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은 사회의 모든 부문을 해방하는 방법으로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에 헌신했다.
Number 1917 Socialist Worker(영국) September 4, 2004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by Esme Choonara
지난 100년 동안 여러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모든 혁명은 보통 사람들의 잠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혁명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거나 어정쩡한 타협으로 마무리되었거나 아니면 그저 최고위층 인사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17년 10월의 위대한 러시아 혁명이었다. 이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진정한 권력을 쟁취했다. 이 혁명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레닌과 볼셰비키 정당의 역할이었다.
그들 이전에 사회주의 정당이라는 개념은 모든 노동자를 단일한 정당으로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일한 조직 내에서 상이한 정치학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게 됨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한 조직에 엄격한 이민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거하는 식이다.
레닌의 정당 개념은 노동자 계급 내부에는 천차만별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혁명가에서 반동적 분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대부분은 이 양 극단의 어느 지점에 분포할 것이다.
당이 혁명가들로 결집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당은 결코 그 자체로 목표나 대중 행동의 대체물이 될 수 없으며 다른 노동자들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정당과 운동은 서로를 강화해야 한다.
레닌 자신은 당이 더 잘 조직될수록 “노동계급은 물론이고 다른 사회 계급 출신 사람들이 더 큰 규모로 운동에 가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배운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투쟁만이 피착취 계급을 교육한다. 피착취 계급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보유한 힘의 위대성을 깨닫고 그 지평을 확대하며 능력을 신장시키고 사상을 명료화하며 그 의지를 단련한다.”
그러나 모든 투쟁에서는 그 전진의 방향을 놓고, 얼마나 나아갈지를 놓고, 누구를 신뢰할지를 놓고 언제나 논쟁이 벌어진다.
혁명에서는 동일한 논쟁이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어진다. 1917년 2월에 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폭동과 함께 혁명이 시작되었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독재자 차르가 전복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남았다. 전쟁, 토지, 식량, 복수를 위해 칼을 빼어든 장군들 등등.
2월에서 10월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불을 뿜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최고의 혁명 방어자임을 실천으로 입증해 보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레닌의 방식은 “끈기 있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논쟁을 수행하려면 조직의 근본이 튼튼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성격을 논하는 에세이를 들고 바리케이드 위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가 당신 말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볼셰비키는 혁명 이전 연간에 활동과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 점은, 지도자와 그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구성된 당이 아니라 모두가 지도자인 정당--주변에 네트워크를 가진--이 필요함도 암시해 주고 있다. 1917년에 공장과 군대에는 수천 명의 볼셰비키가 있었던 것이다.
레닌에게 마륵스주의는 교조가 아니라 변화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이 바로 당이었던 셈이다.
볼셰비키는 승리와 패배의 시기를 견뎌냈다.
레닌은 정당이 투쟁의 파고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당이 보수화될 수 있으며 사건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해 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1902년 차르 경찰에 탄압에 직면해 레닌은 직업적 혁명가들의 강고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5년 노동자들이 대중 파업과 함께 공세에 나서자 그는 당의 문호를 개방해 젊은 혁명적 노동자들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과거 테제들을 들먹이며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천명했다. “그 모든 조직화 요강 및 계획이 관료적 형식주의를 낳았다. 어떤 형식적 절차도 요구하지 마라. 아무쪼록 모든 의식과 권리와 특권을 내던지기 바란다.”
볼셰비키는 획일적이고 자유가 없는 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활발한 논쟁과 불일치로 들끓던 정당이었다.
레닌이 소수파였던 적도 많았다. 1917년 10월 봉기와 같은 핵심적인 사안에서도 처음에는 소수였던 점을 상기해 보라.
그는 논쟁과 예증을 통해 당을 자신의 입장으로 획득해야만 했다.
레닌은 원칙을 고수해야 함은 물론 전술적으로 타협해야 할 필요성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시종일관 온갖 형태의 억압에 반대했고, 노동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전술적 문제에서 유연성을 발휘했고, 구체적 개별 사안을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반적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고립과 침략군으로 인해 탄생하자마자 교살당하기는 했지만 러시아 혁명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었고, 여성이 가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예술과 문화와 정치를 향유하는 그런 사회였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부상하면서 혁명은 패배하기 시작했으며 레닌이 지지하고 옹호했던 그 모든 가치들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새롭게 성장하면서 우리는 레닌을 통해 해방의 전망은 물론 그 달성 방법에 관한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