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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장면 하나.


 뜨거운 여름. 논에 들어간 학생과 아저씨가 함께 웃으면서 피를 뽑고 있다. 피 대신 모를 잘 못 뽑아도, 농부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시며 친절하게 피와 모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잘 뽑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머리에 막걸리와 식사거리를 이고서는 천천히 걸어오신다. 그리고 일한 뒤에 먹는 꿀맛 같은 새참 맛에 일하는 보람은 점점 더 커져가고, 농민 분들과 끈끈한 연대의 정을 느낀다.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전형적인 환상에서 깨면,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고 열받는 농민과 농촌의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힘들여서 일해야 함은 물론이요, 일하면서 계속 불거져 나오는 문제는 나를 계속 당혹스럽게 했다.


 첫 번째, 권위와 통제.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학생들은 농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일찍 준비를 해 새벽부터, 저녁 6시 정도까지 계속 일 ‘해야 한다’. ‘농활’ 이기에 물론 농민과 학생 사이에 연대감을 키우는데 같이 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이는 농민들이 학생들을 단순히 일 도와주러 온 것으로만 생각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학생을 일꾼. 더 심하게는 머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재떨이 좀 찾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도였다. 그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학생들의 생활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학생들은 농대장의 명에 따라 숙소에서도 쉽게 드러눕지 못하고, 벽에 등을 대지도 못한다. 이유는 단 하나. 숙소에 무심코 들린 농민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오버액션인 것 같지만,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으로 군림해온 남성 농민은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예의 없이 버릇없이 아무데서나 함부로 누워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맞춰야 했다. 물론 공동체 생활과 연대 단위에서의 행동의 통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농활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들이 권위주의적 태도는 밤에 술 마실 때 많이 마시는 걸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그 절정으로 치 닿는다. 권위주의적 태도는 농촌 사회의 가부장성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데, 농사일을 잘 도울 수 있는 아들을 선호하는 남아선호 사상은 아직도 농촌 사회에서는 뚜렷이 남아, 그들의 가부장성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주방 일은 여학생에게만 시키려고 한다든지, “여자 애들을 가르쳐서 뭐해?” 와 같은 여성의 능력을 한정짓는 말은 실제로, 농민들과의 연대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와 장애물이 되고 만다. 물론 이는 비단 농민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 택시 노동자 집회에서도 있었던 일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두 번째, 누구와 연대하는 것인가.

 또한, 학생들이 농사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의 배분은 마을 청년 회장이 하는데, 주로 마을 청년회의 핵심 멤버들을 위주로 나눈다. 따라서, 학생들이 항상 일을 하게 되는 집은 몇몇 집으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이들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만큼 사정이 열악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업량이 만다는 것. 즉 그만큼 부농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빈농들의 경우는 학생들이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이 일거리가 적은 것이 사실이며, 학생들이 할 만한 일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 청년회와 잘 연관이 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분된다. 하지만, 소자영농과 같은 경우에 높은 토지 가격이 문제시 되고, 비료, 농기구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소자영농의 경우, 경쟁력이 뒤떨어져, 몰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 기울이게 되는데, 이들의 몸에 배여 있는 소유욕 때문에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로 돌려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보게 된다. 소자영농이 이러할 진대, 학생들이 많은 경우 연대하게 되는 부농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농민의 계급 의식을 상승시키고, 소작농의 경우,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맑스가 말했듯이, 단순히 이는 농민들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로 계급 운동에 가담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농민인 채로 사회주의자에 편이 될 수 있는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변혁은 더욱더 빨라지고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지난 1월 두차례 전농대회에 결합하면서 농민 계급이 가진 한계와 그들을 어떻게 혁명의 전선 앞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1. 전농대회와 농민의 문제점


1) 농민들은 모두 애국자?

 전농대회에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민족 농업 사수하자”이다. 대치상태에 있는 전경들에게 그와 함께 꼭 덧붙인 말은 “너희는 어느 나라 쌀 먹냐? 너희는 밥도 안먹냐?”이다. 농업 자체가 수천만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직접 행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라 그런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자부심을 갖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응되게 서 있는 칠레 농민, 칠레 농민들 입장에선 그들의 민족 농업을 사수하는 한편 농산품을 자유롭게 수출까지 한 것이니 정말 잘 된 것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한국 농민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위와 같이 민족의 문제로만 치부할 경우 너무나도 많이 얘기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한계에 부딪쳐 근본적인 요인을 간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전농대회 내내 진행되는데 있어서 좌파 학생진영 쪽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은 전국에서 힘들게 올라온 농민들에게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님 그 근본적인 요인은 알고 있지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것이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폭풍 속에 노동자, 농민, 빈민 모두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중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몰계급적인 사고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2) 멈추시오!!!!

 전농대회가 계속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이유는 fta 국회 비준안 통과를 막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해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농민들의 투쟁은 마치 국회의원들이 우리들의 의견을 꼭 우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농성하는 것과 같다. 비준안 통과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국노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팔아먹었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왜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분노하는 것과 같고, 이 역시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고생해가며 서울까지 올라와 추위에 떨면서 투쟁한 결과물이 고작 농촌 출신 의원들이 비준을  막아주었다는 것에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청원식 투쟁은 농민이 주체로 서지 못한 것이며, 자신의 계급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투덜거리며 징징대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3)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농민가와 앞에서 투쟁을 선동하시는 마이크 잡고 계시는 분의 말이 집회 내내 거슬렸다.  지난 회의 때에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농민가에 나오는 “♪~~형제들 있다.♬"라는 가사가 바로 그것인데, 처음에는 문제를 인식했다가도 겨우 외워서 노래를 부를 때면 그대로 따라 부르게 되어 알게 모르게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앞에서 선동하시는 분이 경찰 쪽에 마이크 잡고 있는 사람(명칭이 뭔지ㅡㅡa)에게 거기 숨어서 나불대지 말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짱 한번 뜨자고 말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집회에 참가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말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농민이 위에서도 논했듯이, 농촌 사회의 특성상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농민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아무도 그 문화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쉽게 그러한 논의들이 오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 억압적인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농민들은 단순히,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많은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과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도태되고, 몰락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은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위의 전농 대회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이상한 협약을 체결해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고, 국회 앞에서 온 힘을 다해서 투쟁을 하지만 그 한계만큼 농민들은 쉽게 지치고 만다. 그들에게 닥쳐온 문제는 사회주의자, 노동자들과 함께 반자본주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함을, 명확히 인식시키고 함께 투쟁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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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로 농업을 바라보자!

맑스주의로 농업을 바라보자!



1. 왜 ‘맑스주의’인가!


다소 도발적인 질문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 ‘맑스주의’라니. 어떤 사람들은 21세기인 지금, 맑스주의는 일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 참조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여기에 바탕을 두는 이념 논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체제가 어떠한 체제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과 같은 파시즘의 광풍이 사라졌다고 하여 맑스주의의 유효성이 소실된 것인가, 노동자계급이 이제는 하나의 ‘힘’있는 이익집단이 되어(물론 이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의 참된 의미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착취와 피착취를 전제로 한 임금노동이 유지되는 한, 계급사회가 유지되는 한 자본주의는 존재할 것이며 여전히도 우리는 그러한 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국회 앞에서는 농민들의 격렬한 집회가 연이어 일어났다. 바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안 통과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총선을 의식해서 인지 자신의 지역구가 농업지역인 국회의원들은 표결에 주저하여 비준안 표결이 아예 실시되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통과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많은 농민들과 연대단체들은 ‘400만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라고 외치며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고민은 이제 여기에서부터 이다. ‘400만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라는 구호가 과연 그 자체로 옳은 것인가? 남한 농민의 대다수는 농업노동자가 아니라 자그마한 땅이라도 소유한(그것을 직접소유하든 빌리든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소농임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달과 이들의 요구는 어떻게 배치되는가? 하는 등의 고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 농업은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과정에서 농민은 어떠한 처지로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맑스주의에 입각한 엥겔스와 레닌의 농업에 관한 글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에서의 ‘농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자본주의 아래에서 농민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가


-[프랑스와 독일 농업문제](엥겔스 저. [맑스/엥겔스저작선집 6, 박종철출판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텀에서는 이 글이 맑스주의에서 농업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바, 엥겔스의 글을 많이 직접 인용하고자 한다.


2.1 소농에 대해


앞서 언급할 때 남한농업에서 소농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소농’이란 어떤 개념인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텀에서는 엥겔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첫째 소농에 대한 정의, 둘째 사회주의자에 대한 소농의 태도, 셋째 소농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소농에 대한 정의이다. 엥겔스는 소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농이란, 대체적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경작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지 않은 약간의 땅의 소유자이거나 차지인을 -특히 전자를- 일컫는다. 이 소농은, 소(小)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별된다; 요컨대, 소농은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 (저작선집6 p.404)


즉 소농은 고된 일을 직접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소(小)수공업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무산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서는 생산수단을 가진 위치인 것이다. 그러면서 엥겔스가 소농에 대해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이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농업에서도 대규모 경작이 자본의 이해에 따라 시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소농은 과거의 생산 방식의 모든 유물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 가고 있다.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다.(저작선집6 p.405)


이러한 언급에서 주의를 해야 할 점은 소농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라고 하여 그들의 몰락을 바라만 보고, 소농과 같은 봉건적 잔재가 모두 사라지는 즉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성장하기만 하면 다음 사회체제인 사회주의라 간다 라는 ‘대기주의’라는 식의 발상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근거로 조그마한 땅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소농은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이들은 이 땅을 빼앗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농이 자본주의 그 자체가 철폐되는 즉 사적소유가 폐기되는 방향의 사회주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소농이 반대하는 것은 주어진 안락한 삶을 방해하는 생산력 증대를 위한 대규모 토지의 집적이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농은 매우 불안정한 위치로 자본주의 체제에 동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소농의 태도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사회주의(자)에 대한 소농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처지 때문에, 소농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에 베어 있는 소유욕 때문에 그는 얼마간은 여전히 그것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는 자신의 땅뙈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그에게 힘에 겨우면 겨울수록, 그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그 땅뙈기에 매달리며, 또한 그럴수록 그는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에 양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고리대금업자와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적으로 보게 된다. (저작선집6 p.405)


사회주의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동요하고 있는 소농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신들이 피해보는 것을 체득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불만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계급에 훌륭한 동맹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물론 이것의 전제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확고한 지도력이 있을 경우를 말한다) 엥겔스는 이러한 점들을 간파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소농들을 노동자계급의 동맹군으로 만들기 위해 ‘사탕발림’의 말을 소농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 당의 소농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장은 ‘다음 총선거를 위하여 소농을 획득하려는 것 같다’라고 하며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현재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낳게 될 상태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농민을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형집행을 유예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농민을 획득하였다가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됨으로써 농민이 그 다음에 우리를 다시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분할지 소유를 영구화해 줄 것을 기대하는 농민을 우리는 당원으로 필요치 않는바, 이는 장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수공업 장인을 필요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작선집6 p417)


즉 단순히 소농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그러한 주장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는 소농들에 대해 ‘사형집행을 유예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동요하고 있는 소농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어느 때나 어느 상황에 대해 반드시 옳다는 절대 불변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입장으로서 각각의 특수한 국면에 적용되는 ’맥락적 의미‘로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보편‘과 '특수’에 대한 명확한 구별, 그리고 이의 상호침투의 내적관계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보편’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교조주의의 한 편향, ‘특수’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내적 본질을 적용할 수 없는 구체적 상황에만 즉자적으로 매몰되는 한 편향, 즉 양 편향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중략); 우리는 소농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견하고 있으나, 우리의 개입을 통해서 그 몰락을 가속시키는 사명은 결코 갖지 있지 않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국가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 소농을 폭력적으로 착취하고(보상을 하든 보상을 하지 않든 간에) 대토지 소유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명맥한 사실이다. 소농에 대한 우리의 과제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적 경영과 사적 소유를 협동 조합적 경영과 소유로 이끄는 바, 그것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례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사회적 원조의 제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소농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만, 그때 가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이 소농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저작선집 6 p.417~418)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자들은 소농에 대한 개입을 통해 그들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적 경영과 사적소유를 협동조합적 경영과 소유’로 전화시키기 위해 선전/선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농들이 반감을 갖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조치들이 소농들에게 유리한 것임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역시 충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농이란 무엇이며, 이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엥겔스가 집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소농에 대한 입장을 인용하면서 소농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고자 한다.


요컨대, 우리가 분할지 소유의 지속적인 보호를 기도하고 있다는 가상을 조금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약속을 한다면, 당뿐만 아니라 소농들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해방으로 가는 길을 직접 막는 것이며 당을 소란스러운 반유태인주의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 농민들의 처지는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것, 분할지 소유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기차가 손수레를 밀치고 나갔듯이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은 무력한 낡은 소경을 밀치고 나갈 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농민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 당의 임무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한 경제적 발전이라는 확신 속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발전은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소농의 머리를 일깨울 것이다.(저작선집6 p.420~421)


2.2 중농과 대농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


소농에 비해 중농과 대농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에 누군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과 함께 해야 할 대상은 물론 중농과 대농에 의해 예속된 농업 노동자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중농과 대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선 그들의 중간적인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농업에 있어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을 소농, 중농/대농, 대토지 소유자로 나누었을 때 중농/대농은 소농에 비해 경작하는 토지가 넓기 때문에 농업 노동자를 고용할 수는 있지만 해외의 값싼 농산물에 대해서는 대토지 소유자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몰락의 운명은 소농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농과 대농에 대해서는 이러한 그들의 몰락 운명을 말하며 소농과 같이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유리하다 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엥겔스의 언급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농민들의 늘어가는 부채와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멸망이 이 농민들에게 증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대농과 중농도 자본주의적 경영과 값싼 해외 곡물 생산의 경쟁 앞에 반드시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경제적 확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농장을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통합할 것을 권고하고 것 이외에는 이러한 멸망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는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에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가 점차로 제거될 것이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은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를 갖는 전국적인 대규모 생산 협동 조합의 여러 부문들로 점차로 전화되어 갈 것이다. 만일 이 농민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생산 방식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리하여 그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을 이끌어 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올 것이다.(저작선집6 P.422)


2.3 대토지 소유자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


마지막으로 대토지 소유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앞서 잠시 언급했듯 대토지 소유자들은 소농과 중농/대농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몰락하는 과정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대규모의 토지 집적/경영으로 더욱더 발전을 구가하게 되며, 역시나 이의 기반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이다. 따라서 이들의 이해와 노동계급의 이해는 결코 동일한 지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농과 중농/대농들에 대해 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동맹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 굳건한 중심성 아래 자본주의 자체를 폐기시키는 혁명적 활동에 있어 이들의 몰락 운명을 말하며 같이 할 수 있는 힘을 배가하고자 하는데 ‘동맹’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엥겔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토지 소유의 경우에는 사정이 아주 단순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공공연하게 보게 되며, 따라서 어떠한 주저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리 앞에 농촌 프롤레타리아를 목격하게 되는바, 우리의 과제는 명백하다. 우리 당이 국가 권력을 갖게 되자마자, 당은 공업에서의 공장주와 꼭 마찬가지로 대토지 소유자를 수탈해야 한다. 이 수탈에 대해 보상이 따르느냐 여부는, 대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갖게 될 당시의 상황과 특히 대토지 소유자 신사분들 자신들의 태도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저작선집6 P.423)


3. 레닌의 농업이론-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을 중심으로


-[레닌의 농업이론] - (井野降一 저, 미래사 편집부 역)-이 글을 주된 자료로 보는 것은 이 자료가 ‘원전’이 아닌 2차 자료에 해당하긴 하지만 레닌의 농업이론에 대해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레닌을 통해 농업을 바라보려고 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신의 이론을 ‘도그마’가 아닌 하나의 구체적 활동의 ‘혁명적 이론’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었던 바, 레닌 역시 ‘러시아’라는 공간에 맞게 맑스주의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자신의 이론을 다져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의 이론은 러시아‘만’의 특수한 곳에서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이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이 주장한 논지들을 바탕으로 농업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알아감으로써 농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보다 견고하게 잡아갔으면 한다.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을 통해


이 글은 1905년 6월~7월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제 3차 러시아사회민주당 당대회(1905년 4월에 개최되었는데 멘셰비키가 불참함으로써 볼셰비키의 단독 대회가 되었다)의 성과를 바탕으로 1차 러시아 혁명의 전야 시기에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레닌이 무엇보다도 명백히 하고자 한 것은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아직 농노제의 잔존물을 뿌리 깊게 지니고 있고, 아울러 이미 부패하여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깊이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가 놓여져 있는 러시아에 대한 당시 정황들을 통찰력 있게 정확하게 짚어 냄으로써 그는 다가오는 1차 러시아 혁명기 때 자신의 주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강고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차르의 전제 및 농노제 유물의 일소를 목표로 수행될 당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순조로운 자본주의의 상향 발전의 길을 거친 이전의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과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특징지워지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여 착취가 전혀 없는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으로 계속 ‘성장전화’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각각의 혁명에 있어서 적과 아군, 아군 중에서 주력과 동맹군 등 제 계급의 세력배치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당시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이 글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점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는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일관하여 그 추진력이 되고 지도권(헤게모니)을 갖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광범한 민중의 대중적인 ‘무장봉기’가 강대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갖는 차르전제를 타도하고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기본적 결정적인 수단이 되며, 이 무장봉기에 의해 쟁취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권력을 통해 혁명의 획득물을 확보하여 지주와 부르주아지 측으로부터 반혁명을 저지하고, 당이 내건 최소한의 강령(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을 실현하기 위한 ‘임시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로, 당면의 부르주아 혁명은 계속되는 다음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한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양자는 특히 ‘하나의 사슬에 두 개의 고리’라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한 조건은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 그 외의 도시, 농촌의 반프롤레타리아트 대중과의 폭넓고 강고한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넷째로, 어느 혁명의 경우에도 단일한 중앙지도부 아래에서 중앙집권적인 조직체제를 수립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당 볼세비키 당이 그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레닌의 농업이론 p.83~84)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무원칙적인 농민과의 동맹이 아니라 농민과 그 밖의 다른 계급과의 동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에 의해 지도되는 확고한 ‘원칙’아래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즉 노동자계급의 단일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권력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또한 해당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이 다른 계급, 특히나 당시에는 농민과의 동맹을 맺는 것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길은 아니지만, 이를 앞당길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결코 레닌이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키는 것으로만 목적으로 하여 선전/선동한 것은 아니었다. 맑스와 엥겔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레닌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주장은 무수히 많은 사상투쟁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지적해 둘 점은, 레닌이 전개한 이들 주장은 사실상 혁명의 승리를 두려워하는 러시아 멘세비키와 서유럽의 사회민주당 지도부, 제 2인터내셔널을 지배하고 있던 기회주의자들에서 나온 잘못된 견해를 분쇄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저해하고 분산시키려 하는 그들의 매우 위험한 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부르주아혁명의 지도권을 부르주아지에게서 찾고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보조자’로서 그것에 종속시키며, 농민이 지니는 혁명성을 모조리 부정했다. 즉 사회주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서만 수행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동맹군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레닌의 농업이론 p.84)

또한 레닌은 마찬가지로 농민의 혁명적인 역할을 부정하고 ‘차르를 타도하여 노동자적 정부를’이라는 주장을 하여 부르주아혁명을 건너뛰어,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 수행되는 혁명을 주장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고립시키고, 결국 혁명의 유산을 꾀하고자 한 트로츠키의 잘못된 ‘영구혁명론’과 가차없는 투쟁을 하였다.(레닌의 농업이론 p.85)


이러한 당시의 정황에 있어 지나친 양 편향을 경계하며 레닌의 자신의 주장을 사상투쟁을 수행하며 견결하게 가져갔던 것이다.


4. 남한농업에 대한 간단한 고찰


지금까지 농업에 대해 엥겔스의 글과 레닌의 농업이론에 대해 분석을 한 글을 바탕으로 맑스주의에서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에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실제 투쟁했었는지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남한’이라는 곳에서 농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 점일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을 했지만 현재 남한에서는 농민이 약 400여 만명 정도 되는데, 그 인적 구성에 있어 소농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엥겔스의 분석을 기초로 하자면 중농/대농도 많으나 대토지 소유자는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농산물에 대한 개방의 압력은 더욱 가시화 되고 있고, 실제 쌀개방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지난 2월 국회 앞에서의 농민들의 투쟁은 이에 대한 불만이었음은 분명하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그들의 몰락을 반대하는 처절한 요구였던 셈이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요구대로 개방화를 막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엥겔스가 말했듯 그들의 사형집행을 유예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에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농민들에게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소농을 포함한 중농/대농들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점과 그렇기에 가장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를 폐기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노동자계급과 함께 해야 함을 선전/선동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현재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전술’적인 문제까지 제시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데 있어 명확한 관점은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점은 실천적인 투쟁의 과제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더욱더 분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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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운동 진영 내에서 농업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주된 관점은 아마도 민족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한복 차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전농 출신 강기갑 의원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식량주권을 지켜내서 민족농업을 사수하는 것’이 농업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역설한다. 학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신참’ 민족주의자들은 농활 사업이 “농민-학생이 힘을 모아 전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식량주권을 세계에 선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이 왜 공허하거나 심지어는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짧게나마 분석해내고자 한다.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이 글의 인용문은 모두 『우리농업 지키는 2004년 민족고대 봄 농촌활동』 자료집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가


  이 질문에 옳게 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농업 현안에 대한 각 계급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따져보아야만 한다. “쌀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라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농업 문제에 있어서 각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칠레 FTA 문제를 가지고 이를 살펴보자.

  먼저 농민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농 계급은 FTA가 통과되는 즉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 있다. 정부 스스로도 FTA가 통과되면 400만 농업 인구가 200만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나머지 200만은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하기야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거대한 콤바인으로 수확을 해대는 대규모 기업적 영농에 남한의 영세한 농업이 경쟁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때문에 소농 계급은 지난 한 해 그토록 전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FTA에 관한 남한 ‘민족’ 자본가 계급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들의 입장은 농민들과는 정반대로 열렬한 환영이다. 지난 한 해 전경련이 노무현 정권에게 하루 빨리 한-칠레 FTA를 발효시켜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이것은 그들이 ‘민족의 배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FTA의 발효는 남미의 공산품 수출 시장을 남한 자본에게 활짝 열어준다는 점, 둘째로 값싼 수입 농산품의 유통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묶어 두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FTA의 관철을 비롯한 농업의 세계적 재편이 결코 농업 선진국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남한 자본의 이해 역시 동일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농업의 세계화’는 제국주의 자본의 남한 침략으로써가 아니라, 남한 자본 역시 그 일부로서 참여하고 있는 세계 총자본의 이윤율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의 농업 침탈에 맞선 민족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허황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분쇄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목적이며, 이것을 한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정책의 기조로 가져간다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은 이 같은 사태의 본질을 그릇 이해하게 할 뿐이며, 더불어 민족 내부에서의 계급적 대립을 간과하게끔 만들 따름이다.


  (2)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어떤 측면에서 반동적인가


  모든 사물/사건은 자신의 내부에 대립되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립되는 양자는 부단히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질로 이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문제에는 양면성이 있으며, 어느 한 측면을 절대화 시켜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의 세계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현상하는 갖가지 세계화 흐름은 전 세계 근로인민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갖가지 제반 권리들을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절대악’일 뿐이며, 세계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목적으로 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세계화라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데,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의 세계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갖추어야 한다. … 낡은 지방적, 국민적 자급 자족과 고립 대신에 국민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 전면적 의존이 들어선다.” 즉 세계화가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측면은 생산의 전 세계적 체계화를 수행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는데, 이것이 자본가 계급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참된 모순은 세계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욕을 위해 무계획적으로,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세계화를 통해 획득된 전체 인류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은 계승/발전 되어야 하며, 이것을 전체 근로 인민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는 현재의  생산 관계를 변혁해내는 것이 앞으로 역사가 수행해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은, 역사의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퇴행적 시도이다. 이들은 “원래 농산물은 인간의 생활에 기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급자족, 즉 자기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자국에서 소비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미 남한의 식량 자급률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지은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는 대신 소 달구지에 의존하는 민족적 농업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선적 과제로 된다. 글쎄, 이들에 대해서 ‘경제에서의 자립’이라는 구호를 내건 북조선의 경제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를 언급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민족농업의 논리는 그것이 전혀 생산력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미 획득된 생산력의 유실마저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3) 결론 : 농업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농업 개방을 앞두고 수많은 농민이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성이야말로 어설픈 민족적 감정에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인식을 토대로 하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절실히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농업의 세계화’는 남한 자본을 비롯한 국제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세계화의 흐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의 이해에 따라 무계획적, 무정부적으로 수행됨으로써 남한 농민을 비롯한 전 세계 근로 인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통해 생산의 전 사회적 계획을 수립할 때만이 농업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확고한 결론을 얻게 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분쇄되고 계획에 의한 생산이 전면화 되지 않는 한, 영세한 남한 농민의 생존권이 보장받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민족의 전통을 지키자고 민족 자본에게 외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투쟁하는 농민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소소유자적 본능으로 말미암아 정부에 대한 청원 이상의 의식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농활을 통해 그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알려내고, 자본주의 변혁의 주력군인 노동자 계급과 연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 민족주의는 구체적 역사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남한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사회 통합’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거나, 기껏해야 몰락하는 소생산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해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점이다. 농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감성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을 주축으로 한 전 세계 근로인민의 국제주의적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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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농민의 몰락, 그리고 우리의 과제

세계화와 농민의 몰락, 그리고 우리의 과제



  쌀 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쌀 수입 10년, 정부는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을 준비하고 있고, 이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역시 준비되고 있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자급이 가능한 곡물은 쌀이며, 전통적으로 한국 민족은 쌀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때문에 쌀 시장 개방은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민감한 사안이다. 쌀 시장 개방 뿐 아니라 WTO 등으로 대변되는 세계화 흐름은 취약한 농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남한의 농민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낮은 가격을 무기로 다량으로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 앞에서 남한의 농산물은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 일련의 세계화에 의한 농산물 시장의 개방은 남한 농업을 괴멸시킬 것이 분명하다.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로 인해 민중들이 겪는 고통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흐름에 대해 민중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농민 문제에 있어서도 이들이 세계화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농민들은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가 가속되면 될 수록,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생존의 위기에 몰린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 뿐이다. 이런 면에서 농민들의 투쟁을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농민은 혁명적 계급인가


  문제는 이러한 농민들의 투쟁이 과연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길인가이다. 농민들은 자체로 하나의 동일한 집단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 정도에 따라 여러 계층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농민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뿐, 조직된 세력으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하나의 공장에서 공동으로 일하며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자신의 소유지에서 따로 따로 일한다. 공동작업이라고 해봐야 열을 넘지 못한다. 농민들이 처한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무작정 농민들의 투쟁을 찬양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혁명적 계급은 그/녀들이 가진 전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투쟁이 자본주의와 정면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고, 그 투쟁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만 그/녀들은 혁명적 계급이라 불릴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농민은 그 자체로서는 혁명적인 계급일 수 없다.

  농민들이 하나로 단결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해 매년 겨울이면 열리는 농민대회를 예로 들며 반론을 펼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농민들도 단결해 그/녀들이 가지는 공동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이 순간만큼은 이질적인 구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 투쟁의 요구는 소부르주아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투쟁은 몰락하는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농민들이 한데 모여 정부에 항의하는 가장 큰 목적은 농산물 시장개방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는 타국 농민들과의 경쟁에서 남한 농민이 불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나서서 불리한 부분을 보완해 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한에서 농민들의 투쟁은 지역분산적이고 수공업적인 현재의 농사 방식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결국 반세계화 투쟁은 농업에 있어서 취약한 남한 농업을 정부가 나서서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귀결한다.

  일각에서는 초국적기업의 농업지배를 문제삼으며 농민들의 투쟁을 정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음모 뒤에는 초국적 자본들이 버티고 있고, 농민들의 투쟁은 이들의 음모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투쟁이며 자본주의를 분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카길과 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간과하고 있는 것은 농민들이 어떠한 계급인지에 대한 분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모순의 배후에는 자본이 존재한다. 때문에 모든 투쟁은 반자본주의적일 수 있다. 각각의 투쟁들이 계급적일 수 있는 것은 참가하는 세력이 얼마나 사회주의적인 정치를 가지고 있는가이지, 대립하는 적이 누구인지가 아니다.


다시 노동자계급 중심성으로


  농민들의 투쟁에 결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탈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혁명적 계급은 노동자계급 뿐이다. 여타의 계급/계층이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며 이들과 함께 미래의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할 때 뿐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지위는 하락하며, 이들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몰락은 불가피하며, 자본주의 철폐 외에는 대안이 없다. 즉 그/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이익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미래사회의 주인인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야 한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고 모순을 깨뜨릴 중심세력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지 결코 민중에 대한 배제나 방기가 아니다. 각각의 투쟁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투쟁들의 의미를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투쟁들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해 주며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할 뿐이다.


세계화의 대안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 철폐 뿐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세계화를 지연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자본은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폭력적으로 제거된다. 이미 자본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다.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는 것만이 세계화에 대한 대안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세계화로 인해 농민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아파하고, 그/녀들의 투쟁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맹목적으로 농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농민집회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민들이 자신의 현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즉 그/녀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그/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일 수 없다. 이러한 투쟁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의 미래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신들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은 몰락하는 지위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이후 얻게될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농민들이 깨달을 때, 그/녀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일 수 있다.

  우리는 농민들에게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모순의 지연일 뿐,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서도 안된다. 농민들은 미래의 이익을 위해 싸울 줄 알아야하며, 이는 자본주의를 철폐할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농민들은 노동자계급과의 더욱 굳건한 연대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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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적 입장들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적 입장들


  일말의 정치 활동과 권리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한국의 6,7,80년대. 그것에 맞서 국민 대다수가 벌였던 민주화 투쟁과 그 성과들. 그들은 스스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권리를 쟁취하고, 대통령을 탄핵시키려는 야당의 ‘음모’에 맞서왔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현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는 조금만 보완하면 거의 완벽하다. ‘진보적’인 사람의 경우라도 국가보안법 정도가 맘에 들지 않지만 곧 폐지될 것도 같으니 봐줄만 하다. 각종 기구 등을 통해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귀족’ 소리 들을 만큼 배불리 먹고 산다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모든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만 소수의 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절충하면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절대적인 제도가 아니던가!! 어찌 이것을 신봉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당신들의 천국”


  하지만 피어나올 변혁의 불꽃을 가슴에 품고 있는 청년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현재 다수의 평등과 소수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행해졌던 모든 것들이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현재 사회는 여러 계급들로 분열된 자본주의 사회이며 이를 유지시키는 것은 사유재산제와 임금 노예제이다.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해 잉여가치를 만들어 냄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렇듯 체제를 굴리는 자들은 노동자 계급이지만 그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자들은 자본가 계급이라는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상식과 역사를 우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순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할 수 없는 것이다.1)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평등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순수” 민주주의를 “순진”하게도 부르짖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스승은 카우츠키다. 그는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내세워 1918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팜플렛을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만만세!!”라는 구호를 세련되게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지금 사회의 새로운 ‘카우츠키’ 들에게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을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 하나. 공권력의 문제. 지난 탄핵 정국. ‘탄핵반대. 민주수호’ 외치며 다양한 단체와 시민들이 광화문으로 촛불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현 남한 사회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저녁 5시가 넘으면 거리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금지된 시간’에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평화적으로 반대시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외치는 집회에서는 무장한 경찰들이 마구 폭력을 휘두르며 집회를 진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집회의 성격이 체제에 反하고, 혹은 위협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모두가 광장에 나와서 자신의 요구를 담은 집회를 할 수 있는 “순수”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 둘. 부르주아 의회. 국민의 뜻을 하늘 같이 받들겠다며 악수를 청하던 사람들은 모든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반대하는 파견법 확대 개악안을 국회에 상정, 통과시킬 작정이다. 반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반인권적인 법률이라는 국가 보안법은 아직도 어영부영 하며 폐지 혹은 개정 여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법안을 논하는 와중에도 국회 앞에서 국보법 폐지 기습 시위를 한 청년 학생들은 연행까지 되었다. 이는 단순히 부르주아 의원 몇몇을 잘못 뽑아서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 있는 나라의 인민이더라도 자본가의 “민주주의”가 선언한 형식적 평등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 노예로 전락시키는 수천의 실제적 제약 및 사기가 빚어내는 절박한 모순과 어디서나 마주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3)

  예 셋. 외교 정책. 어떠한 부르주아 국가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민주적이라고 하는 국가에서도 외교정책은 결코 공개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외교 문제의 주된 사안은 식량, 파병, 관세 문제 등 인민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현 남한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안인 쌀 수입에 관련해 정부가 농민들의 의사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는 기사4)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인민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민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언론출판물을 내는 것은 인쇄하는 기구나 인쇄 용지의 소유문제와 각종 법적 제제때문에 쉽지 않다. 오로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굴종할 것을 가르치는 제도권 교육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위의 예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정말로 순수하지 않다는 것. 부르주아들만을 위한 민주주의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독재라는 점을 말이다. 이것을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나가는 것이 ‘가슴에 불꽃을 품은 자’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우리들의 천국”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소수의 착취 계급이 다수의 피착취 계급을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소수만이 잘 살게 되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근로피착취인민의 민주주의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확장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전위 대공장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5) 그런데 흔히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만의 독재’가 되어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으면 어쩌냐는 기우를 하곤 한다. 걱정마시라. 노동자계급민주주의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백만 배 민주적이다.6) 노동자 계급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 1871년 파리 코뮌7)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가 강조했던 파리 코뮌의 대책8)들이 충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국가기관 봉직자의 월급 수준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낮추는 등의 대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또한 특정계급이 억압수단인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에서 노동자·농민과 같은 대다수 인민대중의 일반적 권력에 의한, 억압자에 대한 억압으로의 전환을 보다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의회 선거란 몇 년에 한번씩 자신들을 억압하고 탄압할 자들을 뽑는 것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단순한 의회가 아니라, 활동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사회의 부패한 의회제도를, 의사발표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전락되지 않는 기구로 대체했다. 그것은 곧 의회 구성원 자신들이 일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 업무를 집행해야 하며, 실제로 얻어진 결과에 따라 스스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기구는 잔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잔존하는 대의 기구는 결코 입법과 행정의 노동을 분리시키거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와 같은 특수한 체계로서의 의회는 아니다.9)

  그런데 분명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역시 완벽한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계급 간의 지배와 피지배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계급 사회에서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라 대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파리코뮌)는 이러한 계급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낡아 빠진 관료기구를 일시에 때려 부수고 관료제의 점진적인 폐지를 가능케 할 일시적인 통치기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서 모든 인민이 완전한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과도기의 역할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카우츠키주의자들은 한 술 더 뜬 주장을 제기한다. 착취자는 언제나 극소수의 인구만으로 이루어져 왔다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절대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굳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다수는 다수이므로 다수가 소수의 “저항을 분쇄”할 필요도 “그것을 무력으로 억누를 필요도 없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직도 동화 속 세상을 꿈꾸는 몰계급적·초계급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혁명과정에서도 관료제·국가 기구나 부르주아지를 한 번에 패퇴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이 소유하고 생산 수단이나 토지 등을 턱하니 내줄 리가 없을뿐더러 그것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또한 항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를 오가며 줄을 서는 쁘띠 부르주아들이나 각종 반동들에게 공포를 불어 넣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대해 무장된 인민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적들을 무력으로 억누르기 위해서 독재는 필요한 것이다.10)


  첫 번째와 두 번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 그 독재는 혁명적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모든 인민의 해방과 평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민주주의적 투쟁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라는 것은 그들을 해방시킬 충실한 무기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내디던 걸음에 뒤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구체적 이론 학습과 실천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자.”

 

 

1) <레닌「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28p>

2) 위의 책의 33~35p에서 레닌이 구분했던 방식을 사용.

 

3) 위의 책 34p

 

4) 쌀 관세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협상의 종료 시한이 다가오면서 농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잇따라 개최키로 하는 등 정부와 농민간의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관세화 유예기간을 10년으로 하되 의무수입 물량을 현행 기준 소비량의4%에서 8∼9%로 늘리고, 수입물량의 일부를 밥쌀용으로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선에서 쌀 협상 대상국가들과 이견을 좁힌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전국농민연대 대표들은 지난 1일부터 서울 광화문 시민공원에마련된 농성장에서 국민적 합의없는 쌀협상 중단과        쌀 개방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11월 8일자 한겨레 기사>

 

5)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운동은, 그 시작이 아무리 작고 평범할지라도, 또 그 기회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당장의 목표를 뛰어넘어 구체제 전체와 양립할 수 없게 되며 그것을 파괴하는 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 계급의 처지에 있는 본질적 특수성 때문에, 필사적이고 전면적인 투쟁으로,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뚜렷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 토니클리프『레닌1』362p 러시아어판 레닌 전집8권, 426p 재인용>

6)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36p>

7) 제정에 정반대되는 것이 코뮌이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2월 혁명(1848)을 시작했을 때, ‘사회공화국’ 이라는 최임은 군주제라는 계급지배 형태 뿐만 아니라, 계급지배 그 자체까지도 폐지하려는 공화국의 막연한 염원을 표현한 구호였다. 코뮌은 그런 공화국의 실현형태였던 것이다. 낡은 통치권력의 중심지인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성채인 파리를, 티에르와 시골지주들이 제정에서 인계받은 이 낡은 통치권력을 부활하여 영구화하려고 한 데 대해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한 것이다. <맑스. 『프랑스 내전』>

8)  코뮌은 파리의 각 지역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방자치 위원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언제나 소환의 대상이 되고, 자연적으로 코뮌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덕망있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자들이었다. 경찰은 일시에 정치적 속성이 제거되고 책임성 있고 항상 소환될 수 있는 기구로 변하였다.

   <위의 책>

 

9) <레닌 『국가와 혁명』 63p, 65p>

 

10)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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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민주주의 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김성렬

1.탄핵국면이 의미하는 현 남한의 상황


  지난 3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두고 열우당에서는 ‘의회 쿠데타’로 울부짖으며 말하기도 했으며, ‘진보적’이라고 지칭되는 제 사회민중 단체들의 경우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며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탄핵국면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상처로 남아있는 ‘파시즘’으로의 회귀의 신호탄이었는가? 진정 이 땅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흔들리는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는가?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당시 부르주아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 해외평가기관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남한 경제관료들은 대통령 탄핵 사태가 결코 경제에 위기를 주지 않을 것임을 느긋하게 강조했으며, 실제로 어떠한 불안정한 흐름도 존재하지 않았다.1) 즉 탄핵사태는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 권력의 위기가 아나라 단지 노무현 정권의 위기였을 뿐이며, 체제의 안정,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편안하게 허리띠 풀어놓고 벌인 밥그릇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밥그릇 싸움에 부르주아 한 분파가 노동자와 근로대중을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동원한 것이다. 또한 노사모나 국민의 힘과 같이 탄핵 반대 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은 이 투쟁의 물결이 조금이라도 체제의 울타리 밖으로 넘쳐 날까봐 신경을 썼으며 한 방울도 넘쳐나지 않게 성공([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준비4호] ‘탄핵논쟁,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독재, 현종혁)’ 시켰으며, 이 속에서 제 사회민중 단체들의 경우 역시 그/녀들의 의도이건 혹은 그와 무관하게 결국 열우당의 힘들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정치분파 간의 ‘편안하게 허리띠 풀어놓고 벌인 밥그릇 싸움’이었던 탄핵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찻잔 속의 태풍’으로 진행된 탄핵사태는 그만큼 남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도 사실이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들은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자유주의 체제를 추구해 왔으며, 90년대 초반 이후 확립되었고,  88년 김용갑과 양동만의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하는 극우궐기론을 전후로 하여 극우 세력은 권력 밖으로 배제되었다.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극우 세력은 권력 밖에서 소규모 사회 운동으로 자신들을 재구축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91년 노태우 중간 평가와 강경대 열사 사건을 둘러싼 투쟁 국면에서 김대중이 군부 쿠데타설로 대중의 좌익화를 막으려 했을 때를 제외하고 파시즘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군부 쿠데타의 주역 ’하나회‘ 마저 김영삼 정권기에 청산됐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 패배이후, 대선 패배의 원인을 당의 보수성과 노후화로 평가하고 최병렬 체제 하에서 초/재선 의원들과의 연대를 통해 당의 개혁과 인적 청산을 추진([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준비4호] ‘탄핵논쟁,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독재, 현종혁)’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남한에서도 경제위기가 보다 실물화되고 가속화 된다면 어떠한 노동조합, 진보적 사회단체까지도 직접적으로 탄압하는 파시즘이 다시 대두될 수도 있다. 현재 남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 되어 있다고 해서 파시즘이 다시는 등장하지 말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 국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른 구체적인 판단이다.

  이러한 점에서 살펴 볼 지점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 수호’ 이외에 핵심적으로 제기되었던 진보진영의 대응이었던 ‘국민발의/국민소환제’였다. 국민발의/국민소환제를 당시에 핵심적으로 제기해 들어가며, 외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였는데2) 이에 대한 간략한 평가 역시 필요할 듯하다. 국민발의/국민소환제는 이미 서구에서 스위스, 미국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달했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는 이미 도입되어 있는 제도이다. 따라서 남한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보다 견고히 하는 동시에 노동계급에게 있어 ‘자유’의 확대를 가져오는 국민발의/국민소환제 도입을 반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여기서 살펴봐야 할 지점은 국민발의/국민소환제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는 가 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변혁의 과제로 제기되었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걸고 이에 따른 제반 권리들을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그 투쟁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언급은 다음 텀에서 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원칙은 현 변혁의 과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아닌 노동해방이라고 했을 때, 역시나 발현되는 민주주의 투쟁에 있어서도 여기에 개입해 들어가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함에 있어서 기본 전제는, 민주주의 일반이 아닌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적 재산권과 임금노예제가 바탕을 이루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털끝만큼도 전복시킬 수 없으며, 착취와 피착취의 계급사회를 종국에는 끝내기 위한,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국민발의/국민소환제는 그 주장의 맥락에서 ‘투쟁의 급진화’의 한 기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속의 핵심인 ‘노동계급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면서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월 당시 울산에서는 故 박일수 열사투쟁이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울산지역에서 민노당 총선 준비를 위해 투쟁을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노골적인 말까지 나오던 상황에서 탄핵국면은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전선을 한 번에 대중의 최소한의 관심 속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당시에 열사투쟁 전선을 더욱 더 강고히 가져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탄핵국면에서,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열사투쟁을 알리며 보다 깊은 개입을 했어야 했는가 아니면 열사투쟁에 직접 결합하며 그 투쟁을 사수해야 했는가. 이에 대한 판단은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구체적 판단의 분명한 전제는 앞서 강조했던 ‘원칙’이었다.


2. 민주주의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원칙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계급의 입장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 바라보아야 하고, 이를 위한 제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에 개입해야 될까? 바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시키고 진정 노동해방의 사회의 건설의 주역인 노동계급이 아닐까? 철저한 유물론적 관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러 투쟁 속에서 노동계급이 가져야할 원칙적인 태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이 부르주아에게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부르주아의 수많은 법과 제도들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음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투쟁의 경험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아직 봉건제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서는 구체제의 유산인 반동적 귀족세력이 실질적으로 군대 등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지배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정치적 지배권력을 쟁취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당면과제였지만 노동계급의 그 혁명적 힘의 분출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공장제 공업의 발전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덜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엥겔스는 봉건적 질서가 남아있는 경우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있어 더욱더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요구하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이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3) 그렇다고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문제이니 노동계급은 봉건적 질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지켜만 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분명히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들이 반동적인 봉건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추진하겠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4) 이는 1905년 러시아의 당면 혁명의 과제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 있어 레닌의 주장과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였다.5) 그러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분명 ‘민중의 혁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속에서도 ‘민중’ 그 자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로 구분해야 하며, 계급적 독자성에 대해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했다.6) 그러면서 레닌은 명확한 실천 방향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앞당기는 데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공화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 이외에는 다른 길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 할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제시하였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들이니 노동계급은 이에 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회주의적 조류와 확실한 선을 긋는 동시에 실제 투쟁에 있어 물리력을 담보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만들어가는 데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시키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탄핵사태를 경험했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안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텀에서 자세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따라서 변혁의 과제 역시 그 당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주장에 담긴 보편적인 입장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투쟁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7)



3.현재 제기되고 있는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흐름에 대해


  12월 1일 민주노총은 총파업 투쟁 지침 3호를 전 조합원들에게 알렸다. 국회에서 비정규 법개안이 일단 유보됐으니 이제는 권리보장 입법쟁취 투쟁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하면서, ‘국보법 철폐, 국민연금법 개악 저지, 파병연장 동의안 저지, 사립학교법 민주적 개정, 언론 관련법 개정, 용산미군기지 이전 비용 전면 재협상, 기업도시법 저지’를 위해 함께 싸워나가자고 하였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 지침 3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사실관계 확인에 있어 정말 비정규 법개악이 유보되긴 했는가? 백 번 천 번 뒤로 물러나 양보를 해서, 사실 유보되지 않은 비정규 법개악이 민주노총의 말대로 유보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결국 제자리걸음이 아닌가? 왜냐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하게 끔 한 98년에 통과된 파견법을 더 개악한 것이 이번에 나온 비정규 법개악이라고 했을 때, 비정규 법개악 유보는 결국 기존의 파견법의 범주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 법개악을 철폐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유보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유보되었다고 기만적으로 속이며 1차적으로 승리했다고 자축하는 것은 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 자체이다. 이 와중에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해 이제 싸워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의 기만을 가리기 위한 면피에 불과하다. 총파업이 무산되기 전까지 운동진영에서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내 건 것은 (현장에서 점차 민주노조 운동이 어용화 혹은 전투성에서 탈각하고 있는 것과 맞물려 전반적인 운동의 퇴조기8)라는 조건 속에서) 이 법안의 주요 골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있어 사활이 걸린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 법개악 저지’라는 수세적인 측면을 넘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능동적인 투쟁 참여와 더불어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를 받아 안게 함으로써 보다 공세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과는 달리 민주노총에서는 순전히 총파업을 무산시킨 자신들의 과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를 내걸고 있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연대정신을 바탕으로 전국의 노동계급이 싸우기 위해 비정규 법개악 저지 전선에서 가장 유효한 수단은 총파업이었다. 공허한 공문가가 아닌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나서야 했던 민주노총에서 이렇게 총파업을 무산시킨 것은 운동의 퇴조기를 더욱 가속화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해 비판만 한다고 현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대중투쟁 속에서 기회주의적인 지도부를 끌어내고 진정 투쟁하는 지도부를 건설하는 것이지 결코 지도부 비판만으로 운동의 상황이 급진화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적인 총파업 전선이 사실상 사라진 현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입장대로 투쟁 지침 3호에 나와 있는 다양한 민주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진정 투쟁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9) 아직 학생이기에 우리는 현장의 외곽에서 투쟁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전체적인 운동의 흐름에 대해 면밀히 판단할 자료도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는 조건에 놓여있기도 하다. 하지만 원칙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동계급 대중에게 있어 가장 사활이 걸린 사안과 투쟁에 대해 끝까지 함께 하며 이를 학내에 광범위하게 알려내는 것을 말이다. 현재 비정규 법개악 저지 총파업 국면은 사실상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 대중과 괴리된 상층 중심의 민주노총식 투쟁방향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방하며 활동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국적인, 전 계급적인 투쟁을 어떻게 하면 현장에서부터 끌어올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학생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를 항상 고민하면서 그러한 투쟁을 만들 수 있도록 적극 지지/엄호하는 활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원칙 아래 학내에서 활동하는 것과 맞물려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해 나간다면 운동의 퇴조기라는 객관적 조건에 머무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주체적 의지로 모든 것을 돌파하겠다는 식의 양 편향을 극복해 나가며 작지만 소중한 유의마한 활동들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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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핵소추 10일] 탄핵 충격과 경제 (2004년03월20일)

당초 우려와 달리 탄핵 사태가 경제에 미 친 충격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지난 12일만 해도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렸으나 투자 주체들의 심리적 동요가 진정되면서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탄핵안 가결 당일에는 국가 지도력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헌정 초유의 사태가 시장 불안으로 확산되면서 국가 경제 전반이 밑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던 게 사실이다. 종합주가지수가 장중 한때 47.88포인트나 폭락하며 공황 조짐까지 보였고 원/달러 환율은 12원이나 치솟았으며 선물시장에서는 선물지수의 폭락으로 일시 매매 중 단(사이드카)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경제 부처에는 비상이 걸렸고 다급해진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 총리는 탄핵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관계 장관회의에 앞서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따로 불러 '책임지고 경제 부처를 통괄해 정치 불안이 경제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부총리는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으로서 닦은 금융시장 관리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들을 숨 가쁘게 밟아 나갔고 재경부와 금융 감독위원회 및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관계 기관들은 즉각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이 부총리는 은행장을 비롯한 금융기관장 회의를 소집해 손절매(추가 손해를 막 기 위해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하고 주식을 처분하는 것) 등의 금융시장 불안 조 성 행위를 자제하도록 당부했다. 또 민생과 서민 생활 안정을 위해 영세 상공인을 적극 배려하고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자금난 해소에 적극 나서는 등 금융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힘써 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국제 신용평가회사와 외국 기관투자가 등 1천명에게 e-메일을 보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여건)은 여전히 강하며 정치 불안은 일시적인 만큼 투자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외국인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 총력을 경주했다. 결국 금융시장의 키를 잡고 있던 외국인 투자자들의 동요는 없었고 국내 기관 투자자들도 더 이상 심리적 공황에 빠지지 않고 중심을 지켜 탄핵 사태 후 첫 월요일인 15일에는 금융시장이 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재경부를 비롯한 경제 부처는 가장 걱정했던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다른 분야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탄핵안 가결 6일째인 17일 비상 체제를 해제 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 경제의 체제와 기본 체력, 국민의 의식이 과거와 달리 정 치적 격변에 크게 영향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연합뉴스) 김종현.윤근영 기자


 

2) ‘국민발의/국민소환제’관련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한 논쟁은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홈페이지에서 진행되었던, ‘최원-현종혁씨 논쟁’을 참고했으면 한다. 발제문에서 이 논쟁을 자세히 다루는 것은 토론회의 위상 상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논의 시간에 논점으로 제기된다면 논의/논쟁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3)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는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 쭌프트 제도에 대립하여 상업과 영업의 자유를, 관료적 후견에 대립하여 자유와 자치를 자신들의 깃발에 써넣어야 한다. 따라서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들은 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부르주아지이기를 중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물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권리와 결사의 권리로써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 보통 직접 선거권으로써, 그리고 아울러 위에 적은 선동 수단들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을 획득한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58~59)

 

4)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동파의 앞치마 밑으로 숨어들고 노동자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신의 적대 분자의 힘에 호소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 그러한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노동자 당에 남아 있는 방도는, 부르주아적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권리에 대한 선동과 같은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의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들이 없이는 노동자 당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노동자 당이 이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 본래의 생존 요소, 자신들이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적 폭풍 - 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 - 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60~61)


 

5)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 있어서 부르주아혁명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맑스의 명제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명제는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정치적 슬로건에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초로 한 모든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요구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제일 먼저 내세운다. 부르주아지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획득한 자유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행사하면서 자유를 온건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지의 것으로 변형시켜서, 평화적 시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단히 교묘하게 억압하고 격동의 시기에는 이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데 이 자유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부정되거나 또는 비난받아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로지 나로드니크 폭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뿐이다. 이러한 인텔리적이며 속물적인 교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시일 뿐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힘을 배가시키고 조직을 꾸리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그것도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범위, 계급투쟁의 의식, 조직, 결연함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정치투쟁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의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노동조합의 비서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혁명의 지도자의 지위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2~123)


 

6) 그렇다. 민중의 혁명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이라는 말이 부르주아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해 싸워왔고 지금도 대단히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 단어가 민중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완전히 계급적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은 진보적 계급이 그 자체 내에 머물거나, 좁은 한계 내에 그 자신을 한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적 지배자가 후퇴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을 마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간계급들의 미지근함, 동요, 주저함 등과 인연이 없는 진보적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전 민중의 대의를 위해서 전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3)


 

7) 04년 하반기에 제기되고 있고 지금까지 일부 시민단체와 학생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 중의 하나는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다. 이들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는 ‘인권’에도 훨씬 못 미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완전폐지’를 주장하며 계속해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어 싸워나가지 못하고 있다. 즉 현장의 노동자들과 괴리된 채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가계급의 절대적 힘의 우위 속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상승/발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패배해 가는, 즉 정치적 주체로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분명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어 ‘친북-좌익-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누구보다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의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할 노동계급은 뒷전에 있고. 시민단체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 과연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우리는 해 봐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나 ‘형법대체입법/파괴활동금지법’ 등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여 사실상 제 2의 국가보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개혁성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투쟁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대부분은 시민단체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동계급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며,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는 개악되면 개악되었지 ‘개선’조차 따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도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늦지만 가장 빠른 길을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8)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남한에서 노동운동은 자본과의 치열한 싸움에 있어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연대의식으로 ‘전투성’을 획득하며 뭉치게 되었다. 이는 전노협의 기본 정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와 자본은 예전과 같이 물리력을 동반한 탄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노동계급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자 회유와 협박을 해 들어갔다. 이는 자본의 입장에서 파업을 하는 것보다 일정 정도 떡고물을 나눠주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노동운동 내에서 자본의 하위파트너를 자처하는 세력 역시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었고 노사협조주의는 점차 만연해 갔다. 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반대하며 일어선 97년 총파업, IMF 구조조정 관련 ‘정리해고제, 파견제’에 반대하며 일어선 98년 투쟁이 노사협조주의로 어이없이 패배하면서 노동운동은 계속해서 힘들어져만 갔다. 이후 98년부터 02년까지 구조조정 분쇄투쟁으로 전국적으로 투쟁이 일어났지만 명확한 전망없이 전투적으로 싸운다는 것만을 강조할 때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며 역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결국 04년 현재의 상황은 자본의 힘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운동이 ‘퇴조기’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9) 물론 이 말이 다양한 민주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을 기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역시 필요하고 정당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병렬적으로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는 식의 투쟁과제가 과연 올바른 방향이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투쟁해야 할 과제’라고 한 것은 이 투쟁 역시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이겠지만 전국적이고도 전 계급적인 투쟁으로 상승/발전할 수 있는 투쟁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지칭한 것이다. 결코 민주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과 배치되는 노동해방의 직접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주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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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 : 노동자는 계급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결책 : 노동자는 계급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곤약(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지금까지 파업이 노동자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서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그리고 주되게는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인 파업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계급의 운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학생사회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귀족노동자?? 있긴 한거야??


  저번 열린 토론회 때도 귀족노동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 같다. 귀족노동자들.. 그들은 다른 하청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여성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받으면서 일한다. 이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폭력적 수탈로 인해 일을 뼈빠지게 하면서, 임금은 쥐꼬리도 못받기 때문이다. 그럼 소위 귀족노동자들은 일한 것보다 많이 받아가나?


  예시를 들어보자. 필자의 고향이 영남지방인 관계로 우리 사촌들은 거의가 현대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해상, 현대강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업종도 다양하다. 필자가 가족모임에서는 아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급이 아니기에 그냥 듣고만 있는 상황이지만 사태 파악은 빠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를 열심히 구독하시는 울 고모부 : $^야. 요즘 신문보니깐. 너희들 영 이상하던데~ 느그 노조애들은 연봉이 6천은 더 넘어가는데도 돈 더 달라꼬 난리라메? 나라경제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왜 계속 그라노?

  현대중공업 다니는 울 이종사촌형 $^ : 이모부. 그거 순 거짓말 아닙니꺼. 글마들 말대로 연봉 6천 정도 받을라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압니꺼? 진짜 말그대로 24시간 기계처럼 일해야 됩니더. 365일중에 360일을 잔업, 특근, 야근까지 다 뛰어야제 그래 안 받습니꺼. 그래 일하믄 완전 사람 죽습니더. 그거 가지고 우리 돈 많이 받아간다꼬 하면 얼마나 복창터지는 줄 압니꺼?


  그렇다. 그들은 기계가 아닌데, 그들의 계산속에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서 연봉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일가지고 그들을 귀족노동자라고 부른다. 귀족은 귀족인데 24시간 기계처럼 일하는 귀족봤는가? 과연 태어나자마자 수십억의 재산을 보유하는 사람이 귀족인지 24시간 기계처럼 일해다 죽어나가는 사람이 귀족인지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사실 이런 경우는 있다. 상대적으로 노조 조직율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의 노동자 분할정책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방패막이이고, 우리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같이 긴밀히 연대하지 못하고, 단지 생색내기 수준으로 비정규직노동자의 요구를 협상테이블에 들고 갔다가 슬그머니 치우기도 하고, 이상한 합의 사항을 도출하기도 한다. 이상한 합의 사항들 가운데는 ‘사회공헌기금’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임금협상때 노조쪽으로 유리한 언론형성을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노조와 자본쪽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비정규직을 먹여살리자는 것이 그 주요 취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일단,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를 같은 노동자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단지 보호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허울된 명목으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의식을 통제해 버리고, 투쟁의 발현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이 투쟁을 하려고 할때, 자본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너희한테 돌아가는 기금도 있는데, 너희는 왜 투쟁하려고 하는것이냐!! 확 짤라버린다!!’ 사회공헌기금이라는 것 자체가 비정규직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정책이기에 정규직도 더 이상 비정규직에게 연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고 하면 끝이다. 정규직노조는 진정으로 자신들이 연대할 세력인 비정규노동자가 아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휘말려서 자본가들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합의주의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일각에서 이러한 정규직노조들이 파업하는 것을 가지고, ‘배부른 놈들이 파업한다. 저거 다 짤라버려!!’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논리중 하나는 이런 경제상황에서 빠르게 경기 회복을 이룩해야 하는데, 강성노조 때문에 경기회복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더욱 확산되는 것이란다. 과연 이 말이 옳은 말인가? 우리는 단연코 이러한 논리가 헛소리라고 규정하는 바이다. 경기가 침체하는 것은 강성노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호황과 불황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살아가는 근원적 본질인 것이다. 이를 노동자의 투쟁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무차별적 엉터리 공세일 뿐이다. 체제의 변혁을 통하지 않고서 아무리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말고는 이루어내는 것이 없을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다.’ 허튼 소리가 아닌, 실천에서 풀어내기!!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통치할 때 쓰는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분할정책이다. 피지배계급을 여러 사항으로 나누고, 그들이 쉽게 단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규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남성노동자, 이주노동자/한국노동자 등등 자본의 분할 정책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공세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그룹을 공격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닌 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상황판단이 아니다. 노동자는 하나로 이어지고, 같은 계급이기에 같은 운명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노동자를 정부가 양산한다고 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맘 편히 있을 때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늘면 늘수록, 자본은 임금이 한참이나 싸고 짜르기도 편한 비정규직을 쓴다. 그럼에 따라서 정규직은 자신의 처지를 항상적으로 낮추어야 하고, 자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할 것이다. 각개 격파 당하는 노동자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알아서 낮추며, 취업하러 다녀야 할 것이다. 분할정책이후 각개격파가 자본가들이 잘 쓰는 방법이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은 공문구가 아니다. 역사에서 철저히 검증된 진리이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기에 민주노조가 일어설 수 있었고,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 있었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였기에 다른 노동자들도 그 힘을 이어받아 투쟁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단결된 모습을 보였기에 자본가들은 그 힘에 눌려 조그마한 개량이라도 내주었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단지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내가려고 하지는 않는가? 자본가들의 관대한 처우를 바라면서 단지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옆에서 탄압받는 노동자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는 않은가? 같이 연대해야 할 노동자들을 보지 않고, 자본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단사의 문제에만 급급하여 큰 틀의 노동자 문제는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이제는 단사를 뛰어넘어야 한다. 계급의 운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단지 ‘우리는 이런 상황이 아니야’라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자와의 대결에서 한부분의 공격은 전체를 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해 투쟁할 것을 강요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


  이 시점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만의 투쟁이라면서 마음속으로 지지만하면서 가슴 졸여야만 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변혁의 심장 노동자계급의 철의 동맹군 학생대오도 할 일이 많다. 우선 간단한 일. 학내에서 열심히 선전한다. 특히 그때 그때의 사안으로 노동자 투쟁에 함께 할 것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려주는 것으로도 학생들은 대단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기에 어느 적절한 정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이다. 단지 ‘노동자는 하나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는 식의 구호는 소귀에 경읽기 밖엔 되지 못한다. 공무원노조의 투쟁이 지난번에 펼쳐졌었다. 그런때는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공무원노조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자본과 정권이 언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이런 이야기에 찌들어 있는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간략히 논리적인 선전물을 제작하여 붙이는 것이다. 아무리 평소에 대자보를 안 읽는 학생이어도, 그렇게 이슈화되는 쟁점에 대해서 자보가 붙는다면 한번씩 보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바로바로 설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의문점을 던져주는 것. 그들의 생각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굉장한 방법이다. 특히 매년 초기에는 그런 작업이 굉장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새내기들은 모든 자보를 다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보 백날 붙여봐야 지속적으로 고민을 풀어내가지 못한다면 허망하게 끝난다.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같이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며 실천하자. 그리고 노동자계급중심의 정치를 알려나가자. 이것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전방법이다. 물론 노동자투쟁에 긴밀히 연대하는 것은 필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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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사회는 ‘파업’을 어떻게 말하는가?

부르주아 사회는 ‘파업’을 어떻게 말하는가?


영현(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들어가며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파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무기일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투쟁(?)하는가? 남한 사회만 하더라도 4000만 국민 중 1400만명이 노동자일 정도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 국민적(?) 공감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숫자로는 한 줌도 안되는 자본가들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공격 무기는 노동자계급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부르주아 사회가 어떻게 파업을 말하는지,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어떻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통제를 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12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대학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12년 간 초-중-고등학교의 국민교육과정을 밟아왔다. 그리고 배워왔다. 교과서에 담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립적이고도 가장 참된 진실만을 골라 담았으니 달달 외우란 말이야..!! 과연 그러할까? 우리가 배워왔던 공식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은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까? 도대체 교과서는 노사관계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요즘은 교과서도 많이 개혁(!)되어서 공정하게 쓰여져있지 않을까? 직접 7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속을 들여다보자.3) 물론 국민공통 기본교과 과목인 사회 교과서의 노동 관련 부분은, 독립된 영역으로 구분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는 없으며, 다른 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로 제시되거나 간단히 몇 단락 정도 언급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잠깐, 교과서에는 불경스러운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라고 하고 있는 건 다 아시겠죠?


-선생님, 파업이 뭔지나 좀 가르쳐 주세요!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1. 현대 정치의 과제/ 1)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


내용

 

탐구 활동 - 시민의 힘으로 금융 산업 파업 해결

 

다음은 2000년 7월에 전국 금융 산업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전후의 은행별 저축성 예금의 동향을 나타낸 것이다.

관련 그래프 : 비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과 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 대조

                  - 은행별 저축성 예금 동향(00신문, 2000.7.12) -

 

시민의 힘으로 은행 파업을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 파업을 선언했던 I은행, J은행이 곧 파업 불참을 선언한 배경을 살펴보자.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125>

이 교과서에서는 파업의 당위성 여부는 논하지 않고 금융 산업노조의 파업에 대하여 시민의 힘으로 은행의 파업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암묵적으로 부인함은 물론, 시민과 노동자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묘사함을 넘어, 오히려 시민들이 노동자들의 파업 여파를 적극 해결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노동자=이익집단, 과격행동은 절대 금물!!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2. 사회적 쟁점의 정치적 해결 과정


내용

 

1) 정치와 사회적 쟁점

(...) 물론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이나 부,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며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 중에서 문제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고, 문제 해결의 결과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사회적 쟁점이라고 한다 (...)

그림 :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쟁점들

      주 5일 근무제를 요구하는 근로자와 이를 외면하는 사용자

      근로자 -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동 시간을 단축하라!

      사용자 - 경제 상황도 안 좋은 데 주 5일 근무제는 안 될 말이야!

2) 정치적 해결의 과정

(...) 이익 조정에 있어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조정 절차의 민주성이 필수적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양보와 타협의 자세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의 차이를 좁혀 나갈 때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과격한 집단 행동이나 실력 행사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한다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짐은 물론 심각한 사회 무질서까지 초래하게 된다. 한편, 개인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런 경우, 특정 집단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갈등 해결의 결과가 공익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고등학교, (주)천재교육, 사회 교과서, pp.202-205>


이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익집단 중의 하나가 노동자? 그리고 그러한 이익집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가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가? 더불어 교과서는 파업과 같은 과격한 집단행동과 실력행사가 사회 불안정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 해결, 경제계의 우려?!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3. 민주 정치 발전과 시민 문화


내용

 

사례 탐구2 - 정치 원리에 따른 갈등 해소

 

정리 해고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사용자의 대리전으로 치달았던 H 자동차 사태가 정치권과 정부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3개월에 걸쳐 6차례의 파업과 4번의 조업 중단이라는 극한 대립이 겨우 풀린 것이다. 노사 양측은 합의문에 서명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등 화합의 모습을 보였지만, 해결 방법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갈등 해결 과정에서의 법과 정치의 기능

 미국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의 59%가 M사가 독점 금지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정부의 회사 분할 방침에 대하여는 48%가 반대하였고, 28%만 찬성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법은 이러한 뜨거운 여론과는 달리 냉정하다. 이러한 사례는 기업의 활동도 법이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H 자동차를 둘러싼 정리 해고 문제의 해결은 정치권의 개입으로 조정되었다. 정부나 여권에서는 노사 간의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신노사 문화 창조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사태 해결 방식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계의 우려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번 사태의 해결 과정은 노조가 정리 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될 수 있으며, 앞으로 기업의 구조 조정과 외국 자본의 유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법적으로 하면 일시적으로 효율성을 잃을 수도 있으나 갈등 해결의 원칙이 확립되어 사회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갈등 해결을 정치적으로 하면 구체적 타당성을 얻어 융통성 있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원칙이 무너져 사회적 불안이 생길 수 있다.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p.234-235>

이 교과서에서는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제 3자로 중립적인 정부를 설정하고 있고, 친절하게도 경제계의 우려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설명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타 등등

이 외에도 천재교육 교과서의 경우 ‘일상생활에서의 정치’라는 주제 아래 사회 갈등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례들의 경우 해당 주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예를 선정하였으나, 노동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집행부 사람들이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하였다’라는 유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예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쌓여 졸업할 때쯤이면 누구나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회과 교과서를 보더라도,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말하는 대신,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회 전체에 손실을 주는 이익행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은 학생들이라면, 노동자와 파업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전담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시 하나를 인용해보았다. 아마도 이번 단락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경쟁하던 부르주아들도,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파업했을 때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목소리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고 탄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단사에서 파업을 경험하는 노동자들은 그 공장의 사장, 즉 자본가 개인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투쟁을 하게 된다. 하지면 싸움이 커질수록 또 계속될수록 자본가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더 많은 그들의 동맹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한다. 그리하여 싸움은 사장 한 명이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을 대상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자본가들의 철의 동맹군, 바로 언론이다. 물론 부르주아 언론들은 제아무리 개혁적이라 자칭하더라도, 평상시에는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면 아니 예고만 되어도 대대적으로 악선전을 해댄다. 구체적으로 이번 민주노총 하반기 총파업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기사를 한 번 보자.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훤히 다 보인다. 주된 내용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공무원 노동자들을 철밥통으로 명시하고, 민주노총을 대기업 노조 중심이라 ‘배부른 파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민의 삶과 대기업 노동자들을 대비시키며, 노동귀족 이데올로기를 더욱 더 공고하게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정리해고의 칼바람, 그 때문에 일할 수 있을 때 죽어라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경제위기’는 자본가 그들만의 경제위기 타령일뿐이다. 그리고 언론 스스로가 밝혔듯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든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킬 대안은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공동의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그렇다치고, 자칭 진보 신문인 한겨레 신문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최근에 있었던 공무원 투쟁에 관한 한겨레 신문의 사설이다. 한겨레 사설의 주된 내용은 공무원들이 노동자로서 노동3권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공복이기 때문에  단체 행동권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덧붙여 현재와 같은 경제 불안 속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것은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대변한다고 하는 매일경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언론은 제 아무리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적대적일 뿐이다.

               

  이렇게 든든한 동맹군을 업은 자본은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을 왜곡한다. 앞서 본 시에서처럼 개별 자본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죽을 듯이 경쟁하지만, 노동자들의 단결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강고한 연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자본가 단체이다. 경총이나 전경련 같은 상급 단체들은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경총 회장의 글을 인용해본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조합원 투표에 의해 가결되자, 경총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더불어 ‘임금 동결 선언 등 기득권 정규직들의 양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라’고 충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과연 이 사회에서 누가 기득권인가? 다시 한 번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정규직/비정규직이 대립하는 것인양,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킨다.

덧붙여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은 법 제도 개선사항이기 때문에 파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업은 법 제도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음, 그렇다면 법 제정은 기업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 과연 그럴까? 우선 큰 틀에서 국가라는 것을 보면, 파업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방패로 찍어누르는 공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부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와 같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구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더 중립적으로 보이는 법은 어떠한가? 앞서서 경총 회장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기업의 이익, 즉 자본가의 이익과는 관련이 없다 말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그러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듯이 현대의 법률체계에 의하면 자본-노동의 관계는 쌍방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맺은 상호계약관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장되는 한 이 법률은 공정하며 중립적인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문제이다. 서로 다른 계급적 지위에 의해 한 쪽에 부여된 권력과,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박탈된 권력과 그에 따른 압박과 착취를 법은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때려잡고 있다. 손배가압류라던가 집시법 개악, 이번에 제출된 비정규직 법 개악안만 보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그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국민들, 파업 나빠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 통제와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와 동맹군들에 의해 이 사회의 헤게모니는 압도적으로 자본가들에게 가 있다. 즉, 사실 전 국민의 4/1이 노동자이며 그 부양가족을 헤아려본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인데도 불구하고,데도 국민들의 절대다수는 부르주아 사회가 말하는 바들을 그대로 믿고 있다.  굳이 이 기사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그리고 그 기본단위인 노동조합에 대해 얼마나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영원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빼앗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부르주아 사회가 유포하는 거짓된 사실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는 26일, 우리는 민주노총 총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시금 앞두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다음 발제에서 함께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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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녹테잎(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Intro


 올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이 굵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이 발생했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LG칼텍스 노조의 투쟁, 궤도연대의 투쟁,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올 한해 벌어졌던 투쟁들은 자본가들의 공세에 밀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와 자본의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라던지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투쟁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투쟁하면서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파업은 “하던 일을 중단하다”는 뜻의 하다형 자동사이다(Naver 국어사전 참고.) 왜 노동자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가?- 혹은 중단할 수밖에 없는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는 자신이 어떠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즉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얻기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깎아야만 한다. 혹 노동자들의 저항에 임금을 삭감할 수 없으면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노동자들을 해고 한다.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해고의 문제, 노동 강도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런 자본가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한줌도 되지 않지만 매우 강한 존재다.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고, 작업속도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다. 자본가를 해고할 수도 없고, 저항하기 전에는 작업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멈추기 위한 최후의 수단-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투쟁에 돌입하면서부터 파업을 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속도를 늦춘다던지 준법투쟁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으로도 자본가들이 말을 들지 않을 때-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신의 이윤이 위협받지 않으면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을 진행한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배 연행 구속 등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리에 따라 경제적 고통마저 수반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그것 이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이라는 것은 생산을 멈추는 행위이다. 생산을 멈추는 것은 노동자 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혼자서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을 멈추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진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한 공장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생활한다. 이는 다른 계층과는 차별화 된 모습이다. 그들의 공동생산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일을 할 때부터 단결을 배우게 한다. 농민집회에서와 노동자들의 집회에서의 분위기 차이는 이를 여력히 증명한다. 농민집회에서는 사회자의 멘트를 듣거나 자리에 착석한 채 집회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한 대오 안에서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서의 모습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서 단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하기 전부터 이미 공동생산을 통해 단체 행동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단결할 경우에만 자본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실제 노동을 하면서 ‘단결’에 대해서 체득하는 것이다.


파업은 “전쟁의 학교”


『···자본주의 사회의 바로 그 본성에서 일어나는 파업은 노동계급의 바로 그 사회체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1)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본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87년도의 노동자 대투쟁을 상기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요구사항 중에는 “두발 자유”, “아침체조를 하지 말 것”등등이 있었다. 그렇다. 투쟁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은 일만 하는 하나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함으로서 자본가에게 ‘우리는 너희를 위한 생산을 중단 하겠다’라고 외침으로서 자본은 그들에게 부당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투쟁하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작업량을 늘려도 뭐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요구하고, 라인별, 위치별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가치를 생산해내는 하나의 기계로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인간으로서 다시금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사의 고용주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발견하게 되면 될수록 자신의 적이 고용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임을 선언한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와 수배령을 때리는 경찰· 사법권력, 자신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에 대해 ‘이기주의’라고 호도하는 언론과 정부. 그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진정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만인을 위한 법률이 과연 어떤 만인을 위한-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법률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고, 이에 맞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파업하기 전에는 자기 혼자 공장 내에서 일하는 것을 신경 쓰기만 바빴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자신의 옆 공장, 주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게 되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슷비슷하다는 것.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서 서로의 사안에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적은 자신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공허해보이기도 하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구호는 그들의 투쟁 속에서 진리이자, 진실로서 확인이 된다.

  그것만 배우겠는가? 자신의 투쟁에 연대해 오는 단체. 자신의 투쟁에 대해서 입장을 내오는 단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누가 우리의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노동자계급의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업을 통해서 명확해진 사실이 이전에는 어두운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 드러난 이상 투쟁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명확해 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사의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파업. 자본가를 넘어 정권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댈 수 있게 하는 파업에 대해서 자사의 고용주뿐만이 아니라 정권 역시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귀족노동자니 집단이기주의니 치졸하기 그지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투쟁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동자들은 이것에 굴종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한줌도 안되는 자본가와 정부가 결국 한 몸이고 비슷한 족속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배우게 되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체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과 정권은 한패이고,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파업에 대해서 옛 러시아의 성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이것이 파업을 전쟁의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파업은 전체인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부 관리들의 멍에와 자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그들의 적에 대해 전투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다”2)


보충수업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노동계급이 전체 자본가와 싸워야 하고 정권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파업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에게 학교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그들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노동자계급이 농민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는 파업을 통해서 배우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보충수업.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전체 세상을 볼 수 있는 보충수업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전체 노동계급이 단결하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의식을 획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소중한 학교임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녀들이 다시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녀들이 다시는 파업을 하지 않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파업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변혁적인-노동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선전· 선동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파업이 “전쟁의 학교”이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 파업은 단지 투쟁 수단의 하나이며, 단지 노동계급운동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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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Lenin, 파업에 관하여


 

2)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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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가?

                           -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에 힘차게 결합하자!!


최바울(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우리는 앞에서의 발제를 통해 가당찮은 ‘귀족 노동자’ 공세를 통해 자본과 정권이 획책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자본과 정권은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자 계급을 완전하게 분열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개별화된 원자로 해체시키려 하였다. 노동자 계급은 계급으로서 단결하지 않으면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최근 들어 왜 그토록 많은 돈과 열정을 쏟아 부으면서까지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는 데 열을 올렸는가? 역사가 수차례 증명했듯이 본래 이데올로기 공세는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이전, 사전 정지(整地) 작업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귀족 노동자’ 이데올로기의 유포는 지난 구조조정 투쟁의 승리 이후 자신감을 획득한 자본가 계급이 무언가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지표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공격이 무엇으로 드러났는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는 바, 그것은 다름 아닌 파견법 개악4)이다.

  지난한 수작을 통해 노동 운동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자본과 정권은, 결국 파견법 개악이라는 무시무시한 카드를 빼어들었다. 파견법 개악이 현실화 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주장했던 ‘귀족 노동자’들 역시도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넘쳐나는데, 툭하면 머리띠 두르고 데모질이나 해대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굳이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직 노동자들이 피로써 쟁취해 온 제반 권리 모두가 유실될 것임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권이 지겹도록 지껄여댔던 ‘선진적 노사관계’란 결국 모든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선진적 착취질서’였던 것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은 어떻게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가?


  정권과 자본은 비정규법 개악안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눈웃음을 보내왔던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지도부는 물론이고 어용 한국노총조차 파견법 개악에 있어서는 협상의 파트너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자본은 본래 자신이 필요할 때에만 민주주의, 대화, 타협 등을 필요로 할 뿐이다. 자신이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고상한 척 자신을 꾸며왔던 갖가지 민주주의의 장식품들을 집어 치우고 자신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본모습은 착취욕으로 가득 찬 흡혈귀에 다름 아닌 바, 노동자 계급이 만만히 보이자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파견법 개악안을 단독 입법 예고해 버린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상황은 어용 한국노총은 물론이고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우리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가들의 황금률이 무엇이던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 아니던가. 함께 이야기를 나눠서 자본의 경쟁력도 키우고 노동자의 권익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어야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견법을 개악해 버리다니, 신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귀족 노동자’라 하길래 사회 공헌 기금도 만들어왔다는 점을 잊어버린 것인가?!”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2004년 임단투를 살펴본다면, 특히 이수호 위원장이 지금과 같은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면 말이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자본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직권중재5) 남발마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가 직권중재를 때려 버리면 조합원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사태를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민주노총의 투쟁은 우리 지도부가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할 테니 정부는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 우리를 대등한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 대화로 풀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건 결코 픽션이 아니다. 실제로 정부의 몇 차례 직권중재와 이에 따른 이수호 위원장의 삭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부르주아 언론조차 향후 노사정위 재편을 앞둔 밀고 당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는 민주노총을 압박하면서 지도부가 하루 빨리 조합원에 대한 확실한 ‘지도력’(?)을 확보하기를 요구하며,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도부대로 투쟁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본래는 9월 노사정위 참가를 두고 저울질까지 했던 민주노총 지도부는, 현재 정권의 ‘일방적인’ 파견법 개악에 맞닥뜨리게 되자 “더 이상 사회적 대화는 없다”며 총파업 계획을 입안해 놓고 있다. 지난 10월 25일부터 11월 6일까지 진행된 총파업 투표를 바탕으로 11월 14일 노동자대회 이후 전면적인 총파업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현재 총파업 찬반 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비 납부자 59만 명 중 30만 명 이상이 참여해서 가결 요건을 갖췄으며, 연일 대공장에서 파업 가결 소식이 전해 들려오고 있다. 파견법 개악안이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서도 겨누어진 칼이라는 사실이 조합원 대중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총파업을 위한 투쟁 동력의 형성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벅차오르는 감정만을 가지고 있을 일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지도부가 정권의 ‘일방적인’ 파견법 개악에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쌍방향적’이 될 때에는 거꾸로 충분히 협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때문이다. 또한 민주노총지도부는 파업 찬반 투표 이후 ‘파견법 개악안이 국회 상임위에 상정될 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국회 상임위 상정이 연기될 경우 총파업 역시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이 공무원 노조의 총파업과 실질적으로 결합될 가능성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자본과 정권은 여권 일각을 통해 파견법 개정 연기론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여러 조건들과 ‘사회적 합의주의’의 질긴 역사를 따져 본다면, 되풀이 하지만 마냥 설레어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투쟁해 나가야 하는가?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와 함께 하자!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본과 정권의 가공할 만한 도발에 맞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있다. 노동자 계급 자체를 영구히 해체하려는 저들의 시도에 정규직-비정규직, 여성-남성, 이주-내국인, 장애-비장애 노동자의 완전한 단결로 맞서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파견법의 개악을 저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파견법 자체를 아예 철폐하는 데로까지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특히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와 같이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기풍이 계급 내부에 만연한 상황에서 비타협적 투쟁은 누구에 의해서 선도될 것인가?

  여기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라는 단체를 소개한다. 위에서 밝혔듯이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권의 ‘일방적’ 공격이 시작되기 이전, 9월 노사정위 참가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이야기 되었지만, 사실 노동자 계급에게 노사정위는 악몽과도 같은 이름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생존권과 몇몇 노동관료들의 지위를 맞바꾸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복귀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동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노투는 지난 7월 24일 ‘민주노조 운동 위기! 노사정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 토론회’ 이후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답합 분쇄!”를 기치로 건설되었다. 전노투는 자신의 제안서에서 “경기침체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을 포섭하려는 자본과 정권의 전략이 ‘사회적 합의주의’로 등장”하고 있는 데 반해,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의 기본 입장은 사회적 교섭 전략”에 머무르고 있기에 “전노투는 이름과 형식만 바뀐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의 동지들과 함께 현장으로부터 반격을 조직”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의미있는 흐름이다. 전노투의 건설은, 비록 현저히 퇴조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한 노동운동에 건강한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전노투는 현재 현장 조직, 정치 신문, 학생 단체 등을 망라하여 30여 개에 가까운 단체가 결합하고 있으며, 현장을 기반으로 한 각 지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를 힘차게 선동하고 있다. 또한 전노투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4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 총파업 투쟁! 열사정신 계승!’의 기치로 독자 집회를 기획하고 있다.

  전노투 활동의 성패는 곧 남한 민주노조 운동이 이대로 체제 내화되어 몰락해 가는가, 아니면 이전의 계급적 연대성, 전투성을 복원하고 노동해방 사회 건설의 주된 동력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6) 현재 노동해방학생연대는 전노투의 일원으로서 이 투쟁을 더욱 계급적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아울러 ‘비정규직 철폐! 노동탄압 분쇄! 사회적합의주의 분쇄!’라는 멋들어진 기치를 휘날리고 있는 “다시 싸움을” 역시 전노투와 함께 투쟁해 나갈 것을 제안 드리는 바이다.


  투쟁 없이 쟁취 없다! 투쟁으로 쟁취하자!


  혁명 시인 김남주는 자신의 시 어디에선가 “가진 놈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쥔 것을 놓지 않는다 / 배때기에 칼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고 쓴 적이 있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노동자를 더욱 착취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윤을 증식할 수 있는 자본가들과 ‘대화와 타협’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켜 나가겠다는 생각은 봄날 개꿈에 불과하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때만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칼은 자본가 놈들이 빼어들었다. 노동자 계급은 가만히 앉아서 자본이 자신의 몸뚱어리를 마음껏 난도질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칼에는 총으로! 총에는 대포로!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로 집결된 전국의 노동자 동지들과 함께 파견법 개악 저지 총파업과 공무원 노조 총파업을 적극 엄호하여 노동해방의 빛나는 전망을 밝혀 나가자!!





4) 파견법 개악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파견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기존에는 몇 개의 업종에서만 가능하던 파견을 5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가능하게 한 것이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지금보다도 비정규직을 훨씬 더 늘려보겠다는 수작이다. 그래놓고도 이 법안과 함께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것을 내놓았으니, 참으로 이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뻔뻔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저들의 어이없는 ‘보호’ 놀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꾸해 줄 필요가 있다 : “지랄하고 자빠졌네.”



5) 직권중재란, 노조가 파업을 하게 되면 정부가 개입하여 파업을 중단시키고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직권중재를 내리면 그 기간에는 어떠한 파업도 불법이 되어 버린다. 자본가나 정권이나 그놈이 그놈일진대, 도대체 무엇을 조율하고 있겠는가? 철폐되어야 할 악법 가운데 하나이다.



6) 여기에 두 가지만 덧붙이자. 첫째, 이를 위해서 전노투는 즉자적인 ‘전투성’을 넘어서야 한다. 전노투에 결합하는 모든 동지들은 노동조합 안에서의 활동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을 명백히 하고 투쟁해 나가야 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인 바, 분명한 정치적 목적 없이 행해지는 투쟁이란 언제나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투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현 정세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는 몇몇 민주노총 지도부를 끌어내리는 것만을 뜻할 수는 없다. 현재 노동자들의 의식 역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강고하게 포섭되어 있는 바,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회적 합의주의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계급적으로 각성시켜야 하며, 이것은 노동해방 정치를 폭넓게 알려내는 것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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