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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여성해방을 위한 115주년 메이데이 평가
0. 왜 평가를 제출하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사물과 현상을 해석할 때 언제나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어떤 개인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하지만 동시에 생산의 주역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노동계급의 이해를 옹호하고 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5월1일 충북 노동절 집회를 보자. 당시 집회에서는 집회 대오와 전투경찰의 커다란 충돌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심지어 주유소를 거점 삼아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경찰 측에서는 노동자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동원해 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불법폭력시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몇 백 일이 넘어가는 투쟁과정은 사내하청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하이닉스 매그나칩 자본의 부당한 정리해고와 노동탄압,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전투경찰의 지속적인 과잉진압과 폭력진압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또 자본주의 이래로 이어져 온 노동계급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과 착취의 현실로부터 우리는 경찰의 선전이 투쟁 대오를 매도하기 위한 비열한 왜곡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너무나 정당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우리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보다 더 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더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또한,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성을 상품화하여 이윤을 불리는가 하면 전근대적 가부장적 의식을 활용하여 남성노동자에게 허위의식을 유포하고 그를 통해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방해하고 있다. 한편, 이른바 진보적이라 불리는 운동진영 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성평등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노동운동 혹은 진보운동 내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문제를 다루거나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접했을 때 우리는 함께 투쟁하는 여성 동지들의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입장에 서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때 피해자의 관점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노학연은 지난 115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4월30일, 5월1일 이틀간 힘차게 노동계급의 투쟁에 연대하고자 하였다. 이틀 간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투쟁 속에서 여성 동지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지는 않았는지, 성평등을 실천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이른바 계급적인 운동진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부위들 내에서도 여성문제에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여성문제의 해결은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문제제기와 고민, 실천을 통해서 노동해방과 함께하는 여성해방은 보다 앞당겨지고 구체적인 과제로 다가올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제기된 평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고민하여 우리의 실천을 변화시키고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의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함께 메이데이에 참가했던 학생동지들과, 또 계급운동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메이데이 기간 동안 접수된 문제의식들을 이렇게 정리하여 공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동지들 사이에 논의가 확대되고 적극적인 실천의 변화가 존재하길 바라며, 성평등한 노동계급운동이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1.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
성폭력이란 것은 꼭 강간과 추행처럼 신체접촉이 이루어져야만 성폭력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이란 것이 여성에게 차별, 무시, 배제 당했다는 소외감과 불쾌감을 던져 주고, 부당한 여성억압의 현실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
이틀 간의 일정 동안 출정식, 중간 정리집회, 총정리집회 등 메이데이에 참가한 학생들의 투쟁결의를 고취시키고 활동을 평가하기 위한 자체 약식 집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발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올 때, 특히 새내기들이 앞으로 나올 때 대오 내에서 여학생들에게는 “예쁘다!”, 남학생들에게는 “잘 생겼다!” 등의 발언이 있었다. 물론, 격려하려는 의도로 그런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언들은 여성은 ‘예쁘고, 아름다워야’ 하고 남성은 ‘잘 생겨야’한다는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이어간다. 특히 여성을 외모로만 판별하는 것은 성차별에 해당하며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한편, 사회자가 새내기들을 소개하면서 “새내기들이 우리의 꽃과 같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칭찬하고 격려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꽃’이라는 단어는 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 많이 쓰이기 때문에 이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보통 여성은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에 비유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여성은 꽃처럼 아름다워야 하고, 누군가 꺾어주거나 와서 보아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사실상 여성들을 사물로 비하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여기는 꽃밭이네”하는 얘기나 남성들만 모여 있는 장소에 “꽃꽂이 좀 해야겠다”는 얘기들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이렇게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고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은 ‘예쁘지 않은’, ‘적극적인’, ‘행동적인’ 여성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단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항의하고 투쟁을 시작하면 “여자들이 감히”라는 식으로 탄압이 자행되지 않는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는 현자 울산공장의 중년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은 “아줌마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고 애나 보지 왜 나대냐”는 식으로 무시받는다. 또 의외로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도 동지라고 불리기보다 ‘아줌마’ 혹은 ‘예쁜 동생(후배)들’로 지칭되기도 하고 같이 투쟁하면서도 소극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 때문에 투쟁의 주체를 남성만으로 한정시키는 효과를 낳는 ‘노동형제’라는 표현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여성 동지들에게 고정적인 모습과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한편으로 발언이나 구호에 성기나 강간 같은 성행위를 빗댄 욕설을 섞어 사용하는 것 역시 성폭력이 될 수 있다. 덤프연대 파업출정식에서 발언한 어느 동지가 “x나게.. x같이..”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나 혹은 행진 중에 노동자 동지들이 구호를 외치다가 끝에 “죽여 밟아 묻어 씨x" 등의 끝 구호를 붙이는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주의와 남성우월의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성폭력의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일본군 성노예이며 감금 상태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성매매 여성들이다.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강간, 성추행 (그리고 그와 이어지는 살인) 등의 범죄가 보도되는데 이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함부로 밤길 늦게 다니지 말라거나 옷을 야하게 입지 말라는 등의 반응이 일반적인데 성폭력이 만연하는 원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차별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기나 성행위를 빗댄 욕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여성 동지들에게 불쾌감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감하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자본가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혹은 남성들에게는 욕설 사용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라서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적들을 향해 표출하는 분노의 욕설이 자신의 곁에 있는 동지에게 피해로 다가간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동지를 투쟁으로부터 내모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한의 1500만 노동자계급, 혹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는 남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있고 장애인도 있다. 자본가들과의 싸움을 위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위해서는 옆에 있는 동지에 대한 배려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언어를 통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집회나 행사 도중에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다. 이 경우에는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적절히 지적하여 언어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성 동지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
우리는 4월30일에 기존에 연대하던 인쇄노조 성진애드컴 투쟁집회부터 시작하여 서울지역 비정규직 차별철폐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차별철폐 대행진을 마치고 민주노총 전야제로 이동하기 전에 대행진 전체 대오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식당 화장실이 남녀 공용인데, 설비가 낡아 문이 잘 잠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성 동지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기에 불편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현재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설비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생존권이나 다름없는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 비장애인 중심으로만 설계되어 있는 교통수단, 설비나 공간을 장애인들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공간을 마련하고 사용하는 것에서도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비단 화장실 문제 뿐만 아니라 MT, 수련회, 현장방문단에서의 숙소 문제 등에서 공간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즉, 여성들이 공간의 사용에서 소외되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기존에 학생운동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은 생활방 내에서 잠들어 있는 도중에 벌어진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MT에서도 부득이하게 한 방을 쓰는 가운데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성폭력을 예방하고, 여성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 내 여학생 휴게실은 그런 측면에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 문제는 보통 비용과 조건 등의 문제로 덮어두고 가는 경우가 많다. 공간 보장을 요구하려는 여성 동지들도 비용 문제를 고려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고, 특히 여성 동지들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소수일 때에는 요청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함께 논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3. 민주노총 주최 노동절 본집회의 걸개그림
노동절 이후 민주노총 자유게시판과 참세상 속보게시판에는 쏘냐라는 명의로 [민주노총 노동절 대회의 반여성주의 -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언정 거꾸로 돌아가진 말지어라!]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노동절 집회 걸개그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걸개그림에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한 남성노동자를 그리고 그 오른쪽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남성만이 투쟁의 주체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는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형제라는 남성만을 투쟁 주체화하는 표현 역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내용에 동의하는 한 동지에 의해 노학연 홈페이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옮겨진 글에 한 사람이 반박하는 내용을 올렸고 쏘냐의 글에 동의하는 사람이 재차 반박하면서 짧은 논쟁이 진행되었다. 비판의 내용은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 과도한 해석이다.”라는 것이 주였다.
우리는 쏘냐가 제기한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투쟁조끼와 머리띠는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상징이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투쟁을 결의하는 모습을 종종 ‘머리띠를 묶는 것’으로 묘사한다. 작년 LG칼텍스 노조가 파업에서 패배한 이후, 회사는 관리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투쟁조끼를 가위로 절단할 것을 강요했다. 노조를 철저하게 짓밟고 다시는 노동자들이 회사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인간적인 모멸감과 수치심, 패배감을 안겨 주려는 비열한 탄압이었다. 그런데, 걸개그림은 남성에게만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착용케 하고 여성에게는 분홍색 티셔츠를 입혔다. 투쟁조끼와 머리띠의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그림은 남성만을 투쟁주체로 형상화한다. 또 색상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남성들은 파란 티셔츠와 파란조끼를 입고 있으며 여성은 분홍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 계열은 여성들에게 어울리고, 파랑색은 남성들에게 어울리는 색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근거도 없다. 여성들이 태어날 때부터 분홍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다. 여성에게 분홍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남성이 투쟁조끼를 입고 힘차게 팔뚝질을 하고 있고,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채 그를 보며 웃는 여성이 그려진 그림은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폭력의 기준으로 불쾌감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사실 그것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제기가 너무 주관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성폭력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면 이런 반응들이 돌아온다. “너무 주관적인 것 아니냐, 객관적인 시야에서 보아야 한다, 오버하는 거다” 등등.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문제제기하는 사람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를 주관적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객관적’임을 내세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객관이란 것은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 성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객관이다. 따라서 성폭력이 제기되었을 때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잘못된 현실에 손들어 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사실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주관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주관적인 태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폐지되고 실제로 성별에 관계 없이 평등한 사회가 수립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계급사회의 폐지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의식적인 실천을 방기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가운데서 여성해방과 성평등은 보다 가깝게 다가 올 수 있다. 남성만을 투쟁 주체로 형상화하는 걸개그림에 반대하고 남성 여성 모두가 투쟁의 주체로 그려지는 그림을 선택하는 실천 속에서 말이다.
4. 마치며
전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은 운동 진영 내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이에 대한 각성과 변화의 움직임이 도처에서 보이고 있다. 그 흐름에 노동해방 학생연대도 자리잡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이 더딘 흐름을 더욱 크고 넓게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더 이상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 동지들의 피해가 묻혀 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운동으로부터 밀려나고 소외받는 일이 없도록, 70년대 서슬퍼런 군사독재 치하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전통을 노동운동 위기의 시대에 복원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해체된 계급적 단결을 복원하고 노동해방 투쟁으로 더욱 힘차게 진군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토론을 기대한다. 또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비판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며 실천할 것을 약속한다. 투쟁!
2005. 5. 18
사회주의 정치 실현을 위한 노동해방 학생연대
nohak.jinbo.net
"시대의 정의"
이 작품은 4.19 또는 LA폭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의 섬뜩한 연결을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태어났다. 나는 어린아이로서 4.19를 목격하였고 나의 가족은 그해에 이민을 떠났다. 나의 생일은 4.19가 일어난 날이다. 이는 바로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핵심 구호의 직설적인 동시에 은유적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 민영순 작 -
" 뿌리 Roots " |
" 여사제 Women as High Priestess "
나는 타로카드 유형부터 일정한 규정에 메이지 않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해왔다. 타로카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것에 연결시킬 수 있음으로해서 대중적 인기를 가지게 된 이미지 형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필리핀 생활 속의 여성의 역사 Herstory에 초점을 맞추어 타로카드의 프레임을 이용한 작업을 보인다. 각각의 작품에서 타로카드의 프레임은 다양한 시, 공간에 놓여있는 필리핀 여성의 이미지들을 틀지우는 정신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인쇄기법에서 기인한 에칭 선들은 나의 작품이 드로잉, 혹은 판화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회화적 이미지의 일부로 작용하는 글자들은 구조적 그리드 위에서 이미지 전체의 부분으로 그 경계를 허물게 된다. 또한 작품에 나타나는 다른 이미지들은 사진이나 시각적 개념의 몽타주 속에 편집된 기록들로부터 차용되었다. 여성에 관한 전시는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없는 모순적인 시대에 환영받는 이벤트다. 이 전시가 여성들에게 자신이 지닌 인간 고유의 가치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 Brenda V. Fajardo 작 -
" 여신들 "
이번 전시에 나는 과거 필리핀에서 전시하였던 다른 여러 작품들의 몽타주적 작품을 선보이려한다. 모두 4작품으로 여성들의 역사Herstory에 개입하고 재구술 하기 위해 연설하고 약속하고 재차 언급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구성한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해왔으며, 나는 나의 작품들이 이천을 짜내는 강력한 실이 되는데 기여 하기를 희망한다. 공식적 학문으로부터의 추방과 "신성한"글들과 증언들 속에서의 여성들의 불가시성을 묵인해주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부당한 처사들이다.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전시회를 개최하려는 노력을 "보상"이나 뽐내는 행동쯤으로 진부하게 생각한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 것 같다.
실로, 우리들의 목소리와 작업은 나무작품으로부터 기어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견되거나 쓰여질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문헌의 수사학이 공언하듯이 떠오르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형성과 한 국가의 기원, 민족의 성장 그리고, 참으로 한 예술가의 투쟁은 여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의 작업은 항상 말해왔듯이, 내가 이곳에 존재함을 그리고 항상 존재해왔었음을 이야기 한다. 큰 이용가치가 없으면 당신들은 나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우주의 명령과 절대적 진리로부터 요구된 것만이 나만의 진실이다. 나의 목소리는 두려움, 웃음 그리고 고통과 면죄되어 깨끗이 닦여 나갈 수 있는 오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나의 조국과 유산인 도상, 문헌들 그리고 상징들을 그려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것이 아닁 개인적 야사이며 나의 이야기이다.
- Karen Irene Ocampo Flores 작 -
" 적과의 동침 Sleeping with Your Enemy "
나는 미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인 역사가 아닌 개인적이고 성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를 재고하고자 한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 가운데 절반은 내 어머니의 사촌처럼 전쟁 직후에 미국인과 결혼한 전쟁신부이고 나머지 절반은 더 나은 기회를 위해 미국인과 결혼한 경제성장기의 세대이다.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어려운 '자신만의 삶'을 위해 미국으로 온 이들은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였을 때 다른 종류의 힘의 구조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 베타적인 민족주의에 자신들을 굴복시키지 않기 위해서 투쟁해야만 했다. 특히, 전쟁 이전 일본의 전통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전쟁신부들보다 어린 세대들은 일본과 미국의 혼성물에 가까운 문화적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
나는 하나의 순전한 국가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일본 정계에서는 "순수한 일본적"국가주의에 대한 부활의 조짐이 엿보인다. 이것은 담혼들은 '동양 대 서양'식의 단순한 이원론으로 환원시킨다. 우리 실존의 현실은 다민족, 다인종 정체성처럼 훨씬 복잡하고 혼성적이다. 나는 다양한 국가에 살고 있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만남과 대화를 통해,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에 대한 복합성과 다양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1999년, 뉴욕 주립 대학 아시아/ 태평양학 기관에서의 강연으로부터 발췌)
- Yoshiko Shimada 작 -
" 둥근 마음, 한마음, 여자들 마음 - 흐름을 역행하는 힘 Women's Power : Going Against the Current "
이 작품은 1991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포럼을 도큐멘테이션한 것이다. 이 포럼은 1990년 일본에서 1차로 열렸는데, 일본과 남, 북한의 진보적인 여성계 인사들이 여성과 관련된 이슈들을 주제로 만나 연대하는 자리였고, 이 포럼에서 당시에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정신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제2회 포럼에는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북한대표로 참석하였고, 일본에서는 진보진영의 참의원과 전 수상 부인이 참석하였다. 1992년도 제3회 포럼은 북한에서 진행되었다. 남북이 만나는 일이 흔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이 포럼은 매우 긴장되고 긴박하게 준비되었으며 그마큼 만남과 연대의 기쁨이 컸다. 이 사진들은 그 긴장과 감동의 순간들을 담아낸 것이다.
우리들은 원이었다.
원인 여자들의 이야기는 둥글다.
둥근 그 이야기는 슬프다.
그 슬픈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었다.
갈라진 이 땅에 여자들이 만났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둥그렇게 나누었다.
하나의 마음으로, 큰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 마음이 되었다.
그 한 마음이 오랜 흐름을 따라 흐르지 않고
그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둥근 마음, 한마음, 여자들 마음이 무엇인가를 해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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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은 1991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가졌었던 첫 남북여성대회로서 "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 토론회는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평화와 여성", 그리고 "통일과 여성"이 그 주제였다.
사실 그 이후 "정신대 문제"는 물밑에서 올라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90년 일본 토론에 이어 이루어진 91년 서울대회는 바로 다음해인 92년 평양 대회로 이어 졌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11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 토론대회는 여성 특유의 토론방식으로 남성문화의 방식과는 달랐었다.
나는 그 기억을, 그 느낌을, 그 감동을 전하려고 한다.
- 2002년 6월 박영숙 -
" 강요된 유전 Forced Dislocation "
1937년 17만명의 연해주 고려인들이 모스코바의 대시베리아 통치 구상에 따라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그곳에 유기된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소련 연방 해체 후 중앙아시아 지역이 독립하면서 회교민족 중심의 구조적 불평등으로 또 한번의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유전의 역동성 Dynamics of Dislocation'을 삶과 그림의 화두로 삼고 있는 나는 몇년 전 이들의 통한의 길이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그 유전의 기억을 체험했다. 종착역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에서 북조선과 중앙아시아적 영향을 융합한 의상을 입은 3세대 고려인 무희들을 만나게 되었다. 정체성의 무중력 상태에 놓인 이들을 신화적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뮤즈로 환치transfigure 시켰다. 신화는 과거에 있었던 일정한 사건이 내면화하면서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어 감정의 원천이 풍부해지고 상상력이 유발된 결과이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와 신라인이 된 스키타이Scythian, Proto 몽골족의 이동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또 65년전 고려인의 통한의 길이었던 이 길, 그 철로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침묵이 이어진다.
"내 이름은 네 어머니의 이름과 같으니 어서 그 이름을 불러다오. 네가그렇게 해야지만 나는 존재할 수 있다."
- 김명희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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