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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전봉준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군 긍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명숙, 호는 해몽이자만 체구가 작아 보통 '녹두'라 불리웠다. 그는 37세에 동학에 입교하자마자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참고: [[포접제]])로 임명되는데 그의 인품과 지도력, 개혁의를 인정받아 주위 교도들의 추천받았다.


 전봉준의 시

 전봉준은 순창 피로리에서 채포되어 초토영이 설치된 나주성에 호송되어 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정봉준은 재판을 받은 뒤 1896년 4월 23일 처형되었다.

 전봉준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유언으로 남겼다.

 

                                 때가 오매 천하가 모두 한 힘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전봉준이 죽은 후 민중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로 그를 애도 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파랑새는 청나라 군사를 말하며 청병의 자신만만한 출병을 '하절'로,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것을 엄동설한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녹두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파랑새 민요는 청이 거들먹거리며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조선 민중에게 혼이 났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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