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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사람이 한번 태어나 짦은 삶을 살고 죽는 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죽음을 접할때 마다 끝없이 슬퍼지고 눈물이 나는건 어쩔 수 없나보다. 나는 거의 동시에 브레송과 정은임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뭐.. 그랬구나 하고 넘겼던 일들이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나의 머리속에 인식되나 보다.


1.

아무생각 없이 카메라를 들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셔터를 누르던 때 브레송이란 사람 아니 흑백사진 조차도 생소하던 그 때 내가 만난 브레송의 사진들은 충격 그 자체 였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브레송이 너무 유명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추어가 아닌 "작가"의 사진을 처음 본것이 아마도 브레송이었지 싶다. 브레송은 그렇게 내가 사진이란 것을 고민하게 해준 선생과도 같은 작가였다.

그리고 브레송을 통해서 이젠 나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매그넘을 알게되었다. 처음 매그넘을 알게되었을때의 그 흥분감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어렵풋하게나마 매그넘이란 조직에대한 동경과 또 그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기 시작했던것 같다. 김규항씨가 브레송의 죽음에 대해 쓴글을 퍼와본다.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은 1952년에 펴낸 브레송의 사진집 제목이자 브레송의 사진 세계를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브레송은 대상의 기하학적 구도의 면에서, 그 대상에 담긴 진실의 면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잡는 걸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알려진 대로, 브레송은 스스로 “내 눈의 연장”이라 부르던 라이카 소형카메라만을 사용했고 일체의 연출이나 트리밍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플래시도 사용하지 않았다. 카메라에 세계를 담아 넣으려는 욕심보다는 세계를 카메라로 포착하려는 그의 담백한 태도는, 온갖 첨단 장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프로 사진가들과 카메라보다 포토샵을 더 중요한 장비로 여기는 만인의 사진가들로 넘쳐나는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모든 거장의 말년은 시든 재능을 옛 명성으로 포장하며 보내는 것이다. 브레송은 70년대 중반 이후엔 사진은 접고 데생에만 전념했다. 셔텨만 누르면 ‘거장의 작품’이 되는 시절이 오자 스스로 셔터 누르기를 그만 둔 셈이다.

내가 브레송을 주문하던 바로 그날, 브레송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았다.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브레송의 사진들이 보여주듯 안온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존재한다.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풍요다.

-김규항-

2.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뉴스를 틀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정은임? 정은임이 누구였더라... 그리고 출근을 하고 나서야 "아! 정은임..." 정영음의 그 정은임 이었다. MBC 노동조합 여성 부장 정은임이었다. 아.. 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일찍 떠나는 걸까... 아주어릴적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목소리.. 새벽녘에 듣던 그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언젠가 다시 방송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까지 기다려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나에게 정은임 아나운서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멋진 여성! 이라는 것이었다. 옛날에 술자리에서 지금 아나운서는 손석희와 정은임이 버팀목이다 라고 했던 기억도 나고... 알게 모르게 정도 많이 들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참 좋아했던 사람 이었는데... 또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는 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정영음을 다시 다운받아 들어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당찬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우습게도 가슴이 울컥한다. 너무 아까운 생명이 너무 빨리 떠났다.

19만3천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 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한 사람에게는 몇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 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 한 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만3천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19만3천원, 인라인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35m상공에서 100여일도 혼자 꿋굿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 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속에 그 힐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힐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 정은임의 영화음악 오프닝 멘트 중 -

2004년 8월 05일 난장.

사진:MagnumPhotos,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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