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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20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솥귀
  2. 2005/05/18
    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 노학연
    솥귀
  3. 2005/05/05
    제2회 여성미술제
    솥귀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주장한다!

98년 9월.
공산당선언 150주년 기념 학술제 기고글
beyond 고학번모임 : 시타/바라/피소/하리

레닌은, 그의 혁명 동료인 클라라 제트킨이 여성당원들에게 성 문제를 토론하도록 권유하였다고 그녀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혁명 의식을 고양시켜야 할 중요한 시간에 사소한 문제를 논의하고 여자들을 방종한 경향에 영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계급사회에서 사는 것이 여성억압의 유일한 원인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이를테면 지금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분석 범주들은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가정'과 연관되어야 하는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남성에의 예속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유지되는지, 또한 무엇 때문에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무능력이, 맑스주의 이론에 사실상 "성별 억압"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맑스주의의 범주에서 이해되고 분석되어진 부분은 주로 생산의 개념이었으며, 사회적 생산관계에 따른 계급분석에의 치중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업, 가족관계 속에서의 권력의 서열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맑스주의가 보여주는 '인간 해방'은 사실상 '남성 해방'일 수 있으며,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하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부르주아지들의 담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리스 영이 현 사회의 특수한 체계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일컬어 "샴국의 쌍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하겠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분석틀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문제들이 실재하고 있는 이상, 여성 억압의 역사적 체제로서의 "가부장제" -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체제보다는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는 그 자체 독립적인 억압 체계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맑스주의가 페미니즘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페미니즘은, 다층적인 제도를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권위주의적 체계 전반(가부장제)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이며, 동시에 그것의 구조적 변혁과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실천적 운동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여성 억압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를 자본주의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영역"으로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각자 나름의 역사와 나름의 메커니즘(동학)을 보유한 별개의 억압체계인 것이다. 물론 현실의 수준/구체의 수준에서 가부장제의 영역과 자본주의의 영역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론의 수준/추상의 수준에서 이 둘은 각기 별개의 체계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하기 위해서 "상품"이라는 추상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 억압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우회로를 거칠 때에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두 개의 억압 체계는 현 사회에서 서로에게 복잡하게 연관된 현상으로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의 문제를 혁명의 한 켠에 끼워 달라는 부탁이 결코 아니다 - 만약 그런 식의 "탄원"으로 억압이 사라질 수 있다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낙원은 지금쯤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좌파는, 그 동안 여성억압의 문제를 하위 개념으로,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주제로, 혹은 기껏해야 "자본주의의 아주 정교한 하부 메커니즘"으로 다루어 왔던 관성에서 벗어나(이것은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심오하게 성별화된 맑스주의 이론을 재구성해내야만 한다.

이 글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성별 억압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의 헛점이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과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백은 광란의 세계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에 심각한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족'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표방하는 맑스주의 정치 자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결여'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이론의 이와 같은 커다란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다방면에서의 비판적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생산과 재생산 개념, 노동에 대한 기본적 전제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통한 맑스주의의 재구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적어도 맑시즘에 기반한 운동이 전 인류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되고 계급모순이 사라지면 그밖의 다른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라는 식의 순진하고도 안일한 자세에서 벗어나 맑시즘 자신의 이론적 빈자리들을 고찰,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맑스주의의 공백들


1) 맑스주의 이론에 "여성"은 존재하는가?

맑스주의는 분명 인간해방을 위해 주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 방점을 찍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우리는 중요한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의 인간이란 누구인가?" 해방될 '인간'이라는 범주에 '여성'도 포함되는가? 맑스주의 자체가 기본적으로 남성적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0세의 맑스가 노동자들의 국제주의를 위해 서술한 {공산당 선언}에서조차, 역사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마치 여성은 남성들의 혁명에 의하여 해방되어지는 존재처럼 그려져 있을 뿐이다. 생산노동 영역에서의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여성 억압이라는 사회적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각기 여성과 남성의 자리로 공고화되면서 여성에게 어떠한 이중의 억압이 가해지고 있는 지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성은 노동자의 위치에서 자본의 착취를 당하는 동시에 가정에서 남성 가부장의 착취를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논의에서는 여성을 '노동자'라는 탈성화된(desexualized) 범주로 뭉뚱그림으로써, 노동해방이 달성되면 여성해방도 달성된다는 순진한 낙관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논의에서는 아예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삭제하고 있다. 맑스주의 패러다임 자체의 근본적 재구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여기서는 몇 가지 주요한 공백들을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2) 모계제의 타도

맑스주의 안에서 '가족'에 대한 분석은 주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엥겔스는, '물질상황의 변화가 어떻게 가족관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모계제에서 부계제로의 전환은 잉여가치의 발생에 의해서 가능해진 사유재산의 소유, 상속의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 이어서 엥겔스는, 원시사회에서는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채집과 의복, 식기류 등의 생산을 여성이 담당하였고 종족의 재생산 또한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기 사회가 모계제 사회였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여기서의 모계제 사회는 여성이 경제력 뿐 아니라 정치력과 사회권력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모가장제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냥을 담당했던 남성들에 의해 동물의 가축화와 사육이 가능하게 되고 이로 인한 '잉여'가 발생하면서 남성의 생산성이 중요성을 더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의 중심지가 여성으로부터 남성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여성의 일과 생산의 가치가 약화됨에 따라 그들의 지위 또한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반면 남성들은 가치있는 사회경제적 상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상속'이라는 문제가 최초로 주요한 사안으로서 부각되었으며, 이에 따라 "소유물로서의 여성", "상속의 대상으로서의 아이들"을 차지하기 원하게  된 남성들은 사회의 가부장제적 재편을 위해 엄청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엥겔스의 표현대로. 모권(母權)은 타도되어야 했고, 결국 타도되었다.

"이리하여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그 재부는,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가족 내에서 차지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상속제도를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폐지하려는 경향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만 혈통을 따졌던 시기 동안은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으며 또 폐지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실로 이 혁명- 이것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의 하나이다- 은 살아있는 씨족 성원 중의 단 한 사람도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씨족 성원들은 모두 이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남자 성원의 자손이 씨족에 남아 있어야 하고, 여자 성원의 자손은 이 씨족에서 제외되어 자기 아버지 편 씨족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간단한 결정만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으로써 여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적 상속은 폐지되고, 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적 상속이 도입되었다." (F.Engels,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그러나 이러한 엥겔스의 논의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첫째, 엥겔스는 현대사회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엄격한 노동의 성역할 구분 개념들을, 마치 초역사적인 양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냥과 채집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의 유연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고정된 성역할이 자연적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가족 내에서 생산한 것을 (자식까지 포함하여) 여성이 소유하고 밖에서 생산한 것을 남성이 소유한다는 영역의 구분에 따른 여성 역할의 축소 및 소유물에 대한 급격한 가치 절하는, 단지 남성의 사유재산이 증가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엥겔스에게서는 '생산성의 증가'라는 설명 이외에는 여성의 권력이 남성으로 이전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3) 맑스주의의 가족관 : 보수주의와의 결탁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는, 가족을 오직 경제적인 관계로만 파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정한 '기능'을 위하여 현재와 같은 핵가족적/일부일처제적 가족 모델이 일반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자본과 사적이익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부르주아 가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자본주의적 하부 기제로서의 가족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한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역사적 체계는 생산양식의 발달에 따라 변모해 온 일종의 "종속 변수"였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혼인은 종전 그대로 어디까지나 타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 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가족 내에서의 남편의 지배와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야 할 확실한 자기의 자식을 보자는 것...." (F.Engels, 위의 책)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K.Marx, [공산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거름)

"지금의 가족, 부르주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주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주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주아는 자식, 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주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자는 결코 여성공유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부르주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K.Marx, 위의 책)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첫째, 여성을 단지 생산도구로만 보는 것은 부르주아만의 문제인가? 부르주아지의 가족과 프롤레타리아의 가족은 그들의 계급이 다르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구체적 양태는 거의 같은 모습이다. 오히려 노동영역에서 피억압자로 존재하는 남성 프롤레타리아는 가정의 영역에서 다시금 억압적인 가부장의 위치를 고수한다. 현실을 아무리 뚫어지게 보아도, 이러한 억압에서 노동자계급을 '면제'해 주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맑스주의는 가족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가족 내에서의 여성 억압에 대해 슬쩍 눈을 감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한계는 결혼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맑스주의는 결혼이 계급적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물로 바라보는 부르주아에게 여성은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결혼은 당사자의 계급적 위치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언제나 타산적인 것이다. 이 타산적인 결혼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극심한 매음-때로는 쌍방의, 그러나 훨씬 더 흔히는 아내의 매음-으로 변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이 아내가 보통의 매춘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임금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도급제로 팔듯이 자기의 육체를 도급제로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를 영영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것뿐이다." (F.Engels, 위의책)
"경제적 생활조건이 발전하여 원시 공산주의가 분해되고 인구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전부터의 전통적인 양성관계가 소박한 원시적인 성격을 잃게 될수록, 그러한 양성관계는 여자에게 더욱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여자의 정조에 대한 권리, 즉 오직 한 남자와의 일시적 또는 지속적 혼인에 대한 권리를 구원의 길로 여기고, 이것을 획득하려고 더욱 더 꾸준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결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실상 군혼의 쾌락을 버리려고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이러한 진보를 가져올 수 없었다. 여자에 의해서 대우혼으로의 이행이 실현된 후에야 비로소 남자들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여자 측에만 한정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F.Engels, 위의 책)

가족의 발전에 대한 엥겔스의 논의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하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등장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환", 즉 군혼의 시기에서 푸날루아 가족, 대우혼 가족, 일부일처제 가족으로 전환이, 엥겔스나 맑스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성의 생산에 대한 찬미가 왜 갑자기 사라지고 약탈과 쟁취의 대상이 되었는지 맑스주의는 설명할 수 있는가? 엥겔스는 왜 순결과 정조를 지키는 것을 '권리'로 여겼는가? 왜 여성의 자유로운 성교는 여성에게 짐스러운 것이 됐는가? 가족이나 결혼에서의 불평등한 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이거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임을 엥겔스도 인정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불평등이 형성되어 왔는지,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억압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2. 여성은 '노동자'가 아니다? : 현실에서의 무능력


그런데 맑스주의는 현실의 노동운동과 언제나 겹쳐지고, 함께 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 노동운동은 앞에서 살핀 맑스주의 내부의 공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공백들은 다시 여성 노동권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노동 운동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자본과 노동이라는 하나의 대립쌍을 전선으로하여 배치되어 왔었기 때문에, 각각의 계급 안에서 이중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성의 문제는 간과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말 노동운동의 발전은 자본의 발전을 뒤쫓아갈 뿐인가. 자본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차이를 이용하여 각각을 다른 방법으로 교묘히 착취하고 있는 반면,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은 - 비록 그것이 여성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제3세계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분화된 집단들을 분명히 고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 항상적으로 "노동자"라는 단일 범주로의 수렴 경향을 내재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노동권의 주장을 '결속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이해해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선순위론'이다. 그러나 노동자라는 범주 안에서도 여성과 남성이 착취당하는 양상이 다르고, 나아가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이 (노동자가 아니라) 남성의 "피부양자"로 인식됨에 따라 생존권과 결부된 노동권마저 위협당하는 현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기존의 노동 운동에 완전히 포괄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기존 노동운동에 내재한 허점으로 인해 여성노동권이 어떻게 위협받아왔는지를 밝힘으로써, 맑스주의의 이론적 공백이 '여성들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무능한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위협받는 여성 노동권

이제껏 여성은 안정된 노동권을 보장받아 온 적이 없다. 여성은 경제 호,불황에 따라 필요할 때 데려다 쓰고 필요없을 때는 가차없이 가정으로 내모는 영원한 산업예비군일 뿐이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많은 노동 인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좀 더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적극 권장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 불황기에 접어들게 되면 어떠한가? 흔히 IMF시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불안정한 여성 노동권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 가정으로 내몰리는 여성

IMF구제금융 이후 정리해고 등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행해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이 일차적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다. 경제 성장기에 잠잠했던 남성 가장 이데올로기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족의 생계책임자는 남성이고 여성은 피부양자일 뿐이다라는 가부장제의 논리는 케케묵은 것이지만 여전히 강력하다. '가정'은 다시 여성의 고유영역으로 재확인되었으며, 사회 전체가 담합하여 '남성 가장의 일자리도 부족한 마당에 어디 여성이 일자리를 나눠먹으려 하느냐'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을 끊임없이 노동시장에서 밀어내며 여성의 노동권을 박탈하고 있는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 현재의 노동운동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본과 '담합'까지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침묵을 통해 승인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의 경제 논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가족임금제이다. 가족임금제는 한 가족의 생계책임자는 남성이며 이러한 남성가장의 임금이 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잠깐,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맑스가 '노동자의 임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할 때 나왔던 이야기이다. 그는 여기서 "피부양자로서의 여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금에 대한 최저의 그리고 유일하게 불가피한 사정액은 노동하는 동안의 노동자의 생계비이며, 노동자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노동자 종족이 멸종하지 않을 만큼의 액수이다." (K.Marx, [1844 경제학 철학 초고],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 출판사)

이러한 가족임금제는 실제 노동시장에서 여성 정리해고 1순위라는 양태로 나타난다. '생계부담이 적은 여자부터 짤려주는 것이 순리다' 라는 논리하에 여성 우선해고가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남성의 영역은 노동시장이고 여성의 영역은 가정이라는 불합리한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의 논리에도 못미치는 봉건적인 '불평등'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사실들에조차 배치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실제로 1995년 현재 여성 가장의 수가 16.8%를 육박하고 있으며 여성의 노동 또한 '자아 실현' 등의 수사적 문구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해고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과 같은 고용불안정 상황에서 남성 가장만을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는 가족 전체의 생존권을 더욱 위협할 뿐이다.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밟고 밥그릇을 지킨 남성 노동자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이러한 남성 가장 이데올로기는 정부의 실업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3월 초 노동부 장관은 '실업률이 5%를 넘으면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데 이를 위해 실업자수를 100만명 이하로 줄이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 행하고 있는 실업률 감소 정책이란 어떤 것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성을 '비경제활동인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즉,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가능하지 않도록 여성을 가정의 영역에 묶어놓아 아예 실업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택하고 있는 정책은 탁아정책등의 복지 정책을 최소화하고 국가에서 수행하던 기능의 상당 부분을 가족의 기능으로 전환함으로써 여성들이 가정에서 맡아야 하는 몫을 더욱 늘이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써 가시화되지 않는 여성의 실업률은 더욱 높아져만 가고 있다. 정부는 여성을 희생양으로 하여 가시적인 남성 가장의 실업을 최소화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으며, 남성 노동자들은 이를 묵인한다. 실제로 1997년에 남성 실업률은 20.8% 증가한 반면, 여성 실업률은 60% 증가하여 여성 실업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데도 불구하고 사회는 실직한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만 강요하고 있다. 임금도 없고 휴가도 없는 평생 노동으로 말이다.

(2) 여성은 노동자인가?

이러한 여성 노동권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가 기존의 노동운동에 기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원인은 여성 노동 현실의 특수성에 있다. 여성노동자의 62.7%에 이르는 수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4인 미만 영세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노조들의 연합체인 민주노총에서도 이들의 문제를 다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한 파견근로제의 시행으로 인해 여성 노동자의 불안정은 더욱 가중된다. 고용자와 사용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임금 및 노동조건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중의 착취를 당하게 되는 파견근로제의 대상이 대부분 현재 여성이 맡고 있는 노동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잡은 손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한,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는 더욱 강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렇듯 전체 노동시장에서 실제로 여성의 노동이 행해지는 영역은 노조가 담보해낼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동안 기존의 노동운동 내에서 여성노동의 문제가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원인은 "자본 vs. 노동"이라는 도식적이고 단순화된 이분법에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과 정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착취를 행할 뿐만 아니라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하여 끊임없이 여성을 노동자의 범주에서 밀어내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을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범주로 설정함으로써 그 안에서의 여성 노동 현실의 특수성이나 가려져 있는 여성의 노동권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로부터 "독자적인 여성 노동 운동 세력"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기존의 노동운동 세력이 여성의 노동권을 전면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과 정부는 다양한 형태로 교묘하게 여성 노동권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부한 언어지만 지금은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할 때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위임'할 수 없는 권리를 말이다.


3. "성별화된" 맑스주의로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맑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는 역사유물론이다. 이는 맑스주의가, '이성'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관념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물질적 존재 조건으로부터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는 "실천 철학"임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철학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는 맑스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의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한 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에 대한 이중적 착취에 대해 맑스가 전혀 무지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앞 장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맑스가 본 "총체"로서의 사회, "총체"로서의 이론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여기서, 사적 유물론의 철학적 전제에 어떤 "비약"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여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공백이 바로 그 "비약"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밝히는 데서 시작하여, 맑스주의를 "성별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핵심 축인 "노동"과 "생산" 에 대한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1) 사적유물론의 철학적 전제를 다시 보자.

"모든 인간적 실존의 첫 번째 전제, 따라서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모든 역사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 주거, 의복, 기타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생산, 즉 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단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오늘날에도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전제, 이것은 처음부터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곧 자신들의 삶을 매일매일 재생산하는 인간은 자신들의 종족을 번식시킨다는 것, 즉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 부부 간 - 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즉 '가족'이다." (K.Marx, {독일이데올로기}, 청년사)

맞는 말이다.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이라는 인간의 물질적 조건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이라는 구절이 맑스주의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생산"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함축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우회로를 경유해 보기로 하자.

(1) '노동'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수준에서, 노동은 "합목적적 실천(praxis)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는 인간의 활동"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만 놓고 보자면 '노동'이란 비단 연필 한 자루, 빵 한 조각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닌, 훨씬 광범위한 인간 활동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주는 그 무엇, (현실의 수준, 구체의 수준에 존재하는 억압과 착취를 추상해냈을 때 남는) 이념형적인 활동이 바로 '노동'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노동'은, 이후 맑스가 자본주의의 동학(動學)을 통찰하는 '구체'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짐에 따라 그 의미가 구심점으로 이동한다. "산업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하는 노동"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일체의 노동들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사용가치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즉 "교환가치"로 변화한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신체 즉 살아있는 인격 속에 존재하며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 마다 움직이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총체이다."(K.Marx, {자본1-1}, 이론과 실천)

그렇다면, 맑스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노동자들"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여전히 결국 "산업 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산업노동자들"만이 노동력 상품을 팔아 잉여가치를 생산하며, 잉여가치의 생산과 전유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들이 매듭지어져 있는 핵심 고리이기 때문이다. 즉, (산업)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한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해방은 모든 인간의 해방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이제, 좁은 의미의 '생산적 노동'에만 전력하기로 결심한다. 구조의 변화, 즉 자본주의적 메커니즘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생산이란 무엇인가?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 이 둘 모두를 포함한 생명의 생산은 이제 하나의 것의 이중의 관계로, 즉 한편으론 자연적 관계로, 다른 한편으론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 함은 어떤 조건 아래,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목적으로 하든지간에, 여러 개개인들의 협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K.Marx, [임금노동과 자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거름)

역사유물론의 두 번째 전제를 보면, 철학적 수준에서 맑스가 의미했던 '생산'은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생산' 개념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도 없으며, 두 가지 모두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년 맑스의 철학적 시기가 지나자 마자, "생산"이 의미했던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하나로 축소/압축된다. 생산은 "노동을 통한 사용가치의 생산"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생명의 생산은 '인간의 재생산/노동자의 재생산'이라는 모호한 어휘에 포함된 것으로 간간히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역사의 동력을 평가된 것은 바로 이 "협소화된 의미에서의 생산" 이었다.


2) 성별화된 맑스주의를 향하여

(1) 재생산 노동이란 무엇인가? = 가사노동

맑스주의가 "생산"에 무게중심을 둔 이론체계라고 할 때, 그 속에서 '재생산'이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맑스주의가 생산/재생산 개념 쌍을 비대칭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대칭성이야말로, 대다수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활동들을 '재생산'에 속하는 것,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 생산 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게 된 기원이 아닐까. 물론 암묵적으로이긴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산"을 '노동을 통한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의미로 고정시킴으로써, '생명의 생산'은 "재생산"이라는 개념 속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맑스는 이를 "자연적인 것"으로 범주화한다.

"생산은 직접적으로 소비이기도 하다. 이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이중적인 소비이다. 자연적 출산이 생명력의 소비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키는 개인은 그 능력을 지출하기도 하고 생산행위 속에서 그것을 소모한다." (K.Marx,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경제학 노트}, 이론과 실천)

자연적인 것? 맑스가 근대적 패러다임에 걸쳐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분명히 "인간"에 반대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동물이 속해 있는 '자연'의 영역과 상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범주화가 유감스럽게도 지극히 반(反)-여성주의적 전제에 기반해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 온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과학의 이름을 빌린 생물학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가설들에 의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설들이 가장 애용하는 문구가 바로 "이것이 자연스럽다" 이다. 여성은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성은 남성을 보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패러다임을 벗어 던진 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한 목소리로 이러한 "자연"과 "가족" 사이의 연관성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즉, 맑스주의 내에서의 '재생산'은 명백히 "생산"과는 구분되는 것 (따라서 더 2차적인 것)으로 위치지워져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인간의 재생산" - 현재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몫'인 - 은 암묵적으로 '자연'과 연관지워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생산"에는 '인간의 재생산' - 즉 출산 만이 포함되는가? 여기서 다시,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언급한 사적유물론의 첫 번째 전제, '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물질적인 생활이란 우선, 말 그대로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생리적 필요의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맑스는 음식, 주거, 의복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주의해야 할 함정이 있다. 즉, 인간의 생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인 "음식, 주거, 의복" 등은, 한 번의 '생산'으로 직접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여기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당연히 "차려진 식탁"이다)을 위해서는 '원료의 생산'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리'하고 '저장'하고 '배열'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거나 의복 역시 마찬가지이다. 집안을 쓸고 닦고, 벌레를 퇴치하고, 정돈하고, 보수하는 일, 의복을 수십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빨고, 짜고, 말리고, 다림질하고, 먼지를 떨어내고, 바느질을 하고, 옷걸이나 옷장에 정리하는 일, 이런 노력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 '집'이 아니고 '의복'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현재와 같은 문화적 수준과 욕구를 가진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뿐인가? 성인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하여, 아이가 태어나서 한 사람의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노동"이 필요하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게 직장과 가사일을 병행하라고 하는 것이 왜 부당한지 생각해 보자. 때맞춰 우유를 먹이고, 대소변을 갈아 주고, 예방접종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에서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고, 숙제를 같이 하고, 학부모회에 참석하는 데 이르기까지(이 모두는 우리 모두가 "엄마의 잔소리"라고 기억하고 있는 바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실로 자신의 생활 전체를 쏟아 부어도 모자라는 중노동인 것이다. 만약 이 과정들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가사노동"이라고 뭉뚱그리는 이 모든 노동들은,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단계에 속한 사회에서 "인간이 생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문제들이 맑스주의, 아니 정확히 말하여 역사적 유물론에 기반한 맑스주의적 이론 틀 내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은 무엇보다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매일매일의 자신의 물질적 생활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위와 같은 '가사노동'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엥겔스의 언급은 눈 여겨 볼 만 하다.

"...가부장적 가족의 발생과 함께, 더욱이 일부일처제 개별 가족의 발생과 함께 사태는 변하였다. 집안 살림은 그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사회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사로운 일'로 되었다. 아내는 하녀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회적 생산에서 제외되어 아무 것도 벌 수 없게 된다. 또 만일 그가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여 독립적인 벌이를 하려고 하면, 그는 자기의 가정 살림을 할 수 없게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지위는 공장에 진출하건, 의사 및 변호사를 막론하고 어느 직업 분야에 진출하건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사회는 순전한 개별 가족이라는 그런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F.Engels,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엥겔스와 이후의 맑스주의에게서 더 이상의 진전은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 즉, "가사노동"이 '사사로운 일'이 된 것이 하나의 역사적 결과물이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와 같은 (가사노동에 있어서의) 성역할 분담을 일종의 "가내 노예제"라고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을 하나의 "필수적인 노동"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그저 논의의 초점을 다른 곳 - '좁은 의미의 생산'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노동'으로 옮겨갈 뿐인 것이다. 가정에 갇힌 노예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는, 역사유물론에 의해 잠시 발견되었다가 이내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2) 생산/재생산을 재평가하기

결론적으로 말하여, 맑스가 "인간은 우선 살아있어야 한다"라는 역사유물론의 전제에서 "자신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함에 의해 인간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생활을 생산해 낸다"라는 명제로 나아간 것은 분명 "비약"이었다. {자본}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좁은 의미의 생산일 뿐이며, 여기에는 인류를 지구상에 존속케 하는 "인간의 생산"도, 갓난아이를 한 사람의 "노동자"로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를 "내일도 노동자일 수 있게" 해주는 '가사노동'도 삭제되어 있다. 가사노동은 불완전한 노동, 불완전한 생산, 불완전한 재생산으로서, 여전히 맑스주의 안에 있는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맑스를 따라 '사용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만을 특권화시키고, 생산/재생산의 구분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산이 재생산보다 중요한 것인가? 아니다.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나, 사용가치를 인간의 필요에 맞게 바꾸는 일체의 지속적인 가사노동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적영역/공적영역 모두에 걸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인간의 해방을 지향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총체성'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총체성, "성별화된 맑스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노동'과 '생산'에 대한 협소한 개념 자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산/재생산 사이의 무리한 구분과 이들 사이의 위계 (즉 '생산의 우위') 역시 철회되어야 한다. 맑스주의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세 개념들을 확장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만, 이제까지 삭제되어 있던 '여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착취를 이론화할 수 있을 것이다.


4. '모두'의 대안이어야 한다 : 노동 시간 단축 논의에 대하여


IMF 이후 엄청난 실업률을 비롯하여, 사회적 안전망 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정리해고로 인한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는 지금, 좌파에게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현실적 대안"은 바로 "노동시간 단축"인 것 같다. 70년대 말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체협약에 의해 정해진 서유럽 국가들의 주당 근로시간은 대부분 35-40시간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법정 노동시간을 주 40시간대로 줄임으로써 세계적 노동시간 수준에의 근접을 시도해왔으며 현재 고실업의 상황에서 추가적인 실업 방지와 이미 실업 상태에 있는 인구를 새로이 고용하는 방안의 핵심으로써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행해지고 있다. 고용창출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 "노동시간의 축소에 따른 일자리 창출"이 좌파 모두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은 사회구성원들간에 노동권의 평등한 분배라는 측면 뿐 아니라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간의 관계를 재규정하고 성별 분업을 완화해나가기 위한 방안으로서도 진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현재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모델은 여성(전업주부)의 재생산활동(가사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전반적인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계속해서 재생산책임이 여성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고용기회가 남성에게만 분배된다면, 또 다시 여성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현재 시간 연구자들에 의한 시간 분류는 노동 시간, 여가 시간, 필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러한 시간 모델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분석틀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가사노동'과 같은 여성의 활동은, 그것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강도 높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분류 중 어느 곳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시간/여가시간/필수시간 중 어느 것도, 일상적 재생산 활동 등과 같은 여성의 경험을 배제하고 있는 다분히 남성적 시각에서의 시간 분류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시간 구조에서, 재생산역할로부터 면제된 남성과 재생산책임을 홀로 전담하고 있는 여성이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노동 시간 단축 논의'와 '단축된 노동시간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대로 라면 단축된 노동시간이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는 - 그 최상의 경우라 할지라도 - 남성 노동자에게만 돌아갈 뿐, 무차별적으로 쫓겨나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을 것이다. 또, 노동시간 단축이 '여가시간'을 늘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별 분업의 완화"나 "재생산책임의 공유"라는 "모두의 전진"으로 가기보다는, 남성 노동자들의 생산성(경쟁력?) 향상을 위한 재충전과 재교육을 위해 쓰이도록 (자본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지점들에 대해서 노동운동이 튼튼하고도 분화된 방어막을 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아가 모든 장/단기적 슬로건들이 남/녀 노동자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구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 해방"을 향한 흐름이라 자임할 수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 정당한 투덜거림

아무도 '여성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내내 불만스러웠다. 노동자들의 해방이 인간의 해방이라는 좌파의 신념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 과연 노동자의 해방이 여성의 해방이기도 한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누구의 딸이거나, 누구의 아내이거나, 누구의 어머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억압, 차별, 배제에 대해서는 별개의 이론틀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위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별개의 억압체계이다"라는 추상을 경유한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맑스주의를 '성별화'하고자 하는 좌파의 시도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무지의 소산이거나 정보의 불충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맑스주의는 전공 필수, 페미니즘은 교양 선택" 이라고 생각하는 좌파 남성동지들을 볼 때마다, 얼마간의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어째서 맑스주의 이론에 정통하고 그것의 과학성을 주장하는 그들이, 유독 여성문제에 대해서만은 그토록 "공상적"인 것일까. '나는 강간범이나 성추행범이 아니야, 나는 집에서 가사일도 돕고 있어' 라는 사고방식이,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맑스가 비판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닮은 꼴이라는 것을 어째서 생각해내지 못하는가. 한 개인이 "착한 남성"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한다고? 천만의 말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막대 구부리기'이다.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의 재구성('성별화된' 맑스주의)을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 있어서 '가부장제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억압'이 일어나는 장소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한 몸이 되어 백만 배의 시너지 효과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성급하게 동일시함으로써 여성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맑스가 범했던 우를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짧은 지식으로, 어떤 유명한 이론가의 지원 사격도 없이, 생산/재생산/노동 개념들에 대한 맹랑한 문제제기를 시도한 이유는, 맑스주의의 '공백들'이 메워지기 전까지는 '혁명적 노동자가 집에 가서 노동자 아내의 시중을 받고' '맞담배질을 했다는 이유로 여성 노조 간부가 불신임 당하는' 희극적인(그리고 비극적인!) 일들이 영원히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이다.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는 여성운동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인간 해방을 향한 맑스주의'가 형용모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맑스주의의 재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장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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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K.Marx, {자본 1-1}, 이론과 실천
_______, {경제학 노트}, 이론과 실천
_______, [1844 경제학 철학 초고],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6}, 박종철 출판사
K.Marx & F.Engels, [공산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 거름
__________________,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맑스 엥겔스 저작선}, 거름
__________________, [임금노동과 자본], {맑스 엥겔스 저작선}, 거름
__________________, {독일이데올로기}, 청년사
F.Engels,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조순경, [IMF 관리체제 시대의 실업정책 : 문제와 제안],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여성 실업문제 토론회
황금희, [경제위기와 가부장제], {여성학교 40}
______, [IMF 관리체제 시대의 실업정책], {여성학교 40}
배진경, [위협당하는 여성의 노동권], {여성학교 40}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일하는 여성들이 바라는 여성노동정책 7대 과제]
카피레프트, {읽을꺼리 3}  



출전 : {Gender Division Labor (in) Korea}, 이화여대출판부, 1993
번역 :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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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 노학연

 

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0. 왜 평가를 제출하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사물과 현상을 해석할 때 언제나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어떤 개인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하지만 동시에 생산의 주역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노동계급의 이해를 옹호하고 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5월1일 충북 노동절 집회를 보자. 당시 집회에서는 집회 대오와 전투경찰의 커다란 충돌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심지어 주유소를 거점 삼아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경찰 측에서는 노동자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동원해 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불법폭력시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몇 백 일이 넘어가는 투쟁과정은 사내하청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하이닉스 매그나칩 자본의 부당한 정리해고와 노동탄압,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전투경찰의 지속적인 과잉진압과 폭력진압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또 자본주의 이래로 이어져 온 노동계급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과 착취의 현실로부터 우리는 경찰의 선전이 투쟁 대오를 매도하기 위한 비열한 왜곡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너무나 정당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우리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보다 더 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더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또한,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성을 상품화하여 이윤을 불리는가 하면 전근대적 가부장적 의식을 활용하여 남성노동자에게 허위의식을 유포하고 그를 통해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방해하고 있다. 한편, 이른바 진보적이라 불리는 운동진영 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성평등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노동운동 혹은 진보운동 내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문제를 다루거나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접했을 때 우리는 함께 투쟁하는 여성 동지들의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입장에 서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때 피해자의 관점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노학연은 지난 115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4월30일, 5월1일 이틀간 힘차게 노동계급의 투쟁에 연대하고자 하였다. 이틀 간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투쟁 속에서 여성 동지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지는 않았는지, 성평등을 실천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계급적인 운동진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부위들 내에서도 여성문제에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여성문제의 해결은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문제제기와 고민, 실천을 통해서 노동해방과 함께하는 여성해방은 보다 앞당겨지고 구체적인 과제로 다가올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제기된 평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고민하여 우리의 실천을 변화시키고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의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함께 메이데이에 참가했던 학생동지들과, 또 계급운동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메이데이 기간 동안 접수된 문제의식들을 이렇게 정리하여 공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동지들 사이에 논의가 확대되고 적극적인 실천의 변화가 존재하길 바라며, 성평등한 노동계급운동이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1.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


성폭력이란 것은 꼭 강간과 추행처럼 신체접촉이 이루어져야만 성폭력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이란 것이 여성에게 차별, 무시, 배제 당했다는 소외감과 불쾌감을 던져 주고, 부당한 여성억압의 현실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


이틀 간의 일정 동안 출정식, 중간 정리집회, 총정리집회 등 메이데이에 참가한 학생들의 투쟁결의를 고취시키고 활동을 평가하기 위한 자체 약식 집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발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올 때, 특히 새내기들이 앞으로 나올 때 대오 내에서 여학생들에게는 “예쁘다!”, 남학생들에게는 “잘 생겼다!” 등의 발언이 있었다. 물론, 격려하려는 의도로 그런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언들은 여성은 ‘예쁘고, 아름다워야’ 하고 남성은 ‘잘 생겨야’한다는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이어간다. 특히 여성을 외모로만 판별하는 것은 성차별에 해당하며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한편, 사회자가 새내기들을 소개하면서 “새내기들이 우리의 꽃과 같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칭찬하고 격려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꽃’이라는 단어는 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 많이 쓰이기 때문에 이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보통 여성은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에 비유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여성은 꽃처럼 아름다워야 하고, 누군가 꺾어주거나 와서 보아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사실상 여성들을 사물로 비하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여기는 꽃밭이네”하는 얘기나 남성들만 모여 있는 장소에 “꽃꽂이 좀 해야겠다”는 얘기들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이렇게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고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은 ‘예쁘지 않은’, ‘적극적인’, ‘행동적인’ 여성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단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항의하고 투쟁을 시작하면 “여자들이 감히”라는 식으로 탄압이 자행되지 않는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는 현자 울산공장의 중년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은 “아줌마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고 애나 보지 왜 나대냐”는 식으로 무시받는다. 또 의외로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도 동지라고 불리기보다 ‘아줌마’ 혹은 ‘예쁜 동생(후배)들’로 지칭되기도 하고 같이 투쟁하면서도 소극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 때문에 투쟁의 주체를 남성만으로 한정시키는 효과를 낳는 ‘노동형제’라는 표현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여성 동지들에게 고정적인 모습과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한편으로 발언이나 구호에 성기나 강간 같은 성행위를 빗댄 욕설을 섞어 사용하는 것 역시 성폭력이 될 수 있다. 덤프연대 파업출정식에서 발언한 어느 동지가 “x나게.. x같이..”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나 혹은 행진 중에 노동자 동지들이 구호를 외치다가 끝에 “죽여 밟아 묻어 씨x" 등의 끝 구호를 붙이는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주의와 남성우월의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성폭력의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일본군 성노예이며 감금 상태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성매매 여성들이다.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강간, 성추행 (그리고 그와 이어지는 살인) 등의 범죄가 보도되는데 이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함부로 밤길 늦게 다니지 말라거나 옷을 야하게 입지 말라는 등의 반응이 일반적인데 성폭력이 만연하는 원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차별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기나 성행위를 빗댄 욕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여성 동지들에게 불쾌감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감하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자본가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혹은 남성들에게는 욕설 사용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라서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적들을 향해 표출하는 분노의 욕설이 자신의 곁에 있는 동지에게 피해로 다가간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동지를 투쟁으로부터 내모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한의 1500만 노동자계급, 혹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는 남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있고 장애인도 있다. 자본가들과의 싸움을 위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위해서는 옆에 있는 동지에 대한 배려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집회나 행사 도중에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다. 이 경우에는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적절히 지적하여 언어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성 동지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


우리는 4월30일에 기존에 연대하던 인쇄노조 성진애드컴 투쟁집회부터 시작하여 서울지역  비정규직 차별철폐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차별철폐 대행진을 마치고 민주노총 전야제로 이동하기 전에 대행진 전체 대오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식당 화장실이 남녀 공용인데, 설비가 낡아 문이 잘 잠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성 동지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기에 불편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현재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설비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생존권이나 다름없는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 비장애인 중심으로만 설계되어 있는 교통수단, 설비나 공간을 장애인들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공간을 마련하고 사용하는 것에서도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비단 화장실 문제 뿐만 아니라 MT, 수련회, 현장방문단에서의 숙소 문제 등에서 공간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즉, 여성들이 공간의 사용에서 소외되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기존에 학생운동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은 생활방 내에서 잠들어 있는 도중에 벌어진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MT에서도 부득이하게 한 방을 쓰는 가운데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성폭력을 예방하고, 여성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 내 여학생 휴게실은 그런 측면에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 문제는 보통 비용과 조건 등의 문제로 덮어두고 가는 경우가 많다. 공간 보장을 요구하려는 여성 동지들도 비용 문제를 고려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고, 특히 여성 동지들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소수일 때에는 요청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함께 논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3. 민주노총 주최 노동절 본집회의 걸개그림


노동절 이후 민주노총 자유게시판과 참세상 속보게시판에는 쏘냐라는 명의로 [민주노총 노동절 대회의 반여성주의 -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언정 거꾸로 돌아가진 말지어라!]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노동절 집회 걸개그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걸개그림에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한 남성노동자를 그리고 그 오른쪽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남성만이 투쟁의 주체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는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형제라는 남성만을 투쟁 주체화하는 표현 역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내용에 동의하는 한 동지에 의해 노학연 홈페이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옮겨진 글에 한 사람이 반박하는 내용을 올렸고 쏘냐의 글에 동의하는 사람이 재차 반박하면서 짧은 논쟁이 진행되었다. 비판의 내용은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 과도한 해석이다.”라는 것이 주였다.


우리는 쏘냐가 제기한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투쟁조끼와 머리띠는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상징이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투쟁을 결의하는 모습을 종종 ‘머리띠를 묶는 것’으로 묘사한다. 작년 LG칼텍스 노조가 파업에서 패배한 이후, 회사는 관리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투쟁조끼를 가위로 절단할 것을 강요했다. 노조를 철저하게 짓밟고 다시는 노동자들이 회사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인간적인 모멸감과 수치심, 패배감을 안겨 주려는 비열한 탄압이었다. 그런데, 걸개그림은 남성에게만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케 하고 여성에게는 분홍색 티셔츠를 입혔다. 투쟁조끼와 머리띠의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그림은 남성만을 투쟁주체로 형상화한다. 또 색상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남성들은 파란 티셔츠와 파란조끼를 입고 있으며 여성은 분홍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 계열은 여성들에게 어울리고, 파랑색은 남성들에게 어울리는 색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근거도 없다. 여성들이 태어날 때부터 분홍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다. 여성에게 분홍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남성이 투쟁조끼를 입고 힘차게 팔뚝질을 하고 있고,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채 그를 보며 웃는 여성이 그려진 그림은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폭력의 기준으로 불쾌감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사실 그것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성폭력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면 이런 반응들이 돌아온다. “너무 주관적인 것 아니냐, 객관적인 시야에서 보아야 한다, 오버하는 거다” 등등.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문제제기하는 사람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를 주관적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객관적’임을 내세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객관이란 것은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 성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객관이다. 따라서 성폭력이 제기되었을 때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잘못된 현실에 손들어 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사실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주관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주관적인 태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폐지되고 실제로 성별에 관계 없이 평등한 사회가 수립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계급사회의 폐지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의식적인 실천을 방기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가운데서 여성해방과 성평등은 보다 가깝게 다가 올 수 있다. 남성만을 투쟁 주체로 형상화하는 걸개그림에 반대하고 남성 여성 모두가 투쟁의 주체로 그려지는 그림을 선택하는 실천 속에서 말이다.


4. 마치며


전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운동 진영 내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이에 대한 각성과 변화의 움직임이 도처에서 보이고 있다. 그 흐름에 노동해방 학생연대도 자리잡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이 더딘 흐름을 더욱 크고 넓게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더 이상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 동지들의 피해가 묻혀 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운동으로부터 밀려나고 소외받는 일이 없도록, 70년대 서슬퍼런 군사독재 치하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전통을 노동운동 위기의 시대에 복원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해체된 계급적 단결을 복원하고 노동해방 투쟁으로 더욱 힘차게 진군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토론을 기대한다. 또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비판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며 실천할 것을 약속한다. 투쟁!


2005. 5. 18

사회주의 정치 실현을 위한 노동해방 학생연대

nohak.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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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여성미술제

"시대의 정의"

이 작품은 4.19 또는 LA폭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의 섬뜩한 연결을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태어났다. 나는 어린아이로서 4.19를 목격하였고 나의 가족은 그해에 이민을 떠났다. 나의 생일은 4.19가 일어난 날이다. 이는 바로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핵심 구호의 직설적인 동시에 은유적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 민영순 작 -




" 뿌리 Roots "

뿌리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고 여성의 역사이다.
남성들이 기술한 역사에서 인류의 존속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멋진 나무만 보고 그 뿌리는 보지 않는 것과 닮아있다. 나는 뿌리를 그리면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대지의 거대한 자궁 속에서 뿌리는 수분과 자양분을 찾아 끊임없이 잔뿌리를 늘려간다. 수많은 잔뿌리로 양분을 흡수하여 위로 빨아올리는 힘은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 배속에서 밀려오는 파도같은 힘과 흡사하다.
뿌리는 나무를 키우고 잎을 티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만들면서도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뿌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뿌리가 상처받았을 때이다.

- 김인순 작-


 

 

 

 

" 여사제 Women as High Priestess "

나는 타로카드 유형부터 일정한 규정에 메이지 않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해왔다. 타로카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것에 연결시킬 수 있음으로해서 대중적 인기를 가지게 된 이미지 형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필리핀 생활 속의 여성의 역사 Herstory에 초점을 맞추어 타로카드의 프레임을 이용한 작업을 보인다. 각각의 작품에서 타로카드의 프레임은 다양한 시, 공간에 놓여있는 필리핀 여성의 이미지들을 틀지우는 정신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인쇄기법에서 기인한 에칭 선들은 나의 작품이 드로잉, 혹은 판화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회화적 이미지의 일부로 작용하는 글자들은 구조적 그리드 위에서 이미지 전체의 부분으로 그 경계를 허물게 된다. 또한 작품에 나타나는 다른 이미지들은 사진이나 시각적 개념의 몽타주 속에 편집된 기록들로부터 차용되었다. 여성에 관한 전시는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없는 모순적인 시대에 환영받는 이벤트다. 이 전시가 여성들에게 자신이 지닌 인간 고유의 가치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 Brenda V. Fajardo 작 -


 

 

 

 

" 여신들 "

이번 전시에 나는 과거 필리핀에서 전시하였던 다른 여러 작품들의 몽타주적 작품을 선보이려한다. 모두 4작품으로 여성들의 역사Herstory에 개입하고 재구술 하기 위해 연설하고 약속하고 재차 언급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구성한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해왔으며, 나는 나의 작품들이 이천을 짜내는 강력한 실이 되는데 기여 하기를 희망한다. 공식적 학문으로부터의 추방과 "신성한"글들과 증언들 속에서의 여성들의 불가시성을 묵인해주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부당한 처사들이다.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전시회를 개최하려는 노력을 "보상"이나 뽐내는 행동쯤으로 진부하게 생각한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 것 같다.
실로, 우리들의 목소리와 작업은 나무작품으로부터 기어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견되거나 쓰여질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문헌의 수사학이 공언하듯이 떠오르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형성과 한 국가의 기원, 민족의 성장 그리고, 참으로 한 예술가의 투쟁은 여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의 작업은 항상 말해왔듯이, 내가 이곳에 존재함을 그리고 항상 존재해왔었음을 이야기 한다. 큰 이용가치가 없으면 당신들은 나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우주의 명령과 절대적 진리로부터 요구된 것만이 나만의 진실이다. 나의 목소리는 두려움, 웃음 그리고 고통과 면죄되어 깨끗이 닦여 나갈 수 있는 오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나의 조국과 유산인 도상, 문헌들 그리고 상징들을 그려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것이 아닁 개인적 야사이며 나의 이야기이다.

- Karen Irene Ocampo Flores 작 -


 

 

 

 

 

" 적과의 동침 Sleeping with Your Enemy "

나는 미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인 역사가 아닌 개인적이고 성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를 재고하고자 한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 가운데 절반은 내 어머니의 사촌처럼 전쟁 직후에 미국인과 결혼한 전쟁신부이고 나머지 절반은 더 나은 기회를 위해 미국인과 결혼한 경제성장기의 세대이다.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어려운 '자신만의 삶'을 위해 미국으로 온 이들은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였을 때 다른 종류의 힘의 구조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 베타적인 민족주의에 자신들을 굴복시키지 않기 위해서 투쟁해야만 했다. 특히, 전쟁 이전 일본의 전통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전쟁신부들보다 어린 세대들은 일본과 미국의 혼성물에 가까운 문화적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
나는 하나의 순전한 국가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일본 정계에서는 "순수한 일본적"국가주의에 대한 부활의 조짐이 엿보인다. 이것은 담혼들은 '동양 대 서양'식의 단순한 이원론으로 환원시킨다. 우리 실존의 현실은 다민족, 다인종 정체성처럼 훨씬 복잡하고 혼성적이다. 나는 다양한 국가에 살고 있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만남과 대화를 통해,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에 대한 복합성과 다양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1999년, 뉴욕 주립 대학 아시아/ 태평양학 기관에서의 강연으로부터 발췌)

- Yoshiko Shimada 작 -


 

 

 

 

 

" 둥근 마음, 한마음, 여자들 마음 - 흐름을 역행하는 힘 Women's Power : Going Against the Current "
이 작품은 1991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포럼을 도큐멘테이션한 것이다. 이 포럼은 1990년 일본에서 1차로 열렸는데, 일본과 남, 북한의 진보적인 여성계 인사들이 여성과 관련된 이슈들을 주제로 만나 연대하는 자리였고, 이 포럼에서 당시에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정신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제2회 포럼에는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북한대표로 참석하였고, 일본에서는 진보진영의 참의원과 전 수상 부인이 참석하였다. 1992년도 제3회 포럼은 북한에서 진행되었다. 남북이 만나는 일이 흔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이 포럼은 매우 긴장되고 긴박하게 준비되었으며 그마큼 만남과 연대의 기쁨이 컸다. 이 사진들은 그 긴장과 감동의 순간들을 담아낸 것이다.


우리들은 원이었다.
원인 여자들의 이야기는 둥글다.
둥근 그 이야기는 슬프다.
그 슬픈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었다.

갈라진 이 땅에 여자들이 만났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둥그렇게 나누었다.
하나의 마음으로, 큰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 마음이 되었다.
그 한 마음이 오랜 흐름을 따라 흐르지 않고
그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둥근 마음, 한마음, 여자들 마음이 무엇인가를 해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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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은 1991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가졌었던 첫 남북여성대회로서 "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 토론회는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평화와 여성", 그리고 "통일과 여성"이 그 주제였다.
사실 그 이후 "정신대 문제"는 물밑에서 올라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90년 일본 토론에 이어 이루어진 91년 서울대회는 바로 다음해인 92년 평양 대회로 이어 졌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11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 토론대회는 여성 특유의 토론방식으로 남성문화의 방식과는 달랐었다.

나는 그 기억을, 그 느낌을, 그 감동을 전하려고 한다.

- 2002년 6월 박영숙 -


 

 

 

 

 

" 강요된 유전 Forced Dislocation "

1937년 17만명의 연해주 고려인들이 모스코바의 대시베리아 통치 구상에 따라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그곳에 유기된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소련 연방 해체 후 중앙아시아 지역이 독립하면서 회교민족 중심의 구조적 불평등으로 또 한번의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유전의 역동성 Dynamics of Dislocation'을 삶과 그림의 화두로 삼고 있는 나는 몇년 전 이들의 통한의 길이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그 유전의 기억을 체험했다. 종착역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에서 북조선과 중앙아시아적 영향을 융합한 의상을 입은 3세대 고려인 무희들을 만나게 되었다. 정체성의 무중력 상태에 놓인 이들을 신화적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뮤즈로 환치transfigure 시켰다. 신화는 과거에 있었던 일정한 사건이 내면화하면서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어 감정의 원천이 풍부해지고 상상력이 유발된 결과이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와 신라인이 된 스키타이Scythian, Proto 몽골족의 이동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또 65년전 고려인의 통한의 길이었던 이 길, 그 철로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침묵이 이어진다.
"내 이름은 네 어머니의 이름과 같으니 어서 그 이름을 불러다오. 네가그렇게 해야지만 나는 존재할 수 있다."

- 김명희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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