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한국전쟁연구: 커밍스와 박명림

한국전쟁연구에 관하여


[ 주석글 ] [ 주석글 올리기 ] [ 한국정치 ]

이름: 전태진 on January 09, 1997 at 12:26:14:

B. Cumings와 박명림의 한국전쟁연구에 관하여

정치학과 석사과정 전태진

들어가며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전쟁발발 반세기가 되어가는 오늘날에 있어서
과거에로의 함몰이나 현재에 관한 연구의 몫인 관심과 노력의 소모로 비춰
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발전에서 남북대치상황은 마치 망령처
럼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다. 박명림은 이를 한국전쟁이 낳은 분단체제인
"1953년질서"로 규정하고 있다. 남북한 모두 당시에 형성된 체제가 규정하
는 방향에 따라 발전해왔고 오늘날까지 그 지향성은 본질적인 면에서 큰
변화가 없다. 더욱이 지난 50년간의 남북체제대결에서 남북한의 벌어진 격
차와, 특히 최근에 북한이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난은 독일의 통일사례가
완전히 남의 일은 아님을 깨닫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남북한
의 통일에 있어서 전쟁의 경험과 흔적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며, 전쟁
의 원인과 성격, 책임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
제가 아니다. 최근에 다시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히 재개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커밍스는 1981년과 1990년에 각각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I권,
II권을 발표하면서 한국전쟁과 해방전후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당시 공개되기 시작한 방대한 미국내 한국관련 문서들과 자료들에 대
한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사적 수준에서 사회하부에까지 이르는 총체적 분
석과 새로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I권과 II권의
발표사이에 놓여 있는 10년이라는 간극은 그 사이의 우리사회의 변화만큼
이나 커졌으며, 그 두 권의 연속성과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두 권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두 권을 읽는 우
리 자신이 처했었고 처하고 있는 각기 다른 시대적 상황과 의식에 기인할
수도 있다.
그의 연구는 후발자의 이득을 누리는 연구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저작중의 하나가 올해 출판된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
원} I, II권이다. 그의 저작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커밍스의
연구에 자극 받아 쓰여졌고, 곳곳에 그의 영향과 그 반작용의 흔적이 눈에
띄고 있다. 그렇지만은 박명림은 커밍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로와 출
구를 채택하고 있으며, 여러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구결과를 보
여주고 있다. 그의 연구 역시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에서 분리시킬 수 없으
며, 통일이라는 당면 과제와의 연관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위의 두 연구는 기존의 남북한의 공식적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는 단정
적이고, 도덕적인 한국전쟁관련저작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 내용의 차
이와는 무관하게 두 연구 모두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와 이해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커밍스의 박명림의 연구를 각각 살펴보도록 하
겠다.



커밍스의 연구


커밍스는 한국전쟁은 "시작"이 아니라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전쟁이 일어난 시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
가?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커밍스는
전쟁의 기원을 해방 당시인 1945년으로 소급하고 1945년에서 1950년까지의
상황의 연장이자 최정점으로서 한국전쟁을 파악하고 있다. 한국에서 갈등의
성격은 "내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었고, "1945년 직후에 시작되어 혁명과
반동의 논리 하에 진행"되었으며, 1950년의 한국전쟁의 시작은 이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네 가지 분석수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1) 지방적 수준, (2) 민족
국가적 수준(남한), (3) 지역적 수준(동아시아), (4) 세계적 수준(미국의

한정책)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연구가 돋보이면서도 논의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지방적 수준의 분석과 세계적 수준의 분석이다. 그의 논의는
이 두 가지가 자체적인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진행되며 상호 충돌하는 과
정과 그 결과로서의 전쟁을 그려내고 있다.

갑작스러운 해방은 민중들의 폭발적 정치적, 사회적 활성화와 혁명적 상
황을 가져왔다. 한국의 최대과제는 자주독립국가건설과 일제식민지봉건잔재
의 청산이었다. 그러나 남북한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서로 상이한 점령
정책을 실시한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 한국인에 의한 자치와 신속하고
철저한 식민봉건잔재 청산이 실시된 반면에,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식민국
가기구를 유지시키고,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민중의 국가건설노력을 억눌렀
다. 커밍스는 이를 "좌절된 해방"으로 표현한다.
그는 남한에서의 미국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을 면
밀히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대한정책은 철저히 미국의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를 미국내 국제주의자
(internationalists)와 민족주의자(nationalists)간의 대립과 타협의 결과
로 파
악한다.
루즈벨트로 대표되는 국제주의자들은 전후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까지
포함하는 미국 주도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구상했었고, 그 중의 하나가 한
반도의 분할점령과 신탁통치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국제주의자들을 소
련과의 직접대결 및 군사력 강화, 경제의 명확화를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
이 공격하게 되었고, 그 타협의 결과(또는 국제주의의 상대적 후퇴)로서 봉
쇄(containment)정책이 차선의 대안으로 냉전시기를 이끌게 되었다. 커밍스
의 미국대한정책의 시기구분은 다음과 같다: (1) 1943-47: 국제주의(분할점
령 및 신탁통치), (2) 1947-49: containment(UN을 통한 단정수립), (3)
rollback(북진통일), (4) 1951이후: containment(맥아더 해임 후 휴전협상

작). 봉쇄정책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또는 그 이전인 1949년 후반부터 이
미 공세적인 롤백정책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세계
대전의 위험과 전쟁의 장기화 속에서 다시 봉쇄정책으로 후퇴하여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에 비해 소련의 대한정책은 급속한 종전으로 말미암아 미완성된 상태
에서 시작되었으며, 남쪽에서의 미국의 정책에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고 본다. 특히 자국의 전후복구와 동유럽에서 미국과의 대치는 한반도를
주요 관심권 밖으로 밀리게 했고, 따라서 북한은 상대적으로 큰 자치권과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8년 남북단정수립후에도 스탈린의 구상은
미국-일본-남한에 대항하는 소련-중국(또는 중국 북부)-북한의 공산블럭하
의 위성체제의 구축이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대륙통일후 발언권 강화, 북한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성향 등으로 인하여 동유럽식의 직접적 간섭이나 경
제적 통제를 피하고 적은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는 최소위험전략
을 택했다고 한다.

1948년 남북에 각각 수립된 정부는 서로 다른 성격의 정권이었다. 커밍스
는 남한의 정치체제는 해방후 불과 몇 개월만에 기초가 형성되었다고 본
다. 미점령당국의 비호아래 전통적 지주계급과 식민지관료국가기구, 이승
만의 리더십이 결합되어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과 좌파세력들은 물
론이고 중도파나 우익세력중 김구가 이끄는 임정계열도 배제되었고 대다수
민중들과도 유리된 경찰과 청년단체의 폭력에 의존하는 파시즘체제로 파악
한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식민지 국가기구와 친일관료, 경찰이 소련군정에 의해
즉각 한인들의 자치조직으로 대체되었고, 토지개혁등 사회의 기본개혁들이
급속하고 철저하게, 그러면서도 큰 저항과 유혈 없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투쟁경력을 기반으로한 높은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김일성이 소련이 의도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나 지식인 중심의 전위
당 대신 빈농 중심의 대중정당노선을 추진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커밍스는 미군정에 의해 탄생된 식민적 기원을 가진 반민중적 파
시즘국가인 남한과 항일투쟁에서 높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광범위한 자
발적 참여와 지지아래 사회개혁을 추진한 북한과의 대비 속에서 전쟁의 기
원을 찾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간의 전쟁은 "좌절된 해방"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며, 혁명세력이 반민족적, 반민중적, 파시즘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

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려는 내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해방후 분단의 상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는 1949년에 이
루어진다. 미군정과 단독정부에 반대한 남한 민중들의 자생적 저항이 1949
년 겨울 남한군경의 동계토벌작전을 고비로 거의 소강상태에 이르고, 38선
상에서는 남북한 정규군사이의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미
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남한에서의 독자적 혁명에 의한 통일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이승만정권의 도발에 위협을 느낀 북한은 급속히 군사력을 강
화한다. 특히 중국혁명의 성공에 고무 받고, 1950년 초반 급속히 진행된 미
-일-남한의 지역통합체제 구상에 따른 남한의 재식민지화를 우려하여 전쟁
을 서두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한국민중의 통일자주국가수립의 열망이 미국의 봉쇄
적 세계전략속에서 좌절되면서, 처음에는 남한내에서의 투쟁으로 1949년 이
후로는 남북직접대결에 의한 갈등으로 이어진 내전(civil war)으로 파악하
는 것이다. 그러할 때 도덕적 함의는 미국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 자생
적,
자발적 혁명을 통해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적 개혁을 실시하여 통일자
주국가를 건설할 하려 했던 민중의 노력이 미국이라는 외부적, 결정적 변수
로 인해 무산되었고, 남북분단체제로 심화된 민족내 모순이 전쟁이라는 형
태로 폭발하였을 때 다시 미국이 개입하여 통일과 혁명의 노력이 무산되었
던 것이다.

전쟁의 구체적 발발과 관련하여 커밍스는 세 가지 모자이크를 제시하는
데, 그것은 (1) 전면남침설, (2) 남침유도설, (3) 전면북침설로 정리할 수

는데, 그는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두 번째 모자이크의 가능성을 끈질
기게 제기한다. 미국내 롤백주의자들과 대만의 장개석, 남한의 이승만정권
(특히 이범석계) 삼자간의 음모에 의한 소규모 선제공격 가능성과 또는
미국과 남한이, 혹은 미국만이라도 북한의 남침을 사전에 알고 기다렸고,
북한의 남침을 롤백으로 전환시킬 호기로 삼았을 가능성을 치밀하게 추
적한다.
이러한 커밍스의 주장을 적극적 유도설이 아니라 포괄적 유도설로 이해
할 수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1948-49년을 거치며 소극적 봉쇄에서
적극적 봉쇄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군사력 투입에 의한 롤백의 가능성도 내
포하고 있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은 그리스나 터어키,
대만에서의 경우와 공산세력과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없으며, 따라
서 미국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미리 인지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사전에
막기 위한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포석을 미리 깔아 논 상태
에서 사건이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다시 말해 실제로 사건이 터지더라
도 놀랄 일이거나 별 문제될 것이 없었고), 사건이 실제로 터지자 기본전략
에 따라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이것을 애치
슨의 전형적인 외교스타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커밍스는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는 대답되어질
수 없는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베트남전
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를 묻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의 성격과 통
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는 질문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새로운 세대들의 화해와 통일을 가로막을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질문은 이제 멈추어야 하며, 남북의 화해와 포용의 길을 모
색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커밍스의 연구에서 그 성과와 의의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
점들을 제기할 수 있다. 손호철은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연구가 "이론적 일
관성의 결여, 주요 개념과 이론틀의 비적합성 등"의 문제를 갖고 있다고 비
판한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국내정치를 분석할 때는 계급
에 기초한 분석을 행하면서도 미국의 대한정책은 관료정치모델로써 분석하
고 있는 비일관성을 지적하고, 남한 혁명운동의 주력으로 "노동운동의 과소
평가"와 "농민편향주의"를 보이면서, 농민혁명의 주력으로서의 소위 "중농
테제"를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적 견해로는 커밍스의 연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한과 미국 중심의
분석, 즉 북한과 소련에 관한 분석의 공백 또는 취약함이다. 이는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모두 뚜렷이 드러나는데, 근본적으로는
커밍스의 핵심주장, 즉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주장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 측에 관한 분석이 그의 핵심주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북한과 소련에 관한 분석은 호의와 낙
관적 해석으로 가득차 있으며, 북한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권력창출, 그 속
에서의 소련의 역할, 전쟁결정과정에서의 북한지도부와 소련의 의도와 행동
등 중요한 지점을 너무나도 쉽게 규정하고 넘어가 버리고 있다.
또한 (책의 제목처럼) 한국전쟁의 '기원'에만 주목한 나머지 전쟁을 한국
사회 내적갈등의 필연적 결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박명림이
"전쟁은 (상층지도부의) 결정의 과정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
했듯이 갈등과 전쟁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
을 수도 있고, 전쟁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전
쟁의 결정과정과 그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필수적인 것이다.
덧붙여 개별적 사실의 문제차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들을 열거
하면, 미국무부와 미군정간의 대립, 남한민중의 봉기에 있어서 남로당 또는
북한의 역할, 소련의 점령정책, 김일성의 집권과정에서의 소련의 역할, 남

의 실질적 단정수립의 시기, 이승만정권의 파시즘적 성격, 북한정권내에서
의 박헌영의 지위와 전쟁결정에서의 역할, 북한의 대소-대중관계, 전쟁직전
남한-일본연계설, 1950년 6월의 국제 대두시장의 투기사건, 남한 또는 미국
의 전쟁발발 사전인지 여부, 애치슨선언에 대한 북한의 태도, 전쟁기간중
남한 인민봉기, '김책 10만명설', 해주침공설 등등을 제기할 수 있다.

끝으로 그의 저작을 다 읽고나서 얻은 인상은 위와 같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커밍스의 연구를 바라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연구는 기본
적으로 1960년대의 'New Left'세대로서 미국인으로서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미국외교정책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근저에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다. 그의 연구가 밝혀주는 (한국인이 밝히지 못했던) 한국전쟁에 관한 '한
국에서의 사실'들을 포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우리
학계의 연구의 이념적 제한과, 연구수준, 자료접근의 한계로 인한 한국에
관한 사실의 '역수입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연구는 엄청난 영향과 자
극을 우리들에게 주었고,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를 활성화시켰다. 그의 자극
으로 시작된 국내의 연구는 이제 박명림의 예에서처럼 오히려 때로는 그의
연구의 기저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미국인으로서 미국인의 시각에서 출발
한 그의 연구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의 시각에 의한 한국전쟁의 연구를 대
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며, 한국정치연구가 뛰어넘어야 할 과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명림의 연구

박명림은 이른바 '48년질서'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요소는 이념도 경
제도 아닌 정치이며,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는 군사주의는 정치에의 강조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쟁은 혁명과는 달리 결정의 과정이 없
이는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결정하고 준비한 상층정치에 우선적
인 초점을 맞춘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는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 그 원인이며, 전쟁은 48년질서를 타파하려
는 북한리더쉽의 급진군사주의의 귀결이었다고 주장한다.
박명림은 커밍스는 식민모순이 해소된 지역(북한)과 해소되지 않은 지역
(남한)의 대비를 통해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면서, 전쟁의 대상지역이
얼마나 갈등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는가를 규명하는 데 집중하였기 때문
에, 그의 연구는 남한사회에 관한 분석에 더 많은 강조가 두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회와 체제"에 관한 분석이 훨씬 더 중
요하기 때문에 북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권과 체제도 소련의 주도적이고 선택
적인 개입을 통해 수립되었음과, 분단체제를 먼저 시도하고 수립한 측은 소
련과 북한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소련군정과 김일성 주도의 지배
체제는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와 12월 북조선공산당 창
설, 그리고 11월 북조선 행정10국 설치 등의 과정을 통해 1946년 2월까지
수립되었다. 박명림은 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이라는 소련의 기본적인
점령정책이 1946년 1-2월의 "탁치균열"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1946년 동안은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농업현물세
제 시행, 친일세력과 민족주의자의 숙청 등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체
제 구축작업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북한혁명'은 1단계(1945.8-46.2): 혁

적 리더십의 구축단계, 2단계(1946.3-46.8): 그 리더십 주도하의 사회변혁

계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세계사에서 가장 급속하고 철저했던 사회변혁으로
서 단기성, 비유혈성, 체계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또한 토지개혁은 중앙
에서 마을 단위까지 국가가 대중들을 장악하고 동원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
하였다. 이처럼 분단은 미소 점령당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하에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고, 반대파는 물론 중도파까지도 배제시키는 "극
단주의"의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1948년 남북 단독정부수립으로 분단체제인
이른바 "1948년 질서"를 창출하였다.
박명림은 1948년질서 시기 남북한의 평가를 농민, 민주주의, 민족주의라
는 세 가지 준거에 비추어 남북한을 분석할 때 "위로부터의 혁명과 밑으로
부터의 혁명이 결합된 북한의 방식이 반드시 남한의 위로부터의 개혁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남한국가를 미국에 의
해 세워진 정통성이 부재한 반민중적 파시즘체제라고 보는 커밍스와는 달
리 남한국가와 이승만정권이 제세력들의 타협과 합의의 기초 하에서 시작
되었고, 점차로 안정성을 회복하고 국가장악력을 높여가고 있었다고 본
다. 특히 토지개혁을 둘러싼 논의과정은 이승만체제가 지주계급과 경찰의
물리력에 의존하는 허약한 국가만으로 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성공은 농민들에게 자신의 헤게모니를 침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한
다.
이러한 남한국가에 관한 분석은 그의 책속에서도 특히 뛰어난 부분인데,
그 분석이 갖고 있는 함의는 한국전쟁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
다. 한국전쟁은 식민잔재청산과 사회개혁에 성공한 한 지역이 그렇지 못한
다른 지역을 해방시키고자 한 혁명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명실공히 두 개의 합법적 권력실체, 두 개의 분단국
가간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내전의 성격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규정함에 있어서 분할점령으로 시작되어 남북
분단국가 수립으로 귀결된 결과만이 기원이라고 할 때에는 또 하나의 전쟁
필연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1948년질서의 시기인 1948년부터 1950년까
지의 남북갈등 속에서의 "대쌍관계동학"과 북한의 "급진군사주의"로의
경도가 직접적 전쟁의 원인이었다고 규정한다. 냉전과 분단이 하나의 구조
였다면 48년질서와 대쌍관계동학은 상황이었다. 전쟁을 초래한 것은 상황이
었다. 특히 "북한혁명"은 단기적이면서도 철저하였고, 따라서 북한의 사회
변화가 급격할수록 남한과는 반대 방향으로 극단화되었다. 그리고 북한내부
의 일탈과 저항, 남한의 반공의 강화 등의 상황하에서 지도부의 항일무장투
쟁경험과 성향은 북한을 군사주의와 급진주의가 결합되어 통일을 위해 사
회의 모든 정신과 자원을 집중시킨 하나의 혁명적 동원체제로 나아가게 했
다.

1949년에 이르러 김일성 신년사에서 드러나듯이 북한의 혁명전술은 민주
기지론에서 국토완정론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최소한 두 차례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방소 사이의 시기에 스탈
린-모택동-김일성 삼자간의 전쟁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진다. 스탈
린은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였으나 중국혁명의 성공과 그 과정에서의 미
국의 불개입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1950년 3월을 기점으로 전쟁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소련의 개입
을 비밀로 하면서 "지원과 은폐의 이중주"의 양면성을 보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스탈린의 의사에 의해 한국전쟁에 뒤늦게 동의하였으나 일단 개입
한 이후로는 더 적극적인 지원과 책임을 보여주는 태도를 취했다.
위와 같은 설명은 기존의 전통주의적 시각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
일 수도 있으나 전쟁결정이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반대를 동의로 설득시켜내는 북한 지도부의 주체적, 능동적 행위였다는 점
과 소련과 중국의 지도부의 복잡한 결정변수들을 실증적으로 추적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을 결정함에 있어서 두 가지 확신이 결정적이었
다고 한다. 전쟁시작과 동시에 남한 민중이 호응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것
과,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개입한다하더라도 전민중적 봉기가
일어난다면 미군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 전한반도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박명림은 이러한 확신이 전쟁후 나타나듯이 비현실적
인식이자 급진주의에서 나온 "자기기만"의 결과라고 본다. 즉, 지도부의 잘
못된 정세판단이 무리한 전쟁을 감행하게 했고, 패배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
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박명림은 전쟁의 기원을 미소의 분할점령에 의한
분단으로 보고, 따라서 분단의 책임을 두 강대국에게 돌리고 있지만) 전쟁
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돌아간다. 미국의 개입으로 인한 국제전으로의 비
화와 그로 인한 막대한 희생도 1차적으로는 전쟁을 시작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명림의 연구는 커밍스의 연구에 버금가는 방대한 내용과 실증
적 연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국내의 '커밍스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떨쳐버
릴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북한과 소련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커밍스의 '공
백'을 메꾸고 있으며, 커밍스가 입수하지 못했던 공산권 자료들과 커밍스가
간과했던 부분의 추적을 통한 반박은 후발자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리고 1948년부터 전쟁발발까지의 남한체제의 동학분석은 남한국가와 이
승만정권이 그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전쟁 속에서도
대중들을 장악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그 정통성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사실을 설명해준다. 또한 분단체제, 계급투쟁, 자연적, 필연적 모순폭발로
보는 결정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전쟁을 상층정치수준에서의 주체적, 능동
적 결정과정이자 행위로 파악하여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여 분석하는 데
기여하였다. 전쟁에 의한 파국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는 식의 사고는
현실에서 구조결정론적, 상황결정론적 허무주의로 나타난다. 박명림의 연구
는 당시 구조와 상황의 논리 속에서 주체의 성공의 지점과 오류의 지점은
어디었는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역시 여러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커
밍스의 '공백'과 대조되는 전쟁에 있어서의 남한과 미국에 관한 공백과 취
약함이다. 이를 박명림의 '공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박명림 자

이 "미소 중심부"의 역할을 "구조"로서 규정하고 "사태전개의 방향에 결정
적"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세계전략과 그 일환인
대한정책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그
것들에 관한 커밍스의 연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
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전쟁은 일으킨 쪽이 더 중요
하기 때문에'라고 밝히고 있지만, 전쟁은 또한 두 진영이 하는 것이고, 뜬
금없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남한과 미국은 분석에서 제외될 수 없다.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학자들
의 핵심적 주장의 하나인 '유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특별한 주의를 기
울이지 않는다. 단지 전쟁의 발발시 미국과 한국이 완전히 몰랐을 수도 없
고, 그렇다고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기습이면서
도, 기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모호한 절충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역시 유
도였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
는 주장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도의 문제는 실제 사실규명의 문
제이고 전쟁의 성격과 평가에서도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와 함께 역시 전쟁의 결정과 발발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전쟁의 '기원'
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있다. 당시 우리민족이 처해있었던 핵심적 갈
등과 대립은 무엇이었고, 폭동과 유혈로 이끈 모순은 무엇이었던가가 계급
적 분석에 기초하여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단지 "정치균열"이라는 현상적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상층지도부의 결정과정과 전쟁발발을 둘러싼 집
중은 부분적으로 그의 저작을 저널리즘의 성격으로부터 탈피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대쌍관계동학을 강조하면서도 남한에서의 계급투쟁과 무력항쟁
의 실패가 또하나의 혁명기지인 북한과 북한지도부에 미친 영향과 그들이
느낀 책임감은 고려되지 않은 채, 선전적, 선동적 비난과 수사의 차원에서
만 언급되고 있다. 이를 '전쟁결정과 발발에의 절대적 강조라는 환원론'으

규정할 수 있다.
전쟁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그가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농민, 민족주
의, 민주주의의 세 준거에 의한 남북한 상대비교, 다시 말해 북한이 남한보
다 더 우월했다고 볼 수는 없다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토지개혁,
미국의 범위, 제헌의회 민주성과 이승만정권의 개혁정책 등의 분석은 많은
뛰어난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으나, 한편으로 지나치게 형식론적, 결과론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당시의 구체적 갈등속에서의 민중들을 비롯한 당사자들
이 어떻게 느끼고 반응했는가라는 살아있는 분석이 되지 못했다. 또한 그의
그러한 결론은 사후적 역사해석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남북한 격차의 심화는 위와 같은 결론의 핵심
적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오늘로써 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과
거를 오늘로써 대체시키는 것이며, 역사발전을 단선론적 시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에서의 결과가 또하나의 상황을 창출하고 그 상황이 다
른 요소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역사의 진행을 단일적 인과관계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일제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유신이 산업화로 정당화될 수 없듯이 현재의 결과적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
은 결과와 효율만을 강조하는 경제적 태도에 의한 정치의 대체이다.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자신의 자료들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다. 그는
전쟁의 결정과정에 관한 최근 공개된 이른바 "소련외교문서"라고 불리는
구소련의 기록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완전한 원
문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고, 정치적 "위생처리"를 거친, 조심스런 분석이
요구되는 자료들이다. 그리고 그의 자료 인용이나 사실서술의 많은 부분
들도 오류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신빙성이 불명확한 개인들의 증언들과
첩보기록들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들, 서
로 상충되는 서술을 한 부분들이 자주 눈에 뜨인다. 이러한 자료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주요 쟁점에서 단정적이고, 논쟁종료적인 언술로 귀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료에 의해 다시 쉽게 바뀔 수도 있을 위험을
안고 있으며 그의 주장의 신빙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
다.


마치며


이상과 같은 두 저작을 대비시킴에 있어서 1950년 전쟁발발 당시 남북한
을 두 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볼 수 있는가, 따라서 한국전쟁을 내전이 아닌
국가간 전쟁으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지
하다시피 커밍스는 전쟁을 해방이후 계속된 민족내부의 갈등의 계속으로
보고 있으며 박명림은 각기 정통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한 민족내부의
두 분단국가간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둘러싼 많은 논의
들이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왔다. 물론 남북한이 독자적 정통성
을 확보한 분리된 국가였는가의 문제는 보다 세밀한 연구가 덧붙여져야 하
지만, 그 문제는 남북한 국가건설이 전쟁에 의해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고
전쟁이후의 역사와 계속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 시점에서 딱 잘라 분
명히 규정지을 수는 없는 문제이다. 오히려 미국과 중국 등 초강대국의 개
입으로 국제전으로 비화된 것과, 그리고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에도 불구
하고 성과 없이 분단상황이 지속된 결과로 인하여, 내전인가 국가간 전쟁인
가의 문제와 남침인가 북침인가의 문제에 무게가 과도하게 놓여진 것이 사
실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베트남전쟁과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어찌 보면 형
식적 문제인 위의 문제들이 중요하게 강조되지는 않고 있다.
전쟁의 성격과 발발의 문제는 사실규명의 차원에서 당연히 중요한 문제
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전쟁의 책임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학문적
으로 독립적으로 머무를 수는 없으며, 저자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성을 내포하게 되며 사회의 정치와 이데올로기와 결합
되게 된다. 전쟁발발 50주년을 앞둔 오늘의 시점에서 탈냉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통일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전쟁의 책임의 문제는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독일의 갑작스러운 통일의 사례 속에서 남한에 의한 북한의 자본주
의체제하의 흡수통합이라는 통일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최근의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과 탈북사태는 이러한 주장에 현실적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
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성의 배제적 독점과 상대에 대한 제거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50년전의 북진통일주장이나 국토완정론과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러한
지점이 커밍스가 결론으로서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이제 한국민족은 통일과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것을 단순히 회피의 태도로 넘길 수만은 없게 하며, 80년대를 거쳐 90년
대에 제시된 그의 결론을 차분히 생각하도록 하게 한다. 결국 북한의 지도
부에 전쟁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 박명림의 연구를 그의 명쾌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주장이 남
북 상호배제적인 냉전적 논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