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블라디미르 레닌

Number 1915 Socialist Worker(영국) August 21, 2004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21세기를 위한 혁명적 사상

by Esme Choonara

사후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레닌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곱지 못하다.

올해 초에 전국지들은, 새로운 조사를 통해 레닌이 매독에 걸렸던 것이 확실하며 바로 이 때문에 그가 혁명을 광적으로 설교했던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몇 년 전에 BBC의 다큐멘터리는 레닌이 1917년에 권력을 잡는 데 집착했던 이유로 그가 자신이 뇌 종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죽기 전에 권력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노동자와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인물이었다.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던 지난 세기의 첫 25년 동안 레닌은, 더 나은 세계를 목표로 하는 투쟁에서 우리가 오늘날 배울 수 있는 엄청난 기여를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했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대중적 반전 운동의 일부라는 사실에 익숙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는 조국의 정부와 그 전쟁의 잔인한 살육에 반대한 전 세계적으로 한 줌도 안 되는 집단과 개인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전쟁을 야기하는지를 살펴보는 레닌의 제국주의 관련 저술은 오늘날의 우리 운동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혁명의 절정기에 쓰여진 그의 팸플릿 《국가와 혁명》은 사회주의자들이 국가 권력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에 관한 가장 명확한 설명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레닌은 볼셰비키 및 혁명 정당에 관한 사상과 가장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야말로 그가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언론이 엉터리로 퍼뜨린 레닌의 권력에 대한 의학적 의지라는 황당한 이론은 제쳐놓더라도 일반으로 정치 정당에 대한 이해할 만한 불신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정당하면 노동당의 기만이나 더러운 속임수, 스탈린주의의 살인적인 독재를 떠올린다.

레닌의 정당 모형은 이런 전통들 어느 것과도 백만 마일은 떨어져 있다.

레닌에게 있어 출발점은 언제나 마륵스와 동일했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의 행위이다”는 원칙 말이다. 혁명 정당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레닌은 주장했다. “‘민중’, 예를 들어 노동자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농민들에게는 엄청난 조직 능력이 있다.”

레닌에게 있어 정당은 근로 대중(노동 인민)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었고 투쟁을 배우는 것이었다. 레닌에게 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임무)에 관한 논쟁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어조를 낮추어 말하던 당시 사회주의 운동 진영 내의 인사들에게 강경했다. 그는 이렇게 적시했다. “노동자들은 인텔리겐치아를 위해 쓰인 모든 것을 직접 읽고 싶어하고 실제로 읽는다. ‘노동자들은’ 공장 상황과 관련해 몇 가지 사실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며,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을 되풀이해서 그들에게 알려주면 된다고 믿는 것은 소수의 (사악한) 지식인들뿐이다.”

그는 자신이 “경제주의자”라고 칭한 좌익 인사들을 맹렬하게 성토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노동조합 조직과 같이 당면한 경제적 요구를 놓고 벌이는 투쟁에 자신들을 묶어두고 정치 및 사상 투쟁은 자본가 계급 및 지식인들에게 맡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영국에도 이런 분리주의의 강력한 전통이 있다. 노동조합은 경제적 문제를 다루고 노동당은 정치 문제를 처리한다는 관념 말이다. 레닌은 혁명가들이 이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화법을 따르자면 정치는 집중된 경제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정부들의 정치적 결정은 대기업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은밀히 결부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실체에 도전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출되지 않은 사장들, 은행가들, 고위 공직자들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겠다는 소리이다.

더불어서 정치 문제를 외면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경제적 쟁점을 놓고 벌이는 우리의 투쟁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의미이다.

작년에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소방관 파업이나 올해 초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졌던 간호사 파업을 상기해 보자. 그들은 확고한 결의나 지지 부족으로 격파당한 것이 아니라 노동당에 결박당한 노조 지도자들의 정치적 충성 때문에 패배했다.

레닌 역시 정치 사상을 목표로 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사상 분야를 지배 계급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라고 썼다. “계급 적대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비계급적이거나 계급을 초월하는 이데올로기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레닌은 더 나은 임금이나 노동조합 조직을 위해 싸우는 경제적 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더 큰 투쟁의 일부로 파악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더 나은 노동력 판매 조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무산자들이 부자들에게 자신을 판매하도록 강요하는 사회 체제의 폐지를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Number 1916 Socialist Worker(영국) August 28, 2004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혁명가들이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이유

by Esme Choonara

100년도 더 전에 레닌은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분야나 계급·계층에 상관없이 온갖 형태의 폭정과 억압에 대응할 수 있는 민중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가들은 노동조합 쟁점이나 작업장에서의 전투뿐만 아니라 온갖 불의와 억압에 맞선 싸움에서도 최전선에 서야 할 의무를 진다.

예를 들어보자.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전에 경찰의 탄압을 받던 종교적 소수파와 소수 민족, 학생들의 방어를 지지했다.

볼셰비키는 여성의 해방에도 헌신했다. 혁명 이후에 그들은 이혼 및 낙태의 법률적 권리뿐만 아니라 공동 육아·세탁·취사를 제공함으로써 여성 억압의 물리적 뿌리를 근절해 실질적인 여성 평등을 확립해 나갔다.

레닌에게 억압에 맞선 투쟁은 도덕적 대응 쟁점 이상이었다. 그것은 지배 계급과, 우리 편을 분열시켜 무력화하려는 그들의 시도에 맞서 연대를 건설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여러 해 전에 칼 마륵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힘이 에이레 이민자들을 희생양 삼으면서 약화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따라서 우리를 분열시켜 지배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구성이 더 많은 흑인과 아시아인과 여성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영국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관해 쓰면서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평등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자들의 편에서 능동적으로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무슬림을 희생양 삼고 시민적 자유를 공격하는 행위에 맞서 그들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서야 한다.

슬프게도 프랑스 및 기타 지역 좌익의 상당수가 학교에서 히잡(hijab)을 착용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젊은 무슬림 여성들을 방어하는 것과 관련해 추상적인 세속주의(secularism, 교회와 국가의 분리)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억압에 맞서는 투쟁은 지배 계급의 사상에 저항하는 더 광범위한 투쟁의 일부이다.

레닌은 차르 치하 러시아 제국에 억압받던 민족들의 자결권 투쟁이 피억압 민족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자들을 그들 지배자들의 민족주의와 결별시키는 데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민족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 위대한 러시아 국민의 자유라고 하는 이익은 그런 억압에 맞서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인종 차별 및 민족주의 사상을 격파하기 위한 투쟁은 같은 국가의 노동자와 사장들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와해시키는 투쟁의 일부이다.

레닌은, 전제 정치가 폭로되면 “가장 후진적인 노동자도 매 순간 자신을 압살하는 어둠의 세력이 학생·종교 분파·작가들도 매도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는 혁명가들이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투쟁해야 하며, 그런 억압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고, “이 모든 사례를 일반화해 경찰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대개 투쟁 과정에서만 사상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은 혁명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보통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상이한 관념을 갖고 있다.

그는 순수한 혁명을 찾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식민지와 유럽의 소수 민족들의 반란이 없는, 온갖 편견으로 가득 찬 프티 부르주아지 분파의 혁명적 분출이 없는, 정치적 자각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및 반(semi)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이 없는 [그런] 사회 혁명이 가능하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순수한’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살아서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혁명의 순수성에 대한 이런 비판은, 좌익의 일부가 혁명적 마륵스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과 공동 활동을 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학을 흐리는 짓이며 사회주의자들과 무슬림은 공동 실천을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

레닌에게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은 변화를 목표로 하는 투쟁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서 전진의 방향을 주장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1905년에 레닌은, “혁명이 피억압자 및 피착취자들의 축제”라고 썼다. 변화를 위한 투쟁에서 대다수의 피억압자들은 최선두에 섰다.

아시아의 젊은 여성들이 최근의 반전 시위 상당수를 이끌었다.

유태인에 대한 조직적 대량 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던 나라에서 볼셰비키 조직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포함해 다수의 유태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레닌은 사회의 모든 부문을 해방하는 방법으로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에 헌신했다.

러시아 혁명의 유산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다음주에는 레닌이 혁명을 위해 어떻게 조직했는지를 살펴보자.
Number 1917 Socialist Worker(영국) September 4, 2004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by Esme Choonara

지난 100년 동안 여러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모든 혁명은 보통 사람들의 잠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혁명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거나 어정쩡한 타협으로 마무리되었거나 아니면 그저 최고위층 인사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17년 10월의 위대한 러시아 혁명이었다. 이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진정한 권력을 쟁취했다. 이 혁명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레닌과 볼셰비키 정당의 역할이었다.
  그들 이전에 사회주의 정당이라는 개념은 모든 노동자를 단일한 정당으로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일한 조직 내에서 상이한 정치학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게 됨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한 조직에 엄격한 이민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거하는 식이다.
  레닌의 정당 개념은 노동자 계급 내부에는 천차만별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혁명가에서 반동적 분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대부분은 이 양 극단의 어느 지점에 분포할 것이다.
  당이 혁명가들로 결집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당은 결코 그 자체로 목표나 대중 행동의 대체물이 될 수 없으며 다른 노동자들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정당과 운동은 서로를 강화해야 한다.
  레닌 자신은 당이 더 잘 조직될수록 “노동계급은 물론이고 다른 사회 계급 출신 사람들이 더 큰 규모로 운동에 가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배운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투쟁만이 피착취 계급을 교육한다. 피착취 계급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보유한 힘의 위대성을 깨닫고 그 지평을 확대하며 능력을 신장시키고 사상을 명료화하며 그 의지를 단련한다.”
  그러나 모든 투쟁에서는 그 전진의 방향을 놓고, 얼마나 나아갈지를 놓고, 누구를 신뢰할지를 놓고 언제나 논쟁이 벌어진다.
  혁명에서는 동일한 논쟁이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어진다. 1917년 2월에 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폭동과 함께 혁명이 시작되었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독재자 차르가 전복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남았다. 전쟁, 토지, 식량, 복수를 위해 칼을 빼어든 장군들 등등.
  2월에서 10월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불을 뿜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최고의 혁명 방어자임을 실천으로 입증해 보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레닌의 방식은 “끈기 있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논쟁을 수행하려면 조직의 근본이 튼튼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성격을 논하는 에세이를 들고 바리케이드 위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가 당신 말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볼셰비키는 혁명 이전 연간에 활동과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 점은, 지도자와 그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구성된 당이 아니라 모두가 지도자인 정당--주변에 네트워크를 가진--이 필요함도 암시해 주고 있다. 1917년에 공장과 군대에는 수천 명의 볼셰비키가 있었던 것이다.
  레닌에게 마륵스주의는 교조가 아니라 변화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이 바로 당이었던 셈이다.
  볼셰비키는 승리와 패배의 시기를 견뎌냈다.
  레닌은 정당이 투쟁의 파고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당이 보수화될 수 있으며 사건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해 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1902년 차르 경찰에 탄압에 직면해 레닌은 직업적 혁명가들의 강고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5년 노동자들이 대중 파업과 함께 공세에 나서자 그는 당의 문호를 개방해 젊은 혁명적 노동자들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과거 테제들을 들먹이며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천명했다. “그 모든 조직화 요강 및 계획이 관료적 형식주의를 낳았다. 어떤 형식적 절차도 요구하지 마라. 아무쪼록 모든 의식과 권리와 특권을 내던지기 바란다.”
  볼셰비키는 획일적이고 자유가 없는 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활발한 논쟁과 불일치로 들끓던 정당이었다.
  레닌이 소수파였던 적도 많았다. 1917년 10월 봉기와 같은 핵심적인 사안에서도 처음에는 소수였던 점을 상기해 보라.
  그는 논쟁과 예증을 통해 당을 자신의 입장으로 획득해야만 했다.
  레닌은 원칙을 고수해야 함은 물론 전술적으로 타협해야 할 필요성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시종일관 온갖 형태의 억압에 반대했고, 노동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전술적 문제에서 유연성을 발휘했고, 구체적 개별 사안을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반적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고립과 침략군으로 인해 탄생하자마자 교살당하기는 했지만 러시아 혁명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었고, 여성이 가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예술과 문화와 정치를 향유하는 그런 사회였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부상하면서 혁명은 패배하기 시작했으며 레닌이 지지하고 옹호했던 그 모든 가치들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새롭게 성장하면서 우리는 레닌을 통해 해방의 전망은 물론 그 달성 방법에 관한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