 이 글의 목표를 온전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언론이론 자체가 걸쳐있는 분야가 방대하며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언론학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요구한다는 말로 변명을 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의 실천이었던 언론운동들은 대중을 자신의 것으로 전취하는데 몰입한 결과,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당대의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언론의 현실태를 분석하는데 천착한 이들은 다만 하나의 해석으로만 자신을 자리매김했을 뿐이었다.

  글의 초두에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을 살펴본 것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론이 단순히 세상을 바꾼다는 목적합리성에 매몰된 것도, 현실의 분석에만 파묻힌 것도 아닌 고대 수사학에 필적하는 종합적이고 방대한 체계 즉, 오늘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대안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현실적이며 과학적인 운동의 방법들을 정립하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실천적 철학자가 남긴 금언은 아직도 우리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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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이건희 저지 시위' 방어 특별호




http://www.alltogether.or.kr/2005new/newslist/list.php3?tb_name=news&section=news&ho_number=54-1

 

<다함께> 신문 5월 4일자 특별호

 

4면, 총 7개 기사

 

[1면]

 

고려대 당국이야말로 반지성적이고, 삼성재벌이야말로 폭력적이다
- [이 글은 ‘다함께’의 고대모임이 5월 3일 학내 대자보로 붙인 글이다.]

 

[2~3면]

 

삼성은 어떻게 ‘글로벌’ 기업이 됐는가?

 

기업의 대학 투자 - 공짜는 없다

 

대단하신 회장님, 편법 상속까지

 

고려대학생들은 왜 이건희 반대 시위를 했는가

- 삼성의 ‘무노조 신화’

 

[4면]

 

이건희 박사학위 수여 저지는 정당했다

 

민주노동당 논평
청와대·정부, 고려대 학생 꾸짖을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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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창립선언문

창립선언문


우리는 왜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하는가


우리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이념적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한다. 헤겔이나 맑스.엥겔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유란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자연과 사회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것들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레닌 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구체적 조건, 즉 한국사회의 정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운동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 우리의 노력을 우선적으로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정세와 운동의 국제적 규정성.통일성.전체성을 놓치지 않고 국제적 시각을 견지할 것이며, 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확대.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에서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 열렬한 학습의 요구가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학습이 기본적으로 서유럽/사민주의적 강단 맑스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현란하지만 극히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각양각색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현실은 시급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동의 질곡이다. 이러한 사상적 조류는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 '진보'와 '변혁'의 가면을 쓰고 더욱 횡행하고 있으며, 그만큼 노동자계급운동의 사상적.이념적.정치적 혼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사상.이론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운동의 측면에서도 단절과 부정.청산이 아니라 계승.발전이라는 관점에 설 것이며, 저들 모략적이고 몰역사적인 청산주의와 단호히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운동 내에 득세하고 있는 '진보정치'라는 이름의 사민주의.개량주의적 정치 조류와도, 그리고 무원칙한 '좌파 통합주의'와도 비타협적인 사상.이론적 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힘찬 단결을 소망하는 노동자 대중의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망에 편승하여 세를 확대하고 있지만, 그 사상적 본질은 기껏해야 편의주의 혹은 실용주의일 뿐이며, 그러한 편의주의.실용주의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기약할 수 없음은 바늘 허리 매어 못 쓰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우리는 특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함에 있어 억압과 착취 그 자체를 폐지하는 대신에 신자유주의라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만을 지양하려는 일부 경향을 강력히 경계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에는 여러 분열.대립이 존재하고 있고, 그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정치적.조직적 통일과 단결을 달성하는 것이 현 단계 우리 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 통일과 단결은 '대동단결'이나 '좌파 통합'의 구호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고, 오로지 그 분열과 대립의 원인인 여러 편향을 극복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정치노선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여러 편향 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민족주의적 편향이 몰계급적 국가주의로 경도되어 가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사실상 독점자본의 그것에 종속시켜가고 있는 경향에 주목한다. 우리는 또한 협소한 경제주의와 실리주의, 그리고 쌩디칼리즘도 경계한다. 이들 편향은 타협주의와 계급협조주의의 정서적 기초일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통일적.체계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는 사상적 원인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운동은 그 사상.이론과 실천의 양면 모두에서 이들 편향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통일적.체계적으로 파악.대응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이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단결하여 발전할 수 있다고 믿으며, 노동자계급운동이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이론의 과학성에 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정세와 객관적인 조건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유물변증법적이고 사적유물론적인 역사.사회과학을 탐구하고 보급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책임있는 비판과 토론을 언제나 환영하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 개인.조직들과 개방적인 연대행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실천적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2005년 5월 1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창립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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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갈리츠키에 대한 답변 - 타리크 알리

타리크 알리(Tariq Ali) <제트 매거진> 2000년 5월
원 제목 = (The Third Period In Outer-space: A Brief Comment On Boris Kagalitsk's Suicide)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이론지 <뉴 레프트 리뷰>가 2000년 1월호를 계기로 전면적인 지면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편집인 페리 앤더슨은 "갱신(Renewal)"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승리를 거뒀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좌파 세력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현 체제에 대한 순응도, 그렇다고 막연한 변혁의 희망도 아닌 "타협없는 사실주의"를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반박 글에서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 카갈리츠키는 변혁을 포기하는 리뷰의 자살 선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맞서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는 비현실적인 비판이라고 일축합니다.


나는 뉴 레프트 리뷰의 적절한 재창간에 대해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분노를 터뜨린 것에 대해 황당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으며, 그는 절제되지 못한 발언을 종종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따뜻한 인간이다. 나는 80년대말 자신의 부인, 아이와 함께 런던을 방문한 그가 우리집 부엌에서 나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고르바초프에 적대감을 보여 놀랐다. 고르비의 대안인 옐친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옐친이라는 정치 공백기가 환영할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옐친 다음에는 좌파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그에게 이런 태도는 정치적 자살행위같은 것이라고 말했고, 사민주의를 주요 적이라고 비난한 스탈린 3기와 타엘만스(Thaelmanns)가 1933년 파시스트들의 승리를 지적하면서 히틀러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한 정신나간 발언을 상기시켰다. 물론 보리스는 자신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논쟁은 더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그의 아들이 바지를 더렵혔던 것이다.

나는 아장아장 걷는 이 아이의 말없는 행동이 자기 아버지의 환락적인 극좌주의에 대한 본능적 적대감을 명확히 보여주는 너무나 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마피아가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다. 대중은 불만에 차 있지만 겁먹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애틀이 아니다. 그러나 보리스는 변한 것이 없다. 이제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대로 라면 과거 리뷰는 종종 피상적인 급진주의와 이빨 빠진 온건의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 잡지는 국제주의적이며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이제 잡지는 자신의 과거를 배신하고 도를 넘어섰다. 최근 내가 뉴욕에서 열린 사회주의학자회의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잡지 이야기는 거의 안했고 자신의 책 '유럽의 좌파' 출판을 거부한 버소출판사(Verso, 뉴 레프트 리뷰를 발행하는 곳)에 대한 개인적 불평을 털어놨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그 책을 플루토프레스가 작은 3권의 책으로 출판해 잘 팔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버소에서 거절당한 것에 화가 많이 났고, 특히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이 출판을 거절하며 보낸 편지에 적대감을 느끼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의 원고를 거절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버소의 자살'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별 생각없이 리뷰의 자살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년동안 뉴 레프트 리뷰의 변화와 재창간을 논의해왔다. 모든 사람이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지난해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아 재창간을 관장할 때까지는 이를 추진할 힘이 없었다. 이제 일이 벌어졌고 새로운 디자인, 편집, 서평과 문화 관련 글의 보강에 대한 반응은 일반적으로 좋다. 앤더슨이 서명하고 쓴 논설은 놀랄 것도 없이 일부의 비판을 야기 했지만 그가 강조한 기본 논점은 슬프게도 잠시 외계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세기말 자본주의의 승리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모든 체계적 대안의 붕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시애틀은 아주 기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애틀도, 그렇다고 프랑스의 파업 물결도 근본적인 상황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과장하는 것은 절망만 키울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현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뉴 레프트 리뷰 재창간 2호에서 제프리 아이작(Jeffrey Isaac)과 알렉스 칼리니코스(Alex Callinicos)가 벌였듯 앞으로도 논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레닌이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했던 때와 전혀 다른 새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리뷰는 미국과 유럽연합내 미국의 동료들에 여전히 적대적이다. 편집위원회를 떠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는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하고 있다. '갱신'에서 페리 앤더슨은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아주 분명히 보여줬다. 우리는 포크랜드 모험에 반대했으며 잡지 한호를 털어 새처와 그를 지지한 노동당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걸프전도 똑같은 강도로 비판했으며, 보리스는 우리가 나토의 발칸반도 전쟁과 푸틴의 체첸 공격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보리스, 절망하지말라. 뉴 레프트 리뷰는 각 대륙 기고자들의 글을 앞으로도 계속 실을 것이다. 다만, 새 세대가 이해하기 쉽게 세심하게 편집하는 데 더 공을 들일 것이다. 우리는 마셜 버만이 '학구적인 까다롭고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한 것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다. 리뷰는 언제나 그랬듯 내용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자신의 옷을 더럽히면서도 보리스가 바보스럽고 주관적인 개입을 하지 않게 관심을 돌려줄 가까운 이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외계에서 홀로 너무 외로우면 우리에게 돌아오라, 옛 친구여.



원문: www.zmag.org/tariqali.htm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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